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은 복잡하지 않다 - 골리앗 전사 이갑용의 노동운동 이야기
이갑용 지음 / 철수와영희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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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권일의 책을 보다 더위에 샤워라도 해야겠다 하며 일어났는데, 이갑용이 보낸 편지가 책상 위에 놓여 있었다. 2011년 4·27 보선 후 받은 편지였다. 그때 나는 생전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정치자금을 기부했고, 대신 A4 두 장에 빼곡이 인쇄된 편지를 받았다. 그 근저에는 4·27 재선거와 “통합”이라는 화두가 깔려 있었다. 


당시 민주노동당은 '국민의 명령' 류의 전략에 몰입해 있었고, 민주당과 딜을 벌인다. 민주당 이인영 최고의원이 울산 동구에서 후보를 내지 않기로 하고, 민노당은 대신 중구의 권순정 후보가 사퇴한 것. 이갑용은 이런 나눠먹기를 통해서라도 정치적 지분을 획득하는 것, 혹은 자리를 위해서라면 노동자의 삶을 극도로 악화시킨 열린우리당-민주당 라인과도 연합한다는 뻔뻔함에 크게 반대했고, 노동자 후보로 울산 동구에 출마하여 한나라당/민노당/이갑용의 구도로 판을 바꾼다. 

여기에 화들짝 놀란 당권파놈들의 깔대기 민중의소리 김경환은 “자신의 당선가능성이 없는 건 잘 알고 있을 텐데, 그럼 누구를 당선시키기 위해서, 아니면 누구를 낙선시키기 위해 나온 걸까요? 한나라당의 잘못으로 치러지는 선거가 자칫하다가는 한나라당에 면죄부를 주는 최악의 상황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라는 내용이 담긴 메일을 민중의소리 독자들에게 스팸했다(이런 묻지마 지지와 단일화와 정치전략적인 사고를 진행하던 이들, 그리고 이들의 입이 되어 준 민중의소리가 현재 다다른 지경을 생각해 보면, 이 메일이 주는 함의는 상당한 것이다.).



내가 이 책을 손에 든 것은 이런 상황 속에서였다. 이 책은 그가 현대중공업에 입사한 이후 겪었던 민주노조 설립, 어용노조와의 세 싸움, 128일 대투쟁, 식칼테러, 골리앗 파업(노무현이 그때 골리앗에서 담배를 피우던 사진이 유명한데, 이 둘의 이후 인생은 참 이상하게 갈라진다.), 수감, 그에 이은 민주노총 출범까지의 과정을 현장에서 싸우던 사람의 입을 통해 전한다. 그리고 민주노총 출범 이후 노사정 대타협에 합의해 준 국민파에 대한 실망, 위원장 출마 시 당권을 쥐고 있던 파벌과의 끊임없는 세 싸움, 결국 위원장이 되었다가 구속된 이야기, 동구청장이 된 후의 이야기와 공무원 노조 관련하여 민노당 지침을 따르다 구청장직을 잃을 때까지의 이야기가 빼곡하게 적혀 있다.


이 이야기를 통해 느껴지는 정서 중의 하나는 비타협주의적 투쟁 노선이다. 이갑용의 시각에서 보는 귀족노조의 문제가 그렇다. 아니, 그의 시각에서 보면 귀족노조는 존재하지 않는다. 귀족노조가 아니라 노동자들의 입장에서 싸우고 문제를 제기하는 노조와 어용노조 혹은 포섭당한 노조원들이 있을 뿐이고, 한쪽에서 문제를 일으키면 다른 한 쪽에서 몇 푼의 봉급 인상을 받아다 주는 걸로 퉁치는 일이 반복되며 투쟁이 임금높이기의 방편처럼 변질된 것일 뿐이다.

