심리학자들은 이처럼 괴로운 시기에 수집이 줄 수 있는 달콤한 위안에 관해 연구해왔다. 수십 년간 강박적인 수집가들과 상담해온 심리학자 워너 뮌스터버거Werner Muensterberger는 《수집: 다루기 어려운 열정Collecting: An Unruly Passion》에서 수집 습관이 모종의 "박탈 혹은 상실 혹은 취약성이 발생한 후 급격히 심각해지는 경우가 많으며, 새롭게 하나를 수집할 때마다 수집가에게는 폭발적인 도취감을 주는 "무한한 힘의 환상"이 흘러넘친다고 말했다. 그라나다 대학에서 수년간 수집가들을 연구한 프란시스카 로페스-토레시야스Francisca López-Torrecillas는 스트레스나 불안을 겪는 사람들이 수집에 의지해 고통을 달랜다며 비슷한 현상을 지적했다. "사람들이 이렇게 자신의무력함을 느낄 때는 강박적인 수집이 기분을 끌어올리는 데 도움이 된다." 뮌스터버거가 지적하듯, 유일한 위험은 여느 강박과 마찬가지로 수집 습관이 "신나는 일에서 "파멸적인"일로 바뀌는 어떤 지점이 존재할 수도 있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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九四구사¹⁶는 或躍在淵혹약재연¹⁷하면 无咎무구¹⁸리라.

구사는 혹 위로 뛰어오르거나 혹은 연못에 있으면 허물이 없을 것이다.

16 구사(九四)는 하괘에서 상괘로 오르는 자리로 가장 어려운 때에 해당하는데, 위로 올라갈 수도 있고 제자리에 있을 수도 있다. 구사와 구삼은 같은 상황을 두 가지 측면으로 나누어 설명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기본적으로 이 두 위(位)는 자리 자체가 불안하고 위태한 자리로 늘 갈등하고 결단을 필요로 한다. 그러므로 「계사전」에서는 "삼효(三爻)에는 흉이 많고(三多凶)", "사효(四爻)에는 두려움이 많다(四多懼)"고 말한다. 구삼(九三) 효사에서는 군자가 주어로 나타나지만 구사에서 주어는 용(龍)으로 생략되어 있다.

17 구사(九四)의 자리 자체가 불안하기 때문에 "혹(或)"자가 먼저 나오며, 안주할 수도 있고 뛰어 올라갈 수도 있다고 말한다. "혹(或)"의 의미는 분명히 두 가지 일에 관해서 말하는 것으로, 여기에서 말하는 두 가지의 가능성은 혹은 뛰어 오르거나 혹은 여전히 못에 머무는 두 가지 경우를 말한다. 뛰어 오른다는 것은 일종의 모험을 의미하고, 여전히 못에 머문다는 것은 현실에 안주함을 말한다. 이 구절에 대한 일반적인 해석은 "때에 따라 나아가고 물러나는 것"으로 해석한다. 하나의 특수한 관점을 소개하면, James Legge(1815-1897, 서양에 완벽한 형태의 『주역』을 영어로 번역한 스코틀랜드 출신의 중국학자)는 "도약을 시도하였으나 아쉽게도 여전히 못에 머물러 있지만 허물이 될 일은 아니다"라고 번역하였는데 상당히 일리 있는 해석으로 보인다. - P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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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3 현존하는 서유럽 그리스도교 제파의 상태를 훑어보고 그 생명력을 비교해 보면 그것이 이들 종파 각자가 세속적 권력의 지배에 굴복한 정도에 반비례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서유럽 그리스도 교 중에서 오늘날 가장 왕성한 생활력을 나타내고 있는 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가톨릭교이지만ㅡ가톨릭교를 신봉하는 근대 국가는 나라와 시대에 따라 군주가 영토 내의 교회 생활에 강한 세속적 권력의 지배를 가한 일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ㅡ단 한 사람 최고의 교회 권위자의 통솔 아래 단일 종교 단체로서 뭉쳐져 있다는, 이러한 커다란 강점을 아직 한 번도 잃은 일이 없다. 생존력 면에서 가톨릭 교회 다음가는 것은 세속적 정부의 지배에서 이탈한 신교 교파에 속하는 ‘자유 교회‘일 것이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현대의 어느 한 지방 국가의 정치체에 묶여 있는 ‘국립‘ 신교가 규모상 가장 상위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 확실하다.
마지막으로 영국 교회와 같이 많은 파로 나누어져 다양한 형태를 가지는 ‘국립 교회들의‘ 조금씩 서로 다른 종교적 사상과 실천면에서 그 활력의 다소를 굳이 구별한다면, 1874년에 ‘위장된 미사‘ 탄압을 목적으로 하는 법령이 나온 이래 오늘에 이르기까지 세속적 법률을 경멸하며 냉담한 태도를 취해 온 영국 국교파의 앵글로 가톨릭파에게 최고의 영예를 주어야 할 것이다.
이 불유쾌한 비교의 교훈은 명백하다. 현대에 서유럽 그리스도 교회 여러 분파의 운세는 다양하다. 종교는 정치적 권력의 보호를 구하거나 그것에 굴복함으로써 이익을 얻는 것은 고사하고, 결국 마지막에는 손해를 본다는 우리의 명제가 옳다고 완벽히 증명한다고 생각될 것이다. 그런데 이 얼핏 보면 통칙이라고 생각되는 것이 검열을 통과하여 정말로 통칙으로서 인정받기 위해서는 그 전에 아무래도 설명을 달지 않으면 안 되는 현저한 예외가 하나 있다. 그 예외라는 것은 이슬람교이다. 이슬람교는 이때까지 조사해 온 어느 종교보다도 빠른 시기에 일견 한층 결정적인 방법으로 정치와 타협했음에도 불구하고 멸망해 가는 시리아 사회의 세계 교회가 되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사실 이슬람교는 그 창시자의 생존 중에, 다름 아닌 창시자 자신이 취한 조치에 의해서 정치적 타협을 한 것이다. - P593

