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 촛불 대행진

최호철 화백의 그림입니다. 굉장하군요. 7월 5일에 뵙겠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신부님과 수녀님들이 시청앞으로 나오자 사람들은 모두 갑자기 선한 양이 되었다. 이틀째 아고라도 조용하다. 비교적 깨끗한 이미지로 남아있는 종교의 힘이란 게 이런 것인가.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이 비폭력을 화두로 내걸고 집전한 시청앞 구국 미사는 사람들을 꽤나 감동시킨 모양이다.(개신교와 불교계도 시국기도회와 시국법회에 서둘러 나선다고 한다)

덕분에 경찰도 쉬고 시민도 제법 평온한 밤을 보내고 있다. 간만의 평화다. 

 

이 평화는 얼마나 지속될까.

 

알 수 없다. 

 

무척이나 긴요한듯 보이지만 촛불의 향배를 가늠하는 일은 지금으로서는 도저히 불가능하다. 지금 시국은 시민들의 움직임에 정부가 기민하게 대응하는 꼴이 아니라 정부가 얼마나 삐뚤어지느냐에 따라 시민들이 수습해야하거나 겉잡을 수 없이 무너지게 될지 모르는 형세이기 때문이다. 

주목해야 할 것은 이러한 상황에서도 조중동은 다음에 뉴스 공급을 끊는다던지 자신들에게 광고를 싣지 못하게 광고주에게 압력을 넣는 행동이 위법이라는 판단을 이끌어내기도 했다는 사실이다.

이런 상황에서도 대중들(나 역시 대중이다!)은 정말 알 수 없다. 신부님과 수녀님이 집행할 수 있는 비폭력의 힘이 주일까지 이어지기는 힘들텐데 이사이를 틈타 출현하고 사라지는 몇몇 유형의 집단들은 인상적이다.

 
나는 이번 촛불집회의 현장에 출현한 몇몇 독특한 집단과 세력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바로 촛불소녀, 아고리언, 유모차를 끈 엄마, 미국 교포 주부, 예비군, 김밥부대, 그리고 전경 '엄마'들이다.

 

 

'깃발없는 사람들의 모임'이라는 상징적 깃발과 수녀님들이 들고 나온 '평화롭게 저항하는 백기'가 등장하고 결국 '구국의 강철대오 전대협'도 나왔는 판에 어디서 무엇이 어떤 내용을 담고 등장할지는 모를 일이다.

가장 먼저 촛불을 밝히기 시작한 소녀들은 이제 판에서 밀려난 느낌이 강하다. 이건 집회가 밤샘 형태로 진행되고 '국민대책회의'라는 조직이 소녀들의 역할을 자임하면서 나타난 현상이다. 그리고 쇠고기 외의 의제로 집회가 계속 번져나가면서 소녀들이 포섭되지 않고 미끌어지는 상황이 벌어졌다. 분명 교육문제와 생태문제 등에서는 소녀들과 긴밀한 공감대를 만들수 있을텐데 이 대목은 좀 아쉬운 부분이다.

개인적으로 좀 비판적으로 보았던 예비군 문제는 몇몇 장소에서 논의가 되긴 했지만(프레시안의 박노자보다 몇몇 알라디너분들이 더 예리한 논의를 보여주셨다) 대부분 '비판적 지지'를 보내는 선에서 일단락 된듯 싶다. 실제로 예비군은 우리 생활에 너무 깊숙하게 들어와 있기때문에 섣불리 그들의 존재와 행동양식을 나무라거나 칭찬하기가 어려운 측면이 있다.

나는 그들의 출현이 반갑지 않았지만 그들이 계속적으로 어떤 역할을 하는지는 주목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들은 갑자기 어디로 사라졌는가? 사라지니 '군복시위'에 대한 사법처리를 실시한다는 엉뚱한 이야기가 튀어나오고 있다. 지금 현 국면에서 사라지는 일은 삭제되거나 구속되는 것을 의미한다. 법-폭력은 그만큼 기민하고 교활하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 예비군의 실종은 집회의 성숙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질서유지와 보호라는 모토를 걸고 등장한 이들은 시민진영에서 경찰력의 공백을 메워주는 역할을 담당했는데 무질서와 혼돈으로만 보였던 시민들이 나름의 하나의 거대한 코스모스를 형성해나가는 과정에서 예비군은 자연도태, 혹은 흡수된 듯 싶다.

사실, 내가 여기서 가장 많이 말하고 싶은 집단은 바로 '엄마'들이다.(유모차 엄마들에 관해서는 얼마전 알라딘에서 논의가 있었으니 여기선 따로 말하지 않겠다) 전경 '엄마'들과 학생 시위대의 엄마들(각종 학부모 대표와 무슨무슨 어머니회 등 층위와 계열은 무척이나 다양하다)은 도대체 어떻게 보아야하는가.

촛불집회 초기에 전경들에게 꽃을 달아주는 사람들이 있었다. 또 이들은 전경들에게 먹을 것과 물을 건네주며 '나'의 비폭력의 의지가 '너'에게도 전달될 것이라고 믿는 것 같았다. 이들의 모습은 마치 성자와 같았는데 이는 휴머니즘과 거대한 숭고의 출현이었다. 


