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택은 누가 자신에게 구도자 혹은 수도하는 사람이라고 하면 화를 낼 수도 있다. 구도하는 자가 되지 않기 위해, 도를 깨우친 사람이 안 되려고 발버둥치는 사람에게 어떻게 그럴 수가 있냐고 낙담할지도 모른다. 그는 자신을 소닭돼지를 열심히 씹어 비듬과 무좀으로 만들고 있는뻔뻔한 대머리 아저씨라고 고발하는 사람이다.(옛날 사진 속에서 웃고 있는, ) “암처럼 비행기 사고처럼 당연히 남의 일이어야 할 대머리가/내 목 위에 뻔뻔하게 붙어 있다고 남의 일인 양 말하다가, “여기까지 찾아온 걸 보니/오라는 곳 없어도 갈 곳은 참 많았겠구나라며 대머리에 대한 격려도 잊지 않는다(대머리, ). 옆머리에 희끗희끗한 새치는 있어도 머리숱은 무성한 그의 프로필 사진을 보면, 이 시가 꼭 시인 자신에 대한 이야기는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시인이 대머리이든 아니든 이미 그것은 중요치 않다. “제 못난 곳을 악착같이 감추어오다 감춘 사실마저 낱낱이들키고 말겠다는 자세로 시를 쓰는 그가 아닌가(오늘의 할 일, 갈라진다 갈라진다). 그는 어쩌다 자기비하의 달인이 되었는가.

김기택은 살아남는다는 것의 의미가 부단히도 되물어졌던 시대를 거쳐 왔다(그는 89년 등단했다). 당시 어쩌다 살아남게 된 자들은 어째서 자신들이 살아남게 되었는지 그 이유를 찾지 않으면 안 되었다. 살아있다는 것에 대한 죄책감을 도덕적 당위로 타이르지 않으면 안 되는 때였다. 그러다가 불현 듯 90년대가 되자 누군가는 시를 버렸으며 누군가는 시를 신비화시켰고 죽음의 심연으로 가라앉아 신화가 된 자도 있었다. 이러한 와중에 김기택은 다만 당위에 혹사당하지 않는 길을 택했다. 그 어떤 당위로부터도 자유로워야 한다는 것이 그의 당위였다. 이것은 그가 시를 통해 살아남는, 혹은 시에서 살아남는 방법이기도 하였다. 이러한 점에서 김훈은 김기택의 시가 저울의 자리’(태아의 잠해설)에 놓여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아슬아슬한 균형에 얹혀 있으면서 긴장감을 유지한다는 의미였다(그의 지적은 여전히 적확하다). 죽음과 삶 그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는 시를 쓰는 것, 그것이 김기택이 스스로에게 부과한 미학적 사명이다.

그렇다면 그의 시는, 그 자신이 아무리 부정할지라도 금욕적인 수행의 길을 걸어왔음에 틀림이 없다. 그리고 이러한 수행법에 여러 설명이 붙기 시작했다. ‘투시적 상상력이라거나 해부학적 상상력’(이광호)이라는 명명이 등장했다. ‘시선의 다중성언어의 다변성’(최현식)이 나타난다는 지적도 있다. 이들은 김기택의 시가 기본적으로 관찰과 묘사에 기반하고 있다는 데 공감한다. 대상을 있는 그대로 그리는 것이 아니라 시인의 인식, 마음에 따라 그것을 변형시켜서 더 생생하고 미세한 것까지 표현해내려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것, 그는 환자를 치료하기 위해 수술을 하는 의사의 시선이 아니라 이미 죽은 몸을 해부하는 부검의의 시선으로 시를 쓴다. 그는 카프카처럼 세계를 병든 것으로 보지 않는다. 그에게 세계는 이미 죽은 것이다. 이것이 김기택의 시가 위태로워 보이는 결정적 이유이다. 물론 이러한 태도는 자칫하면 진부한 도덕적 관념에 빠지거나 거기에서 벗어나려는 지나친 반작용에 의해 도덕적 스캔들에 휘말릴 위험이 있다. 가령 사회적 약자들을 등장시키는 그의 시가 어떠한 경계선을 위태롭게 넘나들고 있다는 느낌을 주는 것은 이 때문이리라. 하지만 그의 시는 오히려 이 위태로움으로써 자유자재하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아이 울음 하나 새어들어올 틈 없이 빽빽한 이 소리들이

