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지지 않는 사람들 - 20세기를 온몸으로 살아간 49인의 초상
서경식 지음, 이목 옮김 / 돌베개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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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을 보여주지만 그 끝에서 희망의 빛을 보여주고 있다. 진정 좋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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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지지 않는 사람들 - 20세기를 온몸으로 살아간 49인의 초상
서경식 지음, 이목 옮김 / 돌베개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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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경식의 ‘디아스포라 기행’을 기억하고 있다. 부끄럽게도 나는 그 책을 보기 전에 ‘디아스포라’라는 단어가 무엇인지 모르고 있었다. 서경식의 책이라고 해서 봤는데, 읽을 때 내 가슴에서 무언가가 울컥 울컥거려 혼났다. 온 몸에 소름이 돋는 그런 느낌. 추방당한 자들, 디아스포라를 쫓는 서경식의 글에서 나는 이 세상의 그림자를 느꼈었다. 그때의 슬픔이란… 책을 보면서 그런 경험을 하게 될 줄은 전혀 몰랐었다. 그런데 서경식의 또 다른 책, ‘사라지지 않는 사람들’에서 똑같은 경험을 하고 말았다. 소름끼치는 두려움이 나를 엄습해온 것이다.

‘사라지지 않는 사람들’은 20세기를 온몸으로 살아간 49인의 초상을 그리고 있다. 살아갔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서경식은 ‘맺음말’에서 한나 그렌트가 20세기를 ‘난민의 세기’로 규정했다고 말하고 있다. 맞는 말인가. 나는 좀 더 구체적으로 ‘폭력의 세기’라고 말하고 싶다. 폭력의 세기. 세계대전이 일어났다. 인류가 싸움을 시작한 이래 최대 규모의 전쟁이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고 또한 사라져버렸다. 그 와중에 핵폭탄이 날아갔다. 20세기를 넘어 21세기까지 두렵게 하는 것이 탄생했다. 유대인 학살은 어떤가? 유럽에서 유대인을 차별하는 것은 계속해서 존재했지만, 20세기처럼 노골적으로 잔인하게 횡횡한 적은 없었다.

아. 아프리카 난민은 어떤가. 온갖 테러는 어떤가. 동족끼리 총을 쏘게 만들었던 한국전쟁과 베트남전쟁은 또 어떤가. 20세기는 피로 얼룩졌다. 폭력이 매순간 일어났다. 그렇다면 그 폭력이 일어난 이유는 무엇인가? ‘제국주의’적인 시선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제국주의의 야심, 그것은 참으로 잔인하게 세상을 지배해갔다. 그 앞에서 인간이라는 것은 보잘 것 없는 존재로 전락하고 말았다.

20세기에 인간의 생명과 존엄성은 제국주의의 욕심 앞에서는 개껌딱지보다 못한 것으로 재규정되고 말았다. 지금도 강대국들에서 마소가 먹고, 먹다가 남겨서 버리는 음식물만 해도 아프리카의 아이들을 다 먹일 수 있다. ‘난민’도 그렇다. 강대국이 손가락질 하나 하면 구원받을 수 있다. 하지만 그들은 하지 않는다. 그럴 욕심이 나지 않기 때문이다. 잔인한 시대, 폭력의 세기, 광기가 지배하던 시절, 그 안에서 인간은 무슨 의미가 있는가. 의미를 묻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있다. 의미는 있다. 그 암울한 구렁텅이에서 서경식은 49인을 말함으로써 그것이 의미가 있다고 말하고 있다. 독재에 맞선 파블로 네루다, 혁명을 위해 나선 에른스트 톨러, 끝까지 희망을 버리지 않았던 안네 프랑크, 칠레를 위했던 살바도르 아옌데, 글로서 나치의 추악함을 폭로했던 프리모 레비, 제국주의에 항거한 가네코 후미코, 혁명가 김산, 조선의 독립을 위했던 홍범도와 김구… 이들은 무의미했는가. 최후는 초라했을지언정 무의미하지 않는다. 온몸으로 ‘폭력’의 다른 이름인 ‘20세기’에 맞섰던 그들은, 그것만으로 의미가 있다. 이렇게 후대에 알려짐으로써 20세기라는 과거를 돌아보게 만드는 것, 그것으로도 그들의 생과 이상은 숭고하게 기억될 수 있는 것이다.

