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팔 출신 바랄·미안먀 출신 뚜라와의 대담
제법 따사로워진 햇살은 미등록 이주노동자(불법 체류자)들의 피부에는 와 닿지 않는다. 지난해 11월 단속이 시작된 뒤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이주노동자들이 생겨났지만 불법 체류자를 붙잡아 추방하겠다는 정부의 태도에는 변함이 없다. ‘합법’으로 프랑스에서 20여년간 이주노동자로 살았던 홍세화 기획위원이 3월 8일 한국에서 ‘불법’인 미등록 이주노동자들을 만났다. 미얀마 출신인 뚜라(32·사진 오른쪽)는 군부독재 정권이 나라이름을 바꿨다며 군부에 반대하는 뜻에서 항상 조국의 이름을 ‘버마’라고 한다. 그의 가방에는 미얀마 민주화의 상징, 아웅산 수치의 얼굴을 그린 배지가 달려 있다. 시디 바랄(34·사진 왼쪽)은 네팔 출신으로 현재 명동성당에서 이주노동자 전면 합법화를 내걸고 100일 넘게 농성을 하고 있다.
홍세화
“저도 프랑스에서 이주노동자로 살아”
“신문에 사진도 나올 텐데 괜찮나요” 홍세화 기획위원은 이들의 얼굴이 알려져 혹시 정부 당국의 주시를 더 받지나 않을지 걱정했다.
“위험이요 지금은 생각도 안해요.” 단속의 눈초리를 피하는 생활에 이골이 났는지 이들은 웃음으로 받아 넘겼다.
홍세화=프랑스에서 20여년 동안 이주노동자로 살았던 사람으로서 한국에서 두 분을 만난 것이 저한테는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프랑스에서는 극우파들이 두 분 같은 경우를 ‘불법 체류자’라고 합니다. ‘불법’이라는 말을 쓰죠. 진보적인 사람들은 그런 말을 쓰지 않고 ‘상 빠삐에’ 즉 종이가 없다는 말로 표현합니다. 극우파들만 불법 체류라는 말을 쓰고, 언론은 전부 다 종이 없는 노동자들이라고 합니다. 한국에서는 미등록 노동자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고, 불법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불법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주류인 것 같아요. 말 하나에도 사회의 모습을 반영하고 있다는 생각입니다. 한국은 미등록 노동자를 양산하고 있는 것 같은데 먼저 두 분이 어떻게 미등록 노동자가 됐는지 듣고 싶습니다.
뚜라=94년에 산업연수생 제도를 통해 한국에 들어왔습니다. 1년이 안돼서 사업장을 떠나 계속 미등록 노동자 생활을 하고 있어요.
바랄=96년에 산업연수생으로 왔습니다. 포항에서 2년6개월 정도 일하다 회사가 부도 났어요. 연수생으로 3년 동안 일할 수 있으니 6개월이 남았잖아요. 그래서 다른 연수업체로 옮겨달라고 했더니 ‘6개월 밖에 안 남았으니 너는 출국할 수밖에 없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서울로 올라왔어요. 여권은 연수생으로 오자마자 이미 뺏긴 상태였어요. 대부분 서울에서 여기저기 옮겨다니며 일했죠. 네팔에서는 2년 정도 중학교 수학 교사를 했어요. ‘네팔에서 무슨 일 했냐’ 하고 물을 때 ‘선생님 했어요’ 그러면 사람들이 ‘엉~’ 그래요. 한국에서는 선생님이라면 좀 다르게 생각하잖아요. 네팔에서는 임금이 얼마 안 되어 진짜 생활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한국에 오게 됐습니다.