경향신문 취재팀이 출간했던 “민주화 20년의 절망과 열망”에서 지나친 투쟁이 노동운동의 동력을 고갈시켰다고 지적한 부분도, 이갑용의 입장에서는 동의할 수 없게 된다. 신자유주의적 개혁이 완성되어 가는 중이었다.  노동과 성장 위주의 경제 성장은 자산과 투자 위주의 자산 중심 경제로 대체되었고, 제조업의 중요성 혹은 노동자들의 위상은 나날이 추락했다. 공장을 돌리느니 그 땅을 팔아서 아파트 짓는 게 훨씬 좋은 세상이 왔고, 펀드니뭐니 하며 자산을 바탕으로 한 돈불려먹기로 중산층이 퍽퍽한 물가상승을 견디던 시기에, 노동자은 펀드를 쌓는 대신 비정규직이 되고, 개인사업자가 되고, 나락으로 빠져들었다. 이를 보호해야 할 사람들은 노사정의 속임수에 동참했고, 비정규직들을 포기했으며, 노동법 개악을 좌시하여 관뚜껑에 못질을 했고, 사측의 노조 탄압과 손배소가 쌓여 죽어나가던 노동자들을 제대로 보살피지 않았다. 심지어 2003년의 정부 수반은 민주화된 시대를 운운하며 자살한 노동자들을 훈계하려 들었다. 

이갑용의 입장에서 이 시기의 노총의 역할은 더 많은 투쟁을 효율적으로 선도하여 노동자들의 의식을 더 고양시키고, 계급주의적인 투쟁노선을 굳혀 노동자들의 의식을 더 굳게 하는 데 있었을 것이다. 더 많은 투쟁으로 노동계의 입장을 더 강력하게 전달하고 노동자의 학교라는 파업을 통해 의식 있는 노동자들, 노동 운동의 나아갈 길을 제시해야 했다고 보았을 것이다. 그렇게 놓고 보면, 노총의 영향력 상실은 투쟁의 과잉이 아닌, 투쟁의 부족에 인한 것이 된다(그의 노총위원장 출사표 1번이 “우리가 당선된다면 1년을 열심히 싸워 감옥에 가겠다. 만약 가지 않으면 투쟁을 제대로 하지 않은 것으로 알고 1년 후 임원직을 사퇴하겠다”는 것이었으니(185쪽), 그 강단 또한 대단한 것이었다.).


그의 의견에 모두 동의할 필요는 없고, 나도 그의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타협과 양보가 반복되면 사람들이 노동자들을 우습게 볼 것이라는 걸 그는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가 그 투쟁을 겪고 정부와 싸웠던 사람들이 너무나 쉽게 과거는 잊고 한나라당부터 심판하자고 말하는 데 대해 비참할 정도의 배신감을 느끼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나도 그렇게 생각했고, 묻지마 단일화가 가져올 부작용을 겁냈다.


그러나 그 싸움이 이길 만한 싸움도 아니었던 것이 사실이었고, 그는 실제로 4·27 보선에서 패배했다. 그러나 이 책을 읽으면서 느꼈던 두 번째 느껴지는 정서는, 그런 패배를 하더라도 할 말은 해야 하고 싸울 싸움은 싸워야 한다고 생각하는 그의 강직함이었다. 많은 말은 필요없을 것 같고, 그가 골리앗 투쟁을 씁쓸하게 반추하는 대목을 옮긴다. 조금 길더라도 읽어 보는 게 좋다고 생각된다(나도 가끔 생각날 때마다 다시 꺼내 읽는 부분이다.).


5월 10일, 우리는 골리앗에서 내려왔다. 14일 만에. 골리앗에서 내려오는 우리를 전국에서 뜨겁게 지켜보는 것도 몰랐고, 우리 싸움이 위대하다고 역사에 기록될 줄도 몰랐다. 포위되어 갈 곳 없던 우리 앞에 골리앗이 있었고, 그저 버틸 수 없어 내려왔다. 우리는 위대하고 싶어 오른 게 아니었다. 하지만 한 가지, 최선을 다했다. 완패했지만, 때론 잘 진 싸움에서 이긴 싸움보다 더 큰 교훈을 얻을 수 있다는 걸 골리앗을 통해 보여주고 싶었다. 이대로 내려갈 수 없다고 난간을 부여잡고 우는 동지를 붙들고 함께 내려오는데,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모두 울었다. 14일 동안 외로운 하늘에 한 점처럼 떠서 저 아래 평온한 세상을 바라보며 느꼈던 외로움, 저 불빛 어딘가에 있는 내 가족들과 따뜻하게 섞이고 싶은 그리움, 왠지 이길 수 없을 것만 같은 두려움, 끝이 보이지 않는 싸움에 대한 막막함, 그리고 의도치 않게 서로에게 입힌 상처들....... 울지 않을 수가 없었다.※

