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재환씨의 자살 소식은 나의 마음을 황량하게 한다. 예상외로 그의 죽음은 나의 마음속에 아주 깊게 틈입해왔다. 그의 죽음과 관련된 뉴스를 찾아 보면서 여과없이 게재된 죽음의 흔적들도 아주 쉽게 발견할 수 있었다. 곧 그의 자살은 나에게 죽음에 대한 어떤 태도 변경을 요구하는 일이 되어 버렸다. 

나는 이전까지 죽음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편이었다. 아니 죽음에 대해 좀 더 빨리 익숙해지고 싶었다고 말하는 편이 옳으리라. 이전까지 죽음은 나에게 슬픔과 공포를 불러일으키기 보다 어떤 의식 혹은 감당해야 할 일종의 제례 성격을 띠고 있었다. 장례와 조문, 혹은 입관과 발인 등의 절차로만 기억되는 죽음에 대한 상례적 처리 과정은 내게 별다른 충격이나 감흥을 주지 않았다. 또한 나에게 죽음은 곧 단순히 생물학적 시효 정지를 뜻했다. 하나의 생명이 소멸했다라는 명료한 판단. 사태를 이렇듯 차갑게 바라보는 것이야말로 죽음에서 비켜선 삶을 다행스럽게 지속할 수 있는 힘이 되어주는 보다 현명한 처사라고 나는 스스로 믿으려고 애썼던 같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다. 그건 내가 죽음에 대한 보편적 혹은 정신적 이해가 부족하거나 결핍과 부재에 대한 절망감을 미쳐 깨닫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라는 사실을.  

그런데 이 주전 돌아가신 할머니와 이틀전에 시신으로 발견된 안재환 씨는 내가 가지고 있던 죽음에 대한 태도를 바꾸도록 종용한다.

올해 서른여섯인 안재환 씨의 죽음과 1921년 생으로 올해로 여든여덟이신 할머니의 죽음을 동일한 선상에 놓고 바라보기는 어렵다. 그것은 친소의 개념보다도 중요한 사회적 효용 혹은 죽음에 대한 일반적 태도에서 비교 대상이 되지 못한다. 안재환은 비교적 젊은 나이로 창창한 미래를 남겨둔 이외의 시간을 많이 가졌어야 할 존재였다면 나의 할머니는 살아온 날이 이미 넘쳐 자리에 누운 뒤로는 마치 잉여의 삶을 살고 있는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결국 이 두 죽음은 결코 같을 수도 만날 수도 없다. 그렇지만 나는 이 두 죽음이 이 같은 차이를 무화하는 선택된 죽음, 즉 자살이라는 공통항을 발견하게 되면서 죽음에 대한 태도를 정하는 데 있어 어떤 분열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그러니까 최근에 내가 겪은 이 죽음들은  병 혹은 예기치 못한 사고와 연관되어 곧바로 슬픔과 공포를 조장하는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안재환은 알려진대로 정황상 자살임이 분명해 보인다. 또한 나의 할머니는 의학적인 소견상으로 분명 노환으로 사망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내가 판단하기에 할머니 역시 일종의 의식적인 자살을 감행한 것으로 보인다.

엄밀히 말하자면 안재환 씨는 형식적으로 죽음을 선택했지만 가혹한 경제적(현재까지 알려진 바대로라면) 시련에 내몰려 죽음을 강요당한 경우라고 표현하는 것이 옳다. 나의 할머니 역시 자리보전하고 누워계신지 1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왕성했던 소화와 배설과 같은 생물학적 기능을 통해 보건대 아직 사망할 시점이 아니었다는 것을 나는 쉽게 알 수 있었다. 결국 할머니 역시 가족에 대한 의무 부담을 못 견뎌 미약하고 빈곤한 정신 상태의 와중에도 나름의 해결방안을 찾기 위해 고투한 결과 의지로써 죽음을 선택한 것이 아닐까. 왜냐하면 할머니의 의식은 언제나 또렷했으며 돌아가시기 며칠전까지 나의 이름을 부르며 잡았던 손아귀의 강도를 내 귀와 손목은 잊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이 사회에서 경제적인 부담, 다시 말하자면 돈의 압력, 더 쉽게 말해 빚은 학교생활기록부에 기록되는 <상 중 하>정도로만 엉성하게 분류 될 수 없는 복잡한 내용들을 포함하고 있다. 백만원때문에 자살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으며 몇 백억의 손실에 결국 죽음을 택하는 사람도 있다. 곧 자신의 신체를 제어할 수 없는 노인이 자손들에게 짐지우는 경제적 부담과 걷잡을 수 없이 늘어나게 된 젊은이의 빚의 누적은 동일하진 않지만 비슷한 종류의 괴로움일 수는 있는 것이다.   

확실한 것은 나 역시 할머니의 죽음에 대해 전혀 무결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이같은 결부는 한달에 180만원이라는 부담이 어려워 간병인을 쓰지 못해 불편하고 괴로운 자식의 마음과  3만원짜리 링겔을 꼽으면서도 빨리 돌아가시기를 바라는 복잡한 손주의 마음을 순식간에 같아지게 만들 수도 있다. 결국 나는 할머니의 죽음이 슬프다기 보다 괴로웠다. 더해 안재환 씨의 죽음은  우리 사회의 결점 혹은 모순을 상징적으로 드러내고 있을 뿐만 아니라 연예인이라는 특수성, 즉 불가촉이지만 정서적으로 근접가능한 대상이었다는 점에서 사람들에게 괴로움을 주고 있다.

이렇듯  최근에 내가 겪은 죽음은 대부분 사고 혹은 (자살) 의지와 돈이 교묘하고도 깊게 결합되어 있는 것들이 대부분이다.

이제 우리 사회의 거의 모든 죽음은 곧바로 슬픔의 정조와 연결되지 않고 죽은 신체에 매달려 있는 돈을 생각한 뒤 영광스런 죽음과 비참한 죽음을 가늠하는 게 우선이 되어 버렸다. 고인이 남긴 발자취, 즉 온갖 플러스와 마이너스의 계수들이 종합되어 결국 남게 되는 수치의 값들이 그 사람에 대한 종합적인 판단을 가능하게 하는 상황. 슬픔의 정조보다 그 표현해야하는 슬픔의 강도를 조절하는 사람들의 빠른 계산법이 횡행하는 세상이다.

나는 지금 5억 혹은 40억으로 불어난 빚을 감당하지 못하게 된 안타까운 젊은이의 죽음과 자식과 손주의 마음을 견디지 못하고 돌아가신 할머니의 죽음에 대해 생각하고 있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치니 2008-09-11 09: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그랬어요, 다른 사람보다 안재환 이번 죽음이 자꾸 마음에 많이 걸리더라구요.
남아서 살아가야 하는 정선희에게도 마음이 많이 쓰이고.
스콧 니어링처럼 죽기 전 10일 금식해서 자연사 하는 자살을 꿈꾸기는 하지만,
그런 걸 해낼 결연한 의지 같은 건 원래 없는 인간이죠, 제가...

나비80 2008-09-16 13: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석은 잘 보내셨나요. 답이 늦었습니다. 안재환 씨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당황한 사람들과 정선희를 자신의 삶의 대리보충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을텐데 여파가 걱정됩니다. 연관성을 쉽게 단정짓기는 어렵지만 추석연휴 기간내에 벌써 연탄가스 자살이 3건이나 일어났더군요. 안타까운 일이 계속될까 염려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