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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태일 평전
조영래 지음 / 돌베개 / 1983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전태일평전을 읽고 나서……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은 감정에 약한 편이었지요. 조금만 불쌍한 사람을 보아도 마음이 언짢아 하루종일 기분이 우울했던 그는 자신이 너무도 그런 환경을 속속들이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겁니다. 그늘을 알고, 눈물의 의미를 알고 있는 전태일을 늘푸른은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는 말했습니다. '다 같은 인간인데 어찌하여 빈한 자는 부한 자의 노예가 되어야 합니까. 왜 가장 청순하고 때묻지 않은 어린 소녀들이때묻고 부한 자의 거름이 되어야 합니까?이것이 사회의 현실입니까? 빈부의 법칙입니까?' 라고……

그는 평화시장에서 인간 이하의 대우를 받으며 노동을 하면서도 자신이 겪는 고통보다 14세의 어린 여공들이 겪는 고통에 가슴 아파하고 분개합니다. 그래서 재단사가 되기로 결심하고 노동자들의 삶을 좋게 하려고 노력해 보지만, 평화시장 뒤에 버티고 서 있는 거대한 사회 모순 속에 그의 노력은 무참하게 깨집니다. 그러나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최후 수단인 분신자살을 통해 사회 모순에 불을 붙이고 전태일은 영원한 삶을 얻게 되지요. 인간적인 대우를 받고자 실천한 그의 행동에 저는 오랫동안 할 말을 잃었습니다. 죽었지만 그의 옹골참은 정녕 저에게 그가 아름다운 청년으로 남아있기에 충분했습니다.

전태일은 타의에 의해, 환경에 의해 하고 싶은 공부를 하지 못했습니다. 청옥에서의 꿈같은 학생시절이 그의 생애 중 아마 가장 행복한 순간이 아니었을까요?그러나 조영래씨의 표현대로 전태일의 정신적인 성장과정 가운데에서 이 당시에 이미 자신을 거부하는 '부한 환경'의 현실에 대한 비판, 그리고 그 현실과 싸워 이기려는 분명한 의지가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고 한다면,우리는 그가 남들처럼 고등교육을 받을 수 없었던 것을 슬퍼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현실이야말로 가장 좋은 교사이기 때문이지요.

그 현실의 가장 깊은 질곡 한가운데에서 몸부림치면서, 자기의 심장으로 느끼고 스스로의 머리로 생각할 수 있었던 사람이야말로, 교과서의 해설이나 권위자의 암시를 통하여 왜곡되는 일이 없는 현실의 벌거벗은 모습을 생생히 보지 않을 수 없었던 사람이야말로, 현실로부터 가장 많은 것을 배울 수 있고 그리하여 자신의 인간성을 가장 열렬하게 지킬 수 있는 것이겠지요.

비록 학력은 짧지만, 전태일은 저보다 더 성숙하고 훌륭한 생각과 사상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과연 나는 인간다운 삶을 진정으로 생각해 본적이 있었는가? 또 인간의 존엄성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있었는가? 자문 해봅니다. 결론은 그저 생각으로만 그치는 삶을 살아온 시간이 더 많았다는 것입니다. 내 목소리, 내 의지로 살고 싶은 소망을 갖고는 있으나, 사실 전 불안한 투쟁보다는 편안한 나태와 안일을 선호했던 것은 아닐까요? 늘 몸보다 마음이 편안한 삶을 원했으면서도 정작 앞장서서 행동으로 실천하는 삶에는 늘 비껴 서 있지 않았는지 반성합니다. 그 반성이 실천에의 의지로 내 삶을 뜨겁게 달굴 수 있었으면 더 좋겠습니다.

문득 안도현 시인의 시가 생각났습니다.
'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너에게 묻는다>전문
뜨겁게 살다간 한 사람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을 알고 있노라고 안도현 시인에게 자신있게 말하고 싶습니다.