하지만 전경들이 몸에서 꽃을 떼어낸 뒤, 방패를 들고 물대포를 쏘자 이들은 또 이내 사라져 버렸다. 이처럼 폭력은 지극히 상대적인 것이다. 이때 등장한 것이 바로 종교인들이다. 이때를 틈타 가장 기민하게 움직이는 사람들이 있었으니 그들이 바로 전경 '엄마'들인 것 같다. 시민과 전경들 사이에서 걱정하는 얼굴로 배회하거나, 때를 틈타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전경의 손을 잡아주거나 쓰다듬어주는 이들은 거의 대부분 전경 '엄마'들이다.(경찰과 시민들의 대치선인 교보생명 건물 앞의 일명 '교보 아줌마' 들. 이들은 주로 그곳에서 사태의 추이를 키켜보는 경우가 많다.) 전경들도 일반 시민들이 건네주는 음식과 물에는 반응을 보이지 않지만 전경 '엄마'들이 전해주는 먹을것과 마실것만은 선택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실정이다.(이틀전 전경 '엄마'들은 공개적으로 모여 전경들에게 간식을 공급해주었다. 전경들에게 뭘 먹여야 한다면 그건 '엄마'가 아니라 '국가'이다. 지금 전경들을 개처럼 부리고 있는쪽은 바로 국가이기 때문이다.) 

 

시민들 중 연행자가 2천을 넘어섰고 경찰측이 밝힌 전경 부상자가 4백 이상이다. 이때 아들을 전경으로 보낸 어머니의 마음을 나는 헤아릴 수 없다. 짐작은 가지만 내가 안다고 말하는 순간 어머니의 애닯은 심정은 훼손되어버리고 만다. 그러니 지금 내가 모른다고 표현하는 것이 그들에게는 누가 되지 않는 길이다.  

 

다만, 나는 전경 '엄마'들이 만들어내는 이 장면들이 거대한 '숭고'로 보이지 않고 어떤 '멜랑콜리'의 그림자로 여겨진다. 

 

전경 엄마들은 몸을 시민의 편에 두고 있지만 마음은 방패를 들고 서있는 전경들에게 가있다. 이러한 전경 엄마들에게 정치적인 입장을 선택하라고 강요하는 것은 분명 잔인한 일일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러한 선택의 입장을 떠나 전경 '엄마'들이 만들어내는 어떤 기묘한 낙차, 어처구니 없는 싸움의 종결에 대해서 불만이 있다.      

 

전경 '엄마'는 사태의 결정적인 국면을 유아적으로 만들어 버린다. 국가와 시민의 싸움이라는 극한의 대결 양상에서 갑자기 비어져 나오는 전경 '엄마'들의 모성애적 본능은 모든 상황을 일거에 혼란스럽게 만든다. 물론 반복해서 말하지만 자식을 걱정하는 어머니의 심정이야 백번을 생각해도 가닿을 수 없을 만큼 어렵고도 극진한 것일 테지만 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각종 '엄마'란 타이틀의 출현에 반대한다.

 

 

조금 외연을 확대해보면 사태는 더욱 심각해진다. 한국 사회의 고질적 병폐중 하나가 엄마들의 '과잉 보호'와 자식들의 '과잉 의존'이다. 자식이 스무살이 되고, 대학을 가고, 군대를 가고, 혹은 서른이 되거나 취업을 해도 이러한 자식에 대한 보호는 멈추지 않는다. 이는 한국 사회의 구조적 문제이기도 하지만 엄마들의 충성스런 '과잉 보호'도 분명 큰 이유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대학교수에게 제 자식의 성적을 항의하는 전화를 걸어온다는 이야기가 들려온지는 오래되었고 심지어 자식의 직장 상사에게 부탁 인사를 하는 엄마들도 있다는 이야기가 심심치 않게 들려온다.  

그러니까 "내 자식에게 광우병 쇠고기를 먹일 수 없다"라고 말하는 어머니들과 유모차를 끌고 나온 엄마들과, 전경 '엄마'들은 분명히 다르다. 자신의 가족을 우회하여 정치적 입장을 표현하고 보편적 정책반대의 위치에 서는 어머니들의 방식과 제 자식만을 보호하겠다는 엄마가 제3의 위치를 만들어내고 거기에만 있겠다고 선언하는 방식은 층위뿐만 아니라 내용 역시 다르고 또 다르다.

 

시위대의 척후를 흩어내고, 인간의 어느곳을 가격해야 가장 고통스러운지를 정교하게 훈련받는 스무살 전후의 통일된 완력들과 다양한 나이와 성별이 이합집산하여 모여있는 시민들이 소유한 폭력은 질이 다르다. 물론 이때 촛불시위에 참여한 시민들은 자발적인 존재들이고 전경들은 국가의 강제에 의해 동원된 제도적 피해자라는 이의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차이를 인정하려면 그들이 주장하는 보편적 보호 역시 시민과 전경에게 고르게 분배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고 기계적인 폭력을 휘두르는 전경들을 한순간에 보호해야할 어린아이로 만드는 이 기묘한 광경은 도무지 좋게 보이지가 않는다. 전경 '엄마'들은 자신들의 특이한 처지를 내세워 촛불집회의 현장에서마저 자신들이 지키려는 '스위트 홈'의 연장 혹은 분할의 관점에서 사태를 파악하고 있는듯 싶다.