뚜라=학교에 다니면서 아버지 사업을 도왔어요. 기계 제작하는 일을 하셨는데 저도 관심이 많았죠. 한국에 오게 된 이유 가운데 하나도 그것이었죠. ‘산업연수생’이 말 그대로라고 생각했어요. 한국에서 기술도 배울 수 있다고 생각했죠. 청년이 살기에 버마는 너무 자유롭지 않고, 그래서 민주국가, 자유가 있는 국가로 가서 기술도 배워야겠다고 생각했어요. 한국에 오면 한국말이든 뭐든 기본적으로 하나는 배울 테니까요. 2~3년 정도 한국 생활을 해보는 것도 좋다고 생각했죠.
뚜라/94년 산업연수생으로 한국 와 1년이 안돼서 사업장 떠나
바랄/6개월 남기고 회사 부도나… 네팔에선 선생님 했어요
바랄=어머니, 아버지께서 아주 어렸을 때 돌아가셔서 제가 동생을 공부시켜야 했습니다. 내가 공부한다고 동생한테 돈 벌라고 할 수는 없잖아요. 학교에 다니면서 남는 시간에는 여러 집을 직접 찾아가 애들을 한두 시간씩 가르쳤어요. 잘 사는 집에서 선생을 초대하죠. 그런데 시간적으로도 힘들고, 내가 언제까지 이것을 해야 하나, 그런 생각이 들었죠.
홍=네팔이나 미얀마를 떠나기 전에 한국의 산업연수생에 대해 알고 있었나요
바랄=처음에는 네 시간 일하고, 네 시간은 공부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했어요. 한국에 먼저 와 있던 친구들과 통화할 때 물어보면 ‘네팔에서는 그렇게 선전하더라도 한국에서는 무조건 일하는 것’이라고 했죠. 아주 힘들다고 생각하고 오면 된다고 했어요. 친구들은 관광비자로 와 있어서 연수생에 대해 잘 몰랐지만 기술을 배우는 것은 아니라고 얘기했어요. 50㎏짜리 시멘트를 드는 건지 기계를 잡게 될지, 아무튼 뼈 빠지게 일할 수밖에 없다는 것은 알고 있었죠.
뚜라=학교에 다닐 때 기계 조립을 가르치는 선생님이 계셨죠. 그 선생님이 예전에 독일에 산업연수생으로 가본 적이 있었어요. 독일에서는 하루에 네 시간이나 여섯 시간 동안 공부하고, 나머지 시간에는 일하는 만큼 돈을 벌었다고 했어요. 기술도 배우고 돈도 벌 수 있다고 했죠. 저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한국에서 2~3년 있으면서 돈도 벌고 기술도 배워, 버마로 돌아와 아버지와 함께 새로운 사업을 할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또 버마에서 88년에 민주항쟁이 있었는데 그때 함께 했던 친구들이 외국으로 많이 나갔어요. 가끔 편지에서 친구들은 버마에 있는 것보다 민주주의 국가나 인권을 보호하는 나라에 가면 배우는 게 많다, 그리고 해야할 일이 많다고 했어요. 한국은 군사독재에서 벗어나 민주국가가 되었고 산업발전을 이룬 나라였죠. 우리와 문화도 비슷하고, 멀지도 않은데다 같은 아시아 사람이니 잘 대해줄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와 보니 오히려 거꾸로였습니다. 오자마자 회사 사람들은 돈 주고 사오는 노예처럼 이런 저런 일을 다 시켰어요. 분위기가 이상하더라고요. 사업장에 처음 갔을 때 내가 생각했던 게 완전히 잘못됐다고 느꼈어요.