역설적이다. 참으로 아이러니한 의미 찾기다. 그 자신이 디아스포라이면서 또한 20세기를 온몸으로 살았던 서경식이기에 가능한 길 찾기가 아닌가 싶다. 그 길의 한복판에 서 있는 ‘사라지지 않는 사람들’은 놀라운 책이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니다. 컴컴한 어둠 속에서도 작지만, 밝은 ‘빛’을 보여주는 이 책은 그런 말을 들을 만한 자격이 있다.
 
오늘 나는 지옥을 떠올렸고 몸서리를 쳤다. 그러나 지금은, 희망을 만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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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사마리아인들 - 장하준의 경제학 파노라마
장하준 지음, 이순희 옮김 / 부키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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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세는 신자유주의였다. 그에 따라 시장은 개방해야 한다고 믿어졌다. 공기업은 문제가 많으니 싼값에라도 넘기는 것이 상책이라고 여겨졌다. 국내자본이 어찌되든 간에 일단 외국자본을 끌어와야 한다는 말도 ‘진리’처럼 말해지곤 했다. 그렇지 않으면 흥선 대원군이 이끌던 조선처럼 망할지도 모른다고 했다. 신자유주의 아니면 패망이라는 말이 횡횡했다. 그런 말이 너무 많다보니 나도 신자유주의가 대세인 것이라고 생각했다. 또한 진리하고 믿었다. 그것이 이 나라, 내 가정을 살찌우는 길이라고 믿었다.

그러던 터에 장하준을 만났다. 그리고 혼났다. ‘나쁜 사마리아인들’에서 장하준은 나를 거세게 몰아쳤다. 처음부터 끝까지 잘못 알고 있다고, 신자유주의자들의 속셈에 넘어가 모든 것을 넘겨주게 됐다고 혼나고 말았다. 큰 질책을 받아서 그런가. 책장을 넘기는데 머리가 다 아찔해졌다. 그럼에도 책장 넘기는 손을 거두지 않았다. 나는 알기 때문이다. 이 책이야 말로 진정으로 나를 살찌우게 해준다는 걸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던 것이다.

신자유주의를 말하는 그들은 누구인가. 미국이나 영국 등 이른바 선진국의 거대 자본 세력이다. 그들은 자유롭게 무역하자고 한다. 보호무역은 하지 말자고 주장하면서 따르지 않는 개발도상국을 압박하고 있다. 보호무역은 공평하지 않다는 논리 때문이다. 그런데 ‘나쁜 사마라아인들’은 그것이 얼마나 심각한 ‘기만’인지를 낱낱이 보여준다. 미국이나 영국 등의 보호무역의 역사를 생생하게 까발리고 한다. 아! 뻔뻔하다. 아! 치사하다. 책을 보면서 그런 생각이 드는 건 나만 그런 게 아닐 것 같다.

공기영이 비효율적이라는 주장도 ‘나쁜 사마리아인들’에서 무참히 깨져나간다. 공기업이 훌륭한 사례를 보고 민영기업이 더 부정부패에 노출돼 있다는 말을 읽을 때마다, 교과서에서 배웠고 언론에서 들었던 ‘공기업부패론’과 같은 편견들은 파편화되어 사라져갔다. 그 파편을 바라보면서 어리석었다는 걸 알았다. 왜 무조건 그 말을 믿었을까? 신자유주의자들의 말을 그대로 믿고 공기영하면 멍청한 공룡으로 판단한 것은 왜 그런 것인가. 내가 어리석다. 아! 어리석은 건 그것뿐만이 아니다.

진짜 어리석은 건, 신자유주의가 좋다고 믿었던 것이다. 어른과 아이가 그대로 축구 경기를 하면 반칙이다. 경기장을 조금 기울게 하는 방법 등으로 핸디캡을 조정해줘야 한다. 그런데 나는 무조건 그대로 게임하자는 논리를 줄기차게 믿었던 것이다. 어리석다. 그 어리석음에 하늘을 바라보기도 창피할 지경이었다.

그래도 ‘나쁜 사마리아인들’ 덕분에 진실을 조금이라도 알았고, 그로 인해 어리석음을 깨달았다는 것에서 조금이나마 고개를 들어보려고 한다. 처음부터 너무 신랄해서 당황스러웠지만, 이제는 이 책이 내 손을 잡아주는 꼴이다. 고맙다. 이 책에 고맙고 장하준에게 고맙다.

