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린의 기억, 시네마 명언 1000 - 영화로 보는 인문학 여행
김태현 지음 / 리텍콘텐츠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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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이 책을 펼치는 순간 필독서임을 직감할 것이다. 총 200편의 영화를 여덟가지 파트로 나누어 1000개의 명언을 기록한 책이다.

꿈과 자유를 찾아주는 명대사, 사랑이 싹트는 로맨틱 명대사, 인문학적 통찰력을 길러주는 명대사, 사람의 심리를 파고드는 명대사, 지친 마음을 힐링해 주는 명대사,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명대사, 불굴의 의지를 보여주는 명대사, 내 안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명대사로 나눈 스크린의 기억을 촘촘히 읽고 있노라면 영화 속 인물들이 살아서 그 대사를 치는 게 보이는 듯했다.

책을 읽는 동안 어떤 영화는 그 장면만 찾아서 다시 찾아보기도 하고, 어떤 영화는 전편을 다시 감상하기도 했다.

200편의 영화 중 180편 이상을 관람한 난 진짜 영화를 좋아하는구나 분명하게 느꼈다. 아직 관람하지 않은 20여편의 영화는 하나둘 찾아서 모두 볼 계획이다.

책을 읽다 문득 장정일의 표현이 생각났다.

"한 번 본 영화는 영화가 아니다. 그것은 교통사고 현장을 목격한 것과 같다. 두 번 본 영화라야 영화를 봤다고 할 수 있다." 뭐 이런 비슷한 표현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기억이란 지극히 주관적이긴 하지만 말이다.

아무튼 난 내 인생의 영화로 꼽고 싶은 몇 편의 영화는 열 번 이상, 어떤 영화는 직업 때문이기도 하지만 백번 이상 관람하기도 했다. 그렇기에 이 책에 언급된 명언 천 개가 내겐 더 깊이 와닿았을 지도 모르겠다.


꿈을 향해 나아가는 이야기 중 《빌리 엘리어트》, 로열발레단 오디션에서 심사위원의 질문에 대한 빌리의 답변은 아직도 눈에 선하다. "모르겠어요. 춤을 추면 그냥 기분이 좋아요. 조금은 어색하기도 하지만 한번 시작하면 모든 걸 잊게 되고, 그리고 모든 게 사라져요. 사라져 버리는 것 같아요. 내 몸 전체가 변하는 기분이죠. 마치 몸에 불이라도 붙은 느낌이에요. 전 그저 한 마리의 나는 새가 되죠. 마치 전기처럼요."


《프란시스 하》 영화 속 대사처럼 '때로는 해야 할 때,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이 좋'고 '사람들에 둘러싸여 있어도 우리만 아는 세계'가 있음을 알지 않는가? 자심만의 은밀한 세계 말이다.


《일 포스티노》 영화는 조용히 속삭이는 듯하다. '시는 쓰는 사람의 것이 아니라 읽는 사람의 것'이라고... '시를 이해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 감정을 직접 경험해 보는 것'이라고... '사랑에 빠졌지만 곧 낫기를 바라지 않고 계속 빠'져 있고 싶었던 시절이 있었음을...

영화란 무엇일까? 죽음이 있기에 인생이 빛나고, 이별이 있기에 사랑이 빛나는 것처럼 영화가 있기에 그 속에서 수없이 많은 죽음과 이별과 사랑을 만나고 삶을 만나면서 인간은 고통받고 상실한다. 그리고 다시 애도하면서 성장해 나간다. 인문학이 인간에게 주는 선물이다. 빛나는 영화, 그 속에서 섬광처럼 빛나는 명대사, 내 마음을 건드리고 때론 훔치기까지 하면서 나를 휘둘러버리는 대사들. 그 모든 것들은 그 순간의 내 모습인 것이다. 그 순간의 내 못난 모습을 건드리기도, 혹은 잘난 내 모습을 인식시켜주기도 한다.