596-9 이러한 사실들은 ‘얼핏 보기에‘ 서유럽의 통치와는 다른 것처럼 생각되는 이슬람교의 경우를 충분히 설명한다고 보아도 된다. 서유럽의 통칙이란 또 한번 되풀이해서 말하자면 세속적 권력이 이미 일부 사람들 사이에서 행해지고 있는 종교를 피지배자에게 강제적으로 떠맡기는 데 어느 정도의 성공을 거두는 일이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은 아니나, 그러한 정치적 지지를 받았기 때문에 종교가 지불해야 하는 대가는 결국 정치적으로 비호되는 종교가 직접 얻는 어떤 이익보다도 비싸다는 점이다.
정치적 비호로 얻은 직접 이익이 전혀 없는 경우에도 역시 대가를 치르는 벌을 받아야 할 것 같다. 종교에 유해한 세속적 권력의 지지를 얻음으로써 철저한 손실을 입은 실례를 들 수 있다. 타우루스 산맥 저쪽의 이단설을 신봉하는 피지배자에게 가톨릭의 정통과 신앙을 강요하려고 하다가 실패한 동로마제국의 유스티니아누스, 그리스와 이탈리아의 성상 예배를 행하는 피지배자에게 가톨릭의 정통과 신앙을 강요하려고 하다가 실패한 동로마제국의 유스티니아누스, 그리스와 이탈리아의 성상 예배를 행하는 피지배자에게 성상 파괴를 강요하려다가 실패한 레오 시루스와 콘스탄티누스 5세, 아일랜드의 가톨릭을 믿는 피지배자에게 프로테스탄티즘을 강요하려다가 실패한 영국 국왕, 힌두 교를 믿는 피지배자에게 이슬람 교를 강요하려다가 실패한 무갈 제국의 아우랑지브 제 등등.
강요되는 종교가 기성 종교인 경우에도 위와 같다면 정치적 권력이 지배적 소수자의 철학을 강요하려고 하여 성공할 가망은 더욱 없다. 율리아누스(기원전 361~363. 로마 황제. 그리스도교를 탄압하지는 않았지만 그리스·로마 신을 부흥시키고 「반그리스도교론」을 썼다)의 실패에 대해서는 이미 앞에서 말했다. 사실 그것이 지금 탐구의 출발점이 된 것이다. 마찬가지로 완전한 실패를 한 것은 인도 사회의 피지배자에게 대승 불교(소승불교가 개인 중심인 데 반해, 대승 불교는 모든 중생의 해탈·극락왕생에 중점을 두었다)를 강요하려고 한 아쇼카 제였다. 당시의 불교 철학은 학문적으로나 도덕적으로나 전성기였기 때문에, 율리아누스의 신 플라톤 파 철학(3~6세기 그리스의 종교적·신비적·사변적 철학)보다는 오히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스토아 철학에 비할 만한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쇼카의 뜻은 잘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끝으로 또 한 가지 고찰해야 할 것은 지배자나 지배 계급이 이미 민중 사이에 행해지고 있는 기성 종교나 지배적 소수자의 철학도 아닌, 자기가 고안한 새로운 ‘공상 종교‘를 강요하는 경우이다. 이미 고유의 생명력을 갖고 있는 종교나 철학조차도 그것을 강요하려고 하면 앞에 말한 바와 같은 실패를 하는 것을 보면, 이 후자의 기도는 일부러 역사적 사실을 조사할 것도 없이 어느 시대 어디서 시도되었던 실패처럼 끝날 것이라고 전적으로 단정해도 무방할 것으로 느껴진다. 아니, 사실이 그렇다. 그러나 이들 ‘공상 종교‘는 역사상 매우 진귀한 현상의 하나이니 별다른 이유 없이, 이 이유만으로 대충 훑어보기로 하자.
기록에 남아 있는 가장 극단적인 예는 아마 이슬람교 시아파의 한 분파인 이스마일파의 이설을 세운 알 하아킴(996~1020)일 것이다. 다른 곳에서 어떤 요소를 믿어 왔건 간에 소위 드루즈 파(신플라톤주의와 극단적 분파사상으로서 11세기 초 파티마조 칼리프 하킴의 정통성과 신성성을 주장. 1860년 기독교 마론파를 살해하는 박해로 악명을 떨쳤다) 신학의 독특한 교리는 알 하아킴을 전후 10회에 걸쳐 출현하는 신의 화신의 마지막뿐 아니라 가장 완전한 것으로서, 즉 잠시 출현한 후에 이 세상에서 신비적으로 모습을 감추었다가 곧 다시 승리자로서 자랑스럽게 돌아오는 신성한 불사의 메시아로서 신격화하고 있는 점이다. 이 새로운 전도자가 거둔 단 한 가지 성공은 1016년에 사도 다라지(드루즈파의 모체인 이스마엘파의 포교자)가 시리아의 헤르몬 산 기슭에 있는 워딜타임 지방의 한 작은 부락을 개종시킨 일이었다. 그로부터 15년 후에는 이 새로운 신앙으로 세계를 전향시키는 전도 활동은 분명히 끝났고, 그 이후부터 드루즈 교도의 사회는 새로운 개종자를 받아들이지도 않고 또 배교자를 묵인하지도 않은 채 폐쇄된 세습적 종교 단체로서 존속해 왔다. 그리고 그 구성원들은 교단명을 그들이 숭배하는 신의 화신의 이름이 아니라, 처음으로 그들에게 알 하아킴의 이상한 복으믈 전한 전도자의 이름을 따서, 즉 다라지의 파생형인 드루즈로 칭하고 있다. 실패한 드루즈교 세계 교회는 헤르몬 산과 레바논 산계의 고지에 몸을 숨기고 ‘성채를 고수하는 화석‘의 완전한 견본이 되고 말았다. 동시에 그것은 알 하아킴의 ‘공상 종교‘가 실패로 끝났음을 뜻한다.
