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님
황석영 지음 / 창비 / 2001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흔히 상대방에게 질질 끌려가며 복종해야만 하는 처지에 빠진 경우를 일컬어 ‘코를 꿰었다’고 말한다. 가령 대미종속적인 한국의 군사, 외교를 말할 때 ‘부시 정부에 코를 꿰인 한국정부’라는 식으로 표현한다.

 

농가에서 키우는 소의 경우 송아지 때 코를 뚫는 것이 관례이다. 그래야만 농부가 소를 임의로 부려 쟁기나 수레를 끌도록 할 수 있다. 나는 ‘코를 꿰었다’는 표현도 ‘소의 경우’에서 비롯된 비유적 표현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황석영 작가의 <손님>을 읽으면서 이것이 소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사람들 사이에서 행해졌던 사실이라는 것을 알고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그것도 불과 반세기 전 한국전쟁 시기 북한에서 동족 간에 이런 일이 벌어졌다는 것이다.

 

황석영의 소설은 오랜만에 읽었다. 오래 전 대하소설 <장길산>을 흥미진진하게 읽고나서 이번이 두 번째가 아닌가 싶다. 그런데 이제 보니 <장길산>과 <손님> 두 작품이 공교롭게도 모두 황해도를 무대로 하고 있다. <장길산>이야 다시 말할 필요 없고, <손님>의 경우 황해도 ‘재령’과 ‘신천’이 주요 무대로 나온다.

 

알고 보니 황석영 작가가 출생지는 만주이지만 아버지의 고향이 황해도라고 한다. 그리고 작가의 호적에 나와 있는 원적 또한 황해도 신천군이라고 되어 있다. 실제로 작가가 89년에 이 지역을 방문했고, 이 소설을 쓰기 위한 취재도 이 기간에 했던 것 같다. 다 알다시피 그 후 황석영은 보안법 위반 혐의로 상당기간 감옥 생활을 하다가 풀려났다.

 

<손님>은 재미 동포인 '류요섭 목사'라는 인물의 황해도 고향방문을 통해 한국전쟁 당시 공산당과 기독교도 사이의 피비린내 나는 복수극을 보여준다. 1950년 9월 15일의 인천상륙작전으로 북한군은 수세에 몰리게 된다. 그동안 공산당 치하에서 토지를 몰수당하는 등 피해의식을 갖고 있던 기독교도들은 무기를 들고 봉기한다.

 

그들이 공산주의자들을 잔인하게 폭행하는 장면에서 앞에서 말한 코를 꿰는 장면이 나온다. 토지조사사업에 가담했던 한 공산주의자를 철사로 코를 꿰어서 끌고 가는 것이다. 이와 같은 공산주의자 색출과 처형에 앞장 선 기독교청년단의 행동대장이 바로 류요섭 목사의 친형인 류요한 장로였다. (그는 류요섭 목사의 고향방문 사흘 전에 미국에서 노환으로 세상을 떠난다.) 처형당한 공산주의자들은 요한, 요섭 형제가 어릴 때부터 잘 알고 지내던 이웃들이었다.

 

<한 많은 미아리고개>라는 유행가에 등장하는 ‘철사줄로 두손 꽁꽁 묶인채로’ 끌려가는 모습도 나온다. 포승줄을 구하기 힘든 시절이라 전봇대에 있는 전화선을 끊어 둘둘 말아 허리춤에 차고 다니면서 반대파를 끌고 갈 때 써먹었던 것이다.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과 9.28 서울 수복 후 미군이 북으로 밀고 올라오자 기독교 청년들은 ‘십자군’이 올라온다며 용기백배 한다. 그들은 공산주의자들을 죽일 때는 빠뜨리지 않고 기도를 올린다. (그 상황에서 어떻게 기도가 나오는지...) 공산당을 무찌르는 십자군을 자처하게 된 것이다.

 

불과 반세기 전에 이런 끔찍한 일이 한반도에서 벌어졌다는 것이 충격으로 와 닿았다. 물론 역사책에서 읽긴 했다. 하지만 역사책이란 것이 대개 역사적 사실을 추상화, 개념화 시켜 정리해 놓은 것이라서 인간의 삶의 '결'을 충분히 살려내는 데는 부족함이 많다. 문학은 그 빈틈을 메워주는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공산주의야 본시 폭력혁명을 지지하는 이데올로기니까 그렇다 치자. 하지만 종교의 이름으로 (그것도 기도를 올리면서) 거침없이 사람의 목숨을 빼앗은 기독교 청년들의 행위는 잔인하기 그지없다. 요즘 하는 말로 실로 ‘엽기적’이다. 앞에서 철사줄로 코 꿰는 얘기를 했지만, 그들이 사람을 죽인 방법은 글로 다시 옮기기도 끔찍할 정도이다. 그 잔인성은 몇 해 전 이라크에서 살해당한 김선일 씨의 경우보다 결코 못하지 않다.

 

김선일 씨는 이역만리 낯선 이라크 땅에서 외국인에게 당한 것이었다. 하지만 동족끼리, 그것도 서로 다정하게 음식을 나누어 먹던 이웃 간에 종교의 이름으로 가해진 잔인한 폭력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물론 굳이 따지자면 토지를 몰수한 공산당 측에서 원인 제공을 했다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기독교 청년들의 행동이 정당화될 수는 없을 것 같다.

 

작가가 이 소설의 제목을 <손님>이라고 정한 배경도 의미심장하다. 여기에서 ‘손님’이란 천연두를 말하는 것이다. 조선 시대에는 천연두를 '서병'(西病), 즉 서양에서 온 질병으로 여겼다고 한다. 작가는 공산주의와 기독교를 모두 서양에서 전래된 ‘돌림병’으로 간주하고 있다. 두 전염병이 20세기 중반 황해도에서 일으킨 한바탕 '미친 바람'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려는 것이 작가의 의도이다.

 

황석영 작가는 기독교 신자가 아닌 걸로 알고 있다. 그리고 기독교를 ‘돌림병’으로 파악한 그의 관점은 오늘날 한국의 비기독교인들이 갖고 있는 기독교에 대한 시각을 상당 부분 대변하고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상상을 뛰어넘는 충격, 그와 더불어 씁쓸한 뒷맛을 남겨준 작품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