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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주토끼
정보라 지음 / 아작 / 2017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야밤의 공대생 만화>가 책으로 출간됐다기에 시간 난 김에 직구다! 하면서 강남 교보에 갔다가 허탕을 쳤다. 아이고 아이고. 그러다 이 책에 눈에 띄어 냅다 집어왔다. 정보라는 사실 예전 체코SF 단편선인 <제대로 된 시체답게 행동해!>라든지 브루노 슐츠 작품집 번역 등 꽤 좋은 작품들을 골라 매끈하게 번역해 온 사람이라 흥미가 동했다. 그래서 집어들고 후루룩 넘기는데 "덫"의 문장들이 눈을 잡았고, 몇 자 읽다가 바로 사 왔다(약력을 보니 그 정보라와 같은 사람인 듯하다).


소설은 괴담의 영역으로 들어가기도 하며 때로는 신화의 영역을 건드리기도 한다. 그런데 뭐 이게 괴담이든 신화든 어때, 재미있으면 된 거지. 여튼 정보라의 이 소설집을 꿰뚫는 단어 중 둘을 꼽자면 '죽은 자'와 '돌아옴'이다. 유령들, 과거의 잔재들이 현실과 교호하는 영역들이 시공간을 뒤덮고, 그 영역이 현실과 충돌하는 과정에서 환상의 세계가 구축된다. 세계가 구축되는 과정에서 과거의 잔재들이 현재와 부딪히며 피와 살이 튄다. '거한 그로테스크'라 하겠다. 그 그로테스크가 단정한 문장 안에 담기니 읽기에 쾌적하다.


쾌적하다는 말을 했는데, 내용들이 혼돈과 파괴를 담고 있음에도 문장과 서술이 무너지지 않고 단정하게 잘 잡혀 있어 마음에 들었다는 말을 하고 싶다. 과격한 내용이나 혼란한 내용을 던져넣을 때 자신이 그 이야기에 너무 몰입하여, 이야기 전개가 급하다 못해 마치 블랙홀 주변의 중력장에 물체가 찢기듯 흐트러지는 경향을 볼 때가 있다. 작가가 왜 독자를 넘어서 혼자 흥분하나 싶어 기분이 좀 별로일 때가 있는데, 정보라는 이야기를 강하게 던지면서도 고삐를 잘 틀어쥔다는 느낌이 든다. 번역가로서, 혹은 슬라브문학도로서 많은 문장을 만지면서 쌓은 레퍼런스나 훈련이 영향이 있었겠지 하는 생각도 든다.


문장 자체의 완성도가 높은 작품을 원한다면 강추할 만한 책이다. 때마침 GROUPER의 A | A (2011)을 같이 들었는데 썩 잘 어울린다. 농어 라는 이름의 이 음악가는 자신의 목소리와 악기 소리를 테이프에 녹음하거나 컴퓨터에 입력한 후 로우파이한 방식으로 변조하여 음악으로 가공해 내는 작가인데, 소리를 한계까지 무너뜨리고 그 질감의 완성도로 다른 이들과의 차별성을 만들어 낸다. 그렇게 질감에 집착하면서도 전체적인 곡의 스토리라인을 놓치지 않는데, 그게 이 책과 닮은 면이 있다. 그루퍼(농어)의 음원은 애플뮤직에 있는데, 그거 없다면 줄리아나 바윅 같은 분들 음악이랑 같이 들어도 좋겠다.


덧) 출판사는 이 이야기들을 꽤 밝게 본 것 같은데, 작가 역시 '작가의 말'에서 "작품을 쓸 때의 의도는 전혀 달랐기 때문에 나는 상당히 놀랐다"고 밝히고 있다. 뭐 근데 편집자가 작가한테 소설 맘에 든다고 하면서 "차갑고 이지적으로 쓰였지만 밑에 깔린 정서나 세계관이 정말 제 심경을 득득 긁고 기분 찝찝하게 만드는 점이 정말 맘에 들어요" 라고 말하는 게 쉽겠나? 생각해 보면 편집자의 그 말이 딱히 이상한 것도 아닐듯하다.


