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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기인 > [퍼온글] 위기의 탐구자, 가라타니
탐구 1
가라타니 고진 지음, 송태욱 옮김 / 새물결 / 199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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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본서의 주제를 한 마디로 말한다면 그것은 「독아론」과 「타자」라는 두 개의 문제로 귀착된다. 이것들은 물론 철학의 영역에서는 데카르트 이후 지치지 않고 반복되어온 진부한 화제에 속한다. 그러나 가라타니의 전략목표는 이것들의 논의에 새로운 논점을 첨부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독아론」과 「타자」를 둘러싼 기존의 문제 틀 자체를 근본적으로 「전도」하는 것에 두어져 있다. 이 「전도」작업은 독아론의 극복을 내세우면서도 독아론을 재생산해 온 것에 지나지 않는 지금까지의 철학(가라타니는 그것을 「변증법」이라 부른다)의 전면적인 부정으로 직결되고 있다. 가라타니가 비트겐쉬타인과 만나는 것은 바로 이 지점에서이다.


  우리는 통상 나와 타자와의 사이에 「언어게임」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이전부터 피아(彼我)의 사이에 공통의 규칙(코드)이 존재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가라타니에 의하면 이러한 사고야말로 「독아론」의 전형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독아론이란 「나에게 말할 수 있는 것은 모든 사람에게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고방법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발견되는 타자는 「다른 하나의 자기의식」에 불과하고, 여기서 행해지는 언어게임은 외관은 어떻든 간에 단지 「자기대화(모노로그)」에 지나지 않는다. 여기서는 타자의 「타자성」이 처음부터 누락된 것이다. 현상학을 비롯한 「내성(內省)」을 특권적 방법으로 하는 철학은 「나」로부터 「우리」로의 통로를 확보하려는 것에 불과하며, 결국 진정한 「타자」를 발견하는 것에는 미치지 못한다.


 2.

  자기대화의 폐쇄된 영역을 타파하기 위해 가라타니가 요구하는 것은 「말하다 - 듣다」 입장에서 「가르치다 - 배우다」 입장으로의 근본적인 시좌의 전환이다. 소쉬르의 언어학에서 오스틴의 행위론에 이르기까지 「말하다 - 듣다」관계를 기초에 두고, 그것들을 교환 가능한 역할로 간주하는 입장은 결국 「모노로그」에 귀착될 수밖에 없다. 소쉬르의 「랑그」, 오스틴의 「관습」 등은 공통의 코드를 새롭게 설정하는 것에 의해 역으로 「타자」의 존재를 은폐하는 개념장치가 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에 대하여 비트겐쉬타인의 독창성은 규칙을 공유하지 않는 외국인이나 어린아이에게 말을 「가르치다」라는 관점에서 언어적 커뮤니케이션을 고찰하는 것에 있다. 가르치는 입장에 설 때 우리는 동일한 「의미」나 「규칙」을 아프리오리하게 전제할 수 없다. 오히려 의미이해의 주도권은 항상 「배우는」측의 자의에 맡겨져 있다. 「의미하는 것」에 대한 자기결정권을 갖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여기서는 「사적 규칙」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며, 때문에 언어게임은 「어둠 속의 도약」(크립키)이 되지 않을 수 없다. 여기서는 「공통의 규칙」이 되는 것은 후지혜(後知惠)로서 날조된 사후적인 설명에 지나지 않는다.


  확실히 이러한 가라타니의 비트겐쉬타인 해석은 크립키의 규칙수순(規則隨順)을 둘러싼 고찰에 많은 것을 신세지고 있다. 그러나 크립키가 사적 규칙에 관련된 패러독스를 「공동체의 선행성」에 호소하여 해소하려고 할 때, 가라타니는 크립키로부터 결별한다. 비트겐쉬타인의 사적 언어비판을 사회적 제도나 공동주관성의 우위성을 시사하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은 오늘날에는 일종의 「공인된 학설」의 위치를 점하고 있다. 그러나 가라타니에 의하면 그것은 공통의 의미나 규칙을 「기계장치의 신」으로 무대에 등장시키는 것에 불과하며 결국 데카르트의 「신」의 대체물에 지나지 않는다. 어찌되었든 간에 그것은 문제의 회피가 아니면 순환논법의 아포리아를 면할 수 없는 것이다.


 3.

  「말하다 - 듣다」라는 관계가 결국은 자기대화(독아론)로 귀착될 수밖에 없는 것에 대하여, 「가르치다 - 배우다」라는 관계는 그 속에 가교설정이 불가능한 심연을 안고 있는 것에 의해 역으로 진정한 「타자」와의 만남을 가능하게 한다. 여기서 타자란 공동체의 내부가 아닌, 외부에 속하는 자인 것이다. 이것을 가라타니는 "대화란 언어게임을 공유하지 않는 자와의 사이에만 있다. 그리고 타자란 자신과 언어게임을 공유하지 않는 자가 아니지 않으면 안 된다"하고 간결하게 요약한다. 물론 이것은 역설 등이 아니다. 여기서 볼 수 있는 근원적인 「비대칭성」은 타자를 타자답게 하는 성흔(聖痕, stigmata)인 것이다. 이러한 「타자」를 가라타니는 키에르케고르의 「예수」개념 속에서 발견한다. 즉, 「절대타자(=신)」도 아닌, 「상대타자(=사람)」도 아닌 「神人」이라는 양의성을 지닌 예수야말로 우리들의 언어게임을 「異化」하는 힘을 갖는 본래의 의미에서의 타자인 것이다.


