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릇 옛글을 빌어 자신의 생각을 드러냄에 있어 말하고자 할때, 옛글을 빌어 드러내고자 하는 당대 사회의 말살이, 그 말살이를 가능케 하는 사회 저간의 사정을 중요시하는 것이 첫째라 할 것이다. 이태리의 대문호 움베르토 에코 선생의 경인년 신작을 견실한 번역가 이세욱 선생이 옮겨 계사년에 출간한 “프라하의 무덤”에서도 이러한 문제 설정은 여전히 유효한 것이리라.
역자는 후기에서 에코 선생이 19세기의 신문 연재 문학을 되살리려 했다고 말하며 번역 역시 옛글이 주는 맛을 살려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하는데, 이를 바탕으로 말하자면 19세기의 연재소설 문학의 문체적 특질뿐만 아니라 그 문학이 놓인 저간의 사회·문화적 사정을 톺아보는 게 의미가 있으리라 본다. 박천한 소양의 평자가 이를 이해하고 평가하는 것은 가능하지도 않거니와 적절하지도 않은 바, 옛글의 몸을 빌어 얕은 의견을 몇 자 적는 것으로 그 평가를 갈음한다.
첫째로, 에코 선생이 차용하고 있는 외젠 슈, 빅또르 위고, 大뒤마/小뒤마의 세대는 불란서 시민혁명과 꼬뮌을 거치는, 영국의 홉스봄이 써냈던 19세기 3부작에 걸쳐 있는 시대라 할 것이다. 민족주의가 발호하여 민족국가의 수립으로 이어지고, 그 과정에서 신문 소설이 문학을 넘어 선동과 사회개혁의 도구로서 인식되던 시대, 그 소설의 힘이 줄어들고 음모론 등의 문서와 첩자들의 공작, 불안한 정세가 맞물린 시대는 거칠게 말해 괴력난신의 시대라 해도 그 과함이 지나치지는 않을진대, 그러한 저간사정을 담은 글의 몸을 반도의 문학사에서 빌려 할 때는 그에 해당하는 내셔널리슴이나 혁명의 격률을 담은 文을 참고하는 것도 그 한 가지 방법이라 할 것이다.
한편 역자는 1910년의 번안소설을 률로 삼되 에코 선생이 옛글의 입맛을 살려내는 방식을 참고했다 밝히고 있다(786쪽). 평자의 얕은 소견으로 미루어 보면 민족 독립을 두고 사상들이 쟁투하던 깝프 시기의 문학이나 격문, 신채호의 강파른 아나키슴이나 이광수의 계몽적 글 사이에서 찾을 수 있는 다른 글의 몸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 사실이지만, 당시의 번안소설들 역시 당대의 지식인에 의해 번역되었다는 점, 당대의 역자들 역시 시대의 격랑을 타고 움직여갔다는 점, 그리고 이것들이 신문지면에 실렸다는 점을 고려하면 딱히 나쁜 선택이라 할 수도 없을 뿐더러, 에코 선생이 '요즘의 글과 옛글 사이에서 벌이려 했던 줄타기'를 각 나라의 글로 살려 달라고 부탁했다는 사실을 놓고 보면, 이 책의 문장이 선생의 뜻을 살려 담는 데 큰 문제가 없다는 출판사나 역자의 판단에도 졸자는 큰 이견을 제시하지 않는다.
둘째 논지는 어느 정도 첫째 논지에 닿아 있다 할 것인데, 당대의 글을 되살림에 있어 낱말의 선택이나 말끝의 선택 외에도 문장의 흐름이나 맺고 끊음 역시 중요하다는 점이다. 기실 이 부분은 번역문이라는 이 책의 성격에 기인하는 근원적 문제라 해야 할 것인데, 세기 초 구라파 말글이 가진 흐름을 세기초 반도의 글에 끼워넣는 작업 자체가 근원적인 한계를 노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현대문으로 생각하는 버릇을 들인 자가 외국의 옛글과 반도의 옛글 사이에 벌어지는 충돌을 파악하고 타협하여 중재하는 역할을 맡아야 하기 때문이라 할 것인데, 원글의 뜻을 깨지 않는 한도 내에서 새말글을 만들어 옮겨 담는 역서의 특성상, 지난한 일이 될 수밖에 없다.
결국 역자가 현대문의 흐름을 타고 옛글의 낱말들을 흩뿌리거나 옛글의 색을 덧입히는 정도에서 마무리를 하게 되는 경우를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는데, 이것에 불만을 느끼는 독자들도 있으리라 믿는다. 하지만 그 작업이 가진 난해함을 차치하고, 참하 읽을 수 없는 문장을 내놓을 수 없었던 역자와 편자의 마음 또한 중요하다 하지 아니할 수 없는 것이며, 역자가 마치 자신이 당대의 첩자/평자라도 되는 양하여 에코 선생이 만들어낸 옛글을 반도의 옛글에 끼워넣기 위한 휨과 덧댐을 가한다는 것은 오히려 역자의 책임을 방기하는 귀결로 이어질 위험을 내포하고 있는바, 현재의 문장에서 굳이 이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 대단히 정당하다 할 수도 없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졸자의 취향에 이 글이 충분히 古하지 않을 수는 있으나 그것이 현재의 평균적 독자들의 말글살이에 비춘 것이라 볼 수도 없으며, 비교적 가까운 19세기의 문헌을 차용하는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문체의 차용에도 불구하고, 현대문이 남아 있을 가능성 또한 全히 배제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니 말글의 옮김 자체를 소상히 판단하는 것은 원문과 옮긴 글을 나란히 놓고 비교하기 전에는 힘들며, 각국의 역자들이 많은 고민을 기울였을 것이라 믿지만, 어느 경우든 원 글의 뜻을 따라 기존 글 위에 새로운 글을 덧짓는 과정, 덧지은 글을 다듬어 읽을 만한 책으로 박아내는 과정이 지니는 한계를 일정부분 떠안는 지난한 일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 중한 과업을 성실히 수행해 준 역자와 편자에게 상찬을 보내며, 첩보소설과 연재소설의 틀을 가진 이 책을 통해 19세기의 빠리와 이태리의 정경, 그곳의 사람살이와 말글살이에 대해 조금이나마 다가갈 수 있는 계기를 얻을 수 있었다는 점에 열린책들 구성원들께 감사를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