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부님과 수녀님들이 시청앞으로 나오자 사람들은 모두 갑자기 선한 양이 되었다. 이틀째 아고라도 조용하다. 비교적 깨끗한 이미지로 남아있는 종교의 힘이란 게 이런 것인가.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이 비폭력을 화두로 내걸고 집전한 시청앞 구국 미사는 사람들을 꽤나 감동시킨 모양이다.(개신교와 불교계도 시국기도회와 시국법회에 서둘러 나선다고 한다)
덕분에 경찰도 쉬고 시민도 제법 평온한 밤을 보내고 있다. 간만의 평화다.
이 평화는 얼마나 지속될까.
알 수 없다.
무척이나 긴요한듯 보이지만 촛불의 향배를 가늠하는 일은 지금으로서는 도저히 불가능하다. 지금 시국은 시민들의 움직임에 정부가 기민하게 대응하는 꼴이 아니라 정부가 얼마나 삐뚤어지느냐에 따라 시민들이 수습해야하거나 겉잡을 수 없이 무너지게 될지 모르는 형세이기 때문이다.
주목해야 할 것은 이러한 상황에서도 조중동은 다음에 뉴스 공급을 끊는다던지 자신들에게 광고를 싣지 못하게 광고주에게 압력을 넣는 행동이 위법이라는 판단을 이끌어내기도 했다는 사실이다.
이런 상황에서도 대중들(나 역시 대중이다!)은 정말 알 수 없다. 신부님과 수녀님이 집행할 수 있는 비폭력의 힘이 주일까지 이어지기는 힘들텐데 이사이를 틈타 출현하고 사라지는 몇몇 유형의 집단들은 인상적이다.
나는 이번 촛불집회의 현장에 출현한 몇몇 독특한 집단과 세력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바로 촛불소녀, 아고리언, 유모차를 끈 엄마, 미국 교포 주부, 예비군, 김밥부대, 그리고 전경 '엄마'들이다.
'깃발없는 사람들의 모임'이라는 상징적 깃발과 수녀님들이 들고 나온 '평화롭게 저항하는 백기'가 등장하고 결국 '구국의 강철대오 전대협'도 나왔는 판에 어디서 무엇이 어떤 내용을 담고 등장할지는 모를 일이다.
가장 먼저 촛불을 밝히기 시작한 소녀들은 이제 판에서 밀려난 느낌이 강하다. 이건 집회가 밤샘 형태로 진행되고 '국민대책회의'라는 조직이 소녀들의 역할을 자임하면서 나타난 현상이다. 그리고 쇠고기 외의 의제로 집회가 계속 번져나가면서 소녀들이 포섭되지 않고 미끌어지는 상황이 벌어졌다. 분명 교육문제와 생태문제 등에서는 소녀들과 긴밀한 공감대를 만들수 있을텐데 이 대목은 좀 아쉬운 부분이다.
개인적으로 좀 비판적으로 보았던 예비군 문제는 몇몇 장소에서 논의가 되긴 했지만(프레시안의 박노자보다 몇몇 알라디너분들이 더 예리한 논의를 보여주셨다) 대부분 '비판적 지지'를 보내는 선에서 일단락 된듯 싶다. 실제로 예비군은 우리 생활에 너무 깊숙하게 들어와 있기때문에 섣불리 그들의 존재와 행동양식을 나무라거나 칭찬하기가 어려운 측면이 있다.
나는 그들의 출현이 반갑지 않았지만 그들이 계속적으로 어떤 역할을 하는지는 주목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들은 갑자기 어디로 사라졌는가? 사라지니 '군복시위'에 대한 사법처리를 실시한다는 엉뚱한 이야기가 튀어나오고 있다. 지금 현 국면에서 사라지는 일은 삭제되거나 구속되는 것을 의미한다. 법-폭력은 그만큼 기민하고 교활하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 예비군의 실종은 집회의 성숙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질서유지와 보호라는 모토를 걸고 등장한 이들은 시민진영에서 경찰력의 공백을 메워주는 역할을 담당했는데 무질서와 혼돈으로만 보였던 시민들이 나름의 하나의 거대한 코스모스를 형성해나가는 과정에서 예비군은 자연도태, 혹은 흡수된 듯 싶다.