  가라타니가 비트겐쉬타인과 키에르케고르에서 발견한 것은 이른바 「이인(異人)으로서의 타자」이다. 그것은 공동체의 외부로부터 부지불식간에 도래하고 공동체의 동일성(identity)을 위기에 처하게 하는 폭력적 존재에 다름 아니다. 그것을 「예수」라 불러도, 혹은 「바로바로이」라 불러도 같은 것이다. 플라톤 이후의 철학은 「대화」라는 미명 하에 이 「바로바로이」의 존재를 고의로 은폐하고 배제하는 것에 의해 점차 공동체 내부에 모노로그의 질서를 보지해 왔다. 가라타니가 이의를 제기한 것은 이러한 「모노로그의 질서」 혹은 「독아론적 이성」의 수호신으로서 자신을 바쳐 온 기존의 철학에 대한 것이다.


  「나」와 「공동체」는 대립개념이 아닌 보완개념에 불과하다. 공동체 내부에 안주하는 한, 「내」가 「우리」로 확장된다 해도 그것은 독아론의 꿈을 꾸는 것임은 변하지 않는다. 독아론의 일장춘몽은 타자와의 조우에 의해서만 깨어질 수 있다. 언어에 그 진면목을 묻는 것은 바로 이 장면에서이다. 즉, 「대화」란 공동체와 공동체의 「사이」에서 생기하는 스릴 있는 사건에 다름 아니다. 적어도 가라타니는 비트겐쉬타인의 「언어게임」과 맑스의 「등가교환」 속에서 그러한 「대화」의 있어야 할 모델을 발견한 것이다.

* 蛇足 : 내가 가라타니의 저서 중에서 제일 좋아하는 것이 탐구 1, 2이다. 아마 가라타니의 사고의 전환이 이루어지면서 문예평론가에서 비평가로 자리매김하기 시작한 부분에서 쓴 글일 것이다. 가라타니 스스로도 자신이 태도의 변경이 이루어졌음을 고백하고 있는데, 나는 거기에서 미답의 영역으로 처음 들어가려는 고독한 가라타니의 그림자를 볼 수 있지 않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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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시난테 > 김훈은 '난 아무 편도 아니다'라고 말했다.
'너는 어느 쪽이냐'고 묻는 말들에 대하여 - 김훈 世說
김훈 지음 / 생각의나무 / 200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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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훈, <너는 어느 쪽이냐고 묻는 말들에 대하여>(생각의 나무*2003)

오랫동안 기자생활을 했던 김훈이 소설을 쓴다고 했을 때 한 비평가는 '그의 문체가 소설에 적합하겠느냐'라는 의문을 제기했다고 한다. 기자로서의 글쓰기와 소설가로서의 글쓰기는 엄연히 다른 영역이라는 의견을 피력한 것이다.  

글쎄. 솔직히 난 김훈의 '기사'를 본 적이 없다. 내가 처음 접한 김훈의 글은 <강산무진>이었다. 김훈의 몇몇 소설을 뒤적이고 또 이 책을 본 후에, 난 위의 비평가와는 전혀 반대의 의문을 가졌다. '이런 식의 사고와 문체로 과연 김훈이 기자적 글쓰기를 할 수 있었겠느냐'라는 생각이 들었다.  

요컨대 뒤늦게 읽은 김훈의 글에는 뭐랄까, 기자로서 요구되는 '벼린 이성'보다는 '축축한 감정'이 묻어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너는 어느 쪽이냐고 묻는 말들에 대하여>는 편집자와의 상의 끝에 원래 제목이었던 <아들아 다시는 평발을 내밀지 마라>를 수정한 제목이라고 한다. 너는 어느 쪽이냐고 묻는 말들에 대하여...곱씹을수록 궁금증을 자아내게 하는 제목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걸 두고 제목에 '낚였다'라는 표현을 쓰는가 보다, 했다.   

 

<기자로 산다는 것·호미출판사>에서 스치듯 김훈의 과거사를 전해 듣고, 난 그가 궁금해졌다. 부끄러운 과거 덮기에 급급한 한국 지식인 지형에서 자신의 치부를 손수 밝히고자 했던 사람이 하는 얘기가 듣고 싶어졌다. 게다가 <너는 어느쪽이냐고 묻는 말들에 대하여>라는 도발적 표제를 건, 김훈이 말하는 세설(世說)이라니. 알라딘으로부터 택배가 도착하기 전부터 난 조바심이 났다.  

그에게 붙은, 그를 가장 단선적으로 보여주는 수식어는 바로 ‘문장가’다. 그가 주로 사용하는 간결한 문체와 그 사이에 드문드문 배치하는 만연체는 글의 전체 맥락 속에 적절히 혼용돼 읽는 이로 하여금 탄성을 자아내게 한다. <책머리에>라는 책의 첫 장부터 그의 칼날 같은 문장이 나를 압도한다. “세상은 읽혀지거나 설명되는 곳이 아니고, 다만 살아낼 수밖에 없을 터이다. 나는 미리 설정한 사유의 틀 속으로 세상을 편입시킬 수는 없었다. 나는 내 글의 계통 없음을 조금도 부끄럽게 여기지 않는다. 나는 여러 사람들이 흘린 액즙과 고름이 서로 섞이고 스미는 세상을 꿈꾸었다. 그것은 어찌 그리 어려운 일이었던지. 몸이 가장 부대끼는 날에, 가장 곤고한 글을 나는 썼다.” 이 책에 실린 많은 세설 중 가장 압권으로 문화일보가 소개한 <아들아, 다시는 평발을 내밀지 마라>의 일부를 보자. “내가 아들인 너의 눈치를 보면서 전전긍긍하던 어느 날, 너는 결국 너의 그 별것도 아닌 평발 증세를 너의 어머니께 강조하면서 재심받을 방법을 찾아달라고 말했다. 나와 너의 어머니는 다만 무력하게 한숨을 쉴 뿐 아무런 대답도 해줄 수가 없었다. 너를 낳아서 청년이 되도록 길렀으며, 남자로 태어나 함께 병역의 의무를 진 내가 너에게 이 사태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 것이며, 이 나라의 어느 아버지가 징집을 앞둔 아들에게 이 사태를 납득시킬 수 있겠는가. 병역은 남자로 태어난 국민의 가장 신성하고 가장 도덕적인 의무라고 말한들 이미 더럽혀지고 허물어진 신성 앞에서 그 말이 무슨 씨가 먹힐 것인가. (중략) 너의 어머니에게 다시는 너의 평발을 내밀지 말아라. 아프고 괴롭겠지만, 나라의 더 큰 운명을 긍정하는 사내가 되거라. 네가 긍정해야 할 나라의 운명은 너와 동년배인 동족 청년과 대치하는 전선으로 가야 하는 일이다. 가서, 대통령보다도 국회의원보다도, 그리고 애국을 말하기를 직업으로 삼는 사람들보다도 더 진실한 병장이 되어라.”(pp.18-20) 

