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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도대체 어떤 책인가?
학자가 아닌 일반 독자를 염두에 둔 역사서, 이른바 역사 교양서의 최근 몇 년 사이 추세를 생각나는 대로 두서 없이 돌이켜 본다. 첫째, 하나의 주제를 통시적(通時的)이며 백과전서적으로 파고드는 책들이 최근 몇 년 사이 우리 출판계에서 붐을 이루었다. {빵의 역사}(하인리히 야콥 지음, 곽명단, 임지원 옮김, 우물이 있는 집), {얼굴의 역사}(니콜 아브릴 지음, 강주헌 옮김, 작가정신) 등을 예로 들 수 있다. 이런 성격의 책을 미시사나 일상사라는 용어로 일컫는 일도 많았다. 빵이나 얼굴처럼 비근한 주제를 통시적으로 다루기만 하면 그것이 곧 역사학에서 말하는 미시사나 일상사인 것으로 오해하는 것이다. 역사학의 전문 용어가 학계 바깥에서 오해 혹은 오용되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둘째, 역사 인물을 다루는 책들이 전에 없이 다양해졌다. 예컨대 이덕일의 {송시열과 그들의 나라}(김영사)가 어떤 의미에서는 성역으로 간주되던 영역을 건드렸는가 하면, 임경석의 {이정 박헌영 일대기}(역사비평사)가 현 단계에서 활용할 수 있는 방대한 자료를 치밀하게 고증한 성과를 보여주었고, 프랜시스 윈의 {마르크스 평전}(정영목 옮김, 푸른숲)이 애정과 비판적 거리의 균형을 성취한 마르크스 전기를 보여주었다.
셋째, 넓은 의미에서 우리 근대성을 주제로 한 책들이 자주 시도되고 있다. 천정환의 {근대의 책 읽기}(푸른역사), 권보드래의 {연애의 시대}(현실문화연구), 박천홍의 {매혹의 질주, 근대의 횡단}(산처럼) 등을 예로 들 수 있다. 이 주제에 관해서는 역사학자들보다는 국문학자들이 한층 더 부지런한 모습을 보여준다는 점이 특징이다. 넷째, 일종의 역사 다이제스트, 즉 '하룻밤에 읽는~', '~100장면' 등의 책들도 꾸준히 출간되어 꾸준한 인기를 끌었다. 물론 역사 다이제스트라고 해도 책의 성격은 다양한 편이어서 예컨대 클라우스 뮐러의 {돈과 인간의 역사: 고대부터 현대까지 돈을 둘러싸고 벌어진 역사적 사건들}(김대웅 옮김, 이마고)처럼, 특정 주제를 다이제스트하는 책들도 비교적 자주 볼 수 있었다.
다섯째, 역사 교양서는 아니지만, 소설 분야에서 시도되는 역사와 문학의 교호(交互)가 많은 독자들에게 각광받고 있다. 김훈의 {칼의 노래}(생각의 나무), 김영하의 {검은 꽃}(문학동네), 김탁환의 {방각본 살인사건}(황금가지) 등을 예로 들 수 있다. 이들 세 작가는 현재 문학 출판 시장에서 '드물게도' 잘 나가는 브랜드들이기도 하다. 대중이 역사를 소비하는 통로, 즉 장르 가운데 TV 사극이나 영화가 가장 대중적이라면, 그 다음이 바로 역사 소설이며 그 다음이 역사 교양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뉴턴에서 조지 오웰까지}를 말하기 위해 역사 교양서의 추세 몇 가지를 나열한 까닭은 다른데 있지 않다. {뉴턴에서 조지 오웰까지}가 그런 추세들 가운데 어느 것에도 단적으로 속해 있지 않다는 걸 말하기 위해서다. 이 책은 비근한 주제를 다루지도, 한 인물만을 집중적으로 조명하지도, 우리 근대성을 주제로 하지도, 역사를 먹기 좋게 통조림으로 만들지도, 역사와 문학을 교호시키지도 않는다. 그렇다면 이 책을 무엇으로 규정할 수 있을까? 일독(一讀)을 하면서 얼른 떠오른 생각은 고급 역사 에세이라는 것이다.