그래도 알 하아킴의 종교는 아직 적어도 ‘화석‘으로는 존속하고 있으나 이와 마찬가지로 시리아 태생의 배교자 바리우스 아비이투스 밧시아누스(황제 칭호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안토니우스)가 로마 제국 공인의 판테온의 주신으로서 차마 자기 자신을 앉히지는 못했으나, 그의 조국 에메사의 태양신 엘라가발을 앉히려던 대답한 시도는 아무런 결과도 얻지 못했다. 그는 엘라가발의 세습 제사장으로 218년에 뜻밖의 행운을 만나 로마 황제의 자리에 올라, 이 태양신의 이름을 자기 이름으로 하여 자신의 이름을 엘가라발루스라 칭하기도 하였다. 4년 후 그의 암살과 함께 그의 종교적 실험은 돌연하고도 최종적으로 종말을 고했다.
정치적 권력을 종교적 공상에 봉사하도록 시키려 한 엘라가발루스나 하아킴 등이 완전한 실패를 맛본 것은 별로 놀랄 일이 아닐지도 모르나, 자기 개인의 기분을 만족시키고 싶은 욕망에서가 아니라, 좀더 진지한 동기에서 관심을 갖고 있는 종교적 목적을 촉진시키기 위해 정치적 권력을 이용하려고 계획한 지배자도 역시 마찬가지로 완전한 실패로 끝났음을 보면, 정치적 수단에 의해 배후에서나 아니면 물밑으로 교리나 의식을 퍼뜨리는 일이 곤란하다는 사실이 아마 좀더 뚜렷하게 인식될 것이다. 공상 종교를 퍼뜨리려고 하다가 실패한 지배자 중에는 비종교적인 것이었는지도 모르나 결코 부끄러운 것이 아니고, 또한 고매한 정치가로서 어울리지 않는 것도 아닌 국가적인 이유 때문에 시도한 경우도 있었다. 또 그들 중에는 자기 자신이 그것을 마음속으로부터 믿고 있음으로써 암흑 속에 있는 동포에게 광명을 주고 평화의 길로 인도하기 위해 자기가 이용할 수 있는 온갖 수단을 써서 그것을 동포에게 전할 자격을 가지고 있을 뿐 아니라, 오히려 그렇게 할 의무가 있다고 생각해서 ‘공상 종교‘를 퍼뜨리려다가 실패한 지배자도 있다.
정치적 목적에 쓰기 위해 신종교를 계획적으로 만들어 낸 전형적인 예를 이룬 사람은 프톨레마이오스인데, 이집트에 아카이메네스 제국의 그리스도계 후계 국가를 건설하고 세라피스(고대 이집트 신화의 오시리스와 아피스를 합일시킨 혼성신)의 모습과 제식을 만들어 내었다. 그의 목적은 공통의 종교에 의해 그의 지배 아래 있는 이집트 인과 그리스도 인과의 간격을 없애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의 계획을 실행하기 위하여 많은 전문가를 동원했다. 이 새로운 합성 종교는 목표로 한 민족의 양쪽 민족에게서 상당수의 신자를 획득하였으나 양자의 간격을 없앤다는 점에서는 완전히 실패했다. 양 민족은 각각 다른 모든 점에 있어 그러하였듯이 세라피스 숭배도 따로따로 행동했다. 당시 프톨레마이오스 제국 내부의 양 민족간의 정신적 간격이 겨우 메워지게 된 것은 프톨레마이오스 정권이 완전히 자취를 감춘 지 꼭 1세기나 지난 뒤였으며, 그것도 이전에 프톨레마이오스 제국의 영토였던 코엘레 시리아의 프롤레타리아가 자발적으로 일으킨 다른 종교에 의해서였다.
프톨레마이오스 치세로부터 1000년 이상 이전에도 역시 이집트의 지배자 파라오 이크나톤이 정통의 이집트 사회 판테온 대신에 그 신성을 아톤, 즉 태양 원반으로서 사람의 눈에 나타나는 영묘하고 유일하고 참된 신에의 숭배를 확립하려고 하였다. 생각건대 그가 기도한 동기는 프톨레마이오스를 움직이게 한 것과 같이 정치에서 모든 수단을 불사하는 마키아벨리즘적 이유도 아니고, 또한 알 하아킴이나 엘라가발루스의 기도의 원동력이었다고 생각되는, 반은 제 정신이 아닌 과대 망상도 아니었다. 이크나톤을 움직인 것은 거룩한 종교적 신앙이며 그것이 아쇼카 왕의 철학적 신념과 마찬가지로 전도 활동으로서 나타난 것으로 생각된다. 이크나톤을 움직인 종교적 동기는 이해를 초월한 진지한 것이었다. 그는 당연히 성공해야 할 만한 자격을 갖추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완전히 실패했는데, 실패의 원인은 그의 계획이 정치적 권력자가 위에서 아래로 ‘공상 종교‘를 퍼뜨리려고 하는 성격의 기도였다는 사실 속에서 찾지 않을 수 없다. 그는 그의 왕국 내에서 지배적 소수자의 심한 반감을 샀다. 더욱이 또 프롤레타리아의 마음에 닿아 그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 P596

