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원 문학상 수상 작품집 - 문학상 수상 작품집 5
이순원 지음 / 청어 / 2000년 5월
평점 :
품절


내 생각은!

은비령... 우리 딸아이의 이름이 은비다. 그래서 그런지 더 관심을 갖고 읽었다. 은비(隱秘)령은 더 신비롭게 깊이 감춰진 땅이란 뜻이다. 늘 한계령을 사랑하고 자주 찾으면서도 정작 한계령 어딘가에 그렇게 은밀하고 비밀스러운 고개가 숨어 있으리라고는 생각 못했다. 그래서 작가의 눈은 일반인인 우리의 눈하고는 다른가 보다. 한 가지 사물을 단순하게 보지 않고 늘 깊이 관찰하고 탐구하는 그들의 시선이 사뭇 부러워진다. 올 겨울에 설악산을 찾게 되면 반드시 은비령에 가 볼 생각이다. 그 곳에서 가능하다면 작가의 시선으로 은비령을 마주 볼 것이다. 그러면, 그 고개의 모습이 달리 보일까?

<은비령> 이라는 제목과 더불어 격포 채석강,과 돌연 방향을 바꾸는 길의 흐름, 쏟아지는 눈, 수줍은 사랑, 혼자 별을 보러 떠난 사람, 무엇보다 소설이 암시하는 공간과 시간의 광대하고 변하지 않는 넓이와 그 넓이가 암시하는 사유가 아름답게 느껴졌다.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가 흔히 아름다움이란 것엔 힘도 생명력도 잘 느껴지지 않아서 다 시들어 꼬부라져도 안 시드는 독을 담고 있는 바람꽃이 오히려 매혹을 발휘하는 것일까?

스비스조드의 바위 이야기... 어느 별에서의 들꽃 통신.... 천문관측에 관한 지식을 가르쳐주던 아무추어 천문학자 예하... 별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 <옳지만 오래된 것>보다 <나쁘지만 새로운 것>에 대한 생각.... <아름답지 못한 말을 쓰고 싶다. 자신에게 상처를 주는 강하고 폭력적인 것을 원한다. 말이란 자신의 상처를 더욱 넓히는 작업이다.> - 아쿠타가와 상 수상자 유미리. 작가에게 필요한 것은 너무 때이르게 찾아오는 위안이나 아름다운 깨달음이 아니라 그런 정면 돌파의 <강하고 폭력적인> 힘이 아닐까...

기억에 남는 내용

왜 하필이면 길을 바꾸어 떠난 곳이 지도에도 나오지 않는 은비령이었을까. 바다로 가는 길을 눈을 보러 가는 길로 바꾸고, 눈을 보러 가선 또 별을 가슴에 담고 돌아온 그 여행길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별처럼 여자는 2천 5백만 년 후 다시 내게로 오겠다고 했다. 나도 같은 약속을 여자에게 했다. 벗어나면 아득해도 은비령에서 그것은 긴 시간이 아니었다. 어쩌면 그때 은비령 너머의 세상은 깜깜하게 멈추어 서고, 나는 2천 5백만 년 보다 더 긴 시간을 그곳에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아니, 그보다 이제 겨우 다섯 달이 지난 2천 5백만 년 후 우리는 그 약속을 지킬 수 있을까.

엔야의 노래

그래, 바람꽃...... 아직 다 녹지 않은 눈 얼음 사이를 뚫고 올라와 이름 모를 한 들꽃을 보았다. 저게 어떻게 얼음을 뚫고 올라왔을까 싶을 만큼 고사리보다 가늘고 연약한 꽃대였다.
적막강산 속의 은비은비(隱秘銀飛) 자동차 불빛을 받은 눈들이 새까맣게 몰려와 작은 은조각의 깃털처럼 날리면서 내리고, 내리다가는 다시 하늘로 솟구쳐 올랐다.
노을을 등뒤로 하고 달리는데도 한없이 노을 속으로 빨려 들어가 끝내는 어둠 속에 묻혀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그때는 우선 내가 외로웠고, 바람처럼 휙, 하고 머리를 뒤로 젖혀 넘기던 두 여자의 첫 모습과 뒤에 알게 된 아픈 상처만 생각했지 어쩌면 자신의 운명 안으로 독처럼 그런 상처를 불러들였을지 모를 바람꽃의 줄기와 뿌리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았다.
앞도 잘 보이진 않는 눈길을 헤치고 은비령까지 와 깨달은 것이 있다면, 그가 죽은 다음에도 떠나지 못해 머물러 있는 곳은 격포나 은비령이 아니라 바로 여자와 내 마음 한가운데라는 것...
별은 그렇게 어느 봄날 바람꽃처럼 내 곁으로 왔다가 이 세상에 없는 또 한 축을 따라 우주 속으로 고요히 흘러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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