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과 서사
호미 바바 엮음, 류승구 옮김 / 후마니타스 / 2011년 4월
평점 :
절판


이번 주 토요일 [경향신문] "새로 읽는 명저" 코너에 실릴 서평을 하나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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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미 바바는 인문학에 관심이 있는 독자에게는 전혀 낯선 인물이 아니다. 에드워드 사이드, 가야트리 스피박과 함께 탈식민주의론 3대 이론가로 거론될 만큼 그는 현대 문화이론계의 스타 중 한 사람이다. 그의 주저인 [문화의 위치]만이 아니라 그에 관한 개론서도 국내에 이미 번역되어 있으며, 국내 학자들의 연구 논문도 수십 편에 달한다.


이처럼 대단한 인물이니 그의 저작이 수십 권은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특히 ‘제대로 된’(곧 밥값을 하는) 학자라면 1년에 논문 5~6편이나 저서 한두 권쯤은 거뜬히 써내야 한다고 믿는 한국의 몰상식한 상식에 입각하면, 이 세계적인 석학은 아마도 1년에 논문 수십 편은 써야 마땅할 것이다.


하지만 1949년생인 그가 지금까지 출판한 책이 고작 두 권이고, 그나마 그 중 한 권은 그를 포함한 15명의 학자의 논문을 묶은 편저서라고 한다면 어떨까? 저서는 논문 두 편으로 계산하고 공저에 수록된 논문은 1/저자 수로 따지는 한국식 계산법에 따르면 그는 60이 넘도록 겨우 논문 2와 1/15편을 쓴 셈이다. 이런 그가 한국 학계의 성소(聖所)인 하버드 대학의 석좌교수에 인문학 연구소장까지 맡고 있으니 어찌된 일인가? 그가 한국인이었다면 시간강사 자리나 하나 얻을 수 있었을까?


[국민과 서사]는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네이션과 서사 사이에는 밀접한 상관관계가 존재함을 밝히는 15명의 학자들의 글로 이루어져 있다. 「내러티브로서의 국민」이라는 제목이 붙은 바바의 서론은 이 점을 명쾌하게 밝히고 있다.


사실 상상의 공동체로서의 국민이라는 주장은 베네딕트 앤더슨의 [상상의 공동체](1983) 이후 거의 상식적인 것이 되었다. 게다가 앤더슨은 근대 국민의 형성이 신문과 소설 같은 상상적 형식에 기반을 두고 있음을 보여줌으로써 이전까지 역사가와 정치학자의 전문 분야였던 국민, 국민국가, 민족주의 연구에 많은 문학 연구자들을 끌어들였다.


그럼 문학연구는 국민의 정체를 밝히는 데 어떤 기여를 할 수 있을까? 바바는 국민을 서사 작용의 문제로 보는 것은 개념 대상 자체를 바꾸려는 의도를 담고 있다고 말한다.


우리는 국민이나 민족을 확고한 실체라고 믿기 때문에, 그것이 서사 작용의 산물이라는 것은 좀처럼 생각하지 못한다. 하지만 이 책에 수록된 필자들은 반대로 주장한다. 곧 국민이나 민족이 불변의 실체로 간주되는 것은 다름 아니라 그것이 어떤 서사 작용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단군이라는 시조, 이민족의 침입과 분단 및 전쟁이라는 역경, 새로운 부흥의 기적 같은 서사는 민족을 역사의 시작부터 끝까지 변함없이 지속되는 역사의 주체의 자리에 위치시키며, 이를 통해 현존하는 국민의 정치적ㆍ이데올로기적 질서를 공고히 한다.


반대로 국민을 서사의 효과로 이해하게 되면, 국민은 더 이상 불변적 실체가 아니라 양가성과 균열, 이질성을 포함한 불안정한 구성물이라는 점이 드러난다. 이것은 지배 이데올로기의 한계를 보여줄 뿐만 아니라, 대항 이데올로기의 난점도 보여준다. 따라서 이 책의 화두 중 하나는 다음과 같은 문제라고 할 수 있다. 타자와 소수자들의 이질성에 기반을 둔 저항을 어떻게 사고할 것인가?


몇 권의 책을 번역해본 경험에 비춰보면 이 책은 번역자에게는 악몽과 같은 책이다. 호미 바바의 난해한 논문만 해도 여느 책 한 권을 번역하는 것 이상으로 어려운 일이지만, 이 책은 이 논문 외에도 영문학, 불문학, 라틴 아메리카 문학, 아프리카 문학에서 국민과 민족주의 문제를 다루는 박식한 필자들의 글로 가득 채워져 있다. 이 책의 번역을 시도하는 일 자체가 상당한 지적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인데, 역자는 꼼꼼한 역주와 인용 문헌들에 대한 세심한 검토를 곁들여 이 힘든 일을 성실히 수행해내고 있다. 독자들로서는 더없이 감사한 일이지만, 과연 역자에게는 몇 분의 몇 편의 업적이 귀속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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