그러나 김훈의 미사여구에 갖혀 그의 문체에만 주목하는 것은 오랜 기간 기자로 재직하며 쌓았던 그의 내공을 폄훼하는 일이 될 것이다. 사실 글 쓰는 재주야 하늘이 내려주신 선험적 재능이라 볼 수도 있어 그의 필력에만 평가가 집중하는 건 ‘주례사비평’스러운 경향도 없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책 <너는 어느 쪽이냐고 묻는 말들에 대하여>에 실린 글은 세상살이에 대한 김훈의 사색을 훔쳐볼 수 있어 그의 내면을 보다 깊이 들여다 볼 기회를 제공한다. 

 

김훈식 글쓰기를 말할 때 빼놓지 않고 나오는 게 바로 '아날로그적 글쓰기'다.

그는 여지껏 컴퓨터 자판에 익숙치 않아, 400자 원고지에 연필로 꾸역꾸역 문장을 만들어 나간다고 한다.

이 때문에 그의 집필 공간엔 잔뜩 구겨진 원고지와 지우개 가루가 어지러히 널려 있다고 한다.

사실 글쓰기를 업으로 자임한 자가 만드는 문장 하나하나는 몇번을 고쳐쓰고 지워쓰는, 산고의 고통을 거치는 게 당연하다.

그렇기 때문에 글이란 본디 '볼펜'보다는 '연필'로, 좀 더 투쟁적으로는 '몽당연필'로 써야 맞다.


 

‘너는 어느 쪽이냐’라는 질문에 대한 김훈의 대답은 자못 분명하다. ‘난 아무편도 아니다’가 그가 유일하게 밟고 있는 사유의 방향성이다. 앞서 소개한대로 그는 그의 ‘계통없음’을 조금도 부끄럽게 여기지 않거니와 다음과 같은 문장에서도 그의 ‘아무편도 아님’은 쉽게 읽힌다. “나는 개별적 삶의 구체성을 배반하거나 천대하거나 또는 그것을 추상화해 버리는 모든 이론과 정책은 모두 사기극이라고 믿는다. 도덕은 인간의 개별성과 개별적 존재의 구체성 위에서 논의될 수 있을 뿐이다.”(p.78) "정의로운 언설이 모자라서 세상이 이 지경인 것은 아니다. 지금 정의와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약육강식의 질서를 완성해 가는 이 합리주의의 정글 속에서 정의로운 언어는 쓰레기처럼 넘쳐난다.“(p.76) "나는 보편과 객관을 걷어치우고 집단의 정의를 조롱해 가면서 나 자신의 편애와 편견을 향하여 만신창이로 나아갈 것이다.”(p.76)  

그가 잣대로 삼는 유일한 사유의 기초는 바로 ‘삶의 구체성’이다.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인간의 먹고 사는 일’을 고려하는 것부터 그의 사유가 전개된다. 예컨대 <돈과 밥으로 삶은 정당해야 한다>에서 아들에게 하는 다음과 같은 충고들, “아들아, 사내의 삶은 쉽지 않다. 돈과 밥의 두려움을 마땅히 알라. 돈과 밥 앞에서 어리광을 부리지 말고 주접을 떨지 말라. 사내의 삶이란, 어처구니없게도 간단한 것이다. 어려운 말 하지 않겠다. 쉬운 말을 비틀어서 어렵게 하는 자들이 이 세상에는 너무 많다. 그걸로 밥을 다 먹는 자들도 있는데, 그 또한 밥에 관한 일인지라 하는 수 없다. 다만 연민스러울 뿐이다.”(p.13)를 보고 있노라면 그가 ‘밥을 먹고 돈을 버는’ 인간의 기초 행위에 관심을 집중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내가 일자리를 잃고 내 처자식의 밥 세 끼를 포기해야 하는 것, 이것이 도대체 ‘개혁’이란 말인가."(p.31) 그리고 그의 이러한 기본적 삶에 대한 집착은 곤궁하게 살아온 지난 세월의 대한민국의 기억으로부터 비롯된 듯 보인다. “(한국전쟁 당시) 열차 지붕 위에 실려서 부산까지 내려갔던 세 살 먹은 아이가 죽지 않고 살아서 이 글을 쓴다. 피난지에서 자라난 유년은 하루 종일 배가 고팠고 1년 내내 배가 고팠다.”(p.21) 혹은 오랜기간 기자 생활을 하며 부딪힌 사건들, 사람들의 양면성과 이면성을 몸으로 체득하며 얻은 심성일 수도 있겠다. “미리 설정된 사유의 틀이나 논리의 질서 속에 이 복잡하고 중층적인 세계를 강제로 편입시켜서 일사불란한 논리를 전개하는 언론행위는 별 가치가 없어 보인다.”(p.92) 