바로 고요의 정체라는 것을

그러나 어찌할 것인가

소리들이 돌처럼 내 귓구멍을 단단하게 막아주지 않는다면

내 불안은 내장처럼 한꺼번에 거리에 쏟아져나오지 않겠는가

일시에 소음이 사라져버린다면

심장이 베일 것 같은 차디찬 정적만이 남는다면

갑자기 내 내부의 정적은 공포가 되고

마음속 불안들은 모두 소음이 되어

내 좁은 머릿속에서 악을 써대지 않겠는가

하지만 다행히도 그럴 염려는 없는 것이다

― 「고요한 너무나도 고요한부분, 바늘구멍 속의 폭풍

 

소음으로 틀어 막혀 있는 귀가 고요이며, 그 외부의 고요가 없다면 내부의 불안이 소음이 되어 악을 써댈 것이다. 소음을 통해 오히려 마음의 고요가 있는 것이며, 흔들림을 통해 균형을 얻을 수 있다. 이 발견은 김기택이 세계에 만연한 죽음을, 부정성을, 악을 용인할 수 있는 여유를 준다. 해서, 그는 자기 자신과도 철저한 거리를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 자신의 마음과 육체에도 틈이 있다는 것을, 그리고 이 틈에 의해서 시가 나온다는 것을 그는 적극적으로 승인하고 빈틈없이(?) 이용한다. 그런 점에서 틈의 미학은 김기택의 시 세계를 떠받치는 기반인 동시에 끊임없는 균열을 만들어냄으로써 그의 성채를 움직이는 것으로 만드는 보이지 않는 힘이 되었던 것이다(“! , , , 틈틈틈틈틈……/어떤 철벽이라도 비집고 들어가 사는 이 틈의 정체는/사실은 한 줄기 가냘픈 허공이다―「, 바늘구멍 속의 폭풍).

김기택이 구현하고 있는 틈의 미학은 말과 몸이라는 매개를 통해 그 의미가 분명해진다. 김기택에게 육체는 죽어서야 착하고 순한 것이 된다. 그 전까지는 추악하고 고집 세고 고약한 냄새를 풍기던 것이 시체가 되어서야 용인할 수 있게 된다. 마찬가지로 그는 먼지, 소음, 불순물을 만들어내는 틈을 찬양한다. 틈은 무소불위다. 방사선만큼이나 강력하다. 그런데 틈보다 더 강력한 존재가 등장했다. 탐욕이 그렇다. 이 틈을 가만히 두지 못하고 어떻게든 채우려고 하는 것이 인간의 탐욕이다. 연작에서 중량을 늘리기 위해 물을 먹인 소는 아무 것도 아닌 존재,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존재가 된다. 물결도 바람도 진동도 만들어내지 못하며 지나치게 부풀고 거짓으로 꽉 찬 치욕의 상징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하지만 인간의 탐욕은 마르고 뻣뻣하고 딱딱한 거짓을 만들어낼 뿐, 생명이 얼마나 연약하고 다치기 쉬운 것인지에 대해 조금도 상관치 않는다. 탐욕에는 끝도, 절제도, 그 어떤 이로움도 없다.

그에 대한 분노가 김기택의 시를 변화시킨다. 그의 세 번째 시집 사무원을 보라. 표현은 보다 난폭해지고 상상력은 대담해졌다. 연약한 것들을 물어뜯는 이빨에 대한 증오가 그 자신을 무자비한 이빨, 단단한 가시가 되게 만들었다. 이에 따라 고상하고 정신적이며 이상적이고 추상적인 모든 것을 물질과 육체의 차원으로 이행시키는 강도는 점점 강해진다. 심지어 그는 지인의 죽음을 앞에 두고 그의 죽는 모습이 정말로 웃겼을까봐 두려웠다”(조성환의 죽음)고 고백하기까지 한다. 그러한 와중에 그의 전매특허인 세련되고 깔끔한 풍자가 풍채를 드러낸다. “끝없는 수행정진으로 머리는 점점 빠지고 배는 부풀고/커다란 머리와 몸집에 비해 팔다리는 턱없이 가늘어졌으며/오랜 음지의 수행으로 얼굴은 창백해졌지만/그는 매일 상사에게 굽실굽실 108배를 올렸다고 한다”(사무원) 이때 그의 시를 김지하의 오적의 계보에 놓을 수 있는 것은, 그의 풍자가 자기 폭로에 이어 자기 모멸, 비하까지 서슴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풍자는 대상을 겉돌지 않고 내장까지 까발리는 위력을 발휘한다.