600 "그때 왕의 고문관은 이렇게 언명했다. 종교와 율법과 신조, 이 세 가지는 결코 폐하께서 논의하실 일이 아닙니다. 이런 것들은 예언자의 관심사이지 국왕의 일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종교와 율법은 신의 계시에 의해 탄생하는 것이지 인간의 계획이나 설계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아담 이래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러한 종교적 일들은 예언자와 사도들의 사명이었습니다. 통치와 정치 같은 국왕의 임무를 예언자가 행한 예가 몇몇 있습니다마는, 예언자의 직무가 왕에게 귀속한 일은 이제까지 한 번도 없었으며 또 금후 세계가 존속하는 한 결코 없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저는 폐하께서 결코 이런 이야기를 하시지 않도록 충고드립니다." - P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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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2-3 프롤레타리아 교회의 지배권을 쥐고 그 권력을 악용함으로써 교회를 지배적 소수자의 생각대로, 또한 그들의 이익이 되도록 운영하는 신관 계급은 반드시 지배적 소수자에게 소속되는 종전의 신관 계급 가문의 출신이어야 할 필요가 없다. 실재로 프롤레타리아의 교회 자체의 지도적 인재가 그와 같은 역할을 수행하는 경우가 있다.
로마 공화제 시대의 초기 정치사에서 서민 계급과 귀족 계급 사이의 ‘스타시스(계급전)‘가 종말을 고한 것은, 이들 비특권 계급인 서민의 지도자가 민중의 신뢰를 저버리고 민중을 죽게 내버려 둔다는 묵계 아래 귀족 계급이 서민 계급의 지도자를 한패로 끌어들이는 ‘거래‘가 행해졌기 때문이다. 종교에서도 마찬가지로, 유대 민중은 그리스도 시대 이전에 그들의 옛 지도자였던 율법학자와 바리새인에 의하여 배반당하고 버림받았다.
이 유대의 ‘분리주의자‘들은 최초에 의도한 뜻과는 반대의 뜻으로 그들이 스스로 선택한 이름에 알맞은 행동을 하였다. 바리새 인은 원래 헬레니즘에 물든 유대인이 외래의 지배적 소수자 진영에 참가하였을 때 이들 변절자로부터 분리된 유대의 퓨리턴(청교도)이었다. 그러나 그리스도 시대에 바리새인의 현저한 특징은 유대인 사회의 충실하고 또 신앙이 깊은 성원인 민중으로부터 떨어져 나가면서도 민중에 대하여 위선적으로, 자기들의 행동이야말로 유대인의 모범이라고 일컬었던 점에 있었다. 이것이 복음서의 여러 곳에 나오는, 바리새인에 대한 통렬한 비난의 역사적 배경이다. 바리새인은 유대를 정치적으로 지배하는 로마 인 지배자와 함께 유대를 종교적으로 지배한 유대인의 지배자였다. 실제로 그리스도 수난의 비극에 있어서 그들은 적극적으로 로마의 관헌 측에 가담하여 그들을 욕보인, 그들과 같은 종족의 예언자를 죽이려고 꾀하였던 것이다. - P582