S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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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ubauten 2017-07-12 17: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근데 이거 꼭 별점 찍어야 등록되냐? 그런 거 좀 별론데...
 

릇 옛글을 빌어 자신의 생각을 드러냄에 있어 말하고자 할때, 옛글을 빌어 드러내고자 하는 당대 사회의 말살이, 그 말살이를 가능케 하는 사회 저간의 사정을 중요시하는 것이 첫째라 할 것이다. 이태리의 대문호 움베르토 에코 선생의 경인년 신작을 견실한 번역가 이세욱 선생이 옮겨 계사년에 출간한 “프라하의 무덤”에서도 이러한 문제 설정은 여전히 유효한 것이리라.



역자는 후기에서 에코 선생이 19세기의 신문 연재 문학을 되살리려 했다고 말하며 번역 역시 옛글이 주는 맛을 살려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하는데, 이를 바탕으로 말하자면 19세기의 연재소설 문학의 문체적 특질뿐만 아니라 그 문학이 놓인 저간의 사회·문화적 사정을 톺아보는 게 의미가 있으리라 본다. 박천한 소양의 평자가 이를 이해하고 평가하는 것은 가능하지도 않거니와 적절하지도 않은 바, 옛글의 몸을 빌어 얕은 의견을 몇 자 적는 것으로 그 평가를 갈음한다.


첫째로, 에코 선생이 차용하고 있는 외젠 슈, 빅또르 위고, 大뒤마/小뒤마의 세대는 불란서 시민혁명과 꼬뮌을 거치는, 영국의 홉스봄이 써냈던 19세기 3부작에 걸쳐 있는 시대라 할 것이다. 민족주의가 발호하여 민족국가의 수립으로 이어지고, 그 과정에서 신문 소설이 문학을 넘어 선동과 사회개혁의 도구로서 인식되던 시대, 그 소설의 힘이 줄어들고 음모론 등의 문서와 첩자들의 공작, 불안한 정세가 맞물린 시대는 거칠게 말해 괴력난신의 시대라 해도 그 과함이 지나치지는 않을진대, 그러한 저간사정을 담은 글의 몸을 반도의 문학사에서 빌려 할 때는 그에 해당하는 내셔널리슴이나 혁명의 격률을 담은 文을 참고하는 것도 그 한 가지 방법이라 할 것이다.

한편 역자는 1910년의 번안소설을 률로 삼되 에코 선생이 옛글의 입맛을 살려내는 방식을 참고했다 밝히고 있다(786쪽). 평자의 얕은 소견으로 미루어 보면 민족 독립을 두고 사상들이 쟁투하던 깝프 시기의 문학이나 격문, 신채호의 강파른 아나키슴이나 이광수의 계몽적 글 사이에서 찾을 수 있는 다른 글의 몸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 사실이지만, 당시의 번안소설들 역시 당대의 지식인에 의해 번역되었다는 점, 당대의 역자들 역시 시대의 격랑을 타고 움직여갔다는 점, 그리고 이것들이 신문지면에 실렸다는 점을 고려하면 딱히 나쁜 선택이라 할 수도 없을 뿐더러, 에코 선생이 '요즘의 글과 옛글 사이에서 벌이려 했던 줄타기'를 각 나라의 글로 살려 달라고 부탁했다는 사실을 놓고 보면, 이 책의 문장이 선생의 뜻을 살려 담는 데 큰 문제가 없다는 출판사나 역자의 판단에도 졸자는 큰 이견을 제시하지 않는다.