마지막 눈을 감으면서 한 그의 한 마디는 '배가 고프다'는 것이었지요.며칠동안 그의 마지막 한 마디 '배가 고프다'는 그의 음성이 제 귀에서 떠나질 않았습니다. 그에게 따뜻한 식사 한 끼를 대접하고 싶은 간절한 소망으로 가슴이 뜨거워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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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에게
서상택 지음 / 시학사 / 1992년 4월
평점 :
품절


<img src='http://cafe14.daum.net/Cafe-bin/Bbs.cgi/evergreenmompds/dwn/zka/B2-kB27m/qqfdnum/7/qqfname/아내에게.jpg'> § ...은비친구 유정이 아빠에게 받은 시집... §

딸아이 은비의 초등학교 6학년 때, 단짝친구 유정이는 참 예쁜아이였다.
외모는 물론 마음까지 참 곱고 단정한 그런 아이였다.
그 아인 무남독녀로 부모님의 사랑을 톡톡히 받으면서 자랐지만,
타인을 배려하는 아름다운 심성도 함께 지니고 있었지.

아무래도 그런 심성은 시를 사랑하는 아빠의 영향이 아니었을까?
유정이의 부모는 참 열심히도 붙어(?) 다녔다.
난 그 부부의 모습을 동네 슈퍼에서, 시장에서, 비디오 대여점에서,
참 자주도 만났었지.
특히 비디오 대여점에서 만나게 될 때면 언제나 그들 부부가 함께 의논해서
빌리는 비디오는 어떤 영화일까 참 궁금하기도 했다.

유정이 아빠는 정말 소년 같은 남자였다.
어느 날, 유정이가 우리 집에 놀러와서 불쑥 내미는 시집 한 권!
내 이름까지 아주 정갈하게 쓰셔서 선물해 준,
유정이 아빠가 직접 쓰신 아주 특별한 시집이었다.
그 시집은 다름 아닌 그들 부부의 결혼 1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유정이 아빠가 그 동안 써 온, 시들을 엮은 것이었다.
그 시집을 결혼기념일 선물로 아내에게 주기 위해서...

시들은 모두 좋았다.
아빠를 쏘옥 빼 닮은 유정이를 보면서
난 오랜만에 시다운 시를 만난 듯 그렇게 유정이 아빠의 시를 읽어 내려갔다.

<img src='http://www.crmpark.com/images/line2.gif'>

自序
- 결혼 10주년 기념 詩集에 부쳐

지난 10년 동안
한결같은 사랑으로
나의 內服 빨래를 해 준 아내에게,
나를 위해 국을 데우고 더운밥을 지어온 아내에게,
일 년에 한 번씩은 밤을 새우며
함께 이삿짐을 꾸리고 풀어야 했던
나의 착한 아내에게,
사랑 노래 한 소절을 바친다.

당신을 짝사랑해 오던 내가
당신 앞에서 사랑을 고백한 그날처럼
그냥 부끄러운 오늘이다.

………………………………………

1992. 4. 18. 서 상 택



◎ 아내는 무슨 꿈을 꾸나 ◎

연두빛 햇살은
먼지처럼 풀풀 날리고
물방울처럼 데구르르 굴러다니던
1982년 신혼의 봄

경북 포항시 변두리
담장 없는 10평 짜리 임대 아파트촌 그리고
맨 꼭대기 5층 8자 방 한 칸에 풀어놓았지
내 고향 부산에서 꾸려 온 아내의 새살림

아내의 집 떠나온 생활은
좁다란 부엌 안에 갇혀서
태엽인형 마냥 이리저리 부딪혀 멍이 들고
날마다 울보가 되어 갔지

오늘이라도
집으로 돌아가 버릴 것 같은 불안감에
아내의 신발을 내 마음의 말뚝에 동여매 놓고
밖을 나다녔던 그 해

가끔 화장거울 앞에 앉은
아내는 꿈을 꾸듯 언제나 말이 없다
아내의 꿈은 어떤 빛깔일까
여자임을 알 때 처음 꾼 하늘 다리 무지개 빛깔일까
웨딩드레스의 순결한 빛깔일까
아니면 칠 벗겨진 아파트 벽처럼 실망의 빛깔일까

오늘도 조심스럽게 누르는 초인종
환하게 문이 열리면 밖으로 새어나오는
친근한 집안 내음과 함께
하루를 기다린
피곤한 웃음으로 맞이하는 나의 아내여
아, 기다림의 꿈이여.

<img src='http://www.crmpark.com/images/line2.gif'>


몇 년 전,
늘푸른은 위의 시를 읽으며,
뜨거운 눈물을 흘렸었지.
오늘 또 다시 읽어보며,
역시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이 흘렀다.
유정이 아빠의 시 속에는 내 마음을 움직이는 묘한 움직임 비슷한 감동이 숨겨져 있었다.

