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2004-04-26 20:42]
작품당 관객 1,000만명 시대에도 스태프는 여전히 배고프다. 장시간 노동과 불안정한 고용계약은 기본이다. 2년 동안 작품 1편만 맡는 경우가 비일비재하고, 운이 좋아 작품에 합류한다고 해도 편당 평균수입은 540만원에그친다. 절대빈곤층, 비정규직도 서러운데 그나마 부정기적이다. “한국영화가 르네상스라지만 스태프의 봄은 아직 멀다. 충무로는 스태프의 피를빨아먹고 성장한 괴물이다.” 경력 6년차에 두 아이를 둔 한 스태프의 극단적 표현이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연출부의 경우 영화기획 단계부터 참여하지만, 영화가 엎어지면(투자를 못 받아 제작이 취소되면) 말 그대로 1~2년 공사는도루묵이다. 돈 한푼 못 받는다. 지난해 촬영도중 오른쪽 눈에 화상을 입었는데 산재보험 대상이 아니라고 하더라. 그런데도 ‘100억원으로 이런영화를 만들 수 있다니 놀라울 뿐’이라는 외국 영화인의 말을 칭찬으로알아듣는 현실이 안타깝다.”4부 조수연합회에 따르면 현재 한국영화 스태프는 2,000여명(연출 1,100명, 제작 340명, 촬영 300명, 조명 200명). 1인당 평균연봉은 640만원으로한국노동사회연구소가 발표한 지난해 비정규직 연봉 1,236만원의 51.3% 수준이다. 300만원 미만인 스태프도 16%나 차지했다. 잠을 자지 않고 25시간이상 일한 스태프는 무려 88%, 49시간 이상 일한 경우도 14%에 이른다. 이제 막 영화판에 뛰어든 ‘막내’는 라면 값도 못 받는다.이같은 열악한 임금과 작업환경은 기본적으로 ‘영화가 좋아서 뛰어든 것이니, 저임금은 감내할 수 있다’는 제작사와 스태프의 전근대적인 인식에서 비롯된다. 여기에 한 해 만들어지는 작품수(수요)에 비해 영상관련 전공자(공급)가 훨씬 많은 점, 경력이 일천한데도 알음알음으로 현장에 투입되는 인력을 가려낼 수 없다는 점도 이유다.그러나 현실적으로는 스태프와 제작사와 맺고 있는 ‘작품당 계약’ 방식이 가장 큰 원인이다. 영화가 ‘완성’돼야 비로소 돈을 받는 일종의 도급형태이기 때문에 영화제작이 중단되거나 연장될 경우 임금보전이 사실상어렵다. 할리우드 메이저 영화사의 경우 스태프가 제작사와 촬영 시간별ㆍ회차별 계약을 맺어 촬영이 한 시간만 초과돼도 별도 수당을 받고 있다.4부 조수연합회 이상필 회장은 “초과근로수당, 초과회차수당 등이 원천적으로 봉쇄된 현행 작품당 계약을 ‘시간별ㆍ회차별 근로계약’으로 전환해야 한다”며 “이를 위해서는 회원 가입률 70% 이상의 조합이나 노조를 통한 조직력을 키우는 것이 시급하다”고 말했다. 또한 도제대표(제1조수)가제작사와 계약을 맺은 후 나머지 팀원에게 계약금과 잔금을 배분하는 현행‘통계약’ 방식도 ‘개별계약’으로 바뀌어야 한다고 덧붙였다.
반론도 있다. 스태프의 열악한 현실과 처우는 개선돼야 하지만, 제작비의90% 이상을 외부 투자자로부터 조달해야 하는 상황에서 스태프의 근로조건개선을 제작자나 스태프만의 노력으로 해결하기는 힘들다는 것이다. 조희문 상명대 교수는 “스태프의 처우개선 주장은 원론적으로 옳다. 그러나한 해 만들어지는 영화 60편 중 70%는 제작비도 못 건진다. 할리우드식으로 임금보장을 하다가는 제작도 못 들어갈 영화가 태반이다. 현행 통계약이 아니라 개별계약이 이뤄질 경우, 제작비 앙등요인이 될 수도 있다”고말했다.씨네월드 이준익 대표는 “견습생과 미숙련공이 섞여 있는 상황에서 스태프와 개별계약을 당장 시행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다고 제작사가 자긴돈을 들여 전문인력 양성을 위한 아카데미를 세울 수는 없다. 우선 스태프가 자신들의 능력과 전문성을 근거로 한 임금 가이드라인부터 제시해야 한다. 그러면 제작자는 한정된 예산에 맞는 수준에서 개별 스태프와 계약을맺을 수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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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무로는 스태프의 피를 빨아먹고 성장한 괴물이다.', 이란 글귀가 유난히 눈을 찌르는군요. 마음이 아픕니다. 이집트 고공의 피라미드가 그랬듯, 현재 한국 영화의 르네상스의 근간에는 비정규직 영화인들의 고혈과 눈물 겨운 노동시간이 자리잡고 있을 겁니다. '예술의 길은 고되다, 배움의 여정이다'라는 구닥다리 도제 시스템의 이데올로기가 이 현실을 가린 탓이겠지요.