 

 

이십대 초중반의 전경들 대부분도 현 상황에 대해 충분히 가치판단이 가능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제도적인 압력에 의해 쇄뇌 혹은 통제를 받는 상황에 몰려있다면 그것은 '엄마'에 의해서가 아닌 스스로의 시간 혹은 노력으로 이겨나가야 할 몫인 것이다. 

 

지금 촛불 시위는 나 자신 혹은 내 가족을 보호하는 것에서 출발해 국민 주권의 쟁취로 이어지는 역사적 결단의 장이지만 전경 '엄마'들은 그 출발점에서 멈춰있고 또 그곳이 도달할 도착점이기도 하다. 전경 '엄마'는 지금 분명 설명하기 어려운 '회색지대' 혹은 '공백의 기표'로 서있다. 언제까지 전경 '엄마'들이 정치적 주체의 보조물로만 기능할 것인지는 전적으로 그들의 포즈에 달려있다. 전경 '엄마'들의 자식사랑이 나름의 커다란 명분을 얻기 위해서는 제 자식이 시민들에게 해를 입었는지만을 살펴볼 것이 아니라 의료봉사단 혹은 사제단과 같이 범 영역적 좌표에서 두루 활동하거나 큰 시야를 통해 공감대를 얻어야 할 것이다.

 

나는 현재의 전경 엄마'들의 행동이 전경을 실질적으로 보호하는지에 관해서도 의문이다. 그들이 요청하는 비폭력이  시민 전체의 보호가 아닌 자신의 '스위트 홈'만을 견고하게 유지하려는 욕망에서 나온 언설이라면 그다지 설득력을 얻기 힘들 것이다. 자신이 지키려고 하는 '스위트 홈'의 로망이 사회적 멜랑콜리로 되어버리는 순간 본질적 화해는 기대할 수 없다. 자꾸 의식의 지평을 흐리게 만드는 전경 '엄마'들의 출현은 과연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 두고두고 생각해볼 문제인 것만은 분명하다.   


댓글(6) 먼댓글(0) 좋아요(2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치니 2008-07-03 08: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천을 한번 밖에 못누르게 되어 있음이 아쉽습니다.

나비80 2008-07-03 10:31   좋아요 0 | URL
인기쟁이 치니 님께서 글을 남겨주시다니 영광입니다. ^^

네꼬 2008-07-03 09: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천을 한번 밖에 못누르게 되어 있음이 아쉽습니다. 2

나비80 2008-07-03 10:31   좋아요 0 | URL
인기쟁이 네꼬 님께서 글을 남겨주시다니 영광입니다. 2 ^^

순오기 2008-07-03 11: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우~~ 굉장한 걸 지적하셨네요~~ 알라딘 서재인들의 토론을 귀동냥하며 놀라울 때가 많습니다. 이 페이퍼는 제 놀람중에 최고입니다!!

나비80 2008-07-03 13:55   좋아요 0 | URL
사실 누구나 생각하셨겠지만 쉽게 말하기 어려운 부분이었겠죠. 그만큼 저도 알라딘의 의견 수렴폭을 믿고 쓴 글입니다. 조금만 삐딱하게 받아들여도 제글이 고깝지 않을텐데 말이죠. 최근에 어떤 대학교수가 하는 말중 현재 진행되는 촛불집회에 대한 대중 담론들 중에 알라딘 서재가 가장 수준 높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다음의 아고라는 파토스가 강하게 넘쳐나고 진보신당이나 민노당쪽은 아무래도 운동권 성향인 분들이 발언권을 가지신 것 같고 프레시안이나 레디앙, 오마이뉴스에도 사람은 많이 몰리는데 그닥 신통치는 않은 모양입니다. 저도 알라딘 서재 기웃거리면서 이것저것 많이 생각하고 배우고 있습니다.
 

씨발.

원래 좀 쪼잔해서 말을 가려하는 편인데 오늘은 입을 좀 험하게 놀리지 않으면 잠이 오지 않을 것 같다. 기분은 울쩍한데 한예슬이 선전하는 카스 레몬은 왜 이렇게 상큼한건지. 빠르게 몇 캔 구겼더니 취기가 알딸딸하게 오른다. 두서없이 팡팡 지껄이다 자야겠다.

