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덕하의 안진환 번역 비판이 살짝 평지풍파를 일으키고, http://blog.aladin.co.kr/718825194/5169686
그 밑에 민음사의 해명글과 http://cafe.naver.com/minumsa/18955
안진환의 해명글이 붙어 있었다. http://cafe.naver.com/minumsa/18956

책은 만들지만 번역 쪽은 안 해 본 사람으로서 몇 마디 덧붙인다. 어느 정도는 알지만 사정을 정확히 모르고 쓰는 부분이 많으니 간단히 참고의견  정도로만 들어 주었으면 좋겠다.

사람의 손을 여럿 거치는 일에서는 이래저래 틀어질 만한 부분들이 많이 발생하고, 그 부분에 대해서는 누구든 조금씩 책임을 가져야 한다. 그 책임을 누가 주로 덮어쓰는가의 문제인데, 내가 생각하는 각자의 Role은 다음과 같다(여기 동의하지 않는다면 뭐 어쩔 수 없는 부분이고).

1. 원본을 제공하는 출판사나 작가는 번역자가 작업하고 있는 글이 원작의 최종 버전임을 확인해 주어야 한다(예외로 '솔라리스'의 영문 번역본을 제공한 스타니스와프 렘의 경우가 있는데,그 경우는 작가가 '영어에서 번역하는 것이 더 높은 번역의 질이 나오겠다'고 판단한 경우라 볼 수 있겠다.).

2. 번역가는 자신에게 제공된 판본을 한국 사람들이 읽었을 때, 미국인이 영어로 읽었을 때와 같은 내용이 전달된다는 것을 보증해야 한다. 따라서 어느 정도의 의역은 허용할 만하고, 어떤 면에서는 권장할 만한 일이다. 다만 한계는 명확해야 한다. 한국사람들이 한국말로 읽었을 때 직역의 경우보다도 저자의 뜻을 더 명확히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

3. 편집자는 제공받은 원문, 입수한 번역문 상에 내용상 상이한 점이나 잘못된 번역이 나오지 않도록 번역자를 선정·관리해야 하고, 자체적으로도 문제를 최대한 바로잡아야 한다. 여기에는 내용 수정, 윤문이 포함되며, 교정·교열은 원래 해야 하는 일이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그 부분들에 대해 번역자들이 인지하고 확정할 수 있도록 해 주어야 한다.

여기까지 동의한다면, 이 세 가지 Role이 정확히 수행될 때 그 사람들이 할 수 있는 Best가 나왔다고 판단할 수 있을 것이고, 문제가 발생했을 경우 이 중 어느 부분이 깨져 나갔는지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반대로, 이 과정을 다 거쳤는데도 제대로 된 책이 안 나왔다면 수준이 그 정도밖에 안 된다는 얘기라는 말도 되겠다(그러나, 그런 경우는 거의 없다.). 그래서 이덕하의 민음사와 안진환의 해명글을 읽어 보았다. 원본을 제공한 출판사의 입장은 모르겠으니 제끼고.

2. 안진환은 이 문제의 이유로 첫째로는 의역, 둘째로는 민음사 측의 변경 사항 공지 불비를 들고 있다. 둘째는 어쩔 수 없는 부분이지만, 첫째는 좀 화가 날 만한 답변이다. 다음 문장을 옮겨와 보자.

안진환(162쪽): 그들이 구상한 개념이 바로 지금의 데스크톱 컴퓨터에서 우리가 접하는 것들이다. 즉 모니터 화면에 많은 서류 파일과 폴더가 보이고, 마우스를 이용해 원하는 것을 선택하는 방식 말이다.
Isaacson(95쪽): The metaphor they came up with was that of a desktop. The screen could have many documents and folders on it, and you could use a mouse to point and click on the one you wanted to use.

책상의 메타포를 디자인에 반영한 것을 “데스크톱 설계”라고 적은 부분은 조그마한 실수라고 보기 힘들다. 그나마 이 책상의 메타포를 다른 부분에서는 “데스크톱 메타포”라고 적어 두었다는데, 이건 이덕하의 지적보다 더 심각한 문제를 드러내는 지점일 수 있다. 번역자가 책의 용어를 통일하여 사용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런 식으로 생각해 보면 된다. 하이데거 책을 열었는데 dasein이 어디서는 터-있음이고 어디선 현-존재로 되어 있다(실제로 그렇게 나온 책이 하이데거의 “이정표”인데, 이는 번역자들이 용어 통일을 포기했기 때문이고, 이 부분을 책 안에 밝혀 두었다.).

그런 이유는 두 가지로 볼 수 있는데, 역자가 언어를 혼용하는 경우(정수일의 '이븐바투타여행기'의 경우 '희사'와 '아우까프'를 혼용한다)가 있고, 번역팀 돌려서 작업하는 과정에서 문제를 일으켰을 가능성도 있다. 물론 이게 개인번역인지 프로젝트형으로 돌린 번역인지는 내가 확인할 수 있는 부분도 아니고, 혼자 번역해서 시발망했다 결론 나오는 것보다 프로젝트 번역의 질이 나은 게 소비자 입장에선 훨씬 좋다. 관리만 잘 되면 오히려 혼자 번역하는 것보다 훨씬 나을 가능성도 많고.