바랄 “우리는 일회용품 일 시키고 버리고…”
바랄=94년도에 한국에서 손가락을 잘리거나 다친 사람들 이야기가 네팔 신문에 다 났어요. 제가 오려고 할 때 가족이나 친척들이 ‘손가락 잘리고 팔 잘리고 그런데 왜 가느냐’며 가지 말라고 난리가 났어요. 저는 ‘다 자기 팔자대로 사는 것 아니냐’고 했죠. 어떤 일을 할지도 모르고, 꼭 다치란 법도 없으니 그만큼 주의하면 된다고 했어요. 막 고집을 부렸죠. 처음 한국에 와서 3일 동안 오리엔테이션을 했어요. 이틀 동안 교육을 받고 사흘째는 사장들이 와서 하나씩 하나씩 데리고 갔어요. 그걸 보며 시장에 물건 내놓고 파는 것처럼 여기서는 인간을 놓고 장사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진짜, 친구들이 너무 많이 울었어요. 헤어지면 다시 만날 수나 있는지 없는지, 내가 어떻게 되는 건지…. 한명 한명 데려가는 것을 보고 ‘인간 장사를 하는 구나’고 생각했어요. 마음이 정말 아팠습니다.
뚜라=버마에 있을 때는 한국에 대해 잘 알 수가 없었죠. 여기 들어와서 일해본 뒤 버마에서 연수생을 보냈던 사람들한테 전화를 했어요. ‘왜 우리가 이런 식으로 취급당하고 있느냐, 도대체 뭐냐’ 그 사람들이 뭐라 했는지 아세요 ‘야, 너희를 일하라고 보냈지, 기술은 무슨 기술이야. 너희들이 뭔데’. 버마 정부 사람들이 그렇게 말해요. 사업장에서 억지로 일 시키고 때리고 그런다니까, 그렇게 말했어요.
뚜라 “기술배우고 돈 벌고 그렇게 생각했는데…”
한국에 도착하자마자 이주노동자들은 곧 자신이 ‘인간’으로 대접받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기 위해서는 스스로 깨뜨려야할 벽도 만만치 않다.
바랄=여기에 올 때 가졌던 꿈이 다양하겠지만 여기서 하는 것은 노동이죠. 그런데 노동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아요. 이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나는 잠깐 여기서 일하고 가서 장사한다, 나는 노동자는 아니다.’ 뭐 이런 거예요. 잠깐 와서 돈 벌고 나가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죠. 노동자로서의 권리가 뭔지 모르죠. 저도 마찬가지고요. 돈벌고 나가면 된다고 생각했어요. 돈을 벌어 동생 공부시키고, 남으면 네팔에서 뭐 좀 할 수 있지 않을까 싶었지요.
홍=한국에 들어오는 순간 대다수 이주노동자들이 자기 스스로도 인간성을, 심하게 말하면 포기하는 것이 아니냐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나는 돈 벌러 왔다, 인간 아무개는 없다. 여기서는 돈만 벌고 돌아갈 때 다시 내 모습으로 돌아간다.’ 설령 그렇더라도 끊임없이 상처를 받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바로 인간이기 때문에. 한국이 이주노동자들의 인간성을 어떻게 마모시켰을까, 참 중요한 지점이라고 생각해요.
뚜라=스스로 인간성을 포기한다는 말, 참 옳은 지적인 것 같아요. 이주노동자는 주로 동남아시아 지역,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사람들이 많아요. 가장 큰 문제는 차별을 받는 것이죠. 둘째는 권리가 없어요. 인간으로서의 권리, 노동자의 권리가 없어요. 그런데 사람들 스스로, 저를 포함해서, 자기 권리를 찾아야 한다는 생각이 없는 거예요. 왜 그러냐면, 저는 독재국가라서 태어났기 때문에 자유가 뭔지, 인간의 권리라는 게 뭔지 느껴본 적이 없어요. 도시를 떠나 정글로 가서 타잔처럼 살면 자유가 있지 않을까 생각하기까지 했어요. ‘노동권’이란 것도 책에서나 봤죠. 한국에 온 대부분의 나라 사람들이 인권이나 노동권을 제대로 느껴 본 적이 없는 것 같아요. 자기 권리를 스스로 찾아야 한다는 것도 스스로 느껴봐야 안다는 겁니다. 한국에서만 있는 문제가 아니라 조국에서도 있었던 문제라고 봐요. 늘 힘들게 살기 때문일 겁니다. 조국도 변해야 하고, 한국의 좋은 사람들이 가르쳐 주기도 해야 하죠.