주가 변동을 보는 시간보다 이 책을 보는 시간이 최소한 다섯 배는 유익하다고 말하고 싶다. 경제신문에 비하면 그 값어치는 몇 배나 더하다. 그러니 이 책은 꼭 읽어보라고 말하고 싶다. 나쁜 사마리아인들이 하는 말을 맹목적으로 믿는 사람이라면 더욱 그렇다. ‘제대로’ 생각하고 싶다면 이 책은 ‘필독서’로 삼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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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째 아이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7
도리스 레싱 지음, 정덕애 옮김 / 민음사 / 199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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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벨문학상 발표 소식이 들렸을 때, 시큰둥했다. 누가 받든 무슨 상관일까 했다. 그러나 역시 폭풍이 몰아닥쳤다. 여기저기서 도리스 레싱의 소설을 두고 말이 오갔다. 나는 무관심하려고 했다. 노벨문학상을 받았다고 해서 갑자기 읽어야 한다는 그런 생각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럼에도 ‘다섯째 아이’에 손이 갔다. 사람들의 리뷰를 보니 그 소설은 노벨문학상을 받아서가 아니라 내용 자체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많지 않은 분량, 어떤 소설일까 싶어서 표지를 들춰봤는데 빨아들이는 힘이 상상 이상이었다. 그것을 느낀 시간부터, 100m 달리기를 하는 사람처럼 단걸음에 읽어나갔다.

남녀는 평범했다. 세상의 말대로 하면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남자와 여자는 결혼을 해서도 평범하게 살고 싶었다. 남자는 여우같은 마누라와 토끼 같은 자식들을 두고 싶었고 여자는 아이들을 많이 낳아 기르는 다정한 엄마요 헌신적인 아내가 되고 싶었다.

마침내 그들은 결혼을 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이들을 낳았다. 아이들을 키우기에 경제형편이 어렵기는 했지만 그들은 ‘이상적인 가정’을 위해 자연의 순리를 막지 않았다. 그런데 ‘이상한 아이’가 태어났다. 그 아이는 다른 아이들보다 덩치도 컸고 사나웠다. 남편은 물론이고 세상 사람들은 여자를 암묵적으로 비난한다. 아이의 형과 누나들은 두려움에 어쩔 줄 몰라 한다. 괴물 같은 아이가 등장하자마자 모든 것이 파괴돼 버리고 말았다.

오싹했다. ‘다섯째 아이’를 보는 동안 소름이 돋았다. 이상적인 가정이라는 것은 얼마나 허울 좋은 말이었던가. 겨우 아이 하나가 비정상적으로 보인다고 해서 그렇게 깡그리 무너지고 마는데! 그들의 행태를 보라. 아이를 ‘어떤 곳’으로 보낸다. 아이가 사라지자 집 안은 다시 유쾌해진다. 아이들은 행복해하고, 남편은 웃음을 되찾는다. 하지만 엄마는? 그녀는 독단적으로 다시 아이를 되찾아온다. 그것으로 다시 집안에는 암울한 구름이 덮쳐오는데…

무서운 소설이다. 튼튼해 보이는 일상도 이렇게 쉽게 깨질 수 있다는 것이 무섭다. 그것을 지키기 위해 혈육을 그렇게 내치는 모습도 무섭다. 그보다 정말 무서웠던 것은, 이 내용이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는 것 때문이다. 나도, 내 친구도 예외는 아닌 것이다. 이런 일을 벌일 수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아! 좋은 소설이다. 나는 그것을 깨달았다. 이 책은 많은 사람들, 특히 안정적이고 편안한 삶을 누리고 싶다거나 누리고 있다고 자부하며 사는 것에 만족하는 사람들이 읽어야 하는 소설이다. 그렇구나, ‘다섯째 아이’는 말이 많이 나올 만한 소설이었다.

노벨문학상을 누가 받든 관심 없고 그게 나에게 어떤 영향을 준다는 생각을 해본적이 없지만 이번만큼은 노벨문학상에 고맙다. 덕분에 좋은 소설 읽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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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하광인 - 상 - 백탑파白塔派, 그 세 번째 이야기 백탑파 시리즈 3
김탁환 지음 / 민음사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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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으로부터 약 4년 전, 김탁환은 ‘방각본 살인 사건’이라는 두 권의 책을 선보였다. 그 책은 ‘백탑파 시리즈’의 시작을 알리는 책이었다. 정조가 다스리던 시절, 박지원과 이덕무 등이 활약하던 그 시대를 의금부 도사 이명방이 보여주는데 그것이 너무 재미있었다.

