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개인은 진화한다
남재일 지음 / 강 / 200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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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6세대는 군사독재와 싸울 힘을 얻기 위해 결속을 강조할 수밖에 없었고 개인주의 감수성은 극도로 억압될 수밖에 없었다. 현재 40대가 된 386세대가 막강한 정치적 발언권을 행사하는 한국 사회는 정확하게 386세대의 정체성만큼만 민주화가 진행됐다. 정치 민주화는 이루어졌지만 사회 민주화는 이제 막 시작된 상태, 제도는 민주화됐지만 개인의 삶으로 스며들지는 못한 상태이다. 따라서 한국 사회가 지향해야 할 방향은 일상의 민주화이며,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은 집단적 구호와 동원이 아니라 개인적 주장과 실천이다.”(105쪽)

 

다소 길게 인용했지만 이 글이 저자가 바라본 한국 사회의 현주소라고 봐도 무방할 듯싶다. 저자는 광화문 네거리에서 ‘아이러브 황우석’ 회원들의 집회를 구경하면서 그들의 황우석에 대한 애정 표현이 가미가제 수준임을 느낀다. 집단 속에 파묻혀 있는 그들은 자기가 어디에 있는지 정확히 모른다고 개탄하면서, 저자는 “자고로 용맹은 무지를 못 당한다”고 덧붙인다. ‘집단에 대한 불신과 개인에 대한 희망’, 그것이 저자가 이 책에서 하고 싶은 말이다.

 

영화 <트로이>에 대한 저자의 설명은 흥미롭다. <트로이>에는 그리스는 없고 미국만 있다는 것이다. <트로이>에서 그리스의 신들은 다 거세되고 두 명의 잘난 근대인, 헥토르와 아킬레스만이 등장한다. 헥토르는 이성주의, 가족주의, 국가주의의 핵심적 이데올로기를 온몸으로 구현한다. 아킬레스는 살육을 통해 권력을 확인하지 않으면 존재할 수 없는 근대의 파시스트로 규정된다. 저자는 헥토르와 아킬레스라는 국가주의 영웅들이 파리스의 연애담에 동원된 ‘액션 엑스트라’일지도 모르겠다고 일침을 놓는다. 국가, 민족, 역사라고 소리치는 시간에 주변 사람들과 연애하는 마음으로 지내면 세계가 평화로울 것이라고 하면서….

 

지금까지 천 편 이상의 영화를 관람했으나 내복 입은 남녀 주인공이 등장하는 정사신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는 저자의 너스레를 읽다보면 입가에 웃음이 번진다. 1950년대 할리우드 스타 클락 게이블이 영화 속에서 메리야스를 입지 않자 젊은이들이 ‘런닝구’를 입지 않아 미국 메리야스 산업이 타격을 받았다는 ‘설’도 재미있다. 추울 땐 내복을 입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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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무비 2006-06-15 16: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고보니 여배우가 화장 지우고 이불 속에 들어가는 장면도 거의 못 봤어요.
남재일 씨 글 가끔 무지 재밌습니다.^^
 
열림과 닫힘 - 인문학적 상상을 통한 종교문화 읽기
정진홍 지음 / 산처럼 / 200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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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가 사용하는 ‘종교’라는 말은 백 년 전만 해도 아예 존재하지 않았다. 그것은 서양의 ‘religion’을 번역한 말로 도입되었다. ‘religion’은 서양의 중세 초기에 새롭게 출현한 새로운 개념이다. 이 ‘religion’을 낳은 서양에서 ‘종교란 그리스도교’이고, ‘종교인이란 그리스도교 교인’이었다. 서양에서의 ‘종교’라는 개념은 이렇게 자리를 잡았고, 그 결과 종교란 오직 그리스도교 밖에 없다는 주장이 나오게 되었다. 서양의 종교개념은 종교란 오직 그리스도교 밖에 없다는 주장의 확산을 낳았고, 우리 역시 그 확산의 수혜자로 종교라는 개념을 수용했다. 그 결과 종교는 닫힌 것이 되고 말았다.

원로 종교학자인 정진홍 교수가 독특한 사유로 종교문화를 풀어내고 있다. 그는 종교라는 개념이 곧 종교는 아니라고 말한다. 개념화된 사물은 이미 ‘경험적 실재’가 아니며, 단지 ‘개념적 실재’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고약한 것은 이런 곡절을 거쳐 생성된 ‘개념’이 스스로 ‘경험’을 재단하게 된다는 것이다. 언어가 현실을 규정하게 되는 기이한 상황이 연출된다는 말이다.