바랄=네팔도 카스트 제도로 차별이 엄청나게 심하죠. 한국에서는 사장도 같이 밥을 먹죠. 처음엔 와, 대단하다고 생각했어요. 네팔에서는 신분이 다르면 같이 먹지도 않고, 친한 친구라도 한 탁자에서 커피만 마셔도 소문이 나죠. 악수도 안 해요. 저는 브라만이니까 제일 위의 신분인데 한국에서는 그런 게 없으니까 정말 편해요. 한 접시에서 같이 밥도 먹고. 그런데 한국에 있다 네팔로 돌아가면 또 그렇게 돼요. 네팔에서는 같은 신분끼리만 결혼하라고 해요. 그렇지 않으면 친척들이 ‘네 집에서는 물도 안 마신다’고 해요. 나만 고친다고 되는 것도 아니니까 어떻게 해야할 지 정말 고민스러워요.
홍=한국에 와서 이주노동자로, 소수자로서 차별을 받게 되면서 국내의 카스트 제도에 대해 더 깊이 생각해볼 수 있었나요
바랄=예, 그렇죠. 네팔에서도 생각해보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만. 저희 집에서는, 사람은 다 똑같다, 친척들이 우리 집에 와서 밥을 안 먹더라도 우리 가족만 이해하면 되니까 가족들끼리는 그렇게 해 왔어요. 마을에서는 저랑 말도 안 해요. 같이 차도 안 마시죠. 저는 제일 아래 카스트인 친구랑 손 잡고 물 마시고, 집에 데려가고, 잠자는 방에도 데려갔어요. 신분에 따라 아예 집에도 못 들어가거나 딱 어느 선까지만 들어가도록 정해졌거든요. 그걸 깨는 행동을 하니까 친척이나 동네 사람들이 저를 나쁘게 여기는 거예요. 한국에서는 그런 것은 없죠. 그런데 결혼할 때는 달라요. 가족과 친척이 있으니까요. ‘내가 지금 아무리 한국에 있어도 다른 카스트와 결혼하면 집에서 쫓겨날 수 있다’고 생각하니까 선택을 쉽게 못해요. 한국에서도 카스트 별로 모임이 있는데 ‘끼리끼리 뭉치지 마라’고 해요. 한국사회에 살며 비교해 보고 심각하게 생각해 보지만 네팔에서의 사고방식에서 벗어나기 힘들어요. 시간이 많이 걸리겠죠.
홍=돈 얘기를 한번 해봅시다. 몇 백만원씩 돈을 주고 한국에 왔는데, 여기서 돈을 버는 것이 절대적이냐는 겁니다. 한국 사람들도 ‘이 친구들은 애당초 돈을 벌러 온 사람’이라고 보는 것 같아요. 서로를 인간이라는 측면에서 바라보지 않게끔 상황이 이뤄졌다는 겁니다. 어려워도 한국에 머물러 있게 되는 것은 돌아가서 새 출발을 할 자본을 마련해야 한다는 생각이 일차적인 게 아니냐는 거죠.
바랄=처음에는 목적이 돈이었죠. 돈에만 매달리다가 점차 달라졌습니다. 한 5년 정도 지나면서 변하기 시작했어요. 뭔가 배우고 싶어졌죠. 네팔에서는 인도로 많이 가는데, 인도와는 비슷한 문화와 생각을 가지고 있어서 넓게 볼 수 있는 기회가 없었어요. 문화나 사고방식이 다른 여기서 사람을 만나고 저희 문화를 얘기하고 여기 문화를 알게 됐습니다. 네팔에 있는 동생도 공부를 마치고 돈을 벌게 되니까 저도 여유가 좀 생겼죠. 뭐 돈을 가지고 가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이렇게 생각해요. 한국을 배우고 사람을 얻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봐요. 네팔에 빌딩 몇 개 있냐고요 전혀 아니예요.
