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정진의 시는 인공에 대한 것이다. 거기에는 우연이 들어설 틈이 없다. 그의 시집 동경(창비, 2011)에서 이러한 구절을 발견한다. “오늘 내가 연 문과 닫은 문의 개수가 같을까봐 무섭다 우리에겐 어떤 일도 벌어질 수 없을지 모른다.”(그의 각오) 이 구절을 읽고 정말로 무서워졌다. 나 역시 그와 동일한 세계에 발을 딛고 있다는 실감 때문이었다. 세계가 자신에게 열어놓은 가능성만을 전부라고 착각하면서 살아가게 될 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이 엄습했다. 우연성이 제거된 세계에는 어떠한 생성도 불가능하다. 목적론적 필연성과 인과론의 법칙에 갇혀 활력을 잃어버린 인공의 세계에서는 동일성만이 반복될 뿐이다. 하지만 최정진의 시는 이 인공의 세계를 신비로운 자연에 대한 환상으로 대치시키지 않는다. 필연성이 지배하는 인공의 세계에 우연을 도입하기 위해 있는 힘껏 안간힘을 다할 따름이다.

 

누군가 익은 열매를 손에 쥔다. 나와 내 마음이 떨어진 것 같이 뛴다. 여기서 사랑이 시작된다면

 

계속 떨어지고 있는 것으로부터, 이미 떨어진 것으로부터,

떨어진 것 같은 순간은 무엇인가.

 

누군가 익은 열매를 손에 쥔다. 그것을 나뭇가지에서 떨어질 새라고 믿기 위해 안간힘을 다한다. 그런데 나와 내 마음도 이전엔 붙어있었다는 듯이 뛴다.

 

여기서 사랑이 시작된다면 누군가 돌아왔냐고 묻는다.

 

나와 닮은 나뭇가지들을 분질르러 왔습니다. 등 뒤에서 여러 명이 한 목소리로 답한다.

― 「인과전문

 

인과는 서로 떨어져 있는 것을 연결시키는 작업이다. 일반적으로 인과 작업은 폭력적인 것으로 귀결되기 쉽다. 서로 관련이 없는 것들을 일정한 목적에 따라 배치하면서 그와 관련이 없는 성질들을 무차별하게 소거시키기 때문이다. 해서 우리는 사랑을 인과 관계로 설명하지 않는다. 어떠한 인과관계에 의해 사랑을 설명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사랑은 어떤 방식으로 가능한 것일까. 최정진에게는 두 대상이 떨어진 것 같을 때 사랑이 시작된다고 한다. 그리고 설명을 덧붙인다. 원래 그 두 대상은 붙어있었다는 것이 아니라 계속 떨어지고 있는 것으로부터, 이미 떨어진 것으로부터,/떨어진 것 같은 순간을 말하는 것이라고 말이다. 설명에 다시 부연 설명이 필요할 것 같은데, 이쯤에서 시인은 말을 멈춘다. 아니 오히려 그 자신이 묻는다. 그 순간은 무엇인가.

여기서 다시 누군가 익은 열매를 손에 쥔다는 같은 장면이 반복된다. 그리고 시는 변주된다. 일종의 실험이 행해지고 있는 것이다. 장면의 반복은 시에서 사랑은 어떤 순간에 도달하는지에 대한 답을 구하기 위해 마련되었다. 시에 우연을 도입하여 차이를 만들어내고 그 차이를 통해 인과의 촘촘한 그물망에서 벗어나려는 실험이 그것이다. 최정진은 여기에 사랑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그 사랑의 실험을 통해 누군가 돌아왔냐고 묻는다.” 실험결과 무엇이 도출되었는가. “등 뒤에서 여러 명이 한 목소리로 답하는 소리를 듣는다. 하나와 같은 다수성, 다수적인 하나의 산출. 그리하여 첫 번째 실험은 종료된다.

그리고 이어지는 두 번째 실험. 이는 니체와 보들레르의 가설에 대한 반증명((disproof)이다. 니체는 자연은 우연이다.”라고 했다(우상의 황혼). 권력과 의지를 결합해서 우연의 파도들을 헤쳐 나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보들레르는 이러한 니체의 조언을 받아들였고, 인공을 낙원으로 변모시키려는 실험에 착수했다. 이들의 가설은 과연 성공적인가, 최정진은 의문을 품는다. 인공에서 어떻게 낙원이 가능한가. 그것은 혹시 자기기만은 아닌가. 아니 질문을 바꿔야 하는 지도 모른다. 보들레르가 말하는 인공의 세계와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어떤 일도 벌어질 것 같지 않은 폐쇄적인 인공의 세계를 동일한 것이라고 할 수 있는가. 과연 어떠한가. 이에 대한 최정진의 결론. 낙원은 사라지고 호수만 남았다. 이는 이렇게 해석할 수 있다. ‘인공낙원사이에 어떤 차이를 도입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우리는 누르는 것이다.

