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야행관람차 ㅣ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27
미나토 가나에 지음, 김선영 옮김 / 비채 / 2011년 2월
평점 :
'등단과 동시에 최고가 된' 작가라는 어마어마한 타이틀이 붙은 이 책의 저자 미나토 가나에는 현재 우리나라에서도 상영중인 영화 '고백'의 원작으로 데뷔했다. 이 책으로 각종 문학상을 거머쥔 것도 모자라 300만부"씩"이나 팔아 치우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다. 일본 문예춘추에서는 <<야행관람차>>의 첫 줄에서부터 빨려든다길래, '대체 어떻길래?'하는 심정으로 집어 들었는데 결론부터 말하면, 너무 기대가 커서 그랬는지, 장르소설인 줄로 잘못 알고 읽어 그런 건지 다소 지루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이 책은 '범인이 누굴까?'하며 궁금증을 증폭시키는 구조가 아니라, 초반부터 범인을 드러내놓고 있어 장르소설이라기보다는 현대사회에서 제 기능을 상실해버린 가정의 문제점을 고발하고 그 의미를 되짚는 데 초점을 맞춘 가족소설로 해석하는 게 더 낫겠다.
도쿄의 한 고급 주택가에 그들이 산다. 그 집에는 의사 아버지에 아름다운 어머니, 의대생 큰 아들, 유명 사립학교에 재학중인 딸과 공부도 잘하고 운동도 잘하는 데다 얼굴은 아이돌 스타를 쏙 빼닮은 아들이 그림 같은 집에서 우아하게 산다. 그 집 맞은편에는 가족이라고는 아내와 딸 하나밖에 없는데도 그마저 관심을 보이지 않는데다 무능하기까지 한 아버지와 딸에게 온갖 모욕과 멸시를 견디며 살아가는 어머니, 그리고 사립학교에 떨어진 이후로 매사에 엄마 탓만 하며 패륜아가 되어버린 딸이 바둥거리며 산다.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을까? 그래, 그날 사건을 두고 할 수 있는 말이라곤 이 말뿐인 것 같다. 어쩌다가 그 집에 그런 불상사가 일어났을까? 완벽해 보이던 다카하시 집에서 "난데없이" 살인사건이 일어났다. 그것도 범인이 그 집 식구들 중 하나라니! 이 책은 사건이 일어나기 몇 시간 전부터 그 두 집안을 비롯해 또 하나의 참견쟁이 아줌마 고지마 사토코까지 세 집안의 시선을 통해 사건을 전달한다. 고급 주택가의 토박이라는 사실에 '빈곤한 자부심'을 한 가득 안고 사는 부유층내지는 기득권, 고지마 사토코 아줌마와, 살인사건이 일어나기 전까지만 해도 그 동네와 격이 딱 맞던 신흥부자 다카하시 가족과, 그리고 동네의 격을 확 떨어뜨린다고 멸시를 받을지언정 '부자 동네에 사는 가난한 주민'이라는 타이틀마저 쉽게 포기하지 못하는 서민 대표, 아야카네 가족까지 이 책에서 나타나는 세 가정을 통해 '부의 계급'이 확실하게 드러난다.
언덕 위에 자리한 고급 주택가에 사는 이들은 남보다 높은 지대에 집을 짓고 산다는 사실 때문에 자신이 남보다 우월하다는 값싼 환상에 젖은 채 언덕 아래에서 사는 사람들과는 철저히 격리돼 산다. '모든 게 언덕길 때문이다. (중략) 언덕길을 내려갈수록 자꾸만 무능한 인간들이 사는 세계에 다가가는 기분이 든다. 이 세상에는 계급이라는 것이 분명히 존재하고, 아야카가 입어서는 안 되는 높은 계급의 교복과 스쳐 지나갈 때마다 몸을 둘러싼 얇은 껍질이 갈라지는 듯한 통증을 느낀다. (p. 104)' 언덕을 경계로 해서 사람들은 크게 두 부류로 나뉜다. 이른바 그 "부의 언덕"을 넘은 이들의 하루는 호화롭고 우아하기만 한데 반해, 그 언덕의 능선이 제대로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저 아래에 사는 이들과, 힘이 부쳐 언덕배기 어딘가에 주저앉고 말아버린 이들의 하루는 고되고 힘겹기만 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오늘도 어제처럼 그저 묵묵히 언덕길을 올라갈 뿐이다. 이미 언덕을 다 넘은 이들로부터 언덕길을 오르는 도중에 설사 바보 취급을 당하더라도 그 언덕길은 그들에게 이미 삶의 숙명적 과제나 다름없다. 아야카네 세 식구 모두 언덕길에 대해 다르게 반응하지만, 그들 모두 "언덕길 병"에 걸린 피해자라는 점은 마찬가지다. 외동딸은 어느새 패륜아가 되어버렸고, 가장인 아버지는 가정에 대한 기본적인 의무마저 회피하고 있고, 어머니의 경우는 더 소름 끼친다. 힘겹게 일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그 언덕길에서 '오늘 하루도 열심히 살았어.(p. 130)'라며 스스로를 위안할 수 있는 용기와 힘은 대체 어디서 나올까? 언덕길을 오르는 그 시간이 하루 중에 가장 행복한 시간이라는 한 중년 여성의 망가진 삶이 과연 "행복"이라는 단어로 포장되도 되는 걸까? "너무 행복한" 그녀, 마유미는 그만큼이나 "복이 터졌던"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의 마츠코를 연상시킨다.
"평범한 감각을 가진 사람이 이상한 곳에서 무리해서 살면 점점 발 밑이 기울어지는 것처럼 느끼게 돼. 힘껏 버티지 않으면 굴러 떨어지고 말아. 하지만 그렇게 의식하면 할수록 언덕의 경사는 점점 가팔라져..... (p. 314)
언덕과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 '야행관람차'가 불러 일으키는 감정의 무게는 비슷하다. 어두컴컴한 밤에 관람차를 타면 과연 무엇이 제대로 보일까? 그림 같은 집에서 영화처럼 살 거라 여기던 옆집에게도 알고 보니 차마 말 못할 속사정이 있었다지만, 바로 앞집, 또 옆집에 사는 이들은 알 턱이 없다. 죽어라고 그 언덕배기를 넘어보겠다며 애를 쓴 탓에 기력을 다 잃고는 마치 한밤중에 관람차에라도 올라탄 것처럼 타인을, 타인의 가정을, 타인의 삶을 왜곡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던 건 아닐까? 그 집안에서 새어 나오는 한숨이건 소음이건 웃음이건 모두 들리지 않는다. 타인에게 관심을 줄 여유도 없고, 그래야 할 이유도 없으니 말이다. 멀리서 반짝이는 불빛과 그 빛의 세기에 시야가 흐려지고 있는 줄도 모르고, 또 그 빛이 어디서부터 오는 것인지도 알 지 못한 채 오로지 그 반짝임에 매료돼 허공에 대고 감탄사를 날리느라 바쁜 사람들....
이야기는 굉장히 단순하지만 은근히 여지를 많이 남기는 작품이다. 하나의 비극적인 사건을 두고 이웃 간에 그리고 가족 간에 느끼는 감정의 차이를 보며 낯설지 않은 얄팍함에 속이 쓰려온다. '남의 불행을 보아야만 실감할 수 있는 행복을 진정한 행복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p. 277)'
장르소설에서 얻는 쾌감과 재미만 미리 덜어둔다면,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