583-7 "놀라운 것은······ 이 새로운(즉 그리스도교의) 신화가 외국으로부터 온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리스 어로 저술한 그리스도 교 교부들의 신학과 철학이 본질적인 점에서 플라톤적인 것임이 밝혀졌다. 아니 더 정확하게 표현한다면 거의 수정을 가하지 않고 플라톤을 채용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융합으로 미루어 플라톤이 옛날 신들의 이야기로 대체하려고 한 신화는 그리스도 교의 신앙에 어긋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불완전한 그리스도 교 자체였다는 점이 된다. ······ 그리고 여기저기서 볼 수 있는 암시를 통하여 플라톤 자신은 곧 오고야 말 새로운 신의 출현을 어렴풋하게나마 느끼고 있었던 것이며, 그의 우화는 이것이 예언일지 모른다는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변명」 속에서 자신의 죽음 뒤에 출현하여 죽음에 보복할 영혼의 존재를 증언하는 다른 증인이 있음을 아테네 시민에게 경고하고 있다. 그리고 다른 곳에서 그는 철학이 아무리 추리를 하고, 고원한 상상을 전개시켜도 참다운 진리는 신의 은총에 의하여 인간에게 계시되기 전에는 결코 알 수 없는 것임을 인정하고 있다."
철학이 종교에 몸을 맡기는 역사적 기록은 헬라스 사회에 매우 풍부하므로 우리는 그 과정을 처음부터 끝까지 단계를 좇아 살펴볼 수 있다.
플라톤이 묘사하고 있는, 트라키아의 벤디스 여신 신앙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태도는 냉정한 지적 호기심이었으며, 역사적으로 소크라테스와 같은 시대의 헤로도토스의 태도, 즉 그가 때때로 부수적으로 행하고 있는 비교 종교학적 고찰의 태도도 역시 그와 같았다. 종교에 대한 그의 관심은 본질적으로 학문적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알렉산드로스에 의하여 아케메네스 제국이 무너진 뒤 그 후계 국가들의 헬라스 사회 출신 지배자는 잡다한 인종이 뒤섞인 민족들의 종교적 요구를 만족시키기 위하여 어떤 식으로든 종교적 의례를 정해야 했다. 동시에 지배적 소수자에 의하여 신학적 문제가 그때까지보다도 다소 큰 실제 관심사로 떠올랐다. 또한 스토아파 철학과 에피쿠로스 철학 창시자들이나 전파자들이 정신적 황야에서 절망하여 방황하는 인간 각자의 영혼에 어느 정도의 정신적 위안을 주고 있었다. 그러나 플라톤 학파의 경향과 기푸을 이 시대 헬라스 사회 철학의 지배적 경향을 측정하는 기준으로 본다면 우리는 플라톤의 제자들이 알렉산드로스 이후 200년 동안 점점 회의적인 방향으로 나아갔음을 알 수 있다.
결정적인 정세의 변화는 스토아의 문호를 크게 개방하여 민중의 종교적 신앙을 맞아들인 시리아의 그리스 인 스토아파 철학자와 아파미아(시리아의 지방)의 포세이도니오스(기원전 100년경 그리스의 천문학자)와 함께 일어났다. 그로부터 200년이 못 되어 스토아파의 지도권은 갈리오의 동생이며 성 바오로와 같은 시대의 철학자 세네카로 옮아갔다. 세네카의 철학적 저작 중에는 바오로의 서한 중 여러 대목을 상기시키는 똑같은 글귀가 여러 군데 나오므로 후세의 멍청한 그리스도교 신학자는 로마의 철학자 세네카와 그리스도교 전도자 바오로 사이에 서한 교환이 있었다고 상상하고 있을 정도이다. 그와 같은 억측은 사실에 어긋날 뿐만 아니라 쓸데없는 짓이다. 왜냐하면 같은 시대에 같은 사회적 체험에 의하여 촉진된 정신적 음악의 두 가지 작품에 이와 같이 가락이 일치되는 대목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앞서 해체기 문명의 변경을 지키는 군인과 경계선 저쪽의 야만인 전투 단체와 관계를 고찰하였을 때, 우리는 제1기에 양자가 서로 접근함으로써 거의 분간할 수 없게 된다는 것, 다음에 제 2기에 양자가 다같이 같은 야만의 평면에서 합류함으로써 뒤섞인다는 것을 알았다. 그것과 병행하는 지배적 소수자인 철학자와 프롤레타리아의 종교 신봉자가 서로 접근한 역사에서는 세네카와 성 바오로가 높은 평민에서 ‘접근함‘으로써 제1기를 마무리한다. 제2기에 철학은 자기보다 덜 계발된 종교의 영향에 굴복하여 성실한 신앙으로부터 미신으로 빠진다.
지배적 소수자의 철학적 말로는 이와 같이 가련한 것이다. 그리고 비록 힘껏 노력하여 고등 종교의 온상이면서 보다 호젓한 프롤레타리아의 정신적 토양에 침입할 수 있었더라도 이 운명을 모면할 수는 없다. 철학도 그곳에서 간신히 꽃피지만 모처럼 꽃이 피었더라도 씨를 늦게 뿌려 마지못해 피는 이 꽃은 건전하지 못한 타락 상태에 빠진 나머지 철학에 위해를 끼치므로 아무런 쓸모가 없다. 문명의 사멸이라는 마지막 막이 오르면 철학은 사멸하는 데 반하여 고등 종교는 살아남아 장래의 지위를 확보한다. 그리스도 교는 합리성의 포기 가운데 불사의 영약을 발견하지 못한 신 플라톤 철학을 밀어젖히고 살아남았다. 실제로 철학과 종교가 만날 경우, 종교는 반드시 세력을 증대시키고 반대로 철학은 반드시 쇠퇴해 간다. 그러므로 양자가 만나는 데 대한 고찰을 마침에 있어 왜 철학의 패배가 기정 사실인가 하는 문제를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도대체 종교와의 경쟁에서 처음부터 철학이 패배하도록 정해지게 하는 약점은 무엇일까? 다른 모든 약점의 근원이 되는 치명적이고 근본적인 약점은 정신적 활력의 결핍이다. 즉, 삶의 ‘엘랑(비약)‘이 없다는 것은 두 가지 방식으로 철학이 무능해진다. 이 결핍은 철학이 대중을 끄는 힘을 감소시키는 동시에, 철학에 매력을 느끼는 소수의 사람들이 철학을 펴서 전하는 사업에 모든 힘을 기울이려는 기력을 빼앗는다. 또한 실제로 철학은, 매출이 적은 것을 자기 시집이 뛰어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고답파 시인과 마찬가지로, 철학은 지적 엘리트나 ‘소수의 감당할 수 있는‘ 사람에게만 받아들여지기를 바란다. 세네카보다 1세대 앞선 호라티우스는 「로마의 노래」의 철학적·애국적인 송시에서 다음과 같은 서문으로 시작하면서 조금도 부조화를 느끼지 않았다.