 

둘레에서 둘레로

우리는 서로에게서 생것을 맛본다.

 

풀밭에서 계단으로

계단에서 풀밭으로

우리는 누르지 않아도 넘치지 않는다.

우리에게 걸은 기억은 없다.

 

둘레에 한가운데가 많아진다.

 

우리는 눌러도 넘치지 않고 생것이 넘친다.

― 「인공과 호수전문

 

인공과 호수는 대등하다. 인공적인 호수가 아니라 인공호수를 각각의 개별체로 인정해야 한다. 인공적인 것에서 낙원을 발견할 수 있다고 믿었던 보들레르적인 가능성은 종료되었다. 세계는 닫혀 있고 이 닫힌 세계에서 가능한 것은 인공에서 낙원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인공과 낙원을 분리시키는 것이다. 대신 결합되었던 하나의 기호를 둘로, 혹은 넷으로 다섯으로 증식시키는 작업이 요청된다. 이때 분열된 기호들은 각자가 자신의 중심을 가져야 한다. 둘레가 둘레로 남지 않고 둘레에 한가운데가 많아지게 하는 것이 실험의 목적이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생것이 그 다수들 내에 존재해야 한다. ‘생것야외라는 시에서는 날것이라고 표현되기도 한바, “오전의 볕에 드러난 건물의 낡음에서/근사한 의미를 만드는 것과 등치된다. 낡음에서도 근사함을 만들어내는 근사한 기술, 그것이 사물들에 각자의 중심을 부여한다.

보들레르에게 인공낙원은 축제적인 가운데 가능했다. 영원의 세계를 지향하는 삶속에서의 죽음을 경험하는 것이다. 보들레르는 이렇게 말했다. “항상 취해 있어야 한다. 모든 게 거기에 있다. 그것이 유일한 문제이다.” 하지만 최정진의 낙원은 도취와는 거리가 멀다. 그는 누르지 않아도’ ‘눌러도조건이 변하더라도 언제나 변함없이 성취되는 결과를 원한다. 그의 시 작업을 실험에 비유한 것은 이 때문이다. 그의 시에는 나뭇가지들을 분질르러 왔습니다.”라고 말하는 단호함과 차가워진 음식을 일그러진 표정으로/먹는 것을 보는 것과 같은 자기 처벌적인 측면마저 있다. 금욕주의적인 태도로 실험조건을 조금씩 변형시켜 가면서 그는 도대체 무엇을 만들어내려는 것일까. 무엇이 이렇게 진지한 것일까. 혹 어떤 일도 벌어질 수 없을 지도 모른다는 막막함이 그를 이토록 진지하게 만든 것일까. 그는 감히 도취와 죽음의 상관성을 논할 여력이 없다. 그는 그저 문이 닫혔다는 것만으로도 고통스럽다.

 

계단이 유일한 텅 빈 실내에서

누가 의도를 선점할 수 있든.

해석과 맞설 수 있든.

내가 문을 여는데 쓰는 열쇠를 누군가 문을 닫는데 쓰든.

문이 닫혔다는 것만으로 고통 받는 것.

너는 고통만으로 열린 것.

날카로운 것, 풀려나오는 것, 일어서는 것이 웅성인다.

나를 잠그고 네가 울리지 않는다고 울었을 것이다.

웃음이 의도를 의도할 수 있는가

너는 문이 벽이 되지 않는다고 울었을 것이다.

열쇠가 헐고 갈라지는 것, 파헤쳐진 것, 솟는 것이 웅성인다.

― 「빛과 타워전문

 

필연은 문을 열거나 닫는 데 꼭 맞는 열쇠 모양을 하고 있다. 그리고 문이 열리거나 닫히는 것과 상관없이 그 세계에 갇혀 있다는 사실이 주는 고통이 있다. 문을 열고 나가도 그것이 끝이 아니라는 사실이 주는 고통, 차라리 문이 벽이기를 바라는 절박함. 그러니 누가그 문을 열고 닫는 것이 중요하지 않다. 그런데 이 시는 고통에서 끝나지 않는다. 고통에서 시작된다. 고통만으로 열리는 라는 존재가 있는 것이다. 과연 는 누구인가. 이 수수께끼를 푸는 열쇠는 아마 미로일지 모른다. 최정진이 실험의 연속을 통해 만들어낸 것은 일종의 미로다. 폐쇄된 공간을 미로로 만들어내려는 열정이 그의 실험을 작동시킨다. 그것은 배분의 작업이기도 하다. 벽을 만들고 문을 만들어 자신을 헤매게 하는 것이다. 없는 공간을 있는 공간처럼 만들어 갇혀 있다는 데서 발생하는 고통을 망각케 할 수 있다. 여기서 나갈 수 있다는 희망을 주는 문은 오히려 절망의 비유가 된다. 다만 계단 밖에 없는 텅 빈 공간을 웅성이는 미로로 만들어야 한다.