둘째 논지는 어느 정도 첫째 논지에 닿아 있다 할 것인데, 당대의 글을 되살림에 있어 낱말의 선택이나 말끝의 선택 외에도 문장의 흐름이나 맺고 끊음 역시 중요하다는 점이다. 기실 이 부분은 번역문이라는 이 책의 성격에 기인하는 근원적 문제라 해야 할 것인데, 세기 초 구라파 말글이 가진 흐름을 세기초 반도의 글에 끼워넣는 작업 자체가 근원적인 한계를 노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현대문으로 생각하는 버릇을 들인 자가 외국의 옛글과 반도의 옛글 사이에 벌어지는 충돌을 파악하고 타협하여 중재하는 역할을 맡아야 하기 때문이라 할 것인데, 원글의 뜻을 깨지 않는 한도 내에서 새말글을 만들어 옮겨 담는 역서의 특성상, 지난한 일이 될 수밖에 없다. 

결국 역자가 현대문의 흐름을 타고 옛글의 낱말들을 흩뿌리거나 옛글의 색을 덧입히는 정도에서 마무리를 하게 되는 경우를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는데, 이것에 불만을 느끼는 독자들도 있으리라 믿는다. 하지만 그 작업이 가진 난해함을 차치하고, 참하 읽을 수 없는 문장을 내놓을 수 없었던 역자와 편자의 마음 또한 중요하다 하지 아니할 수 없는 것이며, 역자가 마치 자신이 당대의 첩자/평자라도 되는 양하여 에코 선생이 만들어낸 옛글을 반도의 옛글에 끼워넣기 위한 휨과 덧댐을 가한다는 것은 오히려 역자의 책임을 방기하는 귀결로 이어질 위험을 내포하고 있는바,  현재의 문장에서 굳이 이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 대단히 정당하다 할 수도 없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졸자의 취향에 이 글이 충분히 古하지 않을 수는 있으나 그것이 현재의 평균적 독자들의 말글살이에 비춘 것이라 볼 수도 없으며, 비교적 가까운 19세기의 문헌을 차용하는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문체의 차용에도 불구하고, 현대문이 남아 있을 가능성 또한 全히 배제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니 말글의 옮김 자체를 소상히 판단하는 것은 원문과 옮긴 글을 나란히 놓고 비교하기 전에는 힘들며, 각국의 역자들이 많은 고민을 기울였을 것이라 믿지만, 어느 경우든 원 글의 뜻을 따라 기존 글 위에 새로운 글을 덧짓는 과정, 덧지은 글을 다듬어 읽을 만한 책으로 박아내는 과정이 지니는 한계를 일정부분 떠안는 지난한 일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 중한 과업을 성실히 수행해 준 역자와 편자에게 상찬을 보내며, 첩보소설과 연재소설의 틀을 가진 이 책을 통해 19세기의 빠리와 이태리의 정경, 그곳의 사람살이와 말글살이에 대해 조금이나마 다가갈 수 있는 계기를 얻을 수 있었다는 점에 열린책들 구성원들께 감사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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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수의견
손아람 지음 / 들녘 / 2010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소설은 명백히 용산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하지만 작가는 첫머리에 이 소설이 픽션이라고 못을 박는다. 그리고 실제와 유사했던 이 소설 속 이야기는 조금씩 실제 사건의 진행 방향과 다른 방향을, 많이 다른 디테일로 재구성하기 시작한다. 그런 입장에서 이 소설의 제목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소수의견”. 다수를 차지하지 못해 폐기되는 의견들. 그러나 웬델 홈스의 경우처럼, 어느 날 소수의견들이 상식이 되는 경우가 있다. 일부 좀 거친 전개들도 보이고 주인공의 성격들을 너무 평면적으로 짠 부분들도 보이지만, 이 정도 의견이 상식이 되는 사회라면, 그래도 좀 살 만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나는 하게 되었다. 괜히 박권일 책도 링크를 걸고 싶은 생각이 불쑥불쑥 들지만, 안 걸겠다. 이 책을 검색한 사람이라면 그 책도 한 번쯤 보았을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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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롬 헬 시공그래픽노블
앨런 무어.에디 캄벨 지음, 정지욱 옮김 / 시공사(만화)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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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영국 올림픽이 한창이라기에 음, 영국하면 모더니즘이고, 모더니즘의 뒷면은 빈곤과 데카당트이지 암암. 하다가, 그럼 잭 더 리퍼를 다룬 이놈의 작품을 한 번 볼까 싶어서, 책장을 뒤져뒤져 찾았다(사 놓고 까먹고 있었음.). 그리고 2일 후인 오늘 2일 전의 자신을 저주하는 마음으로 리뷰를 쓴다. 저놈의 자유연상을 하지 말았어야 하는데, 저 책을 샀다는 걸 철저히 까먹고 있었어야 했는데.