가거라, 너희들 속물들이여!
닥쳐라, 너희들의 더러운 혀로
신성한 노래의 의식을 방해하지 마라.
아홉 여신의 제사장인 나는
다만 젊은이와 소녀들만을 위해 새롭고 숭고한 노래를 만든다.

이 호라티우스의 말과 다음의 예수의 ‘큰 잔치의 비유(<누가 복음> 14:23)‘ 사이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

"주인이 종에게 이르되 길과 물가로 나가서 사람들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호라티우스 「송시집」제3권)

이와 같이 철학은 최선을 다해도 도저히 전성기의 종교의 힘에 대항할 수 없었으며, 다만 열등한 신자의 결점을 졸렬하게 모방할 수 있었을 뿐이다. 세네카와 에픽테토스 시대에 겨우 잠시 동안 윤곽이 단정한 대리석상 같은 헬라스 사회 사람들의 지성에 생명을 불어 넣은 종교의 숨결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시대 이후 급속도로 청신함을 잃고 숨 막히는 듯한 광적 신앙으로 떨어졌다. 철학적 전통의 계승자는 양다리를 걸치고 있다가 결국 아무것도 못 얻는 결과가 되고 말았다. 그들은 지성에 호소하는 것을 중지하였으나 달리 마음 속으로 들어가는 길을 발견할 수 없었다. 현인이기를 거부함으로써 그들은 성인도 못 되고 기인이 되고 말았다. 율리아누스 황제는 소크라테스에게 등을 돌리고 디오게네스를 그의 철학적 모범으로 삼았다. 주행자인 성 시메온을 비롯한 추종자인 고행자에게 있어 ‘그리스도 교적‘ 금욕주의의 원천은 그리스도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라 전설적인 디오게네스에서 유래한 것이다. 희비극적인 종막에서 플라톤과 제논의 마지막 유파들은 내적 프롤레타리아의 모방에 몸을 맡김으로써 그들의 스승으로 추앙하여 모범으로 삼고 있는 위대한 철학자의 불충분함을 고백한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바로 앞서 호라티우스가 청중에게 한 말을 거부한, ‘저속한 민중‘과의 거짓 없는 영합이다. 최후의 신플라톤파 철학자였던 이암블리코와 프로클로스는 철학자라기보다는 공상적이고도 비실제적인 가공의 종교의 성직자이다. 성직자의 세력을 지지하고, 종교적 의례에 열의를 보인 율리아누스는 그들의 계획을 실행한 사람이라고 자칭하고 있었는데, 그의 사망과 동시에 국가에 의하여 지지받고 있던 그의 교회 조직이 와해한 것은 현대 심리학의 한 학파 창시자가 한 다음 판단이 옳음을 입중한다!