하지만 여전히 이 시에 나오는 울음과 웃음의 의미는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 그의 실험이 지나치게 조심스러운 탓이다. 헐고 갈라지고 파헤쳐진 것, 솟는 것으로서 웅성이는 우연이 무엇을 생성시킬 수 있는지에 대한 전망도 불분명하다. 그런 점에서 최정진이 만들어놓은 인공의 세계에 필요한 것은 우연의 높이마저도 선점할 수 있는 초월적 시선일지도 모른다. 그가 만들어놓은 미로에서 우연은 그 자체로 즐길 수 있는 놀이가 되어야 한다. 만일 스스로가 아리아드네가 아닌 미로에 갇혀 버린 테세우스가 되어 버린다면 인공과 날것, 울음과 웃음의 차이를 따지는 것조차가 무색한 일이 되어 버리지 않겠는가. 웃음은 어떠한 의도가 아니라 그저 우연에 대한 긍정에서 비롯한다. 그리고 웃음을 통해서 근사한 의미로의 솟아오름도 가능해진다. 그래야만 이러한 작업은 그의 다음 시가 예고하는 것처럼, 이미 펼쳐져 있는 사전을 다른사전으로 펼쳐낼 수 있지 않을까.

 

그의 방엔 사전이 있다. 그것은 두껍다. 언제나 놓인 채로 펼쳐져 있다. 펼쳐져 있는 페이지가 펼쳐진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그의 방엔 음식이 넘치고 옷이 넘치고 그것들은 상하지 않는다. 상하지 않는 음식과 옷들이 그의 방을 무너뜨렸다. 그의 집이 있는 골목들이 복잡해진다.

 

그는 시간과, 같은 장소에 있을 수 없었다.

― 「무더운 번역전문

 

빛과 타워가 미완의 실험이라면 무더운 번역은 일종의 실험에 대한 설계도처럼 읽힌다. 앞으로 진행될 실험을 예상하며 어떠한 조건들이 세팅되어 있는 상황을 체크해 보자. 조건으로 제시된 것은 언제나 놓인 채로 펼쳐져 있는 두꺼운 사전이다. “상하지 않는 음식과 옷은 이 사전에서 제시하는 고정된 의미에 대해, 아니 사전의 존재하는 양태 자체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는 데서 불어나는 것이다. “아무 것도 하지 않고/있어도 음식은 익어 상하지 않는다”(인과)라는 것은 펼쳐진 것을 펼쳐진 것으로 두되, “펼쳐져 있는 페이지가 펼쳐진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라며 해석의 미로를 만드는 무위의 작업을 통해 생성되는 인과의 작용을 나타낸다. 그리고 이것은 미로의 복잡성을 만들어낸다.

에셔의 무한한 공간으로서의 미로를 떠올려보면 최정진이 무엇을 의도하는지 이해하기가 수월할 지도 모르겠다. 2차원의 세계를 3차원으로 변화시키는 에셔의 마술은 평면을 분할하는 대칭과 순환의 원리에 따라 무한을 만들어낸다. 이 무한의 공간에서 죽어 있던 사물은 운동을 시작한다. 이것이 그가 말하는 생것의 근사한 의미에 근사(近似)하려나. 그러니 최정진이 만들어낸 이 미로의 공간에는 시간이 무화되어 있을 수밖에 없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이 공간에는 무한의 시간이 흐르고 있다. 주체와 타자, 안과 바깥이 분리되지 않는 이 무한의 공간에서야말로 우리는 사랑을 이야기할 수 있다. 가령 두 나선형 띠가 한 여성과 남성의 두상을 두르며 하나의 띠로 이어져 있는 에셔의 <확고한 유대>같은 것. 그들의 앞과 옆, 뒤를 떠다니고 있는 공들이 무한한 시공간을 상징한다는 화가의 친절한 설명도 함께 첨부한다.

마지막으로 그의 가설을 정리해보자. 그러니까 최정진이 생것이나 날것이라고 표현한 것은 익은 열매를 사랑하기 위해 그것을 나뭇가지에서 떨어질 새로 변형시키는 작업과 같은 것이다. 이를 통해 시시하던 사물의 의미는 근사한 것 혹은 살아 있는 생것’ ‘날것의 웃음으로 변한다. 이것들은 폐쇄된 공간에 숨 쉴 통로를 뚫는 작업을 통해 가능하다. 변형을 가하여 사물에 차이를 도입하는 것, 그리하여 차이와 그 차이로 인해 발생한 다수성과 우연을 모두 긍정할 수 있게 하는 실험. 최정진은 평면적인 폐쇄회로를 입체적인 무한으로 변형시키는 마술적인 실험을 하는 중이다.

 

2015 <현대시>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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