《셰이프 오브 워터》를 감상하고 난 후의 그 길었던 여운을 어찌 설명할까? 언어장애가 있는 엘라이자는 말한다. '지금까지 나의 모든 것, 내가 살아온 모든 것이, 그를 만나기 위함이라고 느껴요.'라고... 그런 확실한 사랑의 감정을 가질 수 있던 그녀를 얼마나 선망했는지 엘라이자는 알까? 그리고 그녀의 사랑을 전폭적으로 지지했음을 그녀는 느꼈을까? 이별 후에도 그의 존재가 두 눈을 채우고 마음을 겸허하게 하는 이유는 그가 모든 곳에 존재함이라는 그녀의 사랑 앞에 나는 부끄러웠지.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에서 연인과 헤어지고 와서 상심한 아들에게 건네는 아버지의 이야기가 어찌나 감동이던지. '지금의 그 슬픔, 그 괴로움 모두 간직하렴. 네가 느꼈던 기쁨과 함께.' 아들의 사랑, 아들의 정서를 전폭적으로 지지하고 이해하는 아버지를 보면서 부모란 자녀에게 어떤 존재여야 하는지 다시 깨달았고...


《가장 따뜻한 색, 블루》에서 마음에 꽂혔던 명대사. '우는 것에는 이유가 없어.' '사랑엔 성별이 없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좋아서 가질 생각도 못 했다.'


《화양연화》 내 인생의 화양연화를 반추했던 영화. 각자 가정이 있는 두 남녀가 품은 애절한 사랑을 그린 작품으로 배우자의 부재로 외로웠던 두 사람은 비슷한 감정을 품고 서로에게 이끌린다. 감정이 깊어질수록 조심스러웠던 그들은 어느 날 깨닫는다. '우린 그들과 다르다 생각했는데… 그들이 어떻게 그렇게 됐는지 알고 싶었어요. 이젠 알 것 같아요. 자신도 모르게 그렇게 된 거죠.'


《중경삼림》에서 실연한 남자는 낙담한다. 그는 가슴이 아프면 조깅을 한다. 그 이유는 '조깅을 하면 몸속의 수분이 빠져나간다. 그러면 더 이상 눈물이 나지 않'기 때문일까? 그럼에도 남자는 읊조린다. '기억이 통조림이라면 영원히 유통기한이 없었으면 좋겠다.'라고... 사랑에 유효기간이 없길 바라는 게 그의 진심인 걸까? 진짜 유효기간이 없다면 세상은 어떨까? 더 아름다운 세상이 될까? 아니면 아수라장이 될까? 일단 유효기간 없길 바라는 그 사랑의 정의부터 다시 정립해 봐야겠지.


《미스터 노바디》 '모든 선택은 선택하지 않은 것들을 감당하는 것이다.' 인생은 선택의 연속이고, 선택한 이후에는 선택하지 않은 것이 생기기 마련이다. '왜 우리는 과거를 기억하면서 미래는 모르는 걸까?'


《타인의 삶》 '내가 이 음악을 이전에 알고 있었더라면, 혁명은 성공할 수 없었을 것이다.' '당신은 저를 모르겠지만 저는 당신을 잘 알고 있어요. 전 당신의 '관객'이거든요.'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 '모두 자신이 미쳤다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아내야! 길거리를 버젓이 활보하는 악당들보단 덜 미쳤다고.' '혼자 있고 싶어 하는 것도 병인가요?' '그래도 난 시도라도 했잖아. 적어도 시도는 했다고.'


《토니 타키타니》 '기억은 바람에 흔들리는 안개처럼 천천히 그 모습을 바꿔 모습을 바꿀 때마다 흐려져 갔다.' 이 영화를 감상 후엔 원작을 찾아 읽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이었다. 영화와 함께 원작을 읽어볼 것을 추천하고 싶다.


《꾸뻬 씨의 행복여행》 '첫 번째 실수는 행복을 삶의 목표라고 믿는 데에 있다.' '행복은 자기 자신 그대로의 모습대로 사랑받는 것이다.' 행복은 내가 진정 살아 있다고 느낄 때 찾아온다.'