그래픽 노블, 아니 소설이라고 하자. 이 소설의 내용은, 빅토리아조의 타락과 빈곤(초점은 빈곤과 처절한 뒷골목의 삶에 있다.)을 주인공으로 하되 프리메이슨의 광기와 드루이드/오컬티즘을 이야기의 동력으로 삼고, 모더니즘 시대의 과학과 그것이 불러온 데카당트한 혹은 블레이크적 환상들을 뿌려 둔다.그리고 그것을 감싸는 것은 잭 더 리퍼의 이야기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아직 대단한 책이라고 말할 수가 없고..... 부록을 보면 입이 벌어진다. 대부분의 사건과 디테일마다 자료 목록 및 자세한 배경 상황 설명을 넣어 두었다. 심지어 자신들이 제시하는 디테일에 관해 논쟁이 있을 경우 “이건 누가 뭘 제시한 이후로는 요즘 아무도 안 믿는 설이지만 무엇 때문에 남겨 두었다.”며 설명을 다 붙여 두었으니, 1차 사료는 모르겠지만 2차 자료는 샅샅이 긁어다 읽었다고 보면 되겠다.


리퍼가 사람의 몸을 찢어 놓은 순서나 청문회에서의 증인들의 증언에 맞춰 디테일을 짜고, 가끔은 서류가 그대로 튀어나오기도 한다. 심지어는 의학 자문도 받은 듯한게, 사람의 몸이 찢어지는 과정을 몸 안에서 보는 앵글도 나오거든......그런 면에서는 에디 캠벨의 디테일이 재미있는데, 당대 영국의 뒷골목을 꼼꼼하게 고증한 것 같으면서도, 막상 그림으로 옮길 때는 거친 펜선과 극단적인 B/W로 뭉개 버린다. 이게 좀 아쉽게 느껴질 수는 있는데, 오히려 이런 디테일의 생략이 상상력을 더 증폭할 수도 있겠다. 칼라로 그려진 인간의 난도질 당한 내장보다는, 그냥 흑백으로 보고 머릿속에서 상상하든가 연상을 끊어버리든가 하는게 낫지 않겠는가......


그러니까......  쉽지는 않다. 드루이드 역사 강의와 오컬트에서 호크스무어의 건축물로 뛰었다가, 제임스 힌튼/하워드 힌튼의 4차원 시간세계로 뛰었다가, 이스트엔드 창녀들의 삶 속으로 뛰어들었다가, 인간 도축의 장면으로 뛰어넘다가, 갑자기 천상 세계와 지옥과의 공간워프/타임워프를 뛰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가운데 놓여 있는 (빅토리아 여왕과 프리메이슨 포함한) 등장인물의 섬뜩한 생존본능, 그리고 그것이 낳은 피의 홍수를 보면, 정신이 갈기갈기 찢기는 기분이다.


다 읽고 나니 몸이 많이 아프다. 펜과 먹으로 칠해 놓은 디테일이 마치 사포처럼 머릿속을 긁어 놓는 걸 보면, 앨런 무어든 에디 캠벨이든 정말 대단한 작가인 건 맞는 듯하다. 이걸 어떻게 견디면서 쓰고 그랬나 모르겠다. 그러니까 사실, 멘탈이 약하신 분들께는 별로 추천하고 싶은 책이 아니다.