유정이와 은비는 중학교 2학년 때 헤어졌다.
우리도 이사를 하고, 유정이네도 인천으로 이사를 했다.
둘은 가끔 메일을 주고받고 있다.
은비가 속내가 맑은 친구 유정이와 오래도록 우정을 아름답게 쌓아 나갔으면 참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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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공지영 지음 / 푸른숲 / 2006년 9월
평점 :
절판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를 읽고.....>

'절대로' '어차피' '그래도' 는 혜완과 경혜와 영선이 자주 썼던 부사어였다.
사람들은 자기의 성격과 행동 비슷하게 말투도 길들여지는 모양이다.
'절대로'라는 표현을 잘 사용했던 혜완은 왜 선우의 누이를 만난 자리에서 할말을 하지 못했을까?
그것은 결국, '그래 봤자 니가 어쩔 거야?'라는 시선으로 여성을 바라보는 이 사회에서 혜완 역시 놓여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혜완은 경혜에게, 남편한테 느끼는 어떤 모욕감을 각기 다른 사람에게서 열 배쯤의 강도로 느껴도 좋다면 이혼을 하라고 말한다.
공지영은 여성 문제를 세밀하게 분류하여 제기하고 있지만 해결책을 제시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난 선우가 혜완에게 건넸던 대화에서 실마리 같은 희망을 읽은 것도 같다.
불완전한 여자와 남자가 만나서 애쓰지 않으면 문제는 남을 수밖에 없다는 거....
요는 함께 애쓰는 거였다. 그래야 혜완처럼 씩씩하고 꿋꿋하게 생활하는 많은 여자들이 계속 당당할 수 있는 것이다.
사회가... 남자들이... 하면서 핑계를 대는 여자들이 더는 없기를 바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여자와 남자가 함께 노력하는 것이다.
자신이 목욕탕 앞의 발닦개처럼 모든 사람들이 자신을 밟고 가도록 내버려두는 일은 제발 그만 두고, 결혼생활에서 여자가 남자의 하녀가 아닌 동등한 관계를 만들어 가도록 노력해야 하지 않을까?
그리하여 아까운 시간을 낭비하며 다시 아픈 추억에서 즐거운 추억을 만들기 위해 노을 속으로 들어가는 우를 범하지 않길 간절히 바랄 뿐이다.
그런 면에서 혜완은 비겁하지 않았나 생각해본다. 혜완 아버지의 말씀처럼 한번 견디어 볼 수는 없었던 걸까?
그랬다면 재혼한 후 경환의 변화를 혜완이가 직접 경험하게 되었을지도 모를 일 아닌가?

세월은 우리를 변하게 한다. 10대 20대 30대 40대 50대..... 어떤 모습으로 변해 가는지 누구보다 자신이 잘 알리라.
그러한 변화가 발전적이고, 긍정적으로 아름답게 변화되기란 그토록 힘드는 것일까?
20대 초반의 세 친구는 스콜피언스의 [헐리데이]를 들으며 경쟁적으로 시집이나 평론집을 사들이고 김지하의 금지된 시들을 몰래 읽고,
돈을 쓸 일이 생기면 언제나 이 돈으로 몇 권의 책을 살 수 있나 생각하며,
책값이 그들이 지불하는 모든 돈의 가치를 재는 척도였던 그 시절의 세 친구.
그들의 30대를 책을 통해 만나며 또 다른 모습으로 변해 가는 그들의 모습을 지켜보며 가슴이 아파 옴을 느꼈다.
그 가슴앓이가 나의 변화를 살피는 것으로 이어졌을 때 울컥 토해 내고 싶은 오욕들을 만나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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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 어른을 위한 동화 4
안도현 / 문학동네 / 199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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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를 읽고 나서>
시끄러운 세상, 따분한 일상사에 지쳐 어디론가 떠나버리고 싶지만 지켜야할 가정이 떡하니 버티고 서 있는 주부들에게 소설과 동화와 에세이와 시의 중간 어디쯤을 들락거리고 있지만 어디에도 소속되기 싫어하는 책 안도현 시인의 <관계>를 권하고 싶다.
떠나고 싶어도 떠날 수 없는 자와 신선한 공기와 가슴까지 시원해질 맑고 깨끗한 물이 필요한 사람도 <관계>를 읽으면 좋을 것이다.