※는 주석 표시로, 다음 쪽에 실린 김주익에 대한 회고를 가리킨다. 그 글에는 김주익에 대한 미안함, 할 수 있는 일이 없어 단식을 했다는 이야기, 고공 점거 투쟁 시 버티기 위해 제안하는 내용들이 담긴 이야기가 1쪽 분량으로 적혀 있다. 어찌 보면 꼰대질일 수도 있지만, 내 입장에서는 꽤나 세심하게 느껴졌다(108~109쪽)


그러니까, 이길 수 없는 싸움이라도 해야만 할 때가 있었던 것이고, 모든 이들이 통합으로 진군하면 정권교체가 이루어질 것이며 자연히 사람사는 세상이 다시 올 것이라고 할 때, 누군가 아니라고 말할 사람이 반드시, 한 사람이라도 필요하다고 믿었다. 그래서 난 이 책을 샀고, 그에게 후원금을 냈다. 그리고 난 그것이 무척이나 자랑스럽다. 그리고 그는 선거에 패배한 후 쓴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밝힌다.

단일화를 비판한다고 해서 한나라당에 대한 분노가 그들보다 적은 것도 아니며, 정권이 바뀐다고 해서 그들이 늘 떠드는 노동자 민중이 행복해지는 것도 아닙니다. 지난 10년을 어떻게 넘어설 것인가를 말하지 않으면서, 지난 10년이 행복했다고 강요하는 사람들에게 진보정치 그런 거 아니라고 누군가는 말해야 했습니다.

통합진보당이 결국 이 꼴이 나고, 이정희는 이 마당에도 “침묵의 형벌” 기간 동안 쌓은 숙변이 어찌나 쌓였던지 페이스북에다 거하게 똥질을 하고 앉아 있는 마당에 , 그가 무척이나 보고 싶다. 어떤 모습으로든 진보정치에 그가 돌아와 주었으면 좋겠고, 그날이 오면, 다시 한 번 기쁜 마음으로 그에게 후원금도 보내고, 사정이 되면 편지라도 한 통 써 보내고 싶다.


덧) 이갑용의 출마를 지지했던 정당이 하나 있다. 사회당이라고...... 여러모로 참 괜찮은 정당이었고, 아직까지도 심정적으로는 그들을 지지하고 있다(진보신당에 기대를 걸고 있는 한 가지 이유이다.). 

덧) 허영구의 전 민주노총 부위원장의 명문을 옮긴다. 책이나 보고 회사에서 펜대나 굴리던 나의 글보다 훨씬 더 깊은 울림을 가지고 있다. 읽어 주기 바란다. http://hjyd.nodong.net/xe/index.php?document_srl=56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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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롬 헬 시공그래픽노블
앨런 무어.에디 캄벨 지음, 정지욱 옮김 / 시공사(만화)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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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올림픽이 한창이라기에 음, 영국하면 모더니즘이고, 모더니즘의 뒷면은 빈곤과 데카당트이지 암암. 하다가, 그럼 잭 더 리퍼를 다룬 이놈의 작품을 한 번 볼까 싶어서, 책장을 뒤져뒤져 찾았다(사 놓고 까먹고 있었음.). 그리고 2일 후인 오늘 2일 전의 자신을 저주하는 마음으로 리뷰를 쓴다. 저놈의 자유연상을 하지 말았어야 하는데, 저 책을 샀다는 걸 철저히 까먹고 있었어야 했는데.