그러니까 결론은 한국대표팀 파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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럭키잭 2018-07-05 23: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허세로 흉물스레 똥칠된 글
 

이번 달 밥값이 이십만원 대를 찍는 동안 책 구매비가 0인 것에 살짝 충격받고(......) 서울역 철도문고에 들렀다. 원래는 창비 폴란드 문학 선집 을 보러 갔는데 없어서...... 책을 둘러보다가 갈랑의 천일야화 번역본을 발견했다. 어머 나 몰라 저건 사야 해.

 

 

 

 

 

 

 

 

 

 

 

 

 

 

 

그 자태가 심히 아름답다(1,3,5권 표지) 


알라딘 가서 열린책들 서평을 보니, 그림도 상당히 괜찮을 듯하다. Dalziel's Illustrated Arabian Nights' Entertainment 에 수록된 그림들을 찾아다 넣었다는데, 화면으로 봐도 상당히 두근두근한 퀄리티. 옵셋 인쇄본을 보면 정신줄을 놓을 듯하니, 당분간은 서점에서도 좀 피해 다녀 봐야겠다(......). 얘기가 샜는데, 이 서평에는 조금 이상한 부분이 있다. 일단 아래 옮기고, 이상한 부분은 볼드처리하도록 하겠다.

 

(전략) <천일야화Les mille et une nuits>의 국내 최초 완역본이 열린책들에서 출간되었다. 누군가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물을지도 모른다.<천일야화>라면 이미 잘 알고 있는 책인데, 어째서 여기에 <국내 최초>라는 수식어를 붙이느냐고. 하지만 국내에서 흔히 정본으로 알려진 리처드 버턴판 <아라비안 나이트>는 선정적이고 잔인한 내용을 첨가하여 <천일야화> 원전을 재구성하여 만든, 일종의 <각색> 작품인 셈이다. (중략) <천일야화>의 정전canon은 바로 프랑스의 동양학자 앙투안 갈랑Antoine Galland의 불역본이었다.

 

문제는 세 가지다.

1. 국내 최초 완역본이라는 말은 틀렸다. 정확히 말하자면, 열린책들의 천일야화는 갈랑 번역에 대한 최초 완역이고, 범우사의 1992년판은 버턴 번역에 대한 최초 완역이다.

2. 버턴의 아라비안 나이트가 각색본이니까 정본은 갈랑 아니겠냐는 질문 또한 무용하다. 그 둘은 시리아본과 이집트본이라는 독립적 저본을 각각 번역한 책이기 때문이다.

3. 세 번째는, 갈랑 역시 저본을 유럽 실정에 맞게 번안하고, 저본에는 들어있지 않은 내용들을 가필하여 자신만의 아라비안 나이트를 재구성했기 때문에 천일야화 자체의 정본이라 부르기가 어렵다는 점이다.

 

즉, 어느 책을 읽어도, '원본 천일야화'의 정본이 이것이다 라고 말할 수는 없는 일이다. 

 

아래는 그런 내용들을 좀 더 자세히 풀어 놓은 얘기인데, 어차피 출처가 영문 위키라 설득력 면에서 조금 문제가 있다. 그래도 뭐 읽으실 분들을 위해 링크 투척하고 시작(요 중에서 Arabic Versions / Modern Translations 부분을 참고했다.). http://en.wikipedia.org/wiki/One_Thousand_and_One_Nights 


1. 두 가지 저본
천일야화에 대한 언급이 12세기 카이로 문헌에서 발견된다(이때는 페르시아 전통 하에 있었을것으로 짐작된다.). 이후 저본이 속한 지역이 아랍 문화권에 편입되면서 아랍 전승이 점차 페르시아 전승을 대체한다. 그 결과로 9세기 바그다드 주변과 13~14세기 카이로 주변을 다루는 두 개의 이야기 군이 생겨난다. 그 과정에서 두 개의 아랍어본(혹은 계열)이 형성되는데, 시리아본과 이집트본이다.