난 김훈의 계통없음이 부끄러워하기는커녕 대단히 용기 있는 커밍아웃이라고 생각한다. 그의 말처럼 이 세상은 너무도 ‘복잡하고 중층적’이어서, 한 가지 틀로 명쾌히 설명하는 언설은 이제 흰소리로 느껴진다. 다만 이 책 곳곳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잣대의 무의미함’이 지나치게 강조될 경우, 삶의 모든 부분을 인정하는 ‘절대적 상대주의’의 오류에 빠질 수 있음을 언급해 둔다. 또한 지나친 허무주의로 인해 극단적 부정의 냉소주의를 보여주기도 한다. “젊은 날의 말을 되돌아보는 두려움이 98년의 저물녘에 되살아난다. 말들은 허상 만들기로 싸우고 허상 위에서만 타협이 가능하다. 결국 당대의 현실은 당대에서 말하여지지 않는다. 들끓고 날뛰고 날아오르는 말들이 당대의 결핍이며 빈곤이다. 신기루는 점점 두꺼워진다.”(p.66) "어느 책임있는 위치에 있는 고위관리가 ‘그것(IMF)은 나의 책임이고, 내가 책임지겠다’라고 책임을 자인하고 나섰다 한들 그 말이 그 말이다. ‘책임이 없다’는 말이나 ‘책임을 지겠다’는 말이나 그 말이 그 말인 것이고 하나마나한 소리이고 들으나마나한 소리이다. 그것은 전적으로 무의미하고 무내용하다. 왜냐하면 그가 책임이 있다 하더라도 책임을 질 도리가 없기 때문이다.“(p.35) ‘지옥으로 가는 길은 선의로 가득 차 있다’ 나 ‘천국으로 가는 길은 악의로 가득 차 있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그의 ‘계통없음’을 삶의 구체성에 천착하는 방식으로 이해해야지, 삶의 갖가지 핑계거리를 용인하는 방식으로 이해해서는 안 되는 이유다.  

마지막으로. 스스로를 초로(初老)라 부르지만, 이제 이순(耳順)에 가까워져 오는 그가 보여주는 ‘글’에 대한 집념은 나를 부끄럽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글이란 ‘왜 쓰는가’에 대답하기 위해서 쓰는 것이 아니다. 글을 쓰는 일은 이 생기발랄한 몸의 살아 있음을 입증하는 과정이다. 이 몸이 언어를 통해서 이미지에 가닿을 때 그의 글을 가장 빛나는 문장을 이룬다. 문체는 몸의 일이다. 몸이 이미지에 맞는 가장 정확한 문체를 포착해 내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몸이 술과 담배에 절어 있어서는 끝장이다. 이 몸에 포즈가 배어 있어서는 다 끝난 것이다.”(p.203) 매일 이 핑계, 저 핑계에 절주, 금연 선언을 번복만 하기에 바쁜 나로썬 얼굴 홧홧 거리게 만드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게다가 난 몸을 부릴 대로 부려야 사유가 번뜩이는, 젓 비린내 여지껏 가시지 않은 20대가 아니던가. 이런 내가 ‘술과 담배에 절어 있어서는 끝장이다.’ 지금부터 다시 금연이다.   

문체는 몸의 일이다.

몸이 이미지에 맞는 가장 정확한 문체를 포착해 내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몸이 술과 담배에 절어 있어서는 끝장이다.

이 몸에 포즈가 배어 있어서는 다 끝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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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드무비 > 다자이 오사무라는 향수
나의 소소한 일상 - 다자이 오사무 산문집
다자이 오사무 지음, 김춘미 옮김 / 시공사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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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주 전, 영화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을 보러 갔을 때
꼴에 소설가라는 마츠코의 기둥서방 방에서 대문짝만한 다자이 오사무의 얼굴을 보았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함부로 쌓인 책들과,
햇빛을 차단하는 싸구려 커튼 한 장이 전부인 그 골방, 벽에 붙은 흠모하는 소설가의 대형사진.
1948년, 다자이 오사무의 무덤 가에서 할복자살한 문학청년이 있다고 들었는데
그가 바로 그러고도 남을 위인이었다.

지난주에는  <소라>라는, 스튜어디스가 주인공인 만화를 읽는데
'쓰가루(津輕)'가 나왔다.
다자이 오사무가 태어나서 자란 고향이다.
60년 전 스스로 생을 마감한 이 작가의 살아생전 흔적을 혼자 좇는
초췌한 몰골의 청년들. <쓰가루> 한 권을 품에 안고......
(바닷가 그 스산한 언덕도 좋았지만 언젠가 나도 그 해저터널의 투명창 위에서
물결이 합류하고 부서지는 장면이 보고 싶다.)

소설가 아쿠다가와 류노스케의 문학강연회에 참석한 지 20일 뒤
그의 자살 소식을 듣고 소년 다자이 오사무는 엄청난 충격을 받는다.
오래 전 나는 김승옥과 이제하, 최인호의 글에서 공통된 어떤 수상한 냄새를 맡았는데
알고봤더니 다자이 오사무의 감수성이라는 향수였다.

우리나라의 많은 작가들이 황홀해 하며 언급했던 <사양(斜陽)>의 그 유명한 장면은
<크레이브의 부인>(처음 본 제목!) 같은  책이 모티브가 되었다고.
'그 시절의 귀부인은 궁전의 정원이나 복도 계단 밑의 어두운 곳에서
태연하게 소변을 봤다'(<나의 소소한 일상> 126쪽)고 하는데,
정원 덤불 속의 방뇨 장면으로 그렇게 멋지게 처리하다니!