그는 황금 송아지 숭배를 꾸짖으며 '기계 몰록'에 인신을 희생 제물로 바치는 행위를 질타했다. 그는 불의한 자들의 부주의한 귀에 진노의 나팔을 불었다. 자본은 물신(物神)이며 거짓 신이라고. 마르크스의 지적 편력은 온전히 한 바퀴를 돌았다. 경제이론가의 얼굴은 젊은 이상주의 철학자의 얼굴과 결합되었다. 그에게 궁극적인 악이란, 정신과 영혼이 잔인한 물신의 지배에 종속되는 것이었다. (p.486, J. W. 버로우, '마르크스의 다양한 모습들')
오직 인간만이 자신을 구원할 수 있으며, 인간의 의지만이 그 도구라는 그의 주장은 그의 시대에도 진실이었지만 우리가 사는 기술 시대에도 여전히 타당하다. 루소가 예언자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나날이 복잡해지고 있는 문화 속에서 인간 존재를 어떻게 단순화할 것인가 하는 것은 커다란 문제이다. 루소가 생각한 대로 인간은 선하게 태어나지는 못할지라도, 적어도 선을 향한 잠재력을 지니고 태어난다. 만일 의식적인 집단적 노력에 의해 그 잠재력을 깨닫지 못한다면, 인간은 멸망의 지점에까지 도달한 것이다. (p.246, J. 크리스토퍼 헤럴드, '고독한 방랑자 루소')
사회 의식과 목적 의식만 있다면, 나는 개인주의의 가치에 대해, 심지어 개성 숭배와 탐구의 가치에 대해서도 열렬한 지지를 보낸다. 내게 있어서 로만주의의 반란은 생명력이자 즐거움이다. (p.275, 해럴드 니콜슨, '로만주의의 반란')
단순히 역사학적 지식을 정리하여 전달하는 게 목적이라면, 또한 역사학적 연구(historical studies)라면 위와 같은 글은 나오기 힘들다. 포폄(褒貶)의 춘추필법(春秋筆法)까지야 아니더라도 이 책의 여러 글쓴이들은 자신이 다루는 인물이나 사건이나 시대 사조에 대해 각자의 관점에 따라 총평(總評)하고, 때로는 글쓴이 개인의 호불호까지 드러내는가 하면, 보다 깊은 의미, 보편적인 의미까지 진술하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그들은 '나는 이렇게 생각하고 느꼈다'는 것, 즉 '나'를 숨기지 않고 비교적 분명하게 드러냄과 동시에 그런 '나'의 생각과 느낌을 보편적인 차원과 연결시키려는 노력을 보여준다.
역사학적 주제를 놓고 주관적인 상념을 일방적으로 배설하는 데 그쳤다면 '고급' 역사 에세이라 일컬을 수 없다. 그것은 역사학적 주제를 빙자한 '문청'(文靑) 취향의 부박한 에세이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역사학적 주제를 놓고 그것이 오늘날 지닐 수 있는 의미를 견강부회하는 데 그쳤다면 역시 '고급' 역사 에세이라 말할 수 없다. 그것은 역사학적 주제를 빙자하여 급히 휘갈겨 쓴 근거 박약의 신문 칼럼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이 책이 바로 그런 두 가지 함정에 빠지지 않는 역사 에세이, 즉 고급 역사 에세이들로 이루어진 책이라고 생각한다. 덧붙이자면, 다루는 주제의 덩치가 크든 작든 아니 오히려 클수록, 글을 읽는 사람의 머리와 가슴에 강한 인상을 남기도록 박진(迫進)하게 표현한다는 게 '고급' 역사 에세이의 빼놓기 힘든 특징이다. 영국 제국주의의 몰락을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 '표현'하는 다음 글을 예로 들고 싶다.
모든 위대한 영광은 사라졌고 갑옷은 벗겨졌다. 거창한 팡파르와 더불어 안치되었던 위대한 여왕의 조각상은 슬그머니 철거되었다. 제국주의는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힘을 잃고 말았다. 영국인은 아무런 유감 없이 그 찬란한 빛을 마음에서 지웠다. 피스헬멧(열대 지방에서 직사광선을 막기 위해 쓰던 모자)과 야전욕조를 치우고 작은 세계로 되돌아간 것이다. (p.541, 제임스 모리스, '영국의 제국주의자들')
조금만 읽어도 식욕 아니 독서욕이 도는 책과 만나면, 특히 그 책의 내용이 서양 문명에 터 잡고 있는 책이라면, 또한 글쓴이가 외국 사람이라면 늘 드는 민족주의적인(?) 생각이 있다. 우리 필자가 우리 역사를 놓고 이 정도 수준의 책을 쓰면 좋겠다는 생각. 이 '고급 역사 에세이'를 놓고서도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을 금할 길 없었다. 어쩌면 이것은 우리 출판계의 에디터십(editorship) 문제인지도 모른다. 요컨대 이 정도 수준에 필적할만한 많은 필자들이 있는 데도 미처 알아보지 못하거나, 알아보려는 노력을 게을리 하거나, 설사 안다해도 이번에는 어떤 형식으로 어떤 주제 범위에 따라 '서말의 구슬을 보배로 꿸 것인지' 알지 못하는 것. 앞으로 우리 출판계 에디터십의 분발을 기대해 본다.