이제 개새끼들이 주저없이 쏘고 내려찍고 짓밟는다.이전과는 판이하게 다른 모습이다. 최고통수권자의 직접 명령을 받았기 때문에 이제 망설일 것이 없다. 꽁꽁 숨어있던 쥐새끼는 이제 노골적으로 폭력을 행사하고 있다. 까딱까딱 고개 몇 번 숙이고 가래끓는 목소리로 국민의 '눈높이'가 어쩌구저쩌구 두번 하더니 할만큼 했다 생각하는지 이제 거침없이 밀고 나온다.(그 지랄맞은 '눈높이' 회사 '재능교육'은 '이랜드'나 '기륭전자', '알리안츠' 만큼이나 노조탄압 기업으로 악명높다)

2008년 5.18쯤에는 6.10이 되면 좀 해결이 되나 싶었고 6.10이 지나고 나서는 6.15를 기대하게 되고 그날 이후 또 다시 6.29 때까지는 뭔가 큰 진전이 있을거라 여기며 희망의 크기를 줄이지 않았었다.

그러나, 참혹한 6.29 였다. 우석훈이 열받은 채 지껄인대로 말하자면 '블러디 선데이'.

한국 사회는 숫자로 호명된 기호에 너무 많은 맥락과 상징이 포함되어 숫자를 터뜨리는 입과 그것을 주워듣는 귀가 아주 빠르게 역사를 회집하고 더듬는다. 그렇게 만든 좆같은 놈들에게 이제 그것을 못하게 하려는게 지난 60일간 이어져온 '촛불집회'의 본질이라고 나는 믿고 있다. 

그런데 놈들은 그 숫자를 잘근잘근 토막내어 자꾸만 우리에게 다시 쑤셔넣어주고 있다.

씨발, 비역질이 난다.

놈들은 너무 강하고 끈질기다. 멍청해서 오래가는 건지 너무 강하기 때문에 멍청해도 오래 버티는건지 모르겠다. 분명한건 멍청하다는 사실이다. 더구나 멍청한데 또라이도 더러 몇 끼어 있다.

몇몇 사람들이 시청과 KBS 앞에 가스통과 쏘세지를 들고 나오자 꼴통 몇 명이 힘을 얻었는지 한손에는 무협지와 한손에는 성경책을 들고 나와 지껄이기 시작한다. 찍소리도 못하던 조중동도 자기한테 욕하거나 개겼던 네티즌들을 본격적으로 응징하고 있다. 청와대와 정부, 경찰과 검찰은 한통속이라는 게 분명한데 아직 사법부가 포지션을 정하지 않았다. 야비한 '전경련'은 촛불이 한참 거셀때는 입 다물고 있더니 타이밍 재고 정확하게 치고 들어온다. 촛불끄고 착취의 현장으로 돌아가라고 공개적으로 쳐 씨부리고 있다. 씨발 언제 일안하고 간적 있냐. 해떨어질때 나가서 하고 빨간 날에 나가서 하지.

그 중 가장 대표적이고 심각한 말종이 이문열인데. 천정환 말대로 '문'자와 '열'자가 아깝다. 나는 고등학교 시절부터 이문열 책은 거의 다 읽어 왔고 심지어 가지고 있기도 하다. <선택>때나 '홍위병'때, 남들이 다 깔 때 그나마 옛 정분으로 혼자 닥치고 있었는데 이번에는 도저히 보고 넘어가 주기가 어렵다. 미련없이 밑씻개로 써버렸어야 할 책들을 계속 사모았던 내 자신이 부끄럽다.  

이문열 아들을 한다리 건너 알고 있는데 그 사람 지금 직장에서 너무 힘들게 일한단다. 직접 의사 표현을 하진 않지만 아버지를 우회하여 자신을 더듬는 정치적인 시선때문에 그는 몹시 고단하고 피곤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고 한다.

나는 사실 이번 촛불 시위가 쇠고기 문제를 진작에 넘어섰고 아주 가시적인 정권박살 운동으로 나가야한다고 생각해왔다. 시민들의 과도한 폭력은 문제가 된다고 고상하게 말리는 척 했지만 어느정도의 물리력은 피하기 어렵다고 속으로 생각해온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시위 현장에서 일부 드러나는 폭력도 거대한 시민들의 분명한 모습중 하나라고 여러사람들의 블로그에 욕먹어가면서 댓글을 달기도 했다.

나 역시 촛불집회에 몇 번 나가 닭장차도 잡아 끌어내보기도 했고, 어느때는 그냥 조용히 촛불만 들고 앉아 있거나 걷다가 집으로 돌아오기도 했다. 어느밤에는 너무 피곤해 이랜드 노조 천막에 몰래 기어들어가 스티로폴 쪽위에서 몇시간 눈을 붙인적도 있다. 맥주를 마시고, 다꼬야끼를 사먹고 사람들이 전해주는 김밥과 생수때문에 화장실을 자주 찾기도 했다. 소라광장 옆 '탐앤탐스' 화장실과 서대문 '새문안교회' 화장실, '동아일보' 화장실 등을 주로 이용해가며 춥고 덥고 습하고 어두운 밤을 나기도 했다. 나는 그렇게 자랑스런 촛불의 하나가 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사실 술 먹느라, 피곤해서, 야구보러 가야하기때문에, 쿵푸팬더가 너무 재밌다고 하길래. 때론 일이 넘쳐서, 공부해야하므로 촛불집회에 못 간적이 더 많다.