저자는 종교에서 정작 중요한 것은 ‘개념’이 아니라 ‘경험’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종교에 대해 이해하고자 한다면, 종교라는 현상이 존재하게 된 것은 경험주체의 ‘경험’이 있어 가능한 것임을 받아들여야 하며,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경험주체들, 즉 다양한 종교인들의 자기주장을 그대로 존중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수의 종교가 공존하는 우리 사회에서 종교 간의 막힌 장벽을 활짝 열고 평화를 유도하기 위해서는, 저자가 제시한 ‘인문학적 상상을 통해 종교문화에 다가가기’도 한 방법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단, 몽매주의가 당당하게 종교계의 한 축으로 버티고 있는 우리 현실에서 그것이 얼마나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겠는가에 대한 의문은 여전히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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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지온 2014-09-11 14: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수업 안 듣고 뭐 했었나 싶습니다. 들으셨다니 부럽네요ㅎㅎ 책 읽는 것만으로도 선생님의 지적 깊이가 느껴집니다.
 
강유원의 고전강의 공산당 선언 - 젊은 세대를 위한 마르크스 입문서
강유원 지음, 정훈이 그림 / 뿌리와이파리 / 200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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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사원 철학박사 강유원이 자본주의 체제 현장체험을 바탕으로 풀어낸 고전강의이다. 상황과 배경이야 물론 다르지만 강유원도 마르크스처럼 대학 밖에서 학문과 저술활동을 하고 있다는 점이 눈에 띈다. 사연이야 각각이겠지만, 두 사람 모두 학계 밖으로 밀려나 ‘현실’ 속으로 밀어 넣어졌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는 것이다(31쪽 참조).

그래서인지 그의 글에는 현장감이 약동한다. 예를 들어보자. “요즘 웬만한 회사는 사내 인트라넷을 통해 출퇴근 시간을 체크한다. 이게 회사의 모습이다(155쪽).” 이런 이야기는 대학에 재직하는 창백한 철학교수의 글에서는 나오기 힘들다. 노동자(회사원)로서의 확고한 정체성을 지닌 저자의 글이기에, 그가 들려주는 자본주의 사회의 ‘노골적 현금계산’(사람이 침묵하고 돈이 발언하는) 관행에 대한 서술에는 마치 피가 도는 듯하다.

그렇다고 저자가 마르크스를 우상화 하는 것 아닌가 하는 불필요한 오해를 할 것까지는 없다. 저자 자신이 직접 독자들을 타이른다. 무슨 ‘빠’처럼 마르크스의 견해와 주장을 몇 줄 읽었다고 그 사람 책이라면 다 믿는다는 식으로 나가면 곤란하다는 것이다(131쪽). 무릇 교이불권(敎而不倦)은 모든 선생 된 자의 미덕이 아니던가. 젊은이들에게 읽힐 책에서는 상식적인 이야기라도 반복할 필요가 있다.

강유원은 ‘독립인문학자’의 독특한 길을 걷는 우리 사회의 귀중한 역할 모델(role model)이다. 한 학기 강의를 바탕으로 이렇게 반듯한 인문학 대중서를 제꺽제꺽 펴내는 그의 뛰어난 저술역량은, 변변한 저서 한 권 내지 못하고 생을 마감하는 상당수 인문학 교수들을 부끄럽게 하기에 충분하다. 패거리 놀음에 취해 학내 폴리티킹에 전념하거나 정치판을 기웃거리는 교수들을 솎아내고 강유원 같은 유능한 인문학자를 ‘초빙’해줄 눈 밝은 대학경영자는 언제나 나타날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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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미의 이름 - 하
움베르토 에코 지음, 이윤기 옮김 / 열린책들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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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잘 들어 둬. 당신은 속았어.

...악마라고 하는 것은

영혼의 교만,

미소를 모르는 신앙,

의혹의 여지가 없다고 믿는 진리...

이런 게 바로 악마야!..."

-87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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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6-06-11 16: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장미의 이름,,정말 전율적인 느낌으로 읽었죠.

안티고네 2006-06-12 10: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움베르토 에코는 정말 대~단해요~!!!
 
손님
황석영 지음 / 창비 / 200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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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상대방에게 질질 끌려가며 복종해야만 하는 처지에 빠진 경우를 일컬어 ‘코를 꿰었다’고 말한다. 가령 대미종속적인 한국의 군사, 외교를 말할 때 ‘부시 정부에 코를 꿰인 한국정부’라는 식으로 표현한다.

 

농가에서 키우는 소의 경우 송아지 때 코를 뚫는 것이 관례이다. 그래야만 농부가 소를 임의로 부려 쟁기나 수레를 끌도록 할 수 있다. 나는 ‘코를 꿰었다’는 표현도 ‘소의 경우’에서 비롯된 비유적 표현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황석영 작가의 <손님>을 읽으면서 이것이 소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사람들 사이에서 행해졌던 사실이라는 것을 알고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그것도 불과 반세기 전 한국전쟁 시기 북한에서 동족 간에 이런 일이 벌어졌다는 것이다.

 

황석영의 소설은 오랜만에 읽었다. 오래 전 대하소설 <장길산>을 흥미진진하게 읽고나서 이번이 두 번째가 아닌가 싶다. 그런데 이제 보니 <장길산>과 <손님> 두 작품이 공교롭게도 모두 황해도를 무대로 하고 있다. <장길산>이야 다시 말할 필요 없고, <손님>의 경우 황해도 ‘재령’과 ‘신천’이 주요 무대로 나온다.