시리아본은 이집트본에 비해 짧고, 이야기 수도 적다.  Calcutta I판과 Leiden판 등이 있는데, 갈랑이 활용한 것은 시리아본 중 Leiden 판이다(14~15세기에 발행된 것으로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소장된 것). 비교 연구를 통해 1984년에 새 Leiden판을 내놓은 Mushin Mahdi는, Leiden 판이 천일야화의 원형에 가장 가깝고, 다른 판본들의 뿌리가 된다고 주장 하는데, 여기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하지만 Leiden 판본이 중세 아랍어의 향취를 잘 담고 있다고 하는 데는 어느 정도 의견이 일치한다고 한다.
이집트본은 시리아본의 형성 이후에 형성되는데, 상당히 많은 양의 이야기를 담고 있으며, 버턴 번역의 저본이 된다. 시리아본의 형성 이후에도 여러 가지 구비 전승들을 끌어들였고, 일부 판본들 가운데는 19세기까지도 가필이 이루어진 판본도 있다고 한다. 이처럼 이집트 전승에 더 많은 이야기가 포함되는 데는 완전판을 원하는 서양인들의 요구가 크게 작용했다고 하는데, Mahdi에 따르면, 이는 정리할 때마다 늘어나는 구비 문학의 특징일 수 있으며, 이상한 일은 아니라고 한다.

 

2. 갈랑과 버턴 번역의 차이는? 
열린책들에서 내놓은 이번 번역은 시리아본(Leiden)을 번역한 갈랑의 천일야화의 완역이다. 따라서 버턴의 번역에 비해 들어 있는 이야기의 수가 적고, 좀 더 원형에 가깝다. 갈랑 자신이 텍스트를 유럽 실정에 맞게 번안 하였다는 점 또한 주목할 만하다(실제 갈랑은 자신의 텍스트에 대해 그 의도가 '교화'에 있다고 밝히고 있다(http://en.wikipedia.org/wiki/Antoine_Galland). 이는 버턴이 성적·폭력적 내용을 첨가하였다 는 주장이, 뒤집어 놓고 보면 갈랑이 그런 내용을 빼고 번역했다 는 주장과 경쟁하는 결과를 낳게 되는데, 별로 좋은 현상은 아닐 것 같아 보인다. 솔직히 이쯤 되면 학계의 논쟁이 붙어야 할 부분이고, 사람들이 옆에서 풀무질이라도 해야 하는데, 한국에서 이런 일이 벌어질 것 같진 않다 -_-

게다가 갈랑 자신이 들었던 이야기들을 이용하여 Leiden 판에는 들어 있지 않은 이야기들을 (물론 다른 시리아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썼지만) 창작하여 집어넣었기 때문에, 몇몇 이야기는 원 텍스트에서 찾아볼 수도 없다.이는 천일야화 자체가 시리아본에 고정된 내용들과 별도의 내용을 포함하여 더 발전했고, 그 이야기들 역시 천일야화에 포함되는 게 맞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실제로, 완전한 천일야화 전체를 찾으려는 사람들의 노력 때문에, 한때는 이집트본이 정본으로서의 지위를 좀 더 강하게 얻기도 했다.

이러한 첨가와 가필을 살린, “전집성” 천일야화에 대한 최초의 번역은 E.W. Lane의 번역인데, 출판 과정에서 훼손을 당했다고 한다(검열당하고, 일부는 각색당함.). 이후 John Payne의 번역본은 대부분의 내용들을 살려 번역·출간했으며, 이를 참고하여 진행된 버턴의 번역은 성적·폭력적 함의들을 더 강조한 경향이 있다고 한다(빅토리아 시대의 도덕주의·검열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자비출판된 경우가 많다고). 여튼 이 중에서 버탄의 번역을 번역한 것이 범우사의 1992년판 완역본. 열린책들의 평이 맞는 부분은 이런 것들인데......  엄밀히 말하자면 꼭 옳은 얘기는 아니라 하겠다.