그러나 그 순간들에도 야구장에 싸들고 갈 맥주와 과자를 사러 들어간 '이마트'에서, 쿵푸팬더를 보러간 'CGV'에서, 대학로와 신림동과 홍대앞의 술집들에서 마주친 사람들의 얼굴과 광화문의 시민들의 얼굴이 너무나 닮아 있다는 사실에 흥분과 전율을 느끼며 이 싸움을 이길수도 있겠다는 '착각'을 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결국 언젠가는 지는 싸움이다. 우리는 지금 매일매일 이 싸움의 패배를 조금 뒤로 미루고 있는지도 모른다. 지난 금요일 천정환과 술을 먹으며 나는 늘 져왔으며 이번에도 결국에는 질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나에게 그렇게 생각하면 안된다고 했지만 그도 뚜렷한 반대의 근거나 희망의 좌표를 제시하진 못했다. 그렇게 생각하면 안된다는 그의 마음이 가장 큰 이유라면 이유였다. 관성화된 패배를 주억거리는 내게 그는 웃으며 등을 두드려 주었다.

물론 나도 알고 있다. 지난 역사의 모든 패배가 실로 거대하고 조용한 승리의 이름을 불러오고 있다는 사실을. 또 이미 이번 싸움에서 엄청나게 많은 환희와 희망을 얻어낸 수많은 학생들과 젊은이들에게 지난 5월과 6월이 얼마나 아름다운 승리의 시간이었는지를. 거리의 촛불을 이제 마음의 촛불로 이어가자고 하는 사람의 말 뒤에는 얼마나 큰 촛불의 감동이 놓여있는지를. '우리안의 이명박'을 지우는 일을 선행해야할 것이라는 말에 담긴 염려와 촛불에 대한 건강하고 탄탄한 믿음들을. 

그런데 이 그지같은 새끼들이 우리가 유일하게 첫번째 '승리'였다고 생각할뻔한 이 아름다운 기억들을 싸그리 소각하려 들고 있다. 승리했다고 혹은 승리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하루하루 번갈아 나와 맞고 끌려간다. 비폭력을 외치던 사람들도 마구잡이로 끌려가고 여학생은 또 군화발에 짓밟히고 물대포에 맞아 쓰러진 사람들을 카메라도 지켜주지 못하고 있다.

그들은 이렇게 모르고 넘어갈 수 도 있을뻔한 패배의 사실을 아주 구체적으로 우리들의 몸에 각인시켜주고 있다.

그들은 우리가 패배할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너무나 정교하게 만들어낼 줄 안다. 실제로 규모의 최대치를 기록한 6.10 이후 사람들은 많이 지쳤다. 화물연대와 건설노조의 파업이 정리되는 과정은 정부가 얼마나 야비하고 교활한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화물연대의 컨테이너가 광화문의 명박산성을 위협하고 결국 노동자 총파업으로 연결되고 100만 촛불의 지지로 그 파업이 성공하여 유연하고 부드러운 변화를 이끌어낼 가능성은 이제 사라져 버렸다.

완벽한 공세 포지션을 취한 정부는 사람들을 때리고 걷어차고 쏘아대더니 이제 법으로 구속하기에 이르렀다. 구속된 사람들이 우리의 대표가 아닌 것은 분명하지만 우리는 그들을 대표해서 그들을 구해내야한다. 텐트를 뜯어내고 대책회의 방송차량을 견인해가고 깃발을 단속하는 저들은 이제 우리에게 완벽한 패배의 조건을 마련해주고 있다.

하루하루 지나는 밤들이 너무 춥거나 아파 사람들은 더 많이 지쳐간다. 이명박은 우리에게 승리 혹은 패배의 기억 둘 중 하나를 심어놓으려는 게 아니라 모든 촛불의 기억을 우리에게서 지워내려고 한다. 권력은 개인의 내면에 조용히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내면을 완전히 지워버리는 형태로 다가온다.

그러니까 완전히 뭉개지고 부서질때까지 싸우는 것. 승리했다고 믿었던 사람이나 승리할 것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모두 패배했다고 말할 수 있는 그날까지 싸우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기록할 수 있는 거대한 진짜 승리의 시작일지 모른다.

우리는 결국 패배할 것이다.

저들은 우리를 인간으로 보지 않기때문이다. 저들에게 우리는 한낱 벌레나 짐승이다. 법-폭력의 이름으로 우리를 밀어내고 때론 구속하는 저들은 반드시 괴물이다. 계속 밀려나고 붙들리며 벌거벗은 삶이 되어버린 우리들은 이 상황을 공중에 매달고 있는 저 괴물을 죽이는 수밖에 없다. 괴물을 이길 수 있는 방법이란 현실에 없다. 다만 괴물에게 모두가 패하는 일만이 가능하다. 다만 지고 또 져서 그들이 먼저 우리를 토해내게 되는 그날. 우리의 패배가 완성되는 날. 그날을 끊임없이 만들어가야하는, 우리의 패배를 우리가 직접 예비하는 이 순간이 앞에 놓여있을 뿐이다.