"위대한 혁신은 결코 위에서부터 내려오지 않는다. 언제나 어림없이 밑에서부터 올라간다. ······ 몹시 바보 취급을 받고도, 말을 하지 않는 지상의 민중ㅡ흔히 높은 사람에게서 볼 수 있는 학문적 편견에 그다지 물들지 않은 사람ㅡ들로부터 일어난다." - P583

587-9 지배자가 나라의 종교를 결정한다?(일부)
우리는 앞 절의 끝에서 율리아누스가 철학자로서 심취한 사이비 종교를 황제로서 백성들에게 강요하다 실패한 데 대하여 말하였다. 이것은 더 좋은 상황 아래서였다면 지배적 소수자가 그들의 정신적 약점을 물리적인 힘을 행사함으로서 보충하고, 부당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효과적인 정치적 압력에 의존하여 그들의 피지배자에게 철학이나 종교를 강요함으로써 그들의 정신적 약점을 메꿀 수 있겠는가 하는 일반적인 문제를 제기한다. 이 문제는 이 편의 우리 연구에서 논점의 줄거리를 벗어난 문제이지만, 앞으로 나아가기 전에 그것에 대한 해답을 찾아볼까 한다.
이 문제에 대한 역사적 사실을 살펴보면, 일반적으로 그와 같은 기도는 결국 실패로 끝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의 발견은 헬라스 사회의 동란 시대 중에 나타난 계몽기의 사회학설 중 하나와 정면으로 충돌한다. 그 학설에 의하면 종교적 관습을 위해서 하급 계층을 향해 계획적으로 강요한다는 것은 결코 불가능한 일도 아니거니와 또 이례적인 것도 아니며, 오히려 그것이야말로 실제로 문명의 과정에 있는 사회에서 종교 제도의 정상적인 기원이다. 다음에 게재된 폴리비오스의 유명한 일절 중에 이 설이 로마의 종교 생활에 적용되었다.

"로마의 정치 체제가 다른 나라에 비해 가장 뛰어나게 우수한 점은 종교를 다루는 방식에 있다. 로마는 다른 나라가 몹시 싫어하는 것, 즉 미신을 교묘하게 이용해서 사회 질서를 유지하는 주요한 기반으로 만들어 내었다. 로마는 미신을 그럴싸하게 포장해서 사적 생활과 공적 생활에 극단적일 만큼 침투시켰기 때문에, 많은 관찰자는 이것이 부당한 짓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의 의견으로는, 로마 인은 일반 대중을 겨냥해서 그렇게 한 것이다. 현인들로만 구성되어 있는 선거민을 가진다는 것이 가능하다면 이러한 기만은 필요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 문제로서 대중은 항상 불안정한 것이며, 또한 무한한 정욕과 비이성적인 기질과 광포한 분노에 차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미지의 것에 대한 공포‘ 유발과 그와 같은 연극을 꾸며대는 이외에 그들을 제어하는 방법이 없다. 나는 우리들의 선조가, 지금은 전통적인 것이 되어 있는 신학적 신앙이나 지옥에 관한 관념을 대중 속에 심은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또 그와 같은 일을 행함에 있어 우리들의 선조는 아무렇게나 그때그때의 방식으로 한 것이 아니고 의식적·체계적으로 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오히려 현재 종교를 절멸시켜 버리려는 현대인이야말로 그 무분별과 무책임을 책망받아야 할 것이다."

종교의 기원에 관한 이 이론은 국가의 기원에 관한 사회 계약설과 거의 같은 정도로 진실에서 먼 것이다. 역사적 사실을 조사해 보면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정치 권력이 정신 생활에 주는 영향력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 영향력이 작용할 수 있는 것은 특수한 사정이 조성되었을 때뿐이며 그런 경우에도 작용 범위는 극히 좁은 범위에 한정되어 있다. 성공하는 것은 예외이며 실패하는 것이 통칙이다. - P587

589
예외의 쪽을 먼저 보면, 때로 어떤 숭배가 참된 종교적 감정의 표현이 아니고 종교의 가면을 쓴 어떤 정치적 감정의 표현인 경우에 실제로 그 숭배를 국교로 하는 데에 성공하는 수가 있다. 예컨대 동란 시대의 고배를 뼈저리게 체험한 사회가 정치적 통일을 갈망하는 표현으로서 행하는 유사 종교적 의식이 그것이다. 그러한 경우에는 이미 인간 구세주로서 피지배자의 마음을 장악한 지배자는 그들 자신의 지위와 그의 가계가 예배의 대상이 되는 숭배를 국교로 하는 데 성공한다. - P589

592-3 루이 14세의 야만적인 수법은 프로테스탄티즘을 프랑스의 정신적 토양에서 뽑아 버렸으나, 그것은 회의주의라는 대토작물을 위해 망을 비운 데 불과했다. 낭트 칙령(가톨릭이 앙리 4세가 1598년 국내의 신교파 위그노에게 신앙의 자유를 인정한 칙령) 폐지 후 9년도 되기 전에 볼테르가 태어났고, 영국도 역시 청교도 혁명의 종교적 호전성의 반동으로 회의적인 풍조가 시작되었다. 이 절의 첫머리에 내건 폴리비우스(그리스의 로마사 역사가)의 인용 중에 명시된 것과 흡사한 새로운 계몽 사상과 종교 그 자체를 조소의 대상으로 취급하는 사상 경향이 출현했다. 그래서 1736년에 버틀러 주교는 그의 저서 「자연 종교·계시 종교와 자연의 구조·진로의 유사성」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그리스도 교는 연구의 대상마저도 될 수 없으며, 이제 드디어 허구인 것이 판명되었다는 생각이 당연한 일로 받아들여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그들은 마치 이와 같은 견해가 현대의 모든 식자의 일치된 견해인 것처럼, 또 말하자면 오랫동안 이 세상의 즐거움을 방해받은 보복으로 조소와 우롱의 대표적인 대상으로 그리스도 교를 취급하고 있다."