그래픽 노블, 아니 소설이라고 하자. 이 소설의 내용은, 빅토리아조의 타락과 빈곤(초점은 빈곤과 처절한 뒷골목의 삶에 있다.)을 주인공으로 하되 프리메이슨의 광기와 드루이드/오컬티즘을 이야기의 동력으로 삼고, 모더니즘 시대의 과학과 그것이 불러온 데카당트한 혹은 블레이크적 환상들을 뿌려 둔다.그리고 그것을 감싸는 것은 잭 더 리퍼의 이야기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아직 대단한 책이라고 말할 수가 없고..... 부록을 보면 입이 벌어진다. 대부분의 사건과 디테일마다 자료 목록 및 자세한 배경 상황 설명을 넣어 두었다. 심지어 자신들이 제시하는 디테일에 관해 논쟁이 있을 경우 “이건 누가 뭘 제시한 이후로는 요즘 아무도 안 믿는 설이지만 무엇 때문에 남겨 두었다.”며 설명을 다 붙여 두었으니, 1차 사료는 모르겠지만 2차 자료는 샅샅이 긁어다 읽었다고 보면 되겠다.


리퍼가 사람의 몸을 찢어 놓은 순서나 청문회에서의 증인들의 증언에 맞춰 디테일을 짜고, 가끔은 서류가 그대로 튀어나오기도 한다. 심지어는 의학 자문도 받은 듯한게, 사람의 몸이 찢어지는 과정을 몸 안에서 보는 앵글도 나오거든......그런 면에서는 에디 캠벨의 디테일이 재미있는데, 당대 영국의 뒷골목을 꼼꼼하게 고증한 것 같으면서도, 막상 그림으로 옮길 때는 거친 펜선과 극단적인 B/W로 뭉개 버린다. 이게 좀 아쉽게 느껴질 수는 있는데, 오히려 이런 디테일의 생략이 상상력을 더 증폭할 수도 있겠다. 칼라로 그려진 인간의 난도질 당한 내장보다는, 그냥 흑백으로 보고 머릿속에서 상상하든가 연상을 끊어버리든가 하는게 낫지 않겠는가......


그러니까......  쉽지는 않다. 드루이드 역사 강의와 오컬트에서 호크스무어의 건축물로 뛰었다가, 제임스 힌튼/하워드 힌튼의 4차원 시간세계로 뛰었다가, 이스트엔드 창녀들의 삶 속으로 뛰어들었다가, 인간 도축의 장면으로 뛰어넘다가, 갑자기 천상 세계와 지옥과의 공간워프/타임워프를 뛰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가운데 놓여 있는 (빅토리아 여왕과 프리메이슨 포함한) 등장인물의 섬뜩한 생존본능, 그리고 그것이 낳은 피의 홍수를 보면, 정신이 갈기갈기 찢기는 기분이다.


다 읽고 나니 몸이 많이 아프다. 펜과 먹으로 칠해 놓은 디테일이 마치 사포처럼 머릿속을 긁어 놓는 걸 보면, 앨런 무어든 에디 캠벨이든 정말 대단한 작가인 건 맞는 듯하다. 이걸 어떻게 견디면서 쓰고 그랬나 모르겠다. 그러니까 사실, 멘탈이 약하신 분들께는 별로 추천하고 싶은 책이 아니다.


그러니까 결론은 한국대표팀 파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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럭키잭 2018-07-05 23: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허세로 흉물스레 똥칠된 글
 

이번 달 밥값이 이십만원 대를 찍는 동안 책 구매비가 0인 것에 살짝 충격받고(......) 서울역 철도문고에 들렀다. 원래는 창비 폴란드 문학 선집 을 보러 갔는데 없어서...... 책을 둘러보다가 갈랑의 천일야화 번역본을 발견했다. 어머 나 몰라 저건 사야 해.

 

 

 

 

 

 

 

 

 

 

 

 

 

 

 

그 자태가 심히 아름답다(1,3,5권 표지) 


알라딘 가서 열린책들 서평을 보니, 그림도 상당히 괜찮을 듯하다. Dalziel's Illustrated Arabian Nights' Entertainment 에 수록된 그림들을 찾아다 넣었다는데, 화면으로 봐도 상당히 두근두근한 퀄리티. 옵셋 인쇄본을 보면 정신줄을 놓을 듯하니, 당분간은 서점에서도 좀 피해 다녀 봐야겠다(......). 얘기가 샜는데, 이 서평에는 조금 이상한 부분이 있다. 일단 아래 옮기고, 이상한 부분은 볼드처리하도록 하겠다.