 

다시 말해, 더 많은 이야기와 더 다채로운 내용을 담은(그러나 어쨌든 19세기까지도 가필이 이루어져 이야기들의 진위가 의심스러운) 이집트본을 보려면 버턴의 번역을 기반으로 한 범우사판을, 15세기 이전까지 확립된 시리아본-라이덴판의 텍스트만을 천일야화로 간주하고, 갈랑이 추가한 부분을 일종의 가필로 용인한다면 갈랑의 번역을 기반으로 한 열린책들판을 보는 게 적절한 선택이라 하겠다(개인적으로는 이집트본은 페인 번역이 더 좋을 것 같다는 느낌적인 느낌도 들지만, 여튼 완역된 건 버턴/갈랑 이니까......).

 

 내가 이 10권 세트를 고등학생 때 5권까지 읽다 만 것 같은데, 별천지다...... 주인공이 고난에 처하니까 하인이 지나가는 유대인을 죽이고 염소를 뺏어 오는걸, 무슨 가게에서 물건 사오듯 당연하고 담담하게 묘사하는데, 오오 아랍의 패기 오오...... (잠깐 이건 뭔가 얘기가 또 샌다.)

 

 

 

3. 위키 추천 번역본
이에서 볼 수 있듯, 원작에 가까운 이야기나 정본을 찾는 것은 현재 한국 땅에서는 큰 의미를 지니지 않는데, 원 아랍어 저본을 확정하고, 이를 자신의 언어로 옮기는 과정에서 여러 가지 선택이 작용하는 그런 층위를 모두 이해하기도 힘들고, 그것을 이해한다 하더라도 그 판단 중 어느 것이 옳을지에 대한 객관적인 판단을 내릴 만큼 이 사회는 아랍 전공자로 가득 차 있지 않기 때문이다(물론 수능 제2외국어는 아랍어입니다, 형제님들). 여튼, 이 여러 가지 판본들 중, 위키는 아래 두 가지의 번역을 주목하고 있다.

 

시리아본
Mahdi가 재편집한 Leiden 판을 Husain Haddawy가 영역한 1990년 번역판이 추천을 얻고 있단다. 아랍어를 충실하게 옮긴데다, 읽히기도 잘 읽힌다고. 물론 Leiden 판에 충실하게 번역했기 때문에 알리바바 등의 친숙한 이야기들이 대거 탈락했는데, 이것들은 1995년에 추가로 출판된다.

 

이집트본
Malcolm C. Lyons와 Ursula Lyons가 번역하고 Robert Irwin이 서문/각주를 맡은 펭귄의 2008년 3권 전집이 있다고 한다. 버턴 이후 최초의 이집트본 완역이라고......(웃긴 건, 이 Irwin이 시리아본으로 위의 Haddawy의 번역을 추천했......). Calcutta II 판을 이용했다고 하며, 버턴이 완역한 이후로는 최초의 이집트본 완역이라고 하는데, 진짜인지는 잘 모르겠다(위키 특성상). 이 판본의 특징은, 구비전승을 살려, 읽히기 좋은 입말을 만드는 데 주력한 판본이라는 점. 판본들마다 누락되기도 하는 시들을 모두 번역해 넣었는데, 한계 상 아랍어 시가 지닌 고유의 음률까지 살리지는 못 했다고 한다.

 

참고1. 보르헤스는 자신의 소설집에서 레인 번역을 몇 번 언급하는데, 막상 그가 “바벨의 도서관” 선집을 간행할 때 택한 판본은 갈랑의 번역이다.

참고2. 레인 번역은 Google Books를 30분 정도 뒤지면 찾을 수 있다. 내가 구한 건 루틀릿지의 1865년판으로, 조카가 다시 편집을 했다고 함. 존 머레이의 1859년판도 구했는데, 대조는 안 해 봤다(앞으로도 안 하겠지...). 갈랑의 번역도 구해 볼까 했는데, 어차피 불어라 못 읽을 것 같기도 하고 하여 포기했고, 페인 번역은 9권이나 돼서 전체를 다 찾으려면 상당히 골치가 아플 것이다. 20세기 이전 번역으로 쉽게 구할 수 있는 공짜 책을 구하려면, 레인 번역이 가장 적절할 듯한데, 역시 축약본스런 검열이......(대신 이 책은 하비의 삽화가 예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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