우리는 이렇게 패배할 것이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지나가다 2008-06-30 08: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지더라도 침묵하는 것 보다 낫지 않을까요!

나비80 2008-06-30 09: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더라도 침묵하지말자는 글입니다.
 

* 시대를 가로지르며 스스로 산 역사가 된 인물들이 있다. 이들의 평전을 읽는다는 것은 하나의 온전한 사상을 마주치는 일이자 불멸의 역사를 되짚어 보는 일이 될 것이다. 하지만 올바르게 씌여진 평전을 구하기는 매우 어렵다. 다행히 실천문학사 쪽에서 '역사인물찾기' 시리즈로 출간을 계속적으로 해오는 편이지만 아직 한국 독서계의 평전의 규모는 여전히 좁고 협소하다. 그러한 와중에도 제법 짜임새 있게 출간되어 우리에게 친숙해진 인물들의 평전을 모아본다. 

1. 마르크스 평전

2. 체 게바라 평전

3. 스콧 니어링 자서전

4. 닥터 노먼 베쑨

5. 문익환 평전

6. 전태일 평전

7. 노신 평전

8. 김수영 평전

9. 로자 룩셈부르크 평전

10. 호치민 평전


10개의 상품이 있습니다.

마르크스 평전- 세계적인 석학 자크 아탈리의
자크 아탈리 지음, 이효숙 옮김 / 예담 / 2006년 10월
20,000원 → 18,000원(10%할인) / 마일리지 1,000원(5% 적립)
2008년 06월 16일에 저장
절판
체 게바라 평전
장 코르미에 지음, 김미선 옮김 / 실천문학사 / 2005년 5월
18,000원 → 16,200원(10%할인) / 마일리지 900원(5% 적립)
양탄자배송
밤 11시 잠들기전 배송
2008년 06월 16일에 저장

스콧 니어링 자서전
스콧 니어링 지음, 김라합 옮김 / 실천문학사 / 2000년 5월
18,000원 → 16,200원(10%할인) / 마일리지 900원(5% 적립)
양탄자배송
밤 11시 잠들기전 배송
2008년 06월 16일에 저장

닥터 노먼 베쑨
테드 알렌 지음, 천희상 옮김 / 실천문학사 / 2001년 6월
18,000원 → 16,200원(10%할인) / 마일리지 900원(5% 적립)
양탄자배송
밤 11시 잠들기전 배송
2008년 06월 16일에 저장



10개의 상품이 있습니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환상범 2008-06-17 15: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평전 마니아~
다른 분들은 어떤 책들을 읽으시는지 궁금해서 들러봤습니다.
'한놈만 패는~' 주유소 습격 사건의 유오성이 생각이 나내요.
저는 요즘 강준만의 "한국 생활문화 사전"을 읽고 있습니다.
도서관에서 책을 흩던중 '강준만'이란 이름을 보고 뽑았는데, 강준만교수님의 책 가운데 베스트가 아닌가 싶습니다
기회 되시면 한번 꼬옥 읽어 보시라 추천드립니다.

나비80 2008-06-19 16: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요즘 읽는 책이 아니라 그냥 분류해서 묶어놓은 겁니다. ^^
강준만 교수들의 책은 꼬옥 읽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6.10 백만 촛불집회' 는 예견된 바대로 꼭 그만큼의 성공을 거두었다. 

6월 10일 새벽부터 거대한 콘테이너를 광화문 한복판에 세우고 있는 권력의 저열함을 목격한 뒤 너나 할 것 없이 그날 자정 이후의 치열한 폭력을 예감했을 터였다. 이명박과 어청수의 불온한 상상력은 이토록 거대하며 무식한 의지는 차고 넘친다. 어찌 생각이나 했을까. 선친과도 같은 정주영처럼 거대한 유조선을 가져다 광화문 대로를 막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을까. 자발적인 자제력을 발휘하던 시민들도 자정 이후에는 폭력적으로 돌변하는 경우를 많이 보아왔기 때문에 그날의 대규모 촛불집회는 아슬아슬한 긴장감 속에서 시작될 수밖에 없었다. 싸움을 도발하는 상대에게 참을성을 발휘하기란 지극히 어렵기 때문이다. 더구나 며칠 전부터 자정 이후의 시간은 평화만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불안한 밤이었다는 사실을 누구나 알고 있었으므로.

'이순신 장군' 동상 앞에 '명박산성'이 세워진 뒤 시민들은 한순간 '왜구'가 되어버렸다. 통치자가 피통치자를 '적'으로 돌려세우는 이 기묘한 광경. 명박산성의 '안'은 어디인가. 정부종합청사와 청와대가 '안'이라면 시민들은 '밖'이다. 시민들이 '안'이라면 청와대와 정부종합청사가 '밖'일 것이다. 순식간에 모든 시민을 '비국민'으로 미끌어뜨리는 저들의 재주는 실로 감탄스럽다. 그러나 실제로 안과 밖의 구분은 이처럼 명확하지 않다. 안과 밖은 늘 비식별역에 위치하고 있기때문에 법-폭력이 들어서고 주권자가 처벌을 가할때만 그 구분이 생겨난다. 늘 우리는 주권자 즉 법-폭력의 언저리에 머무르거나 들어가지도 나서지도 못하는 문턱에 걸쳐 있을 뿐이다. 이것이 바로 이 세계의 실제 현실이며 2008년 6월 대한민국의 심장부에 가로놓인 명박산성이 이러한 사실을 가시적이고 극명하게 드러내 주었을 뿐이다. 