민주노동당, 유명 배우들과 감독들의 지지를 받았다고 헤벌레 입 벌릴 필요 없습니다. 그 명단에 빠져 있던, 진정으로 진보된 삶을 바래며 지지를 보냈던 대다수의 보이지 않는 비정규직 스텝들의 열망을 담아낼 그릇을 준비해야 할 것입니다.
한나라당과의 정책 공조를 할 수 있다는 민주노동당이니만큼, 영화인들 역시 이제는 '진보'라는 뭉뚱그려진 대의 앞에서 이름값을 과시하지 말고, 한국 영화의 발전과 그 밑에 가려진 더러운 현실을 지양하려는 구체적인 정책들로 민주노동당과 대면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스타 배우와 감독들의 '좌파 매명'에 대한 의심을 떨궈내는 길입니다.
몇 번의 조직화 움직임이 있었지만, 충무로 스텝들 지금껏 영화 좋아한다, 는 죄로 장시간 노동으로 착취당해온 거 분명한 사실입니다. 조희문 교수, 헛소리 그만 하시지요. 당신이 한 번 현장에서 카메라 가방 들고 낑낑거리며 다녀보세요. 청테이프 바지에 붙인 채 조명 다리 끌어안고 한 번 졸아보세요. 투자사, 제작사, 그리고 님 같이 보수적인 분들은 자본 회수의 불투명성을 내세워 충무로 노동 인력들의 착취를 끊임없이 정당화해왔습니다. 임금 상승이 충무로 영화 산업을 압박한다는 소리, 자본가의 잠꼬대와 똑 닮아 있지요.
충무로 영화 산업 시스템을 변화시키면 됩니다. 코딱지만한 한국 영화 시장에서 무한경쟁적으로 이뤄지고 있는 자본 투자 방식과 치고 빠지기 바쁜 게릴라 자본들의 움직임을 제어하면 됩니다. 또, 몇 명 되지도 않은 배우들에게 돈을 쳐발라가며 영화 제작하는 참 못난 스타 시스템, 스텝들의 처우는 고려치 않고 단기 이익만 챙기려는 '블럭 버스터 병'을 치유하면 됩니다. 저예산 예술 영화와 작은 영화들에 대한 안전 시스템을 갖추면 됩니다.
두 편의 영화가 관객 천 만명 시대를 열고, 몇 편의 영화들이 유명 해외 영화제에 나가 상을 타고 하는 온갖 화려한 외피, 깜짝의 급성장에 눈이 현혹되어 보지 못하겠지만, 투자, 제작, 배급이 독점되어 있는 이 현실은 암담하기만 합니다. 적은 예산의 좋은 영화들이 살아나갈 숨통을 죄는 것도 그렇지만, 스텝들을 끊임없이 비정규직화하고 그들의 노동시간을 착취하는데 아무런 거리낌 없다는 것이 그 이유입니다. 영화제를 위한 카펫이 깔리고, 감독들이 인터뷰 노동자를 자처하며 바쁘게 입을 놀릴 때, 이들 스텝들의 모습은 어디에 있었던 걸까요?
영화가 좋아서, 단지 영화가 좋아서 어제도 오늘도 스텝들은 노비 문서에 사인하기를 멈추지 않고 있습니다. 성공하는 건 한 줌의 소수일 뿐이지만, 그들의 노동은 그렇게 쉽게 잊혀지고 끊없이 늘어선 관객의 줄과 영화제 스포트라이트 속으로 소멸되기 일쑤였지요.
그러나 이렇게 '계약'하는 충무로 스텝들은 사정이 그래도 나은 편입니다. 아예 계약조차 하지 못하고 '몸 품앗이'로 영화를 제작하는 독립영화판의 상황은 더욱 극악하기만 합니다. 이들 중 월 수입이 20만원이 되는 사람은 70%도 되지 않습니다. 자본의 구속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롭게 상상력을 구현하고 싶어하는 이들에게 신용불량과 전세 빼기는 거의 일상입니다. 이들의 자유로운 상상력은 이 사회 진보 문화에 링크된 젖줄의 한 가닥임에도, 그들의 생산력은 늘 잉여물로 취급되어 왔지요. 현장에서 어느 누구보다도 눈을 반짝이며 무임금으로 상호부조하고 있는데도 말입니다.
하긴 이런 상황이 비단 독립영화뿐이겠어요? 연극, 음악 등 비주류 인력들의 삶은 '생산적 노동'이란 이름 하에 가해진 노동 사회의 폭력 앞에서 시달리기도 바쁜 처지지요.
저는 민주노동당이 노동가치의 의미를 새롭게 갱신하는 당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프랑스의 예술 노조와 정부 당국의 협약 만큼은 아니더라도, 한국 사회의 비주류 문화 인력의 발품을 '공적 노동'으로 자리매김하고 정당한 평가를 내리는 정책을 내놓았으면 합니다. 물론 이는 다양성을 심급으로 삼는 진보 문화인들의 끊임없는 연구, 정책 생산 과정이 지렛대질되어야 하겠지요.
다음 번엔 민주노동당을 지지하는 영화인들의 명단이 화려한 크레딧 롤이 아니라 진짜 현실을 담지한 보고서였으면 좋겠어요./아도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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