광신을 근절하기는 했지만 그 대신 참다운 신앙의 불이 꺼져 버린 그와 같은 심적 태도는 17세기에서 20세기까지 계속되어, 서유럽화한 ‘대사회‘의 모든 면에서 극단적인 형태로까지 추진되었기 때문에, 이제 겨우 그 본질이 인식되기 시작했다. 즉 그것은 서유럽 사회체의 정신적 건강은 물론 물적 존재까지 위협하는 최대의 위험으로 인식되고 있으며, 열렬하게 논의되고 시끄럽게 선전되는 우리들의 정치적·경제적 병폐의 그 어느 것보다도 훨씬 더 치명적인 위험이 된다는 것도 인식하게 되었다. 이 정신적 해악은 이제 너무나도 명백한 사실이라 무시할 수도 없다. 그러나 이 병은 진단하기는 쉬우나 치료법을 처방하기는 어렵다. 신앙은 주문하면 곧 입수할 수 있는 표준화된 상품과는 다르다. 그럭저럭 2세기 반이나 계속되어 온 종교적 신념의 점진적 쇠퇴에 의하여 서유럽 인의 마음 속에 텅 빈 정신적 공허를 다시 채운다는 것은 실제로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서유럽은 아직도 16~17세기에 서유럽 조상이 범한 죄, 즉 종교의 정치 예속 때문에 후유증을 보이고 있다. - P5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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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8-9 미국과 (구)소련의 우주 과학 예산을 합한 금액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은 10년마다 핵잠수함 두세 대를 생산하는 데 드는 경비와 비슷하며, 여러 무기 체계들 중에서 단 한 가지에 드는 연간 경비를 약간 넘는 미미한 액수이다. 1979년도 4·4분기에 F/A-18 전투기 사업에 들어간 예산은 51억 달러로, F-16 사업은 34억 달러로 각각 증액됐다. 그러나 행성들의 무인 탐사에 투자한 예산이 미국이든 (구)소련이든 미소한 액수이기는 마찬가지였다. 구체적 비교를 위하여 미국의 캄보디아 폭격을 예로 들어 보겠다. 미국은 1970년과 1975년 사이에 무려 70억 달러에 이르는 막대한 예산을 캄보디아 폭격에 퍼부었다. 바이킹 우주선을 화성에 보내는 데에 든 경비나, 보이저 우주선을 외행성계로 보내는 데 필요한 총 예산이 1970~1980년에 (구)소련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는데 소요한 경비보다 적다. 전문 기술 인력의 고용을 증대시키고 첨단 기술의 개발을 자극함으로써, 우주 탐사 계획은 투자한 액수의 몇 배를 거두어들일 수 있는 효과가 있다. 행성 탐사에 쓰인 1달러는 국가 경제에 7달러로 돌아온다는 연구 결과는 우리 모두 기억해둘 만한 가치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산 부족 때문에 시도조차 할 수 없는 우주 개발 계획이 여러 가지 있다. 이 계획들 하나하나가 모두 중요한 의미를 가지며 기술적으로도 실현 가능한 것들이다. 화성 표면을 가로질러 움직일 수 있는 차량의 개발, 우주선과 혜성의 궤도 랑데부, 타이탄 위성 대기에 탐사선을 내려 보내려던 계획, 외계 문명권의 대규모 전파 탐색 등이 그 좋은 예가 될 수 있겠다. - P678

707(옮긴이 후기) 저는 꿈, 사유의 지평, 우주와 인간의 관계 등 그가 제시하는 몇 마디 키워드에 그만 손을 들고 말았습니다. 왜냐하면 우주인이 달나라에 발자국을 남길 수 있었던 것은, 현대 과학과 공학의 눈부신 발달 때문만은 아니라고 늘 생각해 왔기 때문입니다. 저는 달을 두고 노래한 시인들이 더 중요하고 큰 역할을 했다고 믿습니다. 우리네 삶에서 소망없이 이루어진 일이 어디에 있습니까? 따지고 보면 시인이 우리 가슴에 심어 준 꿈의 위력이 과학자들로 하여금 달나라 여행을 설계하게 했을 것입니다. 외계 생명의 발견이야 가까운 장래에 기약할 수 없겠지만 어느새 140여 개에 이르는 외계 행성의 존재가 태양계 밖에서 확인되었으니 외계 생명의 존재도 언젠가는 밝혀지고 말 것입니다. 그리고 외계를 향한 인류의 끈질긴 외침이 언젠가는 외계 문명과의 교신으로 결실을 맺게 될 것입니다. 그날이 온다면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는 인류 역사를 바꾼 고전 중의 하나로 재평가될 것입니다. - P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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