《버킷리스트》 '인생에서 기쁨을 찾았는가? 당신의 인생이 다른 사람들을 기쁘게 해 주었는가?' '내게 죽음이 찾아오기까지, 남은 시간을 알면 자유로워질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다.' '그가 죽을 때, 눈은 감겼지만 가슴은 열려 있었다.'


《보이후드》 '난 그냥… 뭔가 더 있을 줄 알았어.' '흔히들 이런 말을 하지. 이 순간을 붙잡으라고. 난 그 말을 거꾸로 해야 될 것 같아. 이 순간이 우릴 붙잡는 거지. 시간은 영원한 거고, 순간이라는 건 늘 바로 지금을 말하는 거잖아.' '주변 사람들이 내 인생에 간섭하는 게 너무 화가 나는데, 정작 그들은 그걸 알지도 못해.'


《나, 다니엘 블레이크》 '나는 개가 아니라 사람입니다. 그렇기에 내 권리를 요구합니다. 나는 요구합니다. 당신이 나를 존중해 주기를.' '자존심을 잃는 것은 모든 것을 잃는 것입니다.' '나는 의뢰인도 고객도 사용자도 아닙니다. 나는 게으름뱅이도 사기꾼도 거지도 도둑도 보험 번호 숫자도 화면 속 점도 아닙니다. 내 이름은 다니엘 블레이크입니다.'


《패치 애덤스》 '다른 이들을 돕기 위해 의사가 되었고, 그래서 모든 것을 잃었습니다. 하지만 모든 것 또한 얻었습니다.' '의사는 단순히 의술을 시행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의사는 무엇보다 환자의 삶의 질을 높여주는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이 대사를 곱씹으면서 요새 tvn 슬기로운 의사 생활 5인방이 생각났다. 그들이야말로 환자의 사람의 질을 높여주기 위해 최선을 다하지 않는가?


《미드나잇 인 파리》 '예술가의 책임은 절망에 굴복하지 않고 존재의 공허함을 채워줄 해답을 주는 거예요.' '진정한 사랑은 죽음마저 잊게 만든다네. 두려운 건 사랑하지 않거나, 제대로 사랑하지 않아서지.' '파리는 비가 올 때 가장 아름답죠.'


마지막 책장을 덮고 나면 다시 보고 싶은 영화들 목록이 두꺼워진다. 어떤 명대사나 영화를 아우르는 메시지 앞에서는 그 장면을 다시 돌려보고 싶은 마음이 든다. 지금 여기에서 내가 느끼는 것과 해결되지 않은 현재의 문제와 연결되어 몇몇 대사와 메시지가 나를 부여잡고 놓아주지 않는다. 영화를 보고 나면 나를... 나의 문제를... 답답한 현재의 상황을 돌아볼 수 있게 한다. 그래서 나는 열렬한 영화광이다. 혼자 생각하고 느끼고 판단하고 결정할 수 있도록 돕는 매개체이기 때문이다.