사실, 내가 여기서 가장 많이 말하고 싶은 집단은 바로 '엄마'들이다.(유모차 엄마들에 관해서는 얼마전 알라딘에서 논의가 있었으니 여기선 따로 말하지 않겠다) 전경 '엄마'들과 학생 시위대의 엄마들(각종 학부모 대표와 무슨무슨 어머니회 등 층위와 계열은 무척이나 다양하다)은 도대체 어떻게 보아야하는가.
촛불집회 초기에 전경들에게 꽃을 달아주는 사람들이 있었다. 또 이들은 전경들에게 먹을 것과 물을 건네주며 '나'의 비폭력의 의지가 '너'에게도 전달될 것이라고 믿는 것 같았다. 이들의 모습은 마치 성자와 같았는데 이는 휴머니즘과 거대한 숭고의 출현이었다.
하지만 전경들이 몸에서 꽃을 떼어낸 뒤, 방패를 들고 물대포를 쏘자 이들은 또 이내 사라져 버렸다. 이처럼 폭력은 지극히 상대적인 것이다. 이때 등장한 것이 바로 종교인들이다. 이때를 틈타 가장 기민하게 움직이는 사람들이 있었으니 그들이 바로 전경 '엄마'들인 것 같다. 시민과 전경들 사이에서 걱정하는 얼굴로 배회하거나, 때를 틈타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전경의 손을 잡아주거나 쓰다듬어주는 이들은 거의 대부분 전경 '엄마'들이다.(경찰과 시민들의 대치선인 교보생명 건물 앞의 일명 '교보 아줌마' 들. 이들은 주로 그곳에서 사태의 추이를 키켜보는 경우가 많다.) 전경들도 일반 시민들이 건네주는 음식과 물에는 반응을 보이지 않지만 전경 '엄마'들이 전해주는 먹을것과 마실것만은 선택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실정이다.(이틀전 전경 '엄마'들은 공개적으로 모여 전경들에게 간식을 공급해주었다. 전경들에게 뭘 먹여야 한다면 그건 '엄마'가 아니라 '국가'이다. 지금 전경들을 개처럼 부리고 있는쪽은 바로 국가이기 때문이다.)
시민들 중 연행자가 2천을 넘어섰고 경찰측이 밝힌 전경 부상자가 4백 이상이다. 이때 아들을 전경으로 보낸 어머니의 마음을 나는 헤아릴 수 없다. 짐작은 가지만 내가 안다고 말하는 순간 어머니의 애닯은 심정은 훼손되어버리고 만다. 그러니 지금 내가 모른다고 표현하는 것이 그들에게는 누가 되지 않는 길이다.
다만, 나는 전경 '엄마'들이 만들어내는 이 장면들이 거대한 '숭고'로 보이지 않고 어떤 '멜랑콜리'의 그림자로 여겨진다.
전경 엄마들은 몸을 시민의 편에 두고 있지만 마음은 방패를 들고 서있는 전경들에게 가있다. 이러한 전경 엄마들에게 정치적인 입장을 선택하라고 강요하는 것은 분명 잔인한 일일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러한 선택의 입장을 떠나 전경 '엄마'들이 만들어내는 어떤 기묘한 낙차, 어처구니 없는 싸움의 종결에 대해서 불만이 있다.
전경 '엄마'는 사태의 결정적인 국면을 유아적으로 만들어 버린다. 국가와 시민의 싸움이라는 극한의 대결 양상에서 갑자기 비어져 나오는 전경 '엄마'들의 모성애적 본능은 모든 상황을 일거에 혼란스럽게 만든다. 물론 반복해서 말하지만 자식을 걱정하는 어머니의 심정이야 백번을 생각해도 가닿을 수 없을 만큼 어렵고도 극진한 것일 테지만 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각종 '엄마'란 타이틀의 출현에 반대한다.