통신에서 만난 어느 주부가 말하길... 그렇게 하기 가장 좋은 방법중의 하나가 오랜만에 서점에 들러 자신에게 필요한 공기와 물을 공급 받아 보는 것이라고 했다. 그렇게 손에 잡힌 것이 어른을 위한 동화 안도현 시인의 <관계>라고... 꼬박 하룻밤으로 읽어낼 수 있는 얇은 책이었는데, 읽고 나니 긴 여행을 다녀온 듯 했다고 했다.
그렇다. 정호승 시인이 말했듯이 안도현 시인은 자연을 통해서만이 인간이 아름답고 풍요로워질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관계>를 읽고 나면 도토리와 햇볕, 낙엽과 자작나무, 또다시 걸어가야 할 길, 발길이 닿는 대로 갈 수 있다고 착각하는 우리 자신과의 만남, 가고 싶은 곳을 지금 막바로 갈 수 없는 감옥 속에 늘 갇혀서 살고 있는 우리의 실재를 만나게 된다. 농부의 쟁기와 미루나무의 푸른 목숨, 그리고 눈사람이 되고 싶었던 시인을 만날 수 있는 긴 여행을 다녀 온 느낌을 받는다.

그냥 무심코 지나쳐 버린 모든 것들이 새로운 관계로 다가왔다. 겨울 바람 한 줄기와의 관계도 새로웠고, 아이들과의 눈빛을 마주할 때 느껴지던 느낌 또한 새로운 관계로 다가왔다. 박노해의 <노동의 새벽>과 <사람만이 희망이다>를 읽으면서 그와의 관계를 새롭게 했고,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을 읽으며 전태일이라는 청년과 새로운 관계를 갖게된다. 그냥 무심히 지나쳤던 노동자의 일상과 그들의 고뇌를 책을 통해 전달받으며 마음이 많이 아파왔다. 이렇게 노동의 아름다움을 일깨워주는 책과의 관계도 감사하다. 관계! 관계라는 말이 늘 가슴 한켠에 따스함을 줄 수 있었으면 좋겠지만, 우리의 삶은 늘 따스함을 느끼게 하는 관계만 형성되는 것은 아니리라. 최소한 상대에게 불편함을 주고 끔찍한 관계를 형성하는 관계를 맺진 말아야 겠다는 생각을 한다.
이 춥고 아픈 시기에 서로에게 진정한 온기를 심어주는 포근한 관계를 글사랑 여러분과 맺어갈 수 있으면 참으로 행복할 것 같다.

거리에서 쓰레기를 쓸고 있던 환경미화원의 빗자루 끝에. 들판에서 밭을 갈던 농부의 쟁기 끝에, 어린아기의 똥기저귀를 빨던 아내의 손 끝에 시가 묻어 있는 것을 그는 보지 못하고 있었다. 환경미화원과 농부와 아내, 그들이 바로 시인이라는 것을 애석하게도 우리의 시인 지망생은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시인이 되는 법> 아기의 똥기저귀를 빨때면 작은 고모는 늘 즐거웠다. 고모는 그 기저귀에서 나는 고약한 똥냄새가 쵸코릿 냄새보다 더 향기롭고, 황금색 변은 그 어떤 빛깔보다도 아름답다고 했다. 바로 작은고모는 시인이었던 것이다. 고모의 말을 난 내 아이들을 키우며 공감하였으니 나도 시인?

자기 자신의 성취만을 위한 꿈이 아니라, 그 꿈을 이루는 과정에서 주위를 둘러보는 사려깊음과 나눔, 그리고 사랑을 함께 배양해 나가는 꿈이 바로 옆으로 아래로 꾸는 꿈이 아닐까? 자기 희생이 내포된 꿈. 그리하여 위로만 꾸는 꿈의 실현이 좀 늦어질지도 모르겠지만, 그렇게 이룬 꿈은 더 아름답게 빛나리라. 우리집 가훈은 <땀과 꿈>이다. 우리 아이들에게도 옆이나 아래로 꾸는 꿈을 가르쳐 주어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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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원 문학상 수상 작품집 - 문학상 수상 작품집 5
이순원 지음 / 청어 / 200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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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생각은!