 

알고 보니 황석영 작가가 출생지는 만주이지만 아버지의 고향이 황해도라고 한다. 그리고 작가의 호적에 나와 있는 원적 또한 황해도 신천군이라고 되어 있다. 실제로 작가가 89년에 이 지역을 방문했고, 이 소설을 쓰기 위한 취재도 이 기간에 했던 것 같다. 다 알다시피 그 후 황석영은 보안법 위반 혐의로 상당기간 감옥 생활을 하다가 풀려났다.

 

<손님>은 재미 동포인 '류요섭 목사'라는 인물의 황해도 고향방문을 통해 한국전쟁 당시 공산당과 기독교도 사이의 피비린내 나는 복수극을 보여준다. 1950년 9월 15일의 인천상륙작전으로 북한군은 수세에 몰리게 된다. 그동안 공산당 치하에서 토지를 몰수당하는 등 피해의식을 갖고 있던 기독교도들은 무기를 들고 봉기한다.

 

그들이 공산주의자들을 잔인하게 폭행하는 장면에서 앞에서 말한 코를 꿰는 장면이 나온다. 토지조사사업에 가담했던 한 공산주의자를 철사로 코를 꿰어서 끌고 가는 것이다. 이와 같은 공산주의자 색출과 처형에 앞장 선 기독교청년단의 행동대장이 바로 류요섭 목사의 친형인 류요한 장로였다. (그는 류요섭 목사의 고향방문 사흘 전에 미국에서 노환으로 세상을 떠난다.) 처형당한 공산주의자들은 요한, 요섭 형제가 어릴 때부터 잘 알고 지내던 이웃들이었다.

 

<한 많은 미아리고개>라는 유행가에 등장하는 ‘철사줄로 두손 꽁꽁 묶인채로’ 끌려가는 모습도 나온다. 포승줄을 구하기 힘든 시절이라 전봇대에 있는 전화선을 끊어 둘둘 말아 허리춤에 차고 다니면서 반대파를 끌고 갈 때 써먹었던 것이다.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과 9.28 서울 수복 후 미군이 북으로 밀고 올라오자 기독교 청년들은 ‘십자군’이 올라온다며 용기백배 한다. 그들은 공산주의자들을 죽일 때는 빠뜨리지 않고 기도를 올린다. (그 상황에서 어떻게 기도가 나오는지...) 공산당을 무찌르는 십자군을 자처하게 된 것이다.

 

불과 반세기 전에 이런 끔찍한 일이 한반도에서 벌어졌다는 것이 충격으로 와 닿았다. 물론 역사책에서 읽긴 했다. 하지만 역사책이란 것이 대개 역사적 사실을 추상화, 개념화 시켜 정리해 놓은 것이라서 인간의 삶의 '결'을 충분히 살려내는 데는 부족함이 많다. 문학은 그 빈틈을 메워주는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공산주의야 본시 폭력혁명을 지지하는 이데올로기니까 그렇다 치자. 하지만 종교의 이름으로 (그것도 기도를 올리면서) 거침없이 사람의 목숨을 빼앗은 기독교 청년들의 행위는 잔인하기 그지없다. 요즘 하는 말로 실로 ‘엽기적’이다. 앞에서 철사줄로 코 꿰는 얘기를 했지만, 그들이 사람을 죽인 방법은 글로 다시 옮기기도 끔찍할 정도이다. 그 잔인성은 몇 해 전 이라크에서 살해당한 김선일 씨의 경우보다 결코 못하지 않다.

 

김선일 씨는 이역만리 낯선 이라크 땅에서 외국인에게 당한 것이었다. 하지만 동족끼리, 그것도 서로 다정하게 음식을 나누어 먹던 이웃 간에 종교의 이름으로 가해진 잔인한 폭력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물론 굳이 따지자면 토지를 몰수한 공산당 측에서 원인 제공을 했다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기독교 청년들의 행동이 정당화될 수는 없을 것 같다.

 

작가가 이 소설의 제목을 <손님>이라고 정한 배경도 의미심장하다. 여기에서 ‘손님’이란 천연두를 말하는 것이다. 조선 시대에는 천연두를 '서병'(西病), 즉 서양에서 온 질병으로 여겼다고 한다. 작가는 공산주의와 기독교를 모두 서양에서 전래된 ‘돌림병’으로 간주하고 있다. 두 전염병이 20세기 중반 황해도에서 일으킨 한바탕 '미친 바람'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려는 것이 작가의 의도이다.

 

황석영 작가는 기독교 신자가 아닌 걸로 알고 있다. 그리고 기독교를 ‘돌림병’으로 파악한 그의 관점은 오늘날 한국의 비기독교인들이 갖고 있는 기독교에 대한 시각을 상당 부분 대변하고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상상을 뛰어넘는 충격, 그와 더불어 씁쓸한 뒷맛을 남겨준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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