그렇더라도 여전히 '안'과 '밖'이 문제이다. 그렇다면 6월 10일 우리는 '안'에 있었는가 '밖'에 있었는가. 이순신 장군이 칼을 들고 노려보는 쪽은 시민들이었다. 명박산성 '밖'의 시민들. 그러므로 전경이 방패를 들고 보호해야하는 쪽은 명박산성 '안'의 권력자들. '고소영'과 '강부자'. 땅을 사랑하고 비지니스 프렌들리한 어륀지들이 맞다. '안'에 있는 그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밖'의 사태는 소요이자 반란이며 저지하고 분쇄해야 할 명백한 적일 뿐이다. 권력은 '명박산성'이라는 아방가르드한 설치 미술 '쇼'를 통해 시민들의 '분노'를 불러냈지만, 시민들은 이 '분노'의 '밖'에서 '안'을 조롱하는 또 한 번의 '쇼'를 벌인다. 

시민들의 쇼와 분노는 '밖'에 있지만 희망과 변화를 품고 있다. 권력의 쇼와 분노는 분명 '안' 에 있지만 거기에는 답이 없다. 이제 경계는 다시 세워져야 한다. 안과 밖의 구분은 다시 설정되어야 한다. 명박산성의 안은 스스로의 고립이며 이명박이 세상으로 나올 수 없다는 명백한 증거일 뿐이다. 그는 시민들을 밖으로 몰아세우며 스스로 왕따가 되었다.

더 확장해서 생각한다면 이러한 '안'과 '밖'의 구별짓기를 통해 연대의 기준이 새삼 재확립될 수 있다. 우리는 국경과 민족, 성별, 인종이 조장하는 주체와 타자의 경계의 무의미함을 알아야 한다. 경계를 넘어서는 계급의 연대가 필요하다. 이명박은 이런면에서 우리에게 훌륭한 것들을 되새기게 해주는 반면교사이다.



오후가 되자 촛불이 하나 둘 몰려들기 시작한다. 5시가 되자 시청앞과 광화문은 이미 시민들로 꽉 채워졌다. 벌써부터 명박산성 앞으로 사람들이 모여들어 사태를 논의하기 시작한다. 자연발생한 아고라. 대의민주제가 멈춘 자리에서 직접민주주의가 꽃을 피운다. 5시간이 넘는 토론. 다소 지루한 말다툼. 폭력과 비폭력의 공방. 아고라를 지켜보는 다수의 시민들도 걱정을 한다. 컨테이너 안의 저들은 컨테이너 밖의 시민들이 서로 싸우기를 바라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최종적으로 저항하되 비폭력이어야 한다라는 가장 현명한 답을 얻어낸 시민들. 그 사이 시민들은 몇 배 이상 불어난다. 엄청난 인파와 촛불이 광화문 십자대로를 중심으로 펼쳐져 있다. 허구와도 같은 부드럽고 유연한 변화가 가능할 정도의 규모이다.

거대한 철과 쇠의 밖에 부드러운 스티로폼 연단이 쌓아 올려진다. 하나둘 시민들이 올라가 명박산성의 안과 밖을 향해 쇼를 벌인다. 노래를 부르고 연설을 한다. 자기가 할 수 있는 말을 통해 자신의 분노와 화를 표현한다. 자신들은 꼭 그만큼의 민주주의를 바라고 있다고 힘주어 외친다.

시민들은 알고 있다. 명박산성 '밖'에 놓여 주권자에 의해 노예보다 못한 적으로 취급받는 상황에 대해서. '명박산성'을 단순히 '소통'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권력자의 의지 정도로만 보는 것은 사태를 지나치게 소박하게 보는 처사일 것이다. 40일이 넘도록 지속되고 있는 촛불집회는 이명박이 애초부터 소통할 의사가 없음을 진작에 보여주었다. 이제 소통의 장에 나서도 시민들이 응하지 않을 것이다. 어렵게 장이 마련되더라도 대학생들에게 야코가 죽은 한승수 보다 처참한 광경이 연출되어 괜한 동정심이나 불러일으킬 소지가 있다. 이명박의 무식함과 교양없음은 이미 충분히 알려지지 않았던가. 또 누가 계란이라도 던지면 전세는 순식간에 뒤집힐 수도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역사를 통해 알고 있다.

6월 10일은 정말 많은 인원이 모였다. 경찰과 찌라시들이 발표한 5만이나 7만이라는 숫자는 이제 은폐할 수도 없는 통계정치의 효력 정지를 더욱 노골적으로 증명시켜 준다. 이러한 숫자에 대한 강박은 규율 권력이 시민들 각자의 내면에 파시즘을 만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내면을 하나하나 지우려고 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것이야 말로 파시즘의 본질이다.