며칠 전 용산 cgv에서 유럽 영화 《우리, 둘》을 보고 나서도 여러 가지 감상이 마음속을 오갔다. 원작이 있다면 찾아서 읽어보고 싶을 만큼 긴 여운을 남긴 영화였다. 영화는 무엇인가? 무엇인데 이토록 끌리는 걸까? 그에 대한 답은 이미 위에 언급했다. 그럼에도 다시 묻는다. 영화는 무엇인가? 왜 나는 영화를 좋아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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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이 군대 갔다 - 시인 강민영이 아들에게 주는 공감 에세이
강민영 지음 / 글로세움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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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뮈의 표현처럼 ˝자신이 행복을 위해 태어났음˝을 깨달은 건강한 엄마가 행복한 아들에게 보내는 따뜻한 메시지, 아니 세상의 모든 아들들에게 보는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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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달이 계속 자란다고 생각 안 하지 삶창시선 58
강민영 지음 / 삶창(삶이보이는창)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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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를 읽으면서 떠오른 풍경 하나! 2019년 5월 뉴욕 센트럴파크 산책 중, 저렇게 큰 달이 있을까 싶을 만큼 말문이 막힐 만큼 어마어마한 달을 만났다. 계속 자라서 내 눈앞에 나타난 자랄만큼 자란 달을 보았다. 달도 계속 자라는거구나! 시가 고플 때 펼쳐서 마음으로 읽는 시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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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핑 도스토옙스키 - 대문호의 공간을 다시 여행하다
석영중 지음 / 열린책들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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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스토옙스키의 삶의 켜켜를 만날 수 있는 책, 이 책 읽기를 마치고 안나 도스토옙스카야가 쓴 [도스토옙스키와 함께한 나날들]까지 읽고 나니 서재에 꽂힌 그의 책들 모두가 그의 거대하고 묵직한 삶의 서사로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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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라색 히비스커스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 지음, 황가한 옮김 / 민음사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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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쪽

아마카는 십 대이고 말랐다는 점만 빼면 제 엄마의 판박이였다. 그 애는 이페오마 고모보다도 더 빠르고 결단력 있게 걷고 또 말했다. 눈만 달랐다. 아마카의 눈에는 이페오마 고모 같은 무조건적인 따스함이 없었다. 그것은호기심 어린 눈, 많은 질문을 하지만 많은 대답을 받아들이지는 않는 눈이었다.

124쪽

"오빠가 왜 이페디오라랑 사이가 안 좋았는 줄 알아요?"

"이페디오라가 오빠 면전에 대고 자기 생각을 말했기 때문이에요. 이페디오라는 진실을 말하는 걸 두려워하지 않았죠. 하지만 오빠는 자기 마음에 안 드는 진실에 대해서는 꼭 싸우려 들잖아요. (………) 아버지가 조상님 방식을 따르기로 한 것에 대해 하느님이 벌할실 거라면 오빠가 아니라 하느님이 벌하시게 놔두란 말이에요."



165쪽

나는 한 번도 대학에 대해, 어느 학교에 가고 무엇을 전공할지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때가 되면 아버지가 결정할 것이었기 때문이다.

171쪽

"은수카에도 그 나름의 매력이 있단다." 아마디 신부가 미소 지으며 말했다. 그는 가수의 목소리를 가지고 있었다. 그 목소리가 내 귀에 가져온 효과는, 어머니가 내 머리카락에 바른 페어스표 베이비오일이 두피에 가져오는 효과와 똑같았다. 저녁 식사 때 나는 그의 영어 섞인 이보어 문장들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다. 내 귀가 말뜻이 아니라 말소리를 좇았기 때문이다. 그는 참마와 채소를 씹으면서 고개를 끄덕였고, 입에 든 음식을 삼키고 나서 물을 홀짝이기 전까지는 말을 하지 않았다. 이페오마 고모의 집에 자기 집인 양 편안해했다. 어느 의자에 못이 튀어나왔는지 알았고 남의 옷에서 실밥을 떼어 줄 수 있었다. "그 못은 내가 저번에 박아 넣은 줄 알았는데." 그가 이렇게 말하더니 오비오라와는 축구얘기를, 아마카와는 정부가 얼마 전에 구속한 기자 얘기를, 이페오마 고모와는 가톨릭 여성 단체 얘기를, 치마와는 이웃집 비디오 게임 얘기를 했다. 사촌들은 어제만큼이나 재잘댔지만 아마디 신부가먼저 무슨 말을 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거기에 달려들듯 대답을 쏟아 냈다.



180쪽

"예쁘지 않니?" 이페오마 고모가 물었다.

"저것 좀 봐. 꼭 하느님이 붓으로 장난치신 것처럼 초록색, 분홍색, 노란색이 섞인 잎을."