지금이야 당연하게 생각되는 것이지만, 그때만 해도 그 소설은 작은 파란을 일으켰던 것으로 기억한다. 한국형 팩션을 시도했기 때문이다. 그랬다. 4년 전 누가 한국형 팩션을 기대했던가. ‘방각본 살인 사건’이 베스트셀러에 오르지는 못했던 것 같지만, 김탁환이라는 이름을 확실히 인식시켜줬다.

어디에선가 김탁환이 2년마다 시리즈를 내겠다는 말을 들었다. 정말인가 했는데 진짜였다. 2005년 김탁환은 ‘열녀문의 비밀’을 발표해 약속을 지켰다. 그 소설 또한 놀랍도록 재미있었다. 그리고 2년이 흐른 지금, 또 한 번 그 약속이 지켜졌음을 확인했다. 완결편인 ‘열하광인’으로 그것이 지켜진 것이다.

귀신 까무러치는 범죄들을 해결했던 그네들의 최후는 어찌 장식되었을까? 제목의 뉘앙스부터 짚고 넘어가야 한다. 제목이 ‘열하광인’이다. 열하에 미친 사람이라는 말 아닌가. ‘열하’란 박지원이 쓴 책이다. 그 책은 정조 시대에 참으로 파란만장한 일들을 겪어야 했다. 세상으로부터 찬사를 듣는 동시에 온갖 시기와 비난을 당하기도 했다. 그래도 사람들은 그것을 읽었다. 조선 시절에 나온 다른 책들과 다르게 곡소리 날 정도로 슬프게, 혹은 날아갈 듯 신명나게 묘사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조가 직격탄을 날린다. 문체를 예로 들며 공개적으로 비판한 것이다. 열하는 읽어서는 안 되는 책이 되고 만다. 그럼에도 ‘열하광인’들은 그것을 멈출 수 없다. 그러기에는 유혹이 너무 컸다. 이명방을 포함한 몇몇 사람들은 몰래 모여서 읽기로 한다. 그런데 무슨 일 일까? 한 명씩 죽어나간다. 누구 죽이는지, 왜 죽는지도 알 길이 없다. 열하광인을 자처하는 사람들은 어처구니없게 죽는다.

하지만 그보다 더 어처구니없는 것은 이명방이 그들을 죽인 범인으로 지목됐다는 것이다. 박지원, 이덕무 등을 스승으로 모신 이명방과 열하광인을 노린 자는 누구인가? 모든 사실을 아는 것 같으면서도 모르는 듯 묻는 정조의 본심은 무엇인가? 백탑 서생들의 꿈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이전에 나온 소설들은 추리소설적인 특징이 강해서 범인의 정체와 사건의 결말이 궁금증을 자아냈고 그것이 소설의 즐거움을 만들었다. 하지만 ‘열하광인’은 다르다. 역사적으로 논쟁이 될 만한 사실이 추리소설적인 특징과 맞물려 있다. 범인을 쫓는 것도 즐겁지만 정조와 박지원의 보이지 않는 갈등을 보는 것도 즐겁고, 백탑파 서생들의 최후를 쫓는 것도 소설의 즐거움을 풍성하게 만든다. 비록 그것이 안타까운 결말을 맺는 것이라고 할지라도 소설의 재미만큼은 이전 작품들에 비할 수 없을 정도로 수준이 높아졌다고 할 수 있다.

‘열하광인’의 마지막 장을 덮으며, 처음으로 백탑파 시리즈를 접했던 순간을 떠올려본다. 이런 소설도 있다는 생각에 흥분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생각할수록 마지막이라는 것이 못내 야속하다. 김탁환에게 시리즈를 더 쓸 수 없겠냐고 말이라고 하고 싶은 마음이다.

하지만 그러면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역사 속의 그들도 끝이 있듯 시리즈도 끝이 있는 법이다. 지지부진하게 이어가는 것보다 제때 끝낼 줄 아는 것은 확실히 미덕이다. 김탁환은 그것을 알고 공을 들여 ‘열하광인’을 썼을 것이고 팬으로서 나는 그것을 고맙게 받아들일 뿐이다. 그리고 대미를 장식하는 ‘열하광인’을 사람들에게 알리는 것이 내가 할 일일 것이다. 오랫동안 나를 즐겁게 해줬으며 마지막까지도 황홀하게 만든 백탑파 시리즈의 그 마지막 이야기 ‘열하광인’, ‘이런 소설은 읽어줘야 한다’는 말로 그 여운을 정리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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