그러나 시민들은 알고 있다. 그것이 30만이든 50만이든 70만이든, 자신의 눈과 마음에 비춰진 촛불들의 거대한 파도가 얼마나 커갈 수 있는지를. 안티테제가 진테제로 바뀌어 갈 수도 있는 가능성을. 허약한 대의민주제도가 소중한 5년을 무조건 담보할 수 없다는 명백한 사실을.

6.10 이후 촛불집회는 휴일과 주말을 이용하여 상시적으로 설 것으로 보도되고 있다. 40일이 넘도록 지속되고 있는 촛불집회가 이제 자체적인 자제력을 발휘하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평화적인 시위를 하루 더 연장하는 매우 슬기로운 결과를 낳았다. 이제 당분간 과열된 폭력시위가 나타날 가능성은 상당히 줄어들었다.(하지만 변수가 있기는 하다. 화물연대의 억눌린 분노가 어느정도인지 아직 거리에서 표현되지 않은 상태이기 때문이다. 생존권을 박탈당한 화물연대의 극한 파업은 생존권을 박탈당한 이들이 벌이는 마지막 사투이기 때문에 폭력의 문제조차 윤리적으로 가늠하기 어렵다. 이는 조금 더 두고 보아야 할 문제이다.)



명박산성이라는 설치미술 '쇼'는 '분노'만 남긴채 하루만에 철거되었다. 명박산성은 언제든 다시 쌓아올려질 수 있다. 아니, 이미 예전부터 거기 그 자리에 가려진 채 쌓아올려져 있던 것이 그날 가시적으로 잠시 드러났던 것일 뿐이라는 표현이 더 적확하다. 분노를 정치적으로 올바른 행동으로 순치시키는 시민들을 보며 희망을 찾는다. 비폭력이되 저항이어야 한다는 시민들의 가르침은 꼭 그만큼의 민주주의가 얼마나 거대한 것인지를 아름답게 보여준다.

이순신 동상을 돌려세우지 않는 이상 명박산성의 안과 밖의 구분은 쉽게 바뀌지 않을 것이다. 설령 그 안으로 시민들이 들어간다 해도 어떤 가시적인 변화가 당장 일어날 것 같지는 않다. 과연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자꾸 더 모여야 한다. 밖이 안을 육박할 수 있는 힘이 될때까지. 안과 밖이 뒤집혀 쇼와 분노의 사이에 되다만 비극이 아닌 주체와 연대의 희망이 꽃피어날때까지 말이다.


댓글(3)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파란여우 2008-06-12 21: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명박산성에 페인팅 벽화도 그리고 단막 영화도 상영하고...
예전엔 무슨무슨 역 시계탑 아래서 만나요 한 것처럼
광화문 컨테이너 앞에서 만나요 하는 약속의 장소로도 활용하면서
촛불집회가 열린다면 무지 재미있겠다 싶었어요.
교통체증의 문제가 치명적이지만 장기전으로 돌입할 경우의 상상입니다.
하루만에 철거되면서 상상이 무너졌지만 다행히 5시간의 마라톤 토론이 있었다니
얼마나 다행이고 감동이었는지 모릅니다.
근데, 이젠 그 후의 촛불을 어떻게 진행해야 하는지 이런 토론도
광장에서 촛불들고 만나 논의했으면 하는 아쉬움도 있어요.
이번주말에 가능할래나...
화물연대는 그 분들의 생존권이 직결되는 문제라서 어떻게 돌출될지 예상하기 어려운데
이명박 정권이 화물연대의 투쟁방식을 폭력적으로 유도해서 진압하지 않을까
별 생각을 다 해 봅니다.

마늘빵 2008-06-12 21: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촛불행렬사진이 굉장하군요! 저 중의 한 점으로 있었지만 티도 안납니다. -_-

나비80 2008-06-12 23: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파란여우 님의 발칙한 상상력은 이명박과 어청수 뺨 때릴 수준이신걸요.^^ 원래는 정말 흉물스러웠던 걸 시민들이 이것저것 붙이고, 바르고, 덧대고, 꼽아서 그나마 볼만하게 해놓았더라구요. 뒤에 말씀하신 부분은 늘 아쉬운 대목이긴 합니다. 연설의 장은 공평하게 제공되지만 파토스가 과도하게 넘쳐납니다. 토론도 난상으로 벌어지긴 하지만 당일 시위의 폭력과 비폭력을 선택하는 공방에 지나치게 많은 에너지가 할애되고 있는 형국이지요. 직접민주주의를 실험하는 진통이 만만치 않더군요. 인터넷 담론이 거리로 자연스럽게 삼투할 수 있다면 알라딘에서 진지하게 의논할 필요도 있겠습니다. 화물연대 파업이 개시되기 약 한 시간 남았는데 이분들이 지금 워낙 목이 졸린 상태여서 향후 국면을 예상하기가 무척 어렵습니다. 유가와 화물대란은 유럽과 미국 쪽에서도 상당히 심각한 문제로 드러나고 있더라구요.

아프락사스 님!
˚ ← 이게 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