"네." 내가 말했다. 이페오마 고모가 나를 계속 쳐다보길래 나는 고모가 정원 얘기를 할 때 내 목소리에 오빠 같은 열의가 없었다고 생각하는 걸까 궁금했다.





216쪽

아마디 신부의 자동차에서는 그의 냄새, 맑은 쪽빛 하늘을 연상시키는 산뜻한 냄새가 났다. 지난번에 그를 봤을 때는 반바지가 무릎 한참 아래까지 내려왔던 것 같은데 지금은 위로 당겨 올려져서 검은 털이 드문드문 난 근육질 넓적다리가 드러났다. 그와 나 사이의 공간이 너무 좁고 너무 밭았다. 이제껏 신부에게 그렇게 가까이 앉았던 건 고해 성사 하는 회개자였을 때뿐이었다. 하지만 아마디 신부의 향수가 폐부 깊숙이 들어와 있는 지금은 회개하는 마음을 갖기가 어려웠다. 오히려 죄책감을 느꼈다. 내 죄악에 집중할 수 없어서, 그가 얼마나 가까운 지 외엔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어서.


캄빌리가 아마디 신부에게 향한 마음을 느끼면서 떠오른 작품이 있었다.

다름 아닌 [가시나무 새]다. 정말 마음 절절한 울림을 주었던 원작과 영화까지 새록새록 떠올랐다.

 
자료 출처: 알라딘 문고

222쪽

"그보다는 훨씬 복잡해, 캄빌리. 어렸을 때 마음속에 의문이 많았는데 사제가 되는 게 해답에 가장 가까웠어." 그 의문이 무엇인지, 베네딕트 신부도 같은 의문을 가졌을지 궁금했다. 그러고 나서 아마디 신부의 매끈한 피부를 물려받는 자식이 없으리라는 것, 그의 각진 어깨가 천장 팬을 만지고 싶어하는 아들의 다리를 받치는 일이 없으리라는 것을 생각하자 터무니없지만 강렬한 슬픔이 느껴졌다.


260쪽

어머니가 시선을 피했다.

"은네, 너는 쉬어야 해."

"이페오마 고모를 불러 주세요. 제발요."

어머니가 팔을 뻗어 내 손을 잡았다. 어머니의 얼굴은 울어서 퉁퉁 부었고 입술은 갈라져서 허옇게 일어나 있었다. 한편으로는 일어앉아 어머니를 안아 주고 싶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밀어버리고 싶었다. 아주 세계 밀쳐서 의자에서 굴러떨어지게 만들고 싶었다.

268쪽

"기운 차린 걸 보니 좋구나." 아마디 신부가 마치 내가 온전히 다 있는지 확인하려는 것처럼 훑어보며 말했다. 내가 미소 짓자 그가 포옹하게 일어나라는 손짓을 했다. 그의 몸이 내 몸에 닿는 것이 긴장되면서도 기분 좋았다. 다시 몸을 떼면서 치마와 오빠와 오비오라와 이페오마 고모와 아마카가 잠시 사라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아마디 신부와 단둘이 있고 싶었다. 그가 여기 있어서 마음이 따뜻하다고, 내가 제일 좋아하는 색깔이 그의 피부색과 똑같은 구운 점토 색으로 바뀌었다는 말을 그에게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285쪽

오빠는 닭을 집어 들어 아마카가 가져온 대야게 담긴 뜨거운 물에 던져 넣었다. 오빠한테는 어떤 정확성, 차갑고 냉정한 외곬인 면이 있었다. 오빠는 빠르게 깃털을 뽑기 시작했고 닭이 백황색 껍질로 덮인 홀쭉한 형태로 줄어들 때까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나는 깃털이 다 뽑힌 닭을 보고서야 닭 목이 그렇게 길다는 걸 알게 되었다.

334쪽

"왜 거절한 거야?" 오비오라가 물었다.