은비령... 우리 딸아이의 이름이 은비다. 그래서 그런지 더 관심을 갖고 읽었다. 은비(隱秘)령은 더 신비롭게 깊이 감춰진 땅이란 뜻이다. 늘 한계령을 사랑하고 자주 찾으면서도 정작 한계령 어딘가에 그렇게 은밀하고 비밀스러운 고개가 숨어 있으리라고는 생각 못했다. 그래서 작가의 눈은 일반인인 우리의 눈하고는 다른가 보다. 한 가지 사물을 단순하게 보지 않고 늘 깊이 관찰하고 탐구하는 그들의 시선이 사뭇 부러워진다. 올 겨울에 설악산을 찾게 되면 반드시 은비령에 가 볼 생각이다. 그 곳에서 가능하다면 작가의 시선으로 은비령을 마주 볼 것이다. 그러면, 그 고개의 모습이 달리 보일까?

<은비령> 이라는 제목과 더불어 격포 채석강,과 돌연 방향을 바꾸는 길의 흐름, 쏟아지는 눈, 수줍은 사랑, 혼자 별을 보러 떠난 사람, 무엇보다 소설이 암시하는 공간과 시간의 광대하고 변하지 않는 넓이와 그 넓이가 암시하는 사유가 아름답게 느껴졌다.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가 흔히 아름다움이란 것엔 힘도 생명력도 잘 느껴지지 않아서 다 시들어 꼬부라져도 안 시드는 독을 담고 있는 바람꽃이 오히려 매혹을 발휘하는 것일까?

스비스조드의 바위 이야기... 어느 별에서의 들꽃 통신.... 천문관측에 관한 지식을 가르쳐주던 아무추어 천문학자 예하... 별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 <옳지만 오래된 것>보다 <나쁘지만 새로운 것>에 대한 생각.... <아름답지 못한 말을 쓰고 싶다. 자신에게 상처를 주는 강하고 폭력적인 것을 원한다. 말이란 자신의 상처를 더욱 넓히는 작업이다.> - 아쿠타가와 상 수상자 유미리. 작가에게 필요한 것은 너무 때이르게 찾아오는 위안이나 아름다운 깨달음이 아니라 그런 정면 돌파의 <강하고 폭력적인> 힘이 아닐까...

기억에 남는 내용

왜 하필이면 길을 바꾸어 떠난 곳이 지도에도 나오지 않는 은비령이었을까. 바다로 가는 길을 눈을 보러 가는 길로 바꾸고, 눈을 보러 가선 또 별을 가슴에 담고 돌아온 그 여행길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별처럼 여자는 2천 5백만 년 후 다시 내게로 오겠다고 했다. 나도 같은 약속을 여자에게 했다. 벗어나면 아득해도 은비령에서 그것은 긴 시간이 아니었다. 어쩌면 그때 은비령 너머의 세상은 깜깜하게 멈추어 서고, 나는 2천 5백만 년 보다 더 긴 시간을 그곳에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아니, 그보다 이제 겨우 다섯 달이 지난 2천 5백만 년 후 우리는 그 약속을 지킬 수 있을까.

엔야의 노래

그래, 바람꽃...... 아직 다 녹지 않은 눈 얼음 사이를 뚫고 올라와 이름 모를 한 들꽃을 보았다. 저게 어떻게 얼음을 뚫고 올라왔을까 싶을 만큼 고사리보다 가늘고 연약한 꽃대였다.
적막강산 속의 은비은비(隱秘銀飛) 자동차 불빛을 받은 눈들이 새까맣게 몰려와 작은 은조각의 깃털처럼 날리면서 내리고, 내리다가는 다시 하늘로 솟구쳐 올랐다.
노을을 등뒤로 하고 달리는데도 한없이 노을 속으로 빨려 들어가 끝내는 어둠 속에 묻혀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그때는 우선 내가 외로웠고, 바람처럼 휙, 하고 머리를 뒤로 젖혀 넘기던 두 여자의 첫 모습과 뒤에 알게 된 아픈 상처만 생각했지 어쩌면 자신의 운명 안으로 독처럼 그런 상처를 불러들였을지 모를 바람꽃의 줄기와 뿌리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았다.
앞도 잘 보이진 않는 눈길을 헤치고 은비령까지 와 깨달은 것이 있다면, 그가 죽은 다음에도 떠나지 못해 머물러 있는 곳은 격포나 은비령이 아니라 바로 여자와 내 마음 한가운데라는 것...
별은 그렇게 어느 봄날 바람꽃처럼 내 곁으로 왔다가 이 세상에 없는 또 한 축을 따라 우주 속으로 고요히 흘러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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