 

(전략) <천일야화Les mille et une nuits>의 국내 최초 완역본이 열린책들에서 출간되었다. 누군가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물을지도 모른다.<천일야화>라면 이미 잘 알고 있는 책인데, 어째서 여기에 <국내 최초>라는 수식어를 붙이느냐고. 하지만 국내에서 흔히 정본으로 알려진 리처드 버턴판 <아라비안 나이트>는 선정적이고 잔인한 내용을 첨가하여 <천일야화> 원전을 재구성하여 만든, 일종의 <각색> 작품인 셈이다. (중략) <천일야화>의 정전canon은 바로 프랑스의 동양학자 앙투안 갈랑Antoine Galland의 불역본이었다.

 

문제는 세 가지다.

1. 국내 최초 완역본이라는 말은 틀렸다. 정확히 말하자면, 열린책들의 천일야화는 갈랑 번역에 대한 최초 완역이고, 범우사의 1992년판은 버턴 번역에 대한 최초 완역이다.

2. 버턴의 아라비안 나이트가 각색본이니까 정본은 갈랑 아니겠냐는 질문 또한 무용하다. 그 둘은 시리아본과 이집트본이라는 독립적 저본을 각각 번역한 책이기 때문이다.

3. 세 번째는, 갈랑 역시 저본을 유럽 실정에 맞게 번안하고, 저본에는 들어있지 않은 내용들을 가필하여 자신만의 아라비안 나이트를 재구성했기 때문에 천일야화 자체의 정본이라 부르기가 어렵다는 점이다.

 

즉, 어느 책을 읽어도, '원본 천일야화'의 정본이 이것이다 라고 말할 수는 없는 일이다. 

 

아래는 그런 내용들을 좀 더 자세히 풀어 놓은 얘기인데, 어차피 출처가 영문 위키라 설득력 면에서 조금 문제가 있다. 그래도 뭐 읽으실 분들을 위해 링크 투척하고 시작(요 중에서 Arabic Versions / Modern Translations 부분을 참고했다.). http://en.wikipedia.org/wiki/One_Thousand_and_One_Nights 


1. 두 가지 저본
천일야화에 대한 언급이 12세기 카이로 문헌에서 발견된다(이때는 페르시아 전통 하에 있었을것으로 짐작된다.). 이후 저본이 속한 지역이 아랍 문화권에 편입되면서 아랍 전승이 점차 페르시아 전승을 대체한다. 그 결과로 9세기 바그다드 주변과 13~14세기 카이로 주변을 다루는 두 개의 이야기 군이 생겨난다. 그 과정에서 두 개의 아랍어본(혹은 계열)이 형성되는데, 시리아본과 이집트본이다.

시리아본은 이집트본에 비해 짧고, 이야기 수도 적다.  Calcutta I판과 Leiden판 등이 있는데, 갈랑이 활용한 것은 시리아본 중 Leiden 판이다(14~15세기에 발행된 것으로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소장된 것). 비교 연구를 통해 1984년에 새 Leiden판을 내놓은 Mushin Mahdi는, Leiden 판이 천일야화의 원형에 가장 가깝고, 다른 판본들의 뿌리가 된다고 주장 하는데, 여기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하지만 Leiden 판본이 중세 아랍어의 향취를 잘 담고 있다고 하는 데는 어느 정도 의견이 일치한다고 한다.
이집트본은 시리아본의 형성 이후에 형성되는데, 상당히 많은 양의 이야기를 담고 있으며, 버턴 번역의 저본이 된다. 시리아본의 형성 이후에도 여러 가지 구비 전승들을 끌어들였고, 일부 판본들 가운데는 19세기까지도 가필이 이루어진 판본도 있다고 한다. 이처럼 이집트 전승에 더 많은 이야기가 포함되는 데는 완전판을 원하는 서양인들의 요구가 크게 작용했다고 하는데, Mahdi에 따르면, 이는 정리할 때마다 늘어나는 구비 문학의 특징일 수 있으며, 이상한 일은 아니라고 한다.