<나의 소소한 일상>을 읽고 나서 나는 책꽂이를 뒤져  '쓰가루'와 '쓰가루 통신'을 묶은
<다자이 오사무의 귀향>(1993년 진화 刊)을 꺼내어 다시 읽었다.

다자이 오사무를 읽고 나면  하염없어지고 몸과 마음이 녹작지근해지지만,
이상하게도 뭔가 조그만 것이라도 행동하게 된다.
툭 튀어나와 내내 신경을 거슬리게 하던 못을 망치로 박아 넣는다든지,
엉망인 책꽂이를 뒤진다든지, 하다못해 슬리퍼를 끌고 동네 가게에 맥주라도 사러.......

-- 창작에서 가장 당연히 힘써야 하는 것은 정확을 기하는 일입니다.
그 외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풍차가 악마로 보이거든 주저말고 악마로 묘사해야 합니다.
또 풍차가 역시 풍차 이외의 것으로 보이지 않을 때에는
그대로 풍차를 묘사하는 것이 좋습니다.
실은 풍차가 풍차로 보이지만, 악마처럼 묘사하지 않으면 예술적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뻔한 궁리를 이리저리 하여 낭만적임을 자처하는 멍청한 작가도 있습니다.
그런 자는 평생 가도 무엇 하나 포착하지 못합니다.(<나의 소소한 일상> 242~ 243쪽)

"예술적 도취라는 웃기는 짓은 집어치우라"는 다자이 오사무.
그러면서 그 자신은 독한 체취 혹은 감수성이라는 향수로, 수많은 청년들을 사로잡았다.
평생 가도 무엇 하나 포착할 기미가 없는 나이지만, 그를 만나는 일은 아직도 즐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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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7-05-11 19: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아하는((?) 작가예요 ..아니 마음한구석...담아두는 ... 담아져있는 작가예요 ..
그가 느꼈던 쓸쓸함들이 .. 세월과 공간을 건너.. 어느날 .. 불어오는 바람에.. 슬그머니 .. 마음속에서 .. 흔들릴때면 .. 생각나곤 하는 ..
다자이는 제게 그런 사람..

나비80 2007-05-11 19: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시군요. 굉장히 어려운 작가이기도 한데 말이죠. 제게도 다자이 오사무 책은 몇 권 있답니다.
 
 전출처 : 기인 > [퍼온글] 사회개혁이냐 혁명이냐
사회 개혁이냐 혁명이냐 책세상문고 고전의세계 5
로자 룩셈부르크 지음, 송병헌 외 옮김 / 책세상 / 200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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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사회개혁이냐 혁명이냐 

1. 로자와 레닌

일주일 전에 『사회 개혁이냐 혁명이냐』(책세상, 2002)를 읽었다. 그리고 곧바로 두꺼운 『레닌』(시학사, 2001)을 집어들었고 일주일만에 완독했다. 19세기 말에 태어나 20세기 초에 정력적으로 활동하던 두 혁명가의 삶과 사상을 연달아 살피다보니 잠시 나의 감각도 백여년 전으로 돌아간 듯 하다. 그때의 사상가들은 지금 우리보다 불행했을까. 그들이 싸워야했던 적들과 배신자들은 지금의 우리의 경쟁자들보다 상대하기가 수월했을까. 훨씬 세련되어보이고 숫적으로도 늘어난 베른슈타인의 후예들이 맑스와 맑스주의를 조롱하는 이 시대에도 로자나 레닌같은 열정과 확신을 지닌 투사들은 여전히 생겨나고 조직하고 반란을 꿈꾸고 있는 것일까.  

‘국가권력’을 장악해야 한다던 로자와 ‘국가권력’을 장악했던 레닌에게 그것은 타도와 획득의 대상이며 시기와 방법의 문제였지만, 우리에게도 그러한 관점은 여전히 유효한 것일까. 로자가 레닌에 비해서 정치적 수완이 부족했다는 것은 분명하지만 혁명적 순수성이 부족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레닌처럼 자신의 뜻대로 움직이는 당파의 권력을 성장시키는 것을 로자가 최우선의 목적으로 삼지 않았기에 그들의 명암이 갈렸다고 생각한다. 레닌의 시신은 통치이데올로기의 상징물로 전시되었지만 로자의 시신은 강물 속에서 썩어갔다.  

2. 로자와 베른슈타인 

1871년에 태어나 1919년에 살해된 Rosa Luxemburg는 『Sozialreform oder Revolution?』(1899)로 Eduard Bernstein의 주장들을 비판한다. 이 책의 1부는 <사회주의의 여러 문제(베른슈타인, 1896-97)>에 대한 비판을, 2부는 <사회주의의 전제와 사회민주주의의 과제(베른슈타인, 1899)>에 대한 비판을 담고 있다. 『사회 개혁이냐 혁명이냐』는 1908년에 재판을 찍었고 로자는 몇몇 구절들을 고쳤다.  

로자는 “임금체계를 폐지한다는 최종 목표(10쪽)”를 갖고 있으며, “사회민주주의는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을 폐기함으로써 사회주의적으로 분배하고자 한다”(84쪽)라고 주장하고 “자본주의의 종양을 제거”하여 그 생명을 연장시키는 게 아니라 “자본주의 자체를 제거하는 것”(95쪽)을 목적으로 한다. 로자의 생각은 “프롤레타리아가 정치권력을 장악하고 자본주의 체제를 전체적으로 해체해야 한다”(99쪽)는 주장으로 압축할 수 있다.  