하지만 김기택은 결코 성급하게 결론을 내리지 않는다. 그는 풍자를 성급하게 마무리 짓고 얼렁뚱땅 신명으로 넘어가는 것이 시를 진부하게 만드는 치명적인 독이 될 수 있음을 안다. 대신 그의 시는 흥은 덜 나더라도 끈질기게 설득하는 방식을 택한다. 판소리 투가 아니더라도 그의 시가 가끔 요설처럼 느껴지는 것은, 누구보다 그 자신이 설득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자기 검열의 기제가 강력하게 작동하고 있기 때문일 게다. 그는 미친 사내를 보면서도 그 사내가 정말 미친 것인지를 스스로에게 차분하고 끈기 있게 설득해야직성이 풀리는 사람이다. “그 사내도 나를 보고 미친 사람이 너무 멀쩡해 보이는구나 생각하며 방금 지하철에서 내렸을지도 모를 일”(멋진 옷을 보고 놀라다, )이라며 다시 한 번 자기 논증의 과정을 곱씹어보기까지 한다. 대상을 허투루 보아 넘기거나 쉽게 단정하고 판단하는 것이 그에게는 도무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는 결코 재판관이 아니다. 그는 소가 되새김질을 하듯이 생각하고 또 생각해서 온전히 소화된 것들만을 진실이라고 믿는 회의론자다.

이러한 회의는 때로 위험한 방향으로까지 나아가기도 한다. 먹자골목에서 풍겨오는 돼지갈비 냄새를 맡고 필시 그 죽음에는 오랫동안 떨던 불안과/일순간에 지나온 극도의 공포가 있었으리라/그러니 이 냄새에는 그런 기미가 전혀 없다”(먹자골목을 지나며, 바늘구멍 속의 폭풍)라는 의문을 제기할 때, 그는 다른 존재를 먹어야만살 수 있는 인간의 존재기반을 그 근본부터 흔들어버린다. 그런데 이는 단순히 생존의 문제로만 치부할 수 없다. 이것은 극단적인 회의론에 다다랐을 때 문제 삼게 되는, 인식론적인 차원의 문제인 것이다. 다시 말해, 그는 이중의 곤경에 처해 있는 것이다. 사물을 생명을 제거한 시체로 바라봄으로써, 그는 관찰자의 시선을 유지할 수 있다. 하지만 그렇게 하는 것이 사물을 죽은 것으로 가정해야 한다는 폭력이 가정된다. 그는 이러한 폭력을 피하고자 사물에 다시 생명을 불어넣어본다. 하지만 사물을 생명이 있는 것으로 바라볼 때, 사물은 인식 자체를 거부하며 인간의 존재 자체가 폭력이라고 항변하고 만다.

사실 이는 앞서 인용한 고요한 너무나도 고요한에서부터 문제의 소지가 있었던 부분이다. 우글우글대는 소음을 포착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기절시키거나 죽은 상태로 만들어야 하고, 그것을 피하려면 틈 없이 빽빽한 소음 혹은 너무나도 고요한 상태를 견뎌야 한다. 하지만 그것은 둘 다 불가능하다. 이제 이것은 단순한 선택의 문제이거나 균형 잡기의 차원을 넘어선다. 이때 김기택은 어떤 해결책을 택하는가. 놀랍게도 그는 자신을 사물의 자리에 내려놓는다. 이러한 변화는 관찰자의 입장을 도치시킨 것이되, 사물이 아니라 자신을 죽은 것으로 치부한다는 점에서 문제적이다. 이제 그는 사물로서말하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이러한 실험은 에서 본격적으로 시도된다. 졸음운전을 하는 버스 기사의 위험천만한 곡예를 유쾌하게 그려내는 것이나(즐거운 버스) 죽어서 받을 사람이 없는 데도 쌓여 가는 우편물들에게서 말을 사정(射精)하고 싶어 근질근질한 혀를 발견하는 시(본인은 죽었으므로 우편물을 받을 수 없습니다)같은 것을 보라.

이러한 시들은 뭐라 말하기 어려운 묘한 공포감을 주는데, 그것은 사물들의 소음을 적극적으로 수용함으로써 인간 중심적 시선을 전복시킨 데서 오는 쾌락이기도 하다. 공포의 쾌락, 쾌락의 공포. 이로써 그는 일부러 보이지 않는 것으로 치부해 두었던 금기의 영역을 파헤치는 반휴머니즘 실험에 본격적으로 돌입한다. 이제 김기택 시의 그로테스크함이 살기를 발하기 시작한다. 끔찍한 범죄현장과 평화로운 일상의 풍경을 아무렇지도 않게 중첩시킨 다음 시들을 보라.

 

(영계의 흰 넓적다리 속에 삽입되는 순간 발기되는 이빨. 부드러운 근육의 탄력으로 이빨을 조여오는 육질. 쫄깃쫄깃하게 저항하다가 뜯겨지는 난폭한 뿌리들. 끈적끈적하게 분비되는 침들. 맛의 오르가슴을 느끼고 부르르 떠는 엄지발가락. 혀를 꽉 껴안고 전육하는 닭살.) 으으, 먹지 않고는 참을 수 없어, 핫크리스피 치킨!

