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주토끼
정보라 지음 / 아작 / 2017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야밤의 공대생 만화>가 책으로 출간됐다기에 시간 난 김에 직구다! 하면서 강남 교보에 갔다가 허탕을 쳤다. 아이고 아이고. 그러다 이 책에 눈에 띄어 냅다 집어왔다. 정보라는 사실 예전 체코SF 단편선인 <제대로 된 시체답게 행동해!>라든지 브루노 슐츠 작품집 번역 등 꽤 좋은 작품들을 골라 매끈하게 번역해 온 사람이라 흥미가 동했다. 그래서 집어들고 후루룩 넘기는데 "덫"의 문장들이 눈을 잡았고, 몇 자 읽다가 바로 사 왔다(약력을 보니 그 정보라와 같은 사람인 듯하다).


소설은 괴담의 영역으로 들어가기도 하며 때로는 신화의 영역을 건드리기도 한다. 그런데 뭐 이게 괴담이든 신화든 어때, 재미있으면 된 거지. 여튼 정보라의 이 소설집을 꿰뚫는 단어 중 둘을 꼽자면 '죽은 자'와 '돌아옴'이다. 유령들, 과거의 잔재들이 현실과 교호하는 영역들이 시공간을 뒤덮고, 그 영역이 현실과 충돌하는 과정에서 환상의 세계가 구축된다. 세계가 구축되는 과정에서 과거의 잔재들이 현재와 부딪히며 피와 살이 튄다. '거한 그로테스크'라 하겠다. 그 그로테스크가 단정한 문장 안에 담기니 읽기에 쾌적하다.


쾌적하다는 말을 했는데, 내용들이 혼돈과 파괴를 담고 있음에도 문장과 서술이 무너지지 않고 단정하게 잘 잡혀 있어 마음에 들었다는 말을 하고 싶다. 과격한 내용이나 혼란한 내용을 던져넣을 때 자신이 그 이야기에 너무 몰입하여, 이야기 전개가 급하다 못해 마치 블랙홀 주변의 중력장에 물체가 찢기듯 흐트러지는 경향을 볼 때가 있다. 작가가 왜 독자를 넘어서 혼자 흥분하나 싶어 기분이 좀 별로일 때가 있는데, 정보라는 이야기를 강하게 던지면서도 고삐를 잘 틀어쥔다는 느낌이 든다. 번역가로서, 혹은 슬라브문학도로서 많은 문장을 만지면서 쌓은 레퍼런스나 훈련이 영향이 있었겠지 하는 생각도 든다.


문장 자체의 완성도가 높은 작품을 원한다면 강추할 만한 책이다. 때마침 GROUPER의 A | A (2011)을 같이 들었는데 썩 잘 어울린다. 농어 라는 이름의 이 음악가는 자신의 목소리와 악기 소리를 테이프에 녹음하거나 컴퓨터에 입력한 후 로우파이한 방식으로 변조하여 음악으로 가공해 내는 작가인데, 소리를 한계까지 무너뜨리고 그 질감의 완성도로 다른 이들과의 차별성을 만들어 낸다. 그렇게 질감에 집착하면서도 전체적인 곡의 스토리라인을 놓치지 않는데, 그게 이 책과 닮은 면이 있다. 그루퍼(농어)의 음원은 애플뮤직에 있는데, 그거 없다면 줄리아나 바윅 같은 분들 음악이랑 같이 들어도 좋겠다.


덧) 출판사는 이 이야기들을 꽤 밝게 본 것 같은데, 작가 역시 '작가의 말'에서 "작품을 쓸 때의 의도는 전혀 달랐기 때문에 나는 상당히 놀랐다"고 밝히고 있다. 뭐 근데 편집자가 작가한테 소설 맘에 든다고 하면서 "차갑고 이지적으로 쓰였지만 밑에 깔린 정서나 세계관이 정말 제 심경을 득득 긁고 기분 찝찝하게 만드는 점이 정말 맘에 들어요" 라고 말하는 게 쉽겠나? 생각해 보면 편집자의 그 말이 딱히 이상한 것도 아닐듯하다.


S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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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ubauten 2017-07-12 17: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근데 이거 꼭 별점 찍어야 등록되냐? 그런 거 좀 별론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