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배중인 나의 왕
아르노 가이거 지음, 김인순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4월
평점 :
절판


삶이라 불리는 피할 수 없는 패배 앞에서 우리에게 남은 유일한 가능성은 그것을 이해하려는 시도이다. - 밀란 쿤데라

이 책은 오스트리아의 작가 아르노 가이거가 알츠하이머에 걸린 아버지의 이야기를 쓴 자전적 이야기다.

˝삶이 아버지에게서 한 방울 한 방울 새어나가고 있다. 아버지의 인품이 아버지라는 사람에게서 한 방울 한 방울 새어나가고 있다. 이분이 나를 낳아주시고 키워주신 아버지라는 느낌은 아직 고스란히 남아 있는데, 예전 모습을 찾아볼 수 없는 순간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이들 부자도 여느 집처럼 처음부터 사이가 아주 좋은 건 아니었다. 사춘기를 지나며 부자 관계는 소원해졌고 아버지의 알츠하이머를 깨닫지 못했던 초기에는 아버지의 이상한 행동 때문에 더욱 관계가 나빠지기도 했다. 그러다 아버지의 병을 깨닫고 나서는 아버지를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알츠하이머가 잃는 것만이 아니라 얻는 것도 있으며 아주 절망적이지많은 않다는 걸 깨닫는다.

˝우리 사이에 뭔가가 있다. 세상을 향해 내 마음을 더 활짝 열게 만든 뭔가가. 그것은 말하자면 보통 알츠하이머병의 단점이라고들 하는 것, 즉 관계 단절의 반대다. 때로는 관계가 맺어지기도 한다.˝

아버지는 병에 걸렸지만 순간 순간 위트와 지혜가 넘치는 말들을 하고 그 대화를 보는 재미가 이 책의 거의 절반을 차지할 정도이다. 그리고 작가가 담담히 풀어놓는 아버지의 성실한 생애는 (안나 카레리나의 남자 주인공 레빈을 닮았다고 작가는 평했다. 뭐든 더 좋게 만들고 싶어 한다는 점에서..) 한 평범한 농부의 숭고한 인생의 감동을 더한다.

˝이제 아버지가 내 세계로 건너올 수 없으니 내가 아버지에게로 건너가야 한다. 저기 너머에서, 아버지의 현재 정신 상태의 한계 내에서, 객관적이고 목표지향적인 우리 사회 저편에서. 아버지는 여전히 주목할 만한 사람이다. 일반적인 기준에서 보자면 언제나 온전히 이성적이라고 할 수는 없어도 어떤 식으로든 빛나는 구석이 있다.˝

치매 환자를 돌본다는 것은 절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아버지를 이해하려고 애쓰고 아버지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작가의 태도는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에서 의사 올리버 색스가 보여준 태도와 오버랩되며 인간을 대하는 관점에 대해 많은 깨달음을 준다.

아버지는 집에 있으면서도 자꾸만 집에 가고 싶다고 하는데 치매 환자들은 삶의 방향감을 상실한 탓에 어디서도 편안함을 느낄 수 없어서 안식처를 갈구한다고 한다. `유배중`이라는 것은 자신의 안식처를 잃어버린 세상과 단절된 상황을 표현하는 것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품위를 잃지 않고 인생의 마지막을 멋지게 살아내는 아버지를 `왕`이라 표현한 참으로 멋진 제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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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디언밥 2015-08-28 02:1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 리뷰글이 없길래 표지랑 제목만 들여다보고 있었는데 금방 올라오네요! ㅎㅎ
리뷰만 읽는데도 많은 생각이 들어요. 저도 꼭 읽어봐야겟습니다

살리미 2015-08-28 02:13   좋아요 2 | URL
늦은 밤에 이렇게 만나뵈니 반가워요^^ 저는 이 책 다 읽고 마무리 좀 하느라 늦어졌어요^^ 편안한 밤 되세요~^^

해피북 2015-08-28 12:0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 이제 아버지가 내 세계로 건너올 수 없으니 내가 아버지에게로 건너가야 한다`는 글 마음을 울컥하게 합니다.그리고 오로라님 처럼 제목을 다시 살펴보고 또 다시 울컥. 멋진 제목이였어요. 저두 보관함에 잘 담아둬야겠습니다 점심 맛있게 드세요 오로라님^~^

살리미 2015-08-28 12:17   좋아요 0 | URL
좋은 글을 읽고.. 서로 같은 마음을 나누고... 책이 있어 행복한 오후네요~^^ 해피북님도 맛점~ 하세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