그에 반하여 로자가 파악한 베른슈타인의 소망은 “자본과 노동의 적대 완화(23쪽)”를 통해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자본주의 사회개혁으로 대체하는 것(101쪽)”이다. 둘 다 “사회민주주의”라는 말을 사용하던 당원동지(?)였지만 로자와 베른슈타인은 전혀 다른 목적, 그에 따라 전혀 다른 방법으로 무장된 사상가들이다. 그러한 사람들 사이에서 비판은 가능한 것일까. 그리하여 비판은 상대를 설득하여 우리 편으로 만들려는 차원이 아니라 독일사회민주당 내에서 비판 대상을 추방하기 위하여 진행된다.  

베른슈타인의 고민을 긍정적으로 수용하는 사람들과 로자의 비판에 동의하는 사람들 사이에도 마찬가지로 너무 먼 거리가 있다. 하여간 로자처럼 명민하고 날카로운 비판자를 맞이한 베른슈타인이 가엾게 느껴지지만, 그 후로 로자가 아닌 베른슈타인의 후예들이 더욱 번성했다는 것이 그들의 위안일 것이다.  

3. 인용 노트 

이론적 논쟁이 결국 ‘학자들’의 일이라는 주장은 노동자 계급에 대한 가장 저열한 모욕이며 악의에 찬 비방이다. … 현대 노동운동의 전체 힘은 이론적 인식에 근거한다. - 13쪽 

노동조합은 임금 법칙을 철폐시킬 수 없다. 노동조합은 최선의 경우에라도, 특정 시점의 ‘정상적’ 한계를 자본주의적 착취에 부과할 수 있을 뿐이며, 결코 그 착취 자체를 점진적으로라도 철폐할 수 없다. - 39쪽 

분명 민주주의의 형식은 전체 사회의 이해관계를 국가 조직 속에 표현하는 데 기여한다. 그러나 반면에, 그것은 여전히 단지 자본주의 사회, 즉 자본가의 이해관계가 결정적으로 지배하고, 그 이해를 표현하는 사회이다. 따라서 형태에 있어서는 민주주의적인 제도일지라도, 내용에서는 지배계급의 도구가 된다. - 51쪽 

팔랑스테르Phalanstere 체제를 건설함으로써 지구상의 바닷물을 모두 레모네이드로 바꾸겠다는 푸리에Charles Fourier의 생각은 매우 공상적이다. 그러나 쓰디쓴 자본주의의 바다에 사회개량주의의 레모네이드 몇 병을 넣어 자본주의의 바다를 사회주의의 단물로 바꾸겠다는 베른슈타인의 생각은, 더욱 어리석은 것이며 머리카락 한 올만큼도 덜 공상적이지 않다. - 53쪽

자본주의 세계에서 이제껏 사회 개혁은 어떤 전술을 사용했다 하더라도, 그 결실은 공허했고 앞으로도 계속 그럴 것이기 때문에, 다음에 이어질 논리적인 결과는 사회 개혁에 대한 환멸이다. - 57쪽

한마디로 베른슈타인의 적응 이론은 개별 자본가의 사고방식을 이론적으로 일반화한 것일 뿐이다. 그러나 이론적으로 표현할 때 이 이론은 부르주아 속류 경제학의 본질이고 특징적인 표현일 뿐이지 않은가? 이 학파의 모든 경제적 오류의 근거는 바로 개별 자본가의 눈을 통해 본 경쟁이라는 현상을 자본주의 경제 전체의 현상으로 간주하고 있다는 것이다. - 63쪽

 마르크스가 발견한 추상적-인간 노동은 결국 그것이 발전하면 화폐라는 형태를 띨 뿐이다. - 75쪽

 … 이러한 종류의 사회주의를 바이틀링이 이미 지난 50년 전에 얼마나 더 많은 힘과 정신과 명예를 가지고 대변했던가! 그러나 그 천재적인 재단사는 아직 과학적 사회주의를 알지 못했다. 그리고 50년이 지난 오늘날 {누군가} 마르크스와 엥겔스에 의해 조각처럼 조각난 생각을 운 좋게도 다시 기워 맞춰서 독일 프롤레타리아에게 과학의 마지막 단어로 제공할지라도, 그는 기껏해야 그저 재단사에 불과할 뿐, 천재적인 재단사는 아니다. - 86쪽

사회주의 운동의 운명이 부르주아 민주주의에 연결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민주주의 발전의 운명이 사회주의 운동에 연결되어 있다. - 91쪽

마르크스가 가능하다고 보는 것은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평화롭게 실행하는 것이지, 이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자본주의 사회 개혁으로 대체하는 것이 아니다. - 101쪽

4. 그밖에

로자와 껄끄러웠던 레닌은 1922년에 다음과 같이 말한다. “… 독수리는 때로는 닭보다 낮게 날지만, 닭은 결코 독수리의 높이에 이를 수 없다. 그녀의 결함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독수리였으며 지금도 여전히 그러하다.”(150쪽) 이미 『국가와 혁명』을 통해 맑스의 생각에 더욱 근접한 레닌은 카우츠키의 “배신”보다 로자의 “결함”을 더 소중하게 평가한다. 그렇다면 과연 “그녀의 결함”은 무엇이었을까? 

스파르쿠스단은 반란에 실패하고 그 지도자들은 살해당했다. 반면에 볼셰비키는 권력을 장악했다. 니콜라스 황제와 그 가족들은 이파테프 하우스에서 갇혀 지내다가 1918년 7월 18일 지하실로 끌려 내려가 모조리 총살당했다. 부부와 네 명의 딸과 아들과 여러 하인들까지. - 『레닌』(648쪽, 시학사) 그 일이 있기 30여년 전, 레닌의 형 알렉상드르 울리야노프는 1887년 5월 8일 교수형을 당했다. 테러에 반대하고 폭력혁명에 찬성한 사람들은 테러에 의해 죽었고, 폭력혁명을 위해 테러도 불사한 이들은 그들의 권력을 유지했다.  