조금 외연을 확대해보면 사태는 더욱 심각해진다. 한국 사회의 고질적 병폐중 하나가 엄마들의 '과잉 보호'와 자식들의 '과잉 의존'이다. 자식이 스무살이 되고, 대학을 가고, 군대를 가고, 혹은 서른이 되거나 취업을 해도 이러한 자식에 대한 보호는 멈추지 않는다. 이는 한국 사회의 구조적 문제이기도 하지만 엄마들의 충성스런 '과잉 보호'도 분명 큰 이유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대학교수에게 제 자식의 성적을 항의하는 전화를 걸어온다는 이야기가 들려온지는 오래되었고 심지어 자식의 직장 상사에게 부탁 인사를 하는 엄마들도 있다는 이야기가 심심치 않게 들려온다.
그러니까 "내 자식에게 광우병 쇠고기를 먹일 수 없다"라고 말하는 어머니들과 유모차를 끌고 나온 엄마들과, 전경 '엄마'들은 분명히 다르다. 자신의 가족을 우회하여 정치적 입장을 표현하고 보편적 정책반대의 위치에 서는 어머니들의 방식과 제 자식만을 보호하겠다는 엄마가 제3의 위치를 만들어내고 거기에만 있겠다고 선언하는 방식은 층위뿐만 아니라 내용 역시 다르고 또 다르다.
시위대의 척후를 흩어내고, 인간의 어느곳을 가격해야 가장 고통스러운지를 정교하게 훈련받는 스무살 전후의 통일된 완력들과 다양한 나이와 성별이 이합집산하여 모여있는 시민들이 소유한 폭력은 질이 다르다. 물론 이때 촛불시위에 참여한 시민들은 자발적인 존재들이고 전경들은 국가의 강제에 의해 동원된 제도적 피해자라는 이의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차이를 인정하려면 그들이 주장하는 보편적 보호 역시 시민과 전경에게 고르게 분배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고 기계적인 폭력을 휘두르는 전경들을 한순간에 보호해야할 어린아이로 만드는 이 기묘한 광경은 도무지 좋게 보이지가 않는다. 전경 '엄마'들은 자신들의 특이한 처지를 내세워 촛불집회의 현장에서마저 자신들이 지키려는 '스위트 홈'의 연장 혹은 분할의 관점에서 사태를 파악하고 있는듯 싶다.
이십대 초중반의 전경들 대부분도 현 상황에 대해 충분히 가치판단이 가능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제도적인 압력에 의해 쇄뇌 혹은 통제를 받는 상황에 몰려있다면 그것은 '엄마'에 의해서가 아닌 스스로의 시간 혹은 노력으로 이겨나가야 할 몫인 것이다.
지금 촛불 시위는 나 자신 혹은 내 가족을 보호하는 것에서 출발해 국민 주권의 쟁취로 이어지는 역사적 결단의 장이지만 전경 '엄마'들은 그 출발점에서 멈춰있고 또 그곳이 도달할 도착점이기도 하다. 전경 '엄마'는 지금 분명 설명하기 어려운 '회색지대' 혹은 '공백의 기표'로 서있다. 언제까지 전경 '엄마'들이 정치적 주체의 보조물로만 기능할 것인지는 전적으로 그들의 포즈에 달려있다. 전경 '엄마'들의 자식사랑이 나름의 커다란 명분을 얻기 위해서는 제 자식이 시민들에게 해를 입었는지만을 살펴볼 것이 아니라 의료봉사단 혹은 사제단과 같이 범 영역적 좌표에서 두루 활동하거나 큰 시야를 통해 공감대를 얻어야 할 것이다.
나는 현재의 전경 엄마'들의 행동이 전경을 실질적으로 보호하는지에 관해서도 의문이다. 그들이 요청하는 비폭력이 시민 전체의 보호가 아닌 자신의 '스위트 홈'만을 견고하게 유지하려는 욕망에서 나온 언설이라면 그다지 설득력을 얻기 힘들 것이다. 자신이 지키려고 하는 '스위트 홈'의 로망이 사회적 멜랑콜리로 되어버리는 순간 본질적 화해는 기대할 수 없다. 자꾸 의식의 지평을 흐리게 만드는 전경 '엄마'들의 출현은 과연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 두고두고 생각해볼 문제인 것만은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