2. 끝이 아닌 출발점
이 책에서 내가 가장 흥미롭게 읽은 부분은 J. H. 플럼의 '18세기 유럽의 그랜드 투어'라는 글이다. 플럼은 로마 제국의 지배라는 '영광'을 누리지 못한 영국인, 독일인, 러시아인, 스칸디나비아인 등이 문화적 열등감 때문에 '위대한 과거'를 지닌 프랑스와 이탈리아로 몰려갔다고 지적한다. 그 결과 서유럽, 북유럽, 동유럽 등에서 남유럽 문화에 대한 열광적인 붐이 조성되었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그랜드 투어는 여행 문화의 차원에서 더 나아가 계몽주의를 전 유럽에 확산시키는 구실까지 했다는 게 플럼의 견해다.
그랜드 투어 덕분에 이탈리아에서 획득한 심미안은 프랑스에서 얻은 교양과 결합했으며, 그 결과 종전에 야만 상태와 비슷한 수준에서 살았던 유럽 외곽 지역은 도회적 세련미를 얻었다. 서양 세계는 이로 인해 고대 유럽과 고대 유럽의 예술적 유산에 대한 애정을 갖게 되었으며 그것은 더 이상 귀족 계급에게만 한정된 것이 아니었다. 한때 귀족만의 특권이었던 것이 이제는 영어 사용권 인구 모두가 공유하는 경험이 되었던 것이다. (p.196, J. H. 플럼, '18세기 유럽의 그랜드 투어')
내가 플럼의 글을 가장 흥미롭게 읽은 까닭은, 그 글을 읽기 얼마 전부터 제레미 블랙(엑세터 대학 역사학과 교수)의 {이탈리아와 그랜드 투어(Italy and the Grand Tour)}(Yale University Press, 2003)를 읽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우연히도 같은 주제를 다룬 글(다른 한 쪽은 단행본이지만.)을 비슷한 시기에 읽게 되었던 것. 블랙에 따르면, 18세기 영국 사회 엘리트 계층에게 외국으로의 장기 여행은 이상적인 교육의 일부였을 뿐 아니라 사회적 지위를 나타내는 중요한 상징이기도 했다. 이탈리아, 특히 로마는 그러한 영국 여행가들의 주요 목적지였다. 블랙은 그러한 영국 여행자들의 개인 일기와 편지들을 주요 사료로 활용한다. 광범위한 독자층을 염두에 두고 여행기를 쓴 문인 여행가들의 기록이 아니라 사적인 기록물을 주요 사료로 활용한 까닭은 무엇인가? 그랜드 투어의 이상화된 모습과 그 현실 사이의 불일치 혹은 모순을 조명하기 위함이다. 사람들이 추구했던 것, 이상적인 것으로 생각했던 것과, 그 사람들이 실제로 경험하고 행동했던 것 사이의 불일치에 주목하려 한 것이다.
한편 아직 본격적으로 읽기 시작하지는 않았지만 브라이언 도란(이스트 앵글리어 대학 강사)의 {그랜드 투어의 숙녀들: 18세기 유럽에서 계몽과 모험을 추구했던 영국 여성들(Ladies of the Grand Tour : British Women in Pursuit of Enlightenment and Adventure in Eighteenth-Century Europe)}(HarperCollins, 2001)도 필자의 독서욕을 자극한다. 도란은 그랜드 투어에 나선 영국 여성들의 현실적 상황을 공감적으로 그려낸다. 도란에 따르면 그랜드 투어는 18세기 영국 여성들에게 사회가 요구하는 여성으로서의 엄격히 한정된 구실에서 벗어날 자유, 지성을 개발하고 실현시킬 수 있는 기회, 원치 않는 혼인으로부터의 도피, 때로는 여행 작가로서의 경력을 쌓을 수 있는 기회 등으로 다가왔다. 그러나 도란은 이런 자유와 기회들이 값비싼 대가를 치러야 했다고 지적한다. 당시 유럽 대륙을 여행하는 것은 안전하지도 안락하지도 않았다. 특히 여성이 오랜 기간 외국을 여행한다는 것은 애국심이 없는 행동, 여성적이지 못한 처사, 나아가 정숙하지 못한 행실로 비난받을 위험이 컸던 것이다.
나는 역사를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학자는 아니지만 흥미를 느끼는 역사학 도서를 이것저것 탐독하는 일반 독서가의 입장에서, 아직까지 미처 주목하지 못했던 많은 흥미로운 주제를 {뉴턴에서 조지 오웰까지}에서 발견하게 된다. 예컨대 '그랜드 투어'라는 주제처럼 이 책에서 제시된 주제와 글쓴이의 관점을 바탕으로, 비슷한 주제를 다룬 다른 책들을 찾아 읽어보고 새로운 관점과 만나면서 해당 주제에 대한 이해를 심화, 확장시켜나갈 수 있는 것이다. 비교적 다독하는 필자의 경험상, 그런 지적 자극을 받을 수 있는 역사 교양서는 흔치 않다. 요컨대 이 책은 이 책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보다 풍부하고 다양한 지적 체험으로 떠나는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다.