책세상문고의 『사회 개혁이냐 혁명이냐』는 꼼꼼한 번역과 적절한 <해제>를 갖추고 있다. 『대중파업론』과 마찬가지로 로자의 글이 재미 있다고 볼 수는 없다. 논쟁과 비판이란 이런 것이다라는 통쾌한 느낌은 들지만 레닌의 대부분의 저작이 그러하듯이 특정 상대를 공격하고 정치적 효과를 얻기 위해 쓰여진 글들은 지나치게 논쟁적이고 호전적인 요소가 강하게 들어가기 마련이다. 물론 로자의 비판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훨씬 품위가 있다. 

지난날과 더불어 오늘날 그리고 앞으로도 기회주의의 실천과 수정주의의 이론은 지속적으로 출현하고 시대의 유행에 따라 새로운 모습으로 변장하고 나타난다. 그럴수록 우리는 로자 룩셈부르크의 비판을 다시 되새겨야 할 것이다. 자본주의의 지속을 위해 투쟁할 것인가 아니면 자본주의에 반대하는 투쟁에 설 것인가. 자본주의를 반대하는 운동의 원칙들은 무엇이고 핵심적인 정신들은 어떤 것일까. 그리고 그러한 실천은 어떤 모습으로 진행되어야 할 것인가. 그러한 것들에 대한 지혜가 꼭 책 속에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지만 맑스, 레닌, 로자가 책을 많이 읽은 사람들이라는 것은 분명하며 그들 역시 앞선 선배들의 비판과 투쟁을 책을 통해 배웠다.  

2002년 4월 1일

오창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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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바람구두 > 오늘날 우리의 상식은 투쟁과 타협의 결과다
100권의 금서 - 금지된 책의 문화사
니컬러스 J. 캐롤리드스.마거릿 볼드.돈 B. 소바 지음, 손희승 옮김 / 예담 / 2006년 4월
평점 :
절판


지난 2006년 9월 즈음 "국가보안법 폐지를 위한 인권평화전시회 - 안녕, 국가보안법"이라는 릴레이 전시회에서 "감옥에 간 금서들의 이야기전" 기획에 참여한 적이 있다. 대학원에서 논문으로 준비 중인 주제 역시 "금서"와 관련이 있다.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금서를 읽은 사람들의 의식 혹은 그것이 형성한 문화에 대한 연구를 논문 주제로 잡고 있다. 대학원 기간 2년 내내 지도교수를 제외한 다른 교수들, 그리고 주변 사람들에게 가장 많이 설명해야 했던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아직까지 금서가 존재한다는 사실이었다. 직업상의 이유로 모두가 가을을 살고 있을 때, 홀로 겨울을 준비하고, 모두가 겨울을 살고 있을 때 홀로 봄을 예비한다. 그래서일까? 많은 이들이 지금 우리는 자유라고 외치는데, 나는 홀로 지금 우리가 정말 자유로운가를 묻고 싶은 건지도 모른다.

어느 사회에서 특정한 관습이나 인식이 '상식(혹은 공식적인 지식)'으로 인정되기 까지는 꽤나 복잡한 절차와 지난한 과정을 거치기 마련이다. 예를 들어 우리는 오늘날 회사 같은 공공 영역에서 또라이 취급을 받을 각오를 하지 않고서는 "여자와 북어는 사흘에 한 번씩 두둘겨줘야 한다"는 말을 할 수 있는 남성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이 같은 변화가 생긴 것은 불과 한 세대만의 일이다. 물론 이 같은 변화가 발생하기 까지는 수많은 조건들이 작용했을 것이지만, 그만큼 많은 이들이 싸워온 결과이기도 하다. 황사를 비롯해 많은 기상이변이 발생하고 있는데, 요새는 그 원인이 산업화의 결과로 초래된 지구온난화로 인한 문제라는 것을 동네 꼬마들도 알고 있다. 이같은 인식의 변화 역시 근래 20여년간 생태환경운동가들의 노력 덕분이다.

그 반대로 우리나라가 UN이 선정한 대표적 '물부족 국가'라는 잘못된(?) 인식은 좀체로 바뀌지 않는다. 실제로 UN이 한국을 앞으로 10년 내에 물부족국가가 될 수도 있다는 내용을 담은 보고서를 낸 적은 있다. (내가 알기로는 딱 한 번이라고 한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 모두에게 상식처럼 받아들여지게 된 이유 중 하나는 댐 건설론자들의 주장과 정부가 출자한 공사가 해마다 광고비를 지출하여 널리 알린 덕이다(물론 나는 어느 것이 진실인지 말할 수 있을 만한 전문적인 식견을 가지고 있지 않지만, 물부족 사태를 해결하는 근본적인 방책이 댐 건설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이 처럼 어느 사회의 상식이란 그 사회 구성원들의 갈등과 타협의 결과이지 본래부터 상식으로 규정되어 있는 것은 없다. 

우리는 많은 것을 학교 교육을 통해 알게 된다. 교육은 사회에서 통용되는 공공지식(상식)을 재생산하는 가장 유력한 공간이자 도구이다. 그렇기 때문에 지배계급은 언제나 교육을 어떻게 통제할 것인가, 통제할 방법은 무엇인가 궁리한다. 그러나 교육은 학교라는 공간에서만 이루어지진 않는다. 때로 우리는 언론을 통해 오피니언 리더라는 불특정한 집단의 의견을 여론이란 형태로 수렴하게 되는데, 이때의 오피니언 리더란 반드시 전문가집단, 지식인을 의미하지 않는다. 지배계급에 충실한 언론일수록 오피니언 리더 그룹은 해당 사안에 대해 자신의 이해관계가 관철되었을 때 이득을 보는 이들일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얼마전 모언론에서 우리 사회의 오피니언 리더 100여명에게 물어본 결과 이들 중 대다수가 FTA에 찬성하더라는 기사를 내보낸 적이 있는데, 이 오피니언 리더들이 언론사의 행사에 초빙되어 온 이들이었다는 후문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피니언 리더들의 의견은 힘이 세다.