그러나 이거나 저거나 일단 이게 안 됐다는 얘기는 번역자가 렉시콘 안 만들고 작업한 거든지, 정신분열을 일으켰던지, 초벌외주를 냈는데 검수를 대충했든지. 뭐 별 변명의 여지가 없다. 의역의 문제가 아니라고요, 번역가님!

3. 민음사의 경우는 이렇다. 저자가 변경본을 보내지 않아서 영문판과 다르다는 얘기다. 이건 저자나 미국 출판사의 문제도 대단히 큰 건데, 조그마한 편집상의 변경에 대해 이해를 하지 못한다는 얘기다. 단순 오타라도 책의 질에는 상당한 문제를 일으킨다. descent를 decent로 바꾼다든지, “이 문제에 대해 민음사에 잘못이 절대 없다고는 말할 수 없다”를 “이 문제에 대해 민음사에 잘못이 없다고는 절대로 말할 수 없다.”로 고치는 것을 단순한 편집상의 변동이라고 볼 수는 없기 때문이다.

동시출간의 문제는 이런 문제의 여지가 있는데, 결국 최초 판본을 산 사람은 불명료한 문장이 있을 수 있는 저자 원고만을 바탕으로 한 번역을 가지고 책을 읽어야 하는 상황이 온다. 사실 그래서 민음사 정책이 정말 이상한 게다. 입장을 바꿔 상상해 보자. 대만 출판사가 신경숙의 신작 “아빠를 부탁해”를 동시출간하겠다며 신경숙 작가가 국내출판사에 보냈던 “한글 파일”을 가지고 대만인 번역가에게 번역을 맡기는 꼴이다. 이렇게까지 해서라도 출간 일정을 꼭 맞추었어야만 한다는 건 마케팅이나 도박꾼의 정책이지, 책의 질을 담보해야 하는 출판사가 택할 수 있는 정책은 아니다.

그걸 다 제끼고 나서라도, 출판사에서 번역본을 스크리닝해서 나왔는데 용어 통일이 안 된다는 건 편집자가 원고를 명확하게 장악하지 못했다는 뜻이다. 외주교열이나 외주편집이 일상화된 상황에서 비문이나 오식을 잡기는 점점 쉬워진다. 교만 많이 돌리면 되니까. 하지만 이런 외주는 원고의 디테일한 흐름이나 용어 수준까지 세밀하게 컨트롤하기가 점점 힘들어진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용어 통일이 되지 않거나 저자만의 특이한 표현들이 일반적인 표현으로 갈려나가는 경우도 발생할 가능성이 높다(물론 이것은 위에서 명확하게 원고를 건네준다는 가정 하에서 말할 수 있는 부분이고, 일반적으로는 2의 책임이 조금 더 크다.).

여튼 기대받는 책이 영 수준이 별로라니 마음은 영 안 좋다. 그렇다고 이걸 사서까지 볼지는 정말 모를 일이다. 특히 이런 글을 본 다음이라면 말이다.

덧) 위에 말한 프로젝트형 번역 문제는 말만 놓고 보면 되게 심각한데, 사실 그렇게 심각한 건 아니다. 대량의 번역을 빠른 시간 내에 수행한다든지 할 경우 이 방법은 꽤 효율적이고, 오히려 더 나은 번역의 질을 보장하기도 한다. 수준 되는 사람 붙이고 전체적인 용어 통일과 번역 원칙을 명확하게 해 둔 다음 교차검토해서 문장을 바로잡고 프로젝트 관리자가 최종적으로 마무리를 지으면 되니까. 실제로 초벌번역이네뭐네 하는 것도 이런 의도가 있기에 가능한 제도라 할 만하다. 문제는 이걸 얼마나 관리를 잘 하는가의 문제다. 실제로 1학년 때 4학년 선배 부탁 받고 했던 번역 숙제를 다른 책에서 확인하고 경악한 기억이 있는데, 이런게 대표적인 관리 실패의 사례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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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인생 2011-11-02 09: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번역된 것만을 읽는 독자로서는 잘 알지 못하는 내용이죠. 저도 읽고 있는데, 크게 오류가 있는지를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위에서 언급한 오류는 번역가와 출판사로서 치명적인 것이 아닌가 생각이 됩니다. 정말 양심이 있다면 산 사람들에게 수정판을 만들어 다시 보내주어야 하지 않을까 싶네요. 저도 처음에 동시출간이란 소리에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은 했죠. 그러나 미리 준비했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아니었군요. 하여튼 기분은 그리 좋지는 않습니다. 좋은 지적 감사합니다. 번역이 반역이 안되기를 소망하며~

출판 산업의 부흥을 위해 2011-12-11 17: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책의 분량이나 출간 준비 기간으로 봤을 때... 너무 혹독한 비난입니다. 마음이 아프네요. 물론 완성도가 매우 높은 건 아니지만, 이미 충분히 번역자와 편집자의 귀에 들어갔을 겁니다.
저도 민음사는 잘 모르지만 , 잠깐 출판계에서 교정 교열 편집자로 일해봤는데... 그냥 마음이 아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