바랄 “한국사회는 이주노동자와 같이 사는 모습을 두려워해요”
뚜라=이주노동자들이 돈에만 신경 쓰고 있다고 보지 않아요. 저도 처음에는, 여기서는 인간답게 살지 못하니까 돈만 어느 정도 있으면 돌아가 새 출발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열심히 일했어요. 하루에 15시간도 일했어요. 그런데 일한 만큼 돈을 버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생활 비용은 한국 사람처럼 많이 들어요. 한국에 온 지 10년 가까이 되는데 돈을 마음대로 써본 적이 없어요. 몇 년 동안 한달 용돈이 3민~5만원 밖에 안 됐어요. 아껴 쓰고 집으로 모두 보냈습니다. 한국 사람들은 ‘10년이나 있었으니까 집에 가면 수영장도 있고, 넓은 땅도 있을 테고…’ 하며 이야기하지만 그런 것은 꿈도 못 꿔요. 열심히 돈을 보냈지만 저희 집은 아직까지 주변 다른 가정과 별 차이 없이 살아요. 오래 머문 사람들은 처음에는 돈에 급급하다가 시간이 지나고 여유를 찾게 되면서 생각이 바뀌어요.
이주노동자들은 정부가 한달에 10일 정도 기간을 정해 집중 단속을 펼친다고 했다. 평소에는 출입국관리사무소 직원들만 나서지만 이 기간에는 경찰 등도 동원하기 때문에 조심해야 한다고 했다.
홍=산업연수생 생활을 그만 두고 미등록 노동자로 돌아다니고 있는데, 정부에서는 단속을 계속하고 강제로 추방하겠다고 하고 있습니다.
바랄=전에도 열 몇차례 단속했습니다. 그러면 조용히 공장에 있거나 밖에 나가지 않았죠. 단속도 다 잡으려는 것은 아니잖아요. 재수 없으면 걸리는 거라고 사람들이 생각해요. 단속 시작하고부터 지금까지 3만명 정도가 나갔는데 단속으로 잡힌 사람은 3천명 정도 밖에 안됩니다. 이번에는 ‘정말 단속이 심하구나’ 하고 스스로 나가는 사람이 많죠. 단속을 한다고 하는데 우리가 볼 때는 다 할 수가 없어요. 한국에는 아직 미등록 이주노동자들의 시장이 있죠.
뚜라/일한 만큼 돈버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바랄/단속을 한다고 하는데 우리가 불땐 다 할 수가 없어요
홍=고용허가제로 인해 더 살기 어려워졌다거나 하는 문제는 없나요
바랄=미등록 이주노동자 만이 아니라 비자를 받은 사람들도 더 어렵다고 말해요. 월급도 20% 정도는 낮아졌다고 해요. 특근 수당도 예전에는 있었는데 지금은 안 준다고 합니다.
뚜라=미등록 상태에서는 이 사업장에서 일하고 싶지 않으면 다른 사업장으로 옮길 수 있었는데 지금은 안 돼요. 현재의 사업주가 허용해야만 옮길 수 있어요. 사장님들이 단속에 걸릴까봐 무서워서 안 써주니까 미등록 노동자들은 일을 못하고 있는 사람이 많죠. 그런데 한국 사람이 일하지 않으니까 사업장에는 일하는 사람이 없어요. 95년에서 96년 사이에서 대대적인 단속이 있었어요. 그때 제 친구들 절반이 잡혀 갔어요. 그 후로는 별로 없었는데 이번에는 엄청나게 겁을 많이 줘요. 실제로 사람을 잡는 것보다 겁을 줘 살지 못하게 하고, 사람 목숨까지 빼앗아가는 것이라고 봐요. 또 잡아가는 것도 예전처럼 잡아가는 게 아니라 범죄자, 살인자를 잡는 것처럼 해요. 인간 사냥을 하고 있는 것처럼 해요. 이번에는 너무 심해요.
