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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은 복잡하지 않다 - 골리앗 전사 이갑용의 노동운동 이야기
이갑용 지음 / 철수와영희 / 2009년 12월
평점 :
박권일의 책을 보다 더위에 샤워라도 해야겠다 하며 일어났는데, 이갑용이 보낸 편지가 책상 위에 놓여 있었다. 2011년 4·27 보선 후 받은 편지였다. 그때 나는 생전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정치자금을 기부했고, 대신 A4 두 장에 빼곡이 인쇄된 편지를 받았다. 그 근저에는 4·27 재선거와 “통합”이라는 화두가 깔려 있었다.
당시 민주노동당은 '국민의 명령' 류의 전략에 몰입해 있었고, 민주당과 딜을 벌인다. 민주당 이인영 최고의원이 울산 동구에서 후보를 내지 않기로 하고, 민노당은 대신 중구의 권순정 후보가 사퇴한 것. 이갑용은 이런 나눠먹기를 통해서라도 정치적 지분을 획득하는 것, 혹은 자리를 위해서라면 노동자의 삶을 극도로 악화시킨 열린우리당-민주당 라인과도 연합한다는 뻔뻔함에 크게 반대했고, 노동자 후보로 울산 동구에 출마하여 한나라당/민노당/이갑용의 구도로 판을 바꾼다.
여기에 화들짝 놀란 당권파놈들의 깔대기 민중의소리 김경환은 “자신의 당선가능성이 없는 건 잘 알고 있을 텐데, 그럼 누구를 당선시키기 위해서, 아니면 누구를 낙선시키기 위해 나온 걸까요? 한나라당의 잘못으로 치러지는 선거가 자칫하다가는 한나라당에 면죄부를 주는 최악의 상황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라는 내용이 담긴 메일을 민중의소리 독자들에게 스팸했다(이런 묻지마 지지와 단일화와 정치전략적인 사고를 진행하던 이들, 그리고 이들의 입이 되어 준 민중의소리가 현재 다다른 지경을 생각해 보면, 이 메일이 주는 함의는 상당한 것이다.).
내가 이 책을 손에 든 것은 이런 상황 속에서였다. 이 책은 그가 현대중공업에 입사한 이후 겪었던 민주노조 설립, 어용노조와의 세 싸움, 128일 대투쟁, 식칼테러, 골리앗 파업(노무현이 그때 골리앗에서 담배를 피우던 사진이 유명한데, 이 둘의 이후 인생은 참 이상하게 갈라진다.), 수감, 그에 이은 민주노총 출범까지의 과정을 현장에서 싸우던 사람의 입을 통해 전한다. 그리고 민주노총 출범 이후 노사정 대타협에 합의해 준 국민파에 대한 실망, 위원장 출마 시 당권을 쥐고 있던 파벌과의 끊임없는 세 싸움, 결국 위원장이 되었다가 구속된 이야기, 동구청장이 된 후의 이야기와 공무원 노조 관련하여 민노당 지침을 따르다 구청장직을 잃을 때까지의 이야기가 빼곡하게 적혀 있다.
이 이야기를 통해 느껴지는 정서 중의 하나는 비타협주의적 투쟁 노선이다. 이갑용의 시각에서 보는 귀족노조의 문제가 그렇다. 아니, 그의 시각에서 보면 귀족노조는 존재하지 않는다. 귀족노조가 아니라 노동자들의 입장에서 싸우고 문제를 제기하는 노조와 어용노조 혹은 포섭당한 노조원들이 있을 뿐이고, 한쪽에서 문제를 일으키면 다른 한 쪽에서 몇 푼의 봉급 인상을 받아다 주는 걸로 퉁치는 일이 반복되며 투쟁이 임금높이기의 방편처럼 변질된 것일 뿐이다.
경향신문 취재팀이 출간했던 “민주화 20년의 절망과 열망”에서 지나친 투쟁이 노동운동의 동력을 고갈시켰다고 지적한 부분도, 이갑용의 입장에서는 동의할 수 없게 된다. 신자유주의적 개혁이 완성되어 가는 중이었다. 노동과 성장 위주의 경제 성장은 자산과 투자 위주의 자산 중심 경제로 대체되었고, 제조업의 중요성 혹은 노동자들의 위상은 나날이 추락했다. 공장을 돌리느니 그 땅을 팔아서 아파트 짓는 게 훨씬 좋은 세상이 왔고, 펀드니뭐니 하며 자산을 바탕으로 한 돈불려먹기로 중산층이 퍽퍽한 물가상승을 견디던 시기에, 노동자은 펀드를 쌓는 대신 비정규직이 되고, 개인사업자가 되고, 나락으로 빠져들었다. 이를 보호해야 할 사람들은 노사정의 속임수에 동참했고, 비정규직들을 포기했으며, 노동법 개악을 좌시하여 관뚜껑에 못질을 했고, 사측의 노조 탄압과 손배소가 쌓여 죽어나가던 노동자들을 제대로 보살피지 않았다. 심지어 2003년의 정부 수반은 민주화된 시대를 운운하며 자살한 노동자들을 훈계하려 들었다.
이갑용의 입장에서 이 시기의 노총의 역할은 더 많은 투쟁을 효율적으로 선도하여 노동자들의 의식을 더 고양시키고, 계급주의적인 투쟁노선을 굳혀 노동자들의 의식을 더 굳게 하는 데 있었을 것이다. 더 많은 투쟁으로 노동계의 입장을 더 강력하게 전달하고 노동자의 학교라는 파업을 통해 의식 있는 노동자들, 노동 운동의 나아갈 길을 제시해야 했다고 보았을 것이다. 그렇게 놓고 보면, 노총의 영향력 상실은 투쟁의 과잉이 아닌, 투쟁의 부족에 인한 것이 된다(그의 노총위원장 출사표 1번이 “우리가 당선된다면 1년을 열심히 싸워 감옥에 가겠다. 만약 가지 않으면 투쟁을 제대로 하지 않은 것으로 알고 1년 후 임원직을 사퇴하겠다”는 것이었으니(185쪽), 그 강단 또한 대단한 것이었다.).