, 잠깐, 잠깐만. 건강이 막 나오려고 그래. 아으, 참을 수가 없어. 가만히 좀 있어봐. 쌀 것 같단 말이야.

― 「건강이 최고야부분,

 

방금 성폭행당한 요도(尿道)에서 나오는 뜨거운 오줌으로

팬티와 치마와 에쿠스 시트가 다 젖는 줄로 모르는 떨림으로

목 조르는 팔뚝 속으로 스며드는 월척 같은 파닥거림으로

그 꿈틀거림으로 더욱 짜릿해져가고 있을 손맛으로

그 손맛 때문에 더욱 단단하게 조여지고 있을 모가지로

아무리 격렬하게 발버둥쳐도 고요하기만 한 모가지로

빨간 스타킹 자국을 감싸고 있는 새하얀 모가지로

― 「목을 조르는 스타킹에게 애원함부분, 갈라진다 갈라진다

 

마침내 지긋지긋한 고행과 징글징글한 그로테스크를 넘어서 오싹한 호러의 현장에 당도하였다. 세련되고 절제된 풍자의 칼날을 휘둘렀던 그가 이제 과격하게 피가 낭자한 살인의 추억을 향유하시 시작했다. ‘강간건강으로 바꾸었을 때 발휘되는 오싹함, 인간의 괴물스러움에 대한 참을 수 없는 혐오감을 그는 역으로 조장한다. 너의 건강을 위해 강간당하는 존재들이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마라. 참으로 지독하지 않은가. 목을 조르는 스타킹에게 애원함은 또 어떤가. 희생자가 아니라 범죄자의 쾌락을 그는 추궁한다. 그럼으로써 그는 범죄자의 쾌락을 욕망하는 쾌락을 집요하게 파헤친다. 그리고 이로써 이 범죄자의 쾌락에 몸서리치는 자의 내면에, 대리만족의 욕망이 도사리고 있음을 고발해낸다. 그러니 이 범죄의 악순환을 끊는 것이 과연 가능한 것일까.

다소 진부한 해석이 될 수 있겠지만, 이러한 변화에서 2000년대 이후 한국사회에 펼쳐진 연옥의 단면을 목격할 수 있다. 노동의 고행을 강요하던 시대에서 구직난에 시달리다가 삶의 치욕을 견디다 못해 죽음을 택하는 시대(구직)로의 이동. 죽음마저 보장성과 수익성이 풍부한 사랑으로 포장되어 팔려나가고(생명보험), 살려달라는 말도 제대로 발음하지 못해서 할여으에어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할여으에어) 지옥 같은 삶의 나날들. 그런데 김기택은 이러한 현실을 고발하는 차원에서 절대 머무르지 않는다. 그는 너무도 끔찍해서 누구도 알려고 하지 않는 외설적인 어떤 부분을 건드린다. 자신의 목을 조르는 쾌락을 즐기고 있는 것은 자기 자신이기도 하다는 사실 말이다. 이것이 목을 조르는 스타킹에게 애원함이라는 기이한 제목의 도착적 진실이다.

도대체 목을 조여 오는 공포가 가상일뿐이라고 말하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사람들이 거기에 그것이 있다고 믿는 이상, 그들은 공포의 견고한 벽에 부딪혀 태아의 발가락처럼 꿈틀거릴 뿐”(, )이다. 김기택이 사물, 이미 죽은 자, 죽어가고 있는 자의 입을 빌려 말하기 시작했다는 것은 이러한 심상치 않은 변화와 관련되는 것일 게다. 살아있는 것도 죽어있는 것도 아닌 어떤 것들이 방울방울방울방울방울방울방울”(거품)하며, 부글거리고 우글거리는 파괴와 탄생의 장면을 그는 바라보고 있는 것이지도 모르겠다. 거기에서 자궁을 부숴버리고 바깥으로 나오는 씨앗들의 그 번개 같은 힘이 나오는 것일까. 스스로의 목을 조르던 힘이 무언가를 잉태해내는 생명의 힘으로 변화할 수도 있는 것일까. 도무지 주위가 어둠이라 앞이 보이지 않는다.

 

온몸이 어둠이라 아직은 보이지 않는다

암구름과 수구름은 몸이 달아 자꾸 으르렁거리는데

땅과 어둠은 서로 으스러지도록 꽉 껴안고 들썩거리는데

암우주와 수우주는 서로 꼬리를 물고 돌며 똬리를 틀고 있는데

― 「번개를 기다림부분, 갈라진다 갈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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