바랄=방글라데시 출신인 비두와 자말을 연행해 12월 30일에 수갑을 채우고 방글라데시로 보냈어요. 항의하려고 방글라데시 대사관 앞에서 집회를 했죠. 마치고 오는 데 출입국관리국 직원들이 가스총까지 사용하면서 잡아갔어요. 단속할 때는 미등록 노동자인지 아닌지 확인을 해야 할 것 아니에요 여권 있는지 없는지도 보고. 그런데 무조건 개처럼 끌고 갔어요.
홍=출국 기준으로 4년을 잡는데 근거를 알 수가 없습니다. 유럽은 장기 체류자부터 등록할 수 있게 하거든요. 그래서 미등록 노동자들은 집세나 공과금 영수증을 다 보관합니다. 언제부터 계속 체류했다는 증거가 되니까요. 프랑스에서는 90년대 후반에 7년 이상 체류자를 구제한다고 하니까 7년 동안 산 것을 다 제시하고 그랬죠. 이탈리아에서 20만명을 구제할 때도 장기 체류 순이었죠. 그런데 한국에 와서 보니까 완전히 거꾸로예요. 오래 될수록 그 나라의 말을 잘 하고, 기술도 갖춰, 자본의 입장에서도 오히려 그들을 수용해야 하는데 왜 거꾸로 가는지가 이상하죠. 두 분은 왜 그렇다고 생각해요.
바랄=거꾸로 간다는 말이 맞아요. 한국 사회에서는 아직까지는 이주노동자를 ‘필요하니까 데려 왔지만 일 시키고 돈만 주고 보내면 된다. 같이 사는 사회를 만들기 위한 것은 절대 아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정부도 그런 것 같아요. ‘너희들 혹시 나중에 주민등록증을 원하는 것 아니냐, 영주권을 원하는 것 아니냐.’ 이주노동자랑 같이 사는 모습을 두려워하는 거죠.
홍=사회에 섞이는 것을 바라지 않기 때문이라는 거죠.
뚜라=이주노동자는 그냥 노동력이 필요해 잠깐 사용하는 것이고, 그 이상의 생각은 없다는 거죠.
바랄=일회용품이죠. 새 기계나 옷을 사는 것처럼 아주 가볍게, 인간 관계를 아주 가볍게 보는 것 같아요. 이주노동자를 데려와서 일 시키고, 내가 필요할 때 사고 버리는 물건처럼, 인간관계로 생각하지 않고 너무 쉽게 보고 있어요.
뚜라=한국사회 전체의 이익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가 개인이나 노동자를 관리하는 사람들의 이익만을 생각해요. 연수생 제도의 가장 큰 문제는 노동자를 노동자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거죠. 노동력을 빨아 먹으려고만 하는 것 같아요. 그 이익은 일부에만 갈 뿐 한국사회는 결국 더 어두워지죠.
홍=한국의 전통적인 ‘혈통’이라는 게 깔려있고, 제1세계 사람들을 올려 보는 만큼 제3세계 사람들은 내려다 보는 차별적인 요소가 맞불려, 정주화를 막겠다는 정서가 강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게 중요한 것 같아요. 장기 체류하는 미등록 노동자와 정부 당국이 정면 충돌하는데 정부는 철저히 단속해 추방하겠다는 식이고, 이주노동자는 그게 과연 가능하겠느냐고 그럽니다. 가능하다고 판단하면 이주노동자들은 아마 스스로 갔을 겁니다. 그런데 해법이 과연 무엇일까 제가 보기에는 참 어둡거든요. 정부가 생각을 바꿔야 하는데 한국 사람들의 정서상 정부가 그걸 바꿀 만한 용기가 있을것 같지 않아요. 시간이 걸리고 이주노동자의 고통은 계속될 것인데, 지금 농성도 하고 싸우고 있는데 어떤 전망을 하고 있습니까
바랄=정부는 11월17일 이후에 계속 단속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는 출국 시간을 연장하고, 한쪽으로는 단속하고 있죠. 자진출국한 사람은 다시 데려오겠다고 하는 데 확실하지 않아요. 정부를 믿고 갈 수도 없는 상황이었죠. 정부가 무조건 내보내려고 사기 치는 게 아닐까 생각하는 겁니다. 다시 들어온다는 보장이 없으니 우리는 버티고 있습니다. 한국 정부가 생각을 바꿀 때까지는 시간이 걸릴 것으로 봅니다. 캄캄하지만 기다려 봐야죠.