"나도 몰라. 자기들 기분이 좋으면 주고, 안 그러면 거절하는거지. 네가 어떤 사람 눈에 쓸모없는 인간으로 보이면 일어나는 일이란다. 우리는 어느 방향이든 그들이 원하는 대로 걷어차도 되는 축구공 같은 거야."

337~338쪽

나는 아마디 신부의 독일 주소를 공책에 베끼고 또 베꼈다. 쓰는 방식을 계속 달리해 가며 또 베끼고 있을 때 그가 돌아왔다. 그는 내게서 공책을 빼앗아 덮어 버렸다. 나는 "보고 싶을 거예요."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 대신 "편지할게요."라고 말했다.

"내가 먼저 보낼게." 그가 말했다.

눈물이 뺨을 흘러내린 줄 몰랐다가 아마디 신부가 팔을 뻗어 손바닥으로 내 얼굴을 문질러서 닦아 줬을 때에야 알았다. 그리고 그는 나르 두 팔로 감싸 꼭 끌어안았다.

360쪽

나는 아마디 신부가 말하는 것을 믿는다. 또박또박 쓴 그의 기울어진 필체를 믿는다. 왜냐하면 그가 그렇게 말했고 그의 말이 참이기 때문이다.

나는 새 편지가 오기 전까지 그가 가장 최근에 보낸 편지를 늘 가지고 다닌다.

그의 편지는 내 마음속에 있다. 그것을 가지고 다니는 이유는 길고 자세하기 때문에, 내가 가치 있는 사람임을 상기시켜 주기 때문에, 내 감정을 자극하기 때문이다. 몇달 전 그는 내가 이유를 찾으려 애쓰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적었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 중에는 이유를 찾을 수 없는 일, 그냥 이유가 존재하지 않거나 필요치 않은 일이 있기 때문이다.

362쪽

오빠가 이곳에 들어온 뒤 한 달이 지날 때마다 조금씩 굳어 갔던 그 눈은 이제 야자수 껍질처럼 딱딱해 보인다. 우리에게 눈의 언어가 정말 있었던 적이 있는지, 아니면 전부 내 상상이었는지 헛갈린다.


나이지리아를 배경으로 하는 한 십대 소녀의 이야기가 오늘날 한국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로부터 멀다고 느끼는 독자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캄빌리가 원하는 것이 국가와 인종, 시대와세대를 넘어 누구에게나 주어져야 하고 누구나 누려야 마땅한 어떤 것이라면, 여전히 그것을 얻기 위해 위험을 감수하며 분투하고 투쟁하는 이들이 존재한다면, 그리고 이것이 한국 사회에 속한 우리와도 전혀 무관한 일이 아님을 떠올린다면, 『보라색 히비스커스』가 던지는 메시지는 언제나 유효하고 의미 있는 질문일 수밖에 없다.

-- 딸에 대하여 저자, 김혜진 --


재미있게 읽혔다.

그리고 몇해전에 관람했던 사우디 아라비아 영화 [와즈다]가 떠올랐다. 

<이 영화를 통해 사우디아라비아의 여성들은 자전거를 탈 수 있게 되었다.>

"왜 여자는 자전거를 탈 수 없죠?" 세상을 바꾼 10살 소녀의 유쾌한 반란!

제 이름은 와즈다. 요즘 최고의 관심사는 바로 자전거!

이웃집 압둘라가 타고 다니는 자전거가 항상 부러웠는데 마침 단골 가게에 내 맘에 쏙 든 초록색 자전거가

새로 들어왔죠! 엄마에게 졸라봤지만 여자는 자전거를 타면 아이를 못 낳는다며 절대로 안 사주신대요.

팔찌도 만들어 팔아보고, 몰래 연애편지도 전달하면서 돈을 모아봤지만 800리얄까지 언제 모으죠? OTL...

그런데 학교에서 무려 1000리얄이라는 어마어마한 상금이 걸린 코란 경전 퀴즈대회가 열린대요!

이건 분명 제가 대회에서 우승하고 자전거를 살 거라는 신의 계시임이 분명해요!