 

2. 갈랑과 버턴 번역의 차이는? 
열린책들에서 내놓은 이번 번역은 시리아본(Leiden)을 번역한 갈랑의 천일야화의 완역이다. 따라서 버턴의 번역에 비해 들어 있는 이야기의 수가 적고, 좀 더 원형에 가깝다. 갈랑 자신이 텍스트를 유럽 실정에 맞게 번안 하였다는 점 또한 주목할 만하다(실제 갈랑은 자신의 텍스트에 대해 그 의도가 '교화'에 있다고 밝히고 있다(http://en.wikipedia.org/wiki/Antoine_Galland). 이는 버턴이 성적·폭력적 내용을 첨가하였다 는 주장이, 뒤집어 놓고 보면 갈랑이 그런 내용을 빼고 번역했다 는 주장과 경쟁하는 결과를 낳게 되는데, 별로 좋은 현상은 아닐 것 같아 보인다. 솔직히 이쯤 되면 학계의 논쟁이 붙어야 할 부분이고, 사람들이 옆에서 풀무질이라도 해야 하는데, 한국에서 이런 일이 벌어질 것 같진 않다 -_-

게다가 갈랑 자신이 들었던 이야기들을 이용하여 Leiden 판에는 들어 있지 않은 이야기들을 (물론 다른 시리아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썼지만) 창작하여 집어넣었기 때문에, 몇몇 이야기는 원 텍스트에서 찾아볼 수도 없다.이는 천일야화 자체가 시리아본에 고정된 내용들과 별도의 내용을 포함하여 더 발전했고, 그 이야기들 역시 천일야화에 포함되는 게 맞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실제로, 완전한 천일야화 전체를 찾으려는 사람들의 노력 때문에, 한때는 이집트본이 정본으로서의 지위를 좀 더 강하게 얻기도 했다.

이러한 첨가와 가필을 살린, “전집성” 천일야화에 대한 최초의 번역은 E.W. Lane의 번역인데, 출판 과정에서 훼손을 당했다고 한다(검열당하고, 일부는 각색당함.). 이후 John Payne의 번역본은 대부분의 내용들을 살려 번역·출간했으며, 이를 참고하여 진행된 버턴의 번역은 성적·폭력적 함의들을 더 강조한 경향이 있다고 한다(빅토리아 시대의 도덕주의·검열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자비출판된 경우가 많다고). 여튼 이 중에서 버탄의 번역을 번역한 것이 범우사의 1992년판 완역본. 열린책들의 평이 맞는 부분은 이런 것들인데......  엄밀히 말하자면 꼭 옳은 얘기는 아니라 하겠다.

 

다시 말해, 더 많은 이야기와 더 다채로운 내용을 담은(그러나 어쨌든 19세기까지도 가필이 이루어져 이야기들의 진위가 의심스러운) 이집트본을 보려면 버턴의 번역을 기반으로 한 범우사판을, 15세기 이전까지 확립된 시리아본-라이덴판의 텍스트만을 천일야화로 간주하고, 갈랑이 추가한 부분을 일종의 가필로 용인한다면 갈랑의 번역을 기반으로 한 열린책들판을 보는 게 적절한 선택이라 하겠다(개인적으로는 이집트본은 페인 번역이 더 좋을 것 같다는 느낌적인 느낌도 들지만, 여튼 완역된 건 버턴/갈랑 이니까......).

 

 내가 이 10권 세트를 고등학생 때 5권까지 읽다 만 것 같은데, 별천지다...... 주인공이 고난에 처하니까 하인이 지나가는 유대인을 죽이고 염소를 뺏어 오는걸, 무슨 가게에서 물건 사오듯 당연하고 담담하게 묘사하는데, 오오 아랍의 패기 오오...... (잠깐 이건 뭔가 얘기가 또 샌다.)