그의 의견에 모두 동의할 필요는 없고, 나도 그의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타협과 양보가 반복되면 사람들이 노동자들을 우습게 볼 것이라는 걸 그는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가 그 투쟁을 겪고 정부와 싸웠던 사람들이 너무나 쉽게 과거는 잊고 한나라당부터 심판하자고 말하는 데 대해 비참할 정도의 배신감을 느끼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나도 그렇게 생각했고, 묻지마 단일화가 가져올 부작용을 겁냈다.
그러나 그 싸움이 이길 만한 싸움도 아니었던 것이 사실이었고, 그는 실제로 4·27 보선에서 패배했다. 그러나 이 책을 읽으면서 느꼈던 두 번째 느껴지는 정서는, 그런 패배를 하더라도 할 말은 해야 하고 싸울 싸움은 싸워야 한다고 생각하는 그의 강직함이었다. 많은 말은 필요없을 것 같고, 그가 골리앗 투쟁을 씁쓸하게 반추하는 대목을 옮긴다. 조금 길더라도 읽어 보는 게 좋다고 생각된다(나도 가끔 생각날 때마다 다시 꺼내 읽는 부분이다.).
5월 10일, 우리는 골리앗에서 내려왔다. 14일 만에. 골리앗에서 내려오는 우리를 전국에서 뜨겁게 지켜보는 것도 몰랐고, 우리 싸움이 위대하다고 역사에 기록될 줄도 몰랐다. 포위되어 갈 곳 없던 우리 앞에 골리앗이 있었고, 그저 버틸 수 없어 내려왔다. 우리는 위대하고 싶어 오른 게 아니었다. 하지만 한 가지, 최선을 다했다. 완패했지만, 때론 잘 진 싸움에서 이긴 싸움보다 더 큰 교훈을 얻을 수 있다는 걸 골리앗을 통해 보여주고 싶었다. 이대로 내려갈 수 없다고 난간을 부여잡고 우는 동지를 붙들고 함께 내려오는데,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모두 울었다. 14일 동안 외로운 하늘에 한 점처럼 떠서 저 아래 평온한 세상을 바라보며 느꼈던 외로움, 저 불빛 어딘가에 있는 내 가족들과 따뜻하게 섞이고 싶은 그리움, 왠지 이길 수 없을 것만 같은 두려움, 끝이 보이지 않는 싸움에 대한 막막함, 그리고 의도치 않게 서로에게 입힌 상처들....... 울지 않을 수가 없었다.※
※는 주석 표시로, 다음 쪽에 실린 김주익에 대한 회고를 가리킨다. 그 글에는 김주익에 대한 미안함, 할 수 있는 일이 없어 단식을 했다는 이야기, 고공 점거 투쟁 시 버티기 위해 제안하는 내용들이 담긴 이야기가 1쪽 분량으로 적혀 있다. 어찌 보면 꼰대질일 수도 있지만, 내 입장에서는 꽤나 세심하게 느껴졌다(108~109쪽)
그러니까, 이길 수 없는 싸움이라도 해야만 할 때가 있었던 것이고, 모든 이들이 통합으로 진군하면 정권교체가 이루어질 것이며 자연히 사람사는 세상이 다시 올 것이라고 할 때, 누군가 아니라고 말할 사람이 반드시, 한 사람이라도 필요하다고 믿었다. 그래서 난 이 책을 샀고, 그에게 후원금을 냈다. 그리고 난 그것이 무척이나 자랑스럽다. 그리고 그는 선거에 패배한 후 쓴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밝힌다.
단일화를 비판한다고 해서 한나라당에 대한 분노가 그들보다 적은 것도 아니며, 정권이 바뀐다고 해서 그들이 늘 떠드는 노동자 민중이 행복해지는 것도 아닙니다. 지난 10년을 어떻게 넘어설 것인가를 말하지 않으면서, 지난 10년이 행복했다고 강요하는 사람들에게 진보정치 그런 거 아니라고 누군가는 말해야 했습니다.
통합진보당이 결국 이 꼴이 나고, 이정희는 이 마당에도 “침묵의 형벌” 기간 동안 쌓은 숙변이 어찌나 쌓였던지 페이스북에다 거하게 똥질을 하고 앉아 있는 마당에 , 그가 무척이나 보고 싶다. 어떤 모습으로든 진보정치에 그가 돌아와 주었으면 좋겠고, 그날이 오면, 다시 한 번 기쁜 마음으로 그에게 후원금도 보내고, 사정이 되면 편지라도 한 통 써 보내고 싶다.
덧) 이갑용의 출마를 지지했던 정당이 하나 있다. 사회당이라고...... 여러모로 참 괜찮은 정당이었고, 아직까지도 심정적으로는 그들을 지지하고 있다(진보신당에 기대를 걸고 있는 한 가지 이유이다.).
덧) 허영구의 전 민주노총 부위원장의 명문을 옮긴다. 책이나 보고 회사에서 펜대나 굴리던 나의 글보다 훨씬 더 깊은 울림을 가지고 있다. 읽어 주기 바란다. http://hjyd.nodong.net/xe/index.php?document_srl=562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