꿈 속에서 저는 이미 제 초록색 자전거를 타고 압둘라와 경주를 하고 있었는걸요?

대회는 앞으로 5주 후!

전교의 문제적 학생이었던 와즈다는 과연, 대회에서 우승하고 자전거를 탈 수 있을까?

자료 출처: 네이버 영화


"집에서도 매일 지켜야 하는 일과표가 있어?" 아마카가 물었다.

"재밌네. 그러니까 이제 부자들은 매일매일 뭘 해야 할지도 결정을 못해서 그걸 가르쳐 줄 일과표가 필요하구나." - P158

"저항은 때때로 좋은 것일 수도 있어." 고모가 말했다. "저항은 대마초 같은 거거든. 제대로만 쓰면 나쁜 게 아니야." 고모가 한 말의 신성 모독성보다 그 진지한 말투에 나는 고개를 들었다. - P182

가끔 아마카와 파파은누쿠가 대화를 할 때면 두 사람의 낮은 목소리가 서로 휘감겼다. 그들은 최소한의 단어만 사용하면서도 서로의 말을 이해했다. 두 사람을 보면서 내가 절대 가질 수 없을 뭔가를 향한 갈망을 느꼈다. 일어나서 나가고 싶었지만 내 다리가 내 것이 아닌 양 내가 시키는 대로 하지 않았다. 겨우겨우 몸을 일으켜 세워서 부엌으로 갔다. 파파은누쿠도 아마카도 내가 나가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 P205

나는 정원의 시든 아가판투스꽃이 줄기에서 떨어지는 것을 쳐다봤다. 늦은 아침 바람에 파두가 바스락거렸다.

"소리 지를 필요 없어, 아마카." 마침내 내가 말했다. "난 오라 잎을 다듬을 줄 모르지만 네가 가르쳐 주면 되잖아." 그런 차분한 말이 어디서 나왔는지 몰랐다. 나는 아마카를 쳐다보고 싶지 않았고, 그 뱁새눈을 보고 싶지 않았고, 그 애를 자극해서 또 한 소리 듣고 싶지 않았다. 내가 더 이상 버틸 수 없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때 킥킥대는 소리가 들리길래 내 귀를 의심했지만 아마카를 보니 역시나 그 애가 웃고 있었다.

"너도 그렇게 큰 소리로 말할 수도 있구나, 캄빌리." 아마카가 말했다.

그러고는 오라 손질법을 가르쳐 줬다.

- P211

아마카가 말했다.

"게다가 이제는 성모님이 아프리카에 나타나실 때도 됐잖아. 왜 항상 유럽에만 나타나시는지 이상하다고 생각지 않아? 성모님은 원래 중동 출신이시라고." - P174

"저건 히비스커스죠, 고모?" 오빠가 철조망에서 가까운 나무를 쳐다보며 물었다.

"보라색 히비스커스가 있는지 몰랐어요."

이페오마 고모가 웃으면서, 아주 진해서 거의 파란색에 가까운 보라색을 띤 꽃을 만졌다.

"다들 처음엔 그렇게 반응해. 내 친구 필라파가 식물학 교수인데 여기 살 때 실험을 많이 했단다. 봐, 이건 하얀 익소라꽃인데 빨간색만큼 활짝 피지 않아." - P162

학교에서 돌아왔을 때 오빠랑 나는 차에서 현관까지 가는 사이에 홀딱 젖었다. 빗줄기가 너무 세서 히비스커스 덤불 옆에 작은 웅덩이가 파여 있었다. 젖은 가죽 샌들 속 발이 가려웠다. 아버지가 거실 소파에 웅크린 채 울고 있는데 너무 작아 보였다. 키가 커서 문을 지나갈 때 고개를 숙이기도 하고 바지를 맞출 때는 항상 남들보다 천을 더 써야 하는 아버지가 지금은 자그마해 보였다. 꼭 구겨진 천 두루마리 같았다. - P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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