 

 

 

3. 위키 추천 번역본
이에서 볼 수 있듯, 원작에 가까운 이야기나 정본을 찾는 것은 현재 한국 땅에서는 큰 의미를 지니지 않는데, 원 아랍어 저본을 확정하고, 이를 자신의 언어로 옮기는 과정에서 여러 가지 선택이 작용하는 그런 층위를 모두 이해하기도 힘들고, 그것을 이해한다 하더라도 그 판단 중 어느 것이 옳을지에 대한 객관적인 판단을 내릴 만큼 이 사회는 아랍 전공자로 가득 차 있지 않기 때문이다(물론 수능 제2외국어는 아랍어입니다, 형제님들). 여튼, 이 여러 가지 판본들 중, 위키는 아래 두 가지의 번역을 주목하고 있다.

 

시리아본
Mahdi가 재편집한 Leiden 판을 Husain Haddawy가 영역한 1990년 번역판이 추천을 얻고 있단다. 아랍어를 충실하게 옮긴데다, 읽히기도 잘 읽힌다고. 물론 Leiden 판에 충실하게 번역했기 때문에 알리바바 등의 친숙한 이야기들이 대거 탈락했는데, 이것들은 1995년에 추가로 출판된다.

 

이집트본
Malcolm C. Lyons와 Ursula Lyons가 번역하고 Robert Irwin이 서문/각주를 맡은 펭귄의 2008년 3권 전집이 있다고 한다. 버턴 이후 최초의 이집트본 완역이라고......(웃긴 건, 이 Irwin이 시리아본으로 위의 Haddawy의 번역을 추천했......). Calcutta II 판을 이용했다고 하며, 버턴이 완역한 이후로는 최초의 이집트본 완역이라고 하는데, 진짜인지는 잘 모르겠다(위키 특성상). 이 판본의 특징은, 구비전승을 살려, 읽히기 좋은 입말을 만드는 데 주력한 판본이라는 점. 판본들마다 누락되기도 하는 시들을 모두 번역해 넣었는데, 한계 상 아랍어 시가 지닌 고유의 음률까지 살리지는 못 했다고 한다.

 

참고1. 보르헤스는 자신의 소설집에서 레인 번역을 몇 번 언급하는데, 막상 그가 “바벨의 도서관” 선집을 간행할 때 택한 판본은 갈랑의 번역이다.

참고2. 레인 번역은 Google Books를 30분 정도 뒤지면 찾을 수 있다. 내가 구한 건 루틀릿지의 1865년판으로, 조카가 다시 편집을 했다고 함. 존 머레이의 1859년판도 구했는데, 대조는 안 해 봤다(앞으로도 안 하겠지...). 갈랑의 번역도 구해 볼까 했는데, 어차피 불어라 못 읽을 것 같기도 하고 하여 포기했고, 페인 번역은 9권이나 돼서 전체를 다 찾으려면 상당히 골치가 아플 것이다. 20세기 이전 번역으로 쉽게 구할 수 있는 공짜 책을 구하려면, 레인 번역이 가장 적절할 듯한데, 역시 축약본스런 검열이......(대신 이 책은 하비의 삽화가 예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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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답고 비싼 초고층 아파트가 있다. 내부에 학교와 약국, 피트니스 등이 모두 완비되어 있고, 주변의 너절한 환경에서는 거의 고립된 하이 클래스 명품 주거 공간. 이곳에 전문직 종사자들을 비롯한 고소득자들 1천가구가 입주한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몇 달만에 지옥으로 돌변한다. 아파트 주변은 투척된 쓰레기로 둘러싸이고, 벽면에는 대소변이 흘러내린다.

 

이렇게 되는 데는 뭔가 계기가 필요한데, 작가는 그 계기를 소설 첫머리에서 정의한다. 로버트 랭 박사가 개를 구워먹으며 이 지경에 이르게 된 결정적인 계기를 찾으려 지난 3개월을 반추하는 것이다(물론 그 실마리는 찾아지지 않는다.). 이들은 어린애도 아니고 광인도 아니다. 심지어 출근해야 할 직장도 가지고 있으며, 광란의 도가니에서도 아침이면 몸을 씻고 출근하는 이들이 있다. 그러나 밤이면 이들도 똑같이 다른 층 주민을 사냥하러 다닌다.