니컬러스 J. 캐롤리드스, 마거릿 볼드, 돈 B. 소바. 세 사람의 공동저서인 "금지된 책의 문화사 - 100권의 금서"는 말그대로 역사적인 관점에서, 금서로 지정된 이유 등 다양한 각도에서 선정한 100권의 금서 이야기를 통해 조망하고 있는 책이다. 어느 사회의 공공지식이 생산되는 과정이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다면 반대로 어느 사회에서 금기의 지식, 혹은 금지된 것이 무엇인지 살펴보는데 가장 유력한 표본이 있다면 바로 금지된 책, 금서일 것이다. 인류는 오랫동안 무엇인가를 선택하고, 배제하는 형태로 스스로의 생존방식을 규정해왔다. 어느 사회가 무엇인가를 허용하고, 권장할 때, 그 이면에는 거의 반드시 그 공동체의 이해관계가 수반되기 마련이다.

만약 그 이유를 이 책의 구분법에 따르자면 그 이유는 크게 다음의 네 가지 이유, 정치, 종교, 성, 사회적 이유로 구분될 수 있다. 이 책 속에서 다뤄지고 있는 것들은 살만 루시디의 "악마의 시"로부터 "카마수트라", "율리시스", "허클베리 핀의 모험"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양한 종류의 것들이다. 우리 관점에서 보았을 때 분명히 권장도서 목록에 수록되었을 법한 책들까지도 금지된 도서 목록에 올라있음을 확인할 수 있는데, 그 까닭은 무엇일까? 그 이면엔 '다빈치 코드'와 같이 뭔가 엄청난 음모가 도사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그 이유를 다음의 인용문에서 유추해보는 것도 재미있을 듯 하다.

20세기 한국인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소설로 주목받는 "태백산맥"은 국가보안법상 이적표현물과 적에 대한 고무 찬양이라는 죄목으로 내사를 하여, 1992년 대검찰청은 "학생이나 노동자들이 읽으면 불온서적 소지, 탐독으로 위법조치할 것이며, 일반 독자들이 교양으로 읽는 경우는 무관하다"라고 알쏭달쏭한 발표문을 냈다. 마광수의 "즐거운 사라"는 그렇게 방종한 여대생이 우리나라에 있을 수 없다며 판매금지되었고, 저자는 대법원에서 유죄 판결을 받았다. - 옮긴이의 글 가운데

검찰청의 발표대로라면 학생과 노동자는 일반인이 아니란 말이고, 방종한 여대생이 우리나라에 있을 수 없다는 대법원 판결은 그와 같이 방종한 여대생이 한 명이라도 존재한다면 무죄라는 판결이 된다. 어떤 논리로도 설명이 안 된다는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랜 세월 우리 사회엔 수많은 금서가 존재해왔고, 금서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양산되고 있다. 아니 인류가 공동체를 이루고 살아가는 동안 어떤 사회이든 금지시키고 싶은 지식은 존재할 것이고, 이에 대한 반항 역시 존재할 것이다. 그러나 역사가 증명해주는 것은 지배집단이 금지시키고 싶어 한 어떤 지식도 결국 금지시키는데 실패했다는 사실이다. 금지된 지식 혹은 금서에 대해 별다른 관심이 없는 이라도 이 책은 읽어둘 만하다. 왜냐하면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책들이나 저자들의 책들이 하나 같이 추천할 만한 명저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금서하면 떠올리는 대표적인 책들인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을 필두로 카를 마르크스의 "공산당선언", 조지 오웰의 "1984", 커트 보니컷 주니어의 "제5도살장", 로버트 코마이어의 "나는 치즈다",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 나기브 마푸즈의 "골목길의 아이들", 드라이저의 "아메리카의 비극", 캐슬린 윈저의 "내 사랑 엠버", 존 업다이크의 "달려라 토끼", 토니 모리슨의 "가장 푸른눈", 휘트먼의 "풀잎", 안네 프랑크의 "일기", 하퍼 리의 "앵무새 죽이기", 허버트 셀비 주니어의 "브루클린으로 가는 마지막 비상구" 등등이 모두 금서에 포함되어 있고, 이 책에는 그에 대한 비교적 자세한 이야기들이 수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 가운데 상당수는 국내에 번역 출간되었지만, 또한 상당수는 정치적 이유보다는 자본과 시장의 검열로 인해 출판되지 못했다. 다시 말해 시장성이 없다는 이유로 출판되지 못했다. 오늘 나는 연세가 많으신 원폭피폭자 한 분에게 전화를 받았다. 그 분은 전쟁 중 일본에서 원자폭탄에 피폭된 분으로 현재까지도 일본 정부는 물론 국내에서도 이와 관련한 일들을 하고 있다. 이 분이 최근 일본에 거주했던 다른 피록 교포들이 일본어로 기술한 회고록을 번역하여 출판하길 원했고, 내게 부탁을 하셔서 몇 군데 알아봤지만 아마도 이 책이 국내에서 일반 독자들 손에 단행본으로 전해지긴 매우 어려울 것 같다. 출판인들의 눈으로 보자면 시장성이 없기 때문이다.   

올해는 우리나라에 자본론이 번역출간된지 만 20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다. "자본론"이 아직도 시장에서 퇴출되지 않고 남아있다는 사실에 감사해야 하겠지만 입맛이 씁쓸한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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