3. '본문 깊이 읽기'의 깊은 뜻은?
이 책에서 각별히 주목해야 할 부분이 있으니 바로 각 장 끝의 '본문 깊이 읽기'다. 언뜻 보면 그냥 일반적인 주석(註釋) 혹은 주요 개념 풀이에 지나지 않은 것 같다. 본문에 나오는 고유 명사의 뜻을 풀이하거나 중요 사항들을 보충 설명해 놓았으니 말이다. 그런데 왜 '본문 깊이 읽기'란 말인가? 우선 그 분량을 보자. '표트르 대제와 서유럽'을 보면 본문이 20쪽이고 '본문 깊이 읽기'가 25쪽이다. 다른 장들도 본문과 '본문 깊이 읽기'의 분량이 대등하거나 후자의 분량이 많은 경우가 드물지 않다. 솔직히 이런 책은, 주석이 본문보다 많은 경우가 대부분인 고전 주석서를 빼고는 처음 봤다.
'본문 깊이 읽기'를 넣지 않았으면 이 책의 쪽 수는 지금보다 거의 절반 가까이 줄었을 것이다. '본문 깊이 읽기'를 시도한 번역자의 수고도 여간한 수고가 아니고 출판사로서는 모험이 아닐 수 없다. 그 수고와 모험에는 어떤 깊은 뜻이 있을까? 이 책의 '본문 깊이 읽기'는 문자 그대로 '깊이 읽기'이다. '표트르 대제와 서유럽'의 '본문 깊이 읽기'에는 프리깃함(frigate)에 관한 자세한 설명이 나와 있다. 이는 118쪽에 나오는 '프리깃함 건조 작업에 직접 참여했고, 그 결과 표트르는 발트 해를 제패할 수 있었다'는 문장의 '프리깃함'에 관한 설명이다. 하지만 그 이상이다. 요컨대 '프리깃함'이라는 말의 뜻을 풀이하는 차원이 아니라, '표트르의 발트 해 제패'라는 중요한 사건의 요인이라고 할 수 있는 '프리깃함 건조 작업 참여'를 보다 깊이 들여다 볼 수 있게 해주는 설명이다.
물론 프리깃함에 관한 설명은 독자들도 백과사전이나 인터넷 자료를 검색하면 어렵지 않게 얻을 수 있다. 그렇다면 번역자는 괜한 수고를 한 걸까? 결코 그렇지 않다. 여기에서 관건은, 번역자가 다른 말이 아니라 하필 프리깃함을 자세히 설명했다는 점, 바로 그러한 번역자의 선택에 있다. 바꿔 말하면, 백과사전이나 인터넷 자료에서 프리깃함에 관한 정보를 누구라도 어렵지 않게 얻을 수 있다 해도, 프리깃함에 관한 정보를 찾아볼 필요가 있다는 인식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번역자는 '본문 깊이 읽기'의 항목들을 선택함으로써 텍스트를 보다 깊이 이해하는 데 필요한 컨텍스트를 짜낸 것이다. 적어도 나는, '본문 깊이 읽기'에 관한 번역자의 진정한 수고는 '본문 깊이 읽기'에 들어갈 항목을 판단하는 과정에 있었다고 생각한다.
또 다른 의미를 찾아본다면, '본문 깊이 읽기'가 그 자체로 본문 구실을 할 수 있다는 점이다. 독자의 읽기 방식이나 태도에 따라서는, '본문 깊이 읽기'를 본문에 대한 일종의 보조 자료가 아니라 본문으로, 배경이 아니라 전경으로, 즉 컨텍스트가 아니라 텍스트로 읽을 수 있다. 예컨대 '영국의 제국주의자들'에 나오는 '리빙스턴'에 대한 '본문 깊이 읽기'의 자세한 설명(pp.551-559)은 그 자체가 리빙스턴 약전(略傳)에 가깝다. 따라서 '본문 깊이 읽기'의 그 부분을 텍스트로 삼고 본문인 '영국의 제국주의자들'을 컨텍스트 삼아 읽을 수도 있다. 이 책의 '본문 깊이 읽기'는 독자가 텍스트와 컨텍스트, 전경과 배경을 상호 전환시키면서 읽을 수 있는 형식적, 내용적 조건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조건을 활용하는 독자는 이 책에서 선형적인 독서가 아니라 비선형적인 독서를 체험할 수 있으며, 독자에 따라서 제 각기 다른 독서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