 

엘리베이터의 출입을 막기 위해 통로가 파괴되고, 중앙공조장치에 대변이 뿌려지며, 층별로 전선이 형성되고, 인간들은 습격대를 조직하여 남의 집을 때려부수고 약탈과 강간의 축제를 벌인다. 그 와중에서도 슈퍼마켓은 돌아가고 관리인은 풀장을 청소하지만, 이것도 오래 가지는 않는다. 복도와 현관은 바리케이드가 되고, 그 와중에서도 인간들은 무언가를 부득부득 먹어치우며 생존해 나간다. 그 누구도 밖에 도움을 택하지 않고(이미 익숙해져 버렸다), 밖의 그 누구도 이 지옥에 신경을 쓰지 않는다.

 

사소한 사건들이 누적되고 갈등이 표면화되는 과정은 뜬금없다싶을 정도로 뻔한 내용들이고, 그것이 내놓는 결과는 참혹하다. 문명의 중심에서 문명이 몰락에 이르는 것이다. 발라드는 이 과정을 몰인정할 정도로 차갑고 잔인하게 묘사해 나간다. 전지적 작가시점에서 바라본 인간들은 마치 체스의 말처럼 그려지며(신이 되고자 하는 앤서니 로열/바바리안이 되고파하는 리처드 와일더/이성의 끈을 놓지 않으려 하는 로버트 랭 등), 이들 모두가 퇴화와 몰락의 과정을 거친다.

당연히도, 이 모든 일이 벌어지는 데 제대로 된 설명은,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 발라드는 이렇게 말하고 싶은지도 모른다. “인간이 원래 그래”. 이러한 내용들을 보고 골딩의 파리대왕을 떠올리는 것은 일견 정당하다. 하지만 액션 영화의 팬이라면 크리스티앙 알버트의 2009년 영화 “팬도럼”을 떠올릴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영화의 내용이 이 소설과 맞닿아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인간을 그리는 방식이나 그 막장을 제대로 재현한다는 점에서는 이 영화와 같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개인적으로 발라드의 이야기를 제일 처음 접한 것은 슬립스트림을 언급한 비평글이었지만, 진지하게 관심을 가지게 된 건 피터 마쓰의 “네 이웃을 사랑하라”에 좀 더 가깝다. 친구라고 믿던 이웃들이 무슬림을 사냥하러 다니던 지옥의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에서 취재원 생활을 한 마쓰는, 인간의 이성이 사멸하는 그곳을 논하며 이 소설을 인용한다. 그래서 “크리스탈 월드”하고 몇 편의 단편소설을 읽어 보았는데, 참 감당하기 힘든 작가인 것만은 사실이다. 다르게 말하자면 이렇다. “발라드의 지옥은 지금까지의 지옥과는 끕이 좀 다르다.” 굳이 말하자면 마쓰의 보스니아 르포가 이 수준에 달한 몇 안 되는 책이다.

 

 

※ 번역 면에서의 문제를 짚기는 좀 애매하다. 원문의 문장 자체가 좀 건조해 보이니까 번역문도 그런 식으로 나오고, 그 과정에서 비문이나 호응이 안 맞는 문장들이 나올 수 있다고 이해는 가능하다. 하지만 “얇은 허벅지”라는 문장은 김이 확 샌다. 대세에 지장을 안 주는 한도라고는 하지만, 일단 내가

 

제일 싫어하는 오류라고. 앞으로 발라드의 멸망 삼부작이 나온다는 소식이 있는데(불에탄세계/물에빠진세계/크리스탈세계) 다음 책은 좀 더 신경을 써 주셨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그리고 이번 소설이 꼭 대박나서, 크래시하고 콘크리트섬도 발매가 되어 줬음 한다.

 

수정: 박해천 선생이 투이타에서 크래시는 출간이 되었다고 알려 오셨음. 찾아 보니 물에 잠긴 세계도 발간이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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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어폭스 : 스토리 & 가이드북 100쪽으로 읽는 IT 5
안재욱 지음 / e비즈북스 / 2011년 12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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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rome에 의해 위세가 꺾이긴 했지만, 오픈소스?익스텐션?독점해소 등의 업적을 보면 Firefox만한 브라우저는 드물다. 100쪽 내에 그런 내용들을 꼼꼼히 쓸어담은 책으로, 가볍게 읽을 수 있는 문고 성격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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