뚜라=우리는 모든 이주노동자를 합법화시키라고 요구합니다. 아직까지 정부에서는 대답이 없죠. 정부가 무엇을 내놓을 수 있을지도 알 수 없고요. 시간이 많이 걸릴 거예요.
뚜라 “사업장에 일하는 사람 없어 한국사람은 안하고 우린 못하고”
홍=지금까지 가장 고통스러웠던 순간과 가장 기뻤던 순간은 언제였죠
뚜라=많은 고통을 겪어 어느 때가 특별히 고통스러웠다고 하기는 어려워요. 이번에 단속이 시작되면서 많은 친구들이 목숨을 끊었고, 정부가 사람을 사람처럼 생각하지 않고 짐승을 사냥하는 식으로 하는 것을 보면서 한편으로 투쟁 의지가 강해지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너무나 가슴이 아팠어요. 기쁨은 많이 경험하지 못했고요. 저희랑 가까이 있으면서 옆에서 위로해 주고 많은 신경을 써주시는 분들을 만날 때마다 기뻐요.
바랄/ 이주 노동자만이 아니라 모든 노동자들을 탄압하는구나
뚜라/ 나는 지금 인간이 아니구나…인간답게 살고싶다 외치며 눈물
바랄=명동성당에서 농성하는데 ‘뭐 하냐, 빨리 나가라’고 손가락질하는 분도 있지만 ‘힘내라, 꼭 해야할 일이다’고 말하는 분도 있어요. 남의 나라에 와서 오래 살고, 어렵게 살아왔는데, 또 당장 추방될 수도 있는데, 이렇게 힘들 때 위로하는 분들 보면 기쁘죠.
뚜라=성공회성당에서 농성하면서 구호를 외칠 때 ‘우리도 인간답게 살고 싶다’고 했어요. 그 때 순간적으로 ‘나는 지금 인간이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지나가는 한국 사람들한테 ‘우리도 인간답게 살고 싶다’고 할 때 갑자기 눈물도 나오고 슬퍼졌어요.
바랄=농성을 시작하기 전에는 우리보다 더 힘들게 일하는 사람들이 있는지 생각도 못했어요. 한국인 중에서도 힘들게 노동하는 사람들이 많고, 이주노동자 만이 아니라 모든 노동자들을 탄압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한국 정부는 우리가 한국 노동자들이랑 연대하고 이라크 파병 반대 집회에 참가했다고 정치활동을 한다고 해요. 기본권을 찾기 위해 하는 것인데 정치활동이라고 보는 거죠. 뼈 빠지게 일하는 노동자가 인간답게 살고 싶다고 외치는 것은 진짜 그러고 싶어서 하는 것인데 정치활동이라고 하면서 표적단속을 하고 있죠.
뚜라는 한국 사람들이 하고 싶은 일을 죽자사자 열심히 하는 모습이 좋다고 했다. 버마 민주화도 그렇게 노력해야 이뤄질 것 같단다. 바랄은 갈수록 네팔은 멀어지고 한국에서 정이 쌓여간다고 했다. 그런데 이들은 한국에서 계속 살고 싶지 않다고 했다. “너무 빡빡해요. 여유가 없어요. 한국 사람도 살기 힘든데 우리가 어떻게 평생 살 수 있어요”
정리 황상철 기자 rosebud@hani.co.kr
사진 강창광 기자 chang@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