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이 힘을 잃어가는 시대다. 말은 타락하고 상처 입으며 정착하지 못하고 구천을 떠도는 신세가 되었다. 말 바꾸기, 우기기, 유체 이탈적인 영혼이 없는 말들에 의해 말에 대한 불신이 높아져 가면서 가벼워진 말들이 어느 때보다 현실을 무겁게 내리누르고 있다. 이 과정에서 공허하고 아무 의미도 담보하지 못한 말들이 그 어떤 말들보다 어마어마한 힘을 지니게 된다. 소통의 가능성을 불신하게 만드는 말들은 냉소와 환멸의 언어를 생산하거나 침묵을 택하게 한다. 말의 힘을 부정하는 말들이 그 어떤 말들보다 강력한 위력을 지니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말의 힘을 박탈하려는 이들이 내보이는 퇴행성은 무지가 아니라 계산된 영악함에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으리라. 그들은 알지 못하기 때문이 아니라 말이 지닌 효력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말을 악용하고 있는 것이다.

말의 지옥은 그들이 만들어놓은 판도 안에서, 그들과 다른말을 고안해낼 수 없는 극단으로 치우쳐갈 때 비로소 펼쳐진다. 용산 참사 이후, 그리고 세월호 사건 이후 시가 써지지 않는다는 시인들의 고백을 들으며 그와 같은 극단적인 상황에 몸서리가 쳐졌다. ‘말 같지 않은 말이 횡행하는 이 세계에서 글을 쓸 수도 쓰지 않을 수도 없는 상황에 시인들은 갇혀 버린 것이다. 쓴다면 그것은 시가 아니며, 그것은 글이 아니며, 그것은 아무 것도 아닌 것이라는 참담함, 이러한 참담함을 시인 자신만의 것으로 한정하지 않고 어떻게 우리 모두의 것으로 만들 수 있는가. 말이 말하게 함으로써 그를 억압에서 자유롭게 하는 것이 시의 역할이 아니던가. 말의 지옥이 펼쳐지고 있는 가운데, 그 누구보다 고통을 당하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말 그 자신이다. 김근의 다음 시는 그렇게 읽힌다.

 

천사는 어떻게 우는가 살았는지

죽었는지 우리가 쏟아진 얼굴을

미처 쓸어담지 못하고 우물만

쭈물만 거려 거리고 있을 때

금 간 담벼락에나 우리의 심장이

가까스로 숨어만 들어 들고 숨이

숨이 수숨이 헐떡 헐헐떡 헐떡만

대는 개의 혓바닥에서처럼 토해져

나올 때 뜨거울 때 뜨거워도

마지막 표정은 기억나지 않고

마지막 눈빛이 마지막 발음이

마지막 목소리가 마지막 풍경이

마지막 당신이 발 없는 바람이

무수히 발자국을 찍어 바람의 행방

도무지 알 수 없고 주름도 없이

구름은 마지막 짠 먼지들을 끌어

올리는데 기억은 나지도 전혀 않고

마지막이라고 말할 때 마지막

입술의 녹청이 이마의 서늘함과

눈꺼풀의 떨림이 온전한 얼굴도 없이

헤아릴 수 없는 저녁의 모든 모음들

죄 관절이 꺾이는데 허여 허옇게만

그만 흐너지고 흩어만 지고 모음들

골목의 어느 창문에도 입김조차

불지 못하는데 아직 다 쏟아지지 않은

얼굴 간신히 손으로 가린 채 죽었는지

살았는지 천사는 천사 천사 천천사는

어떻게 우는가 어떻게, 살아, 나나

김근 천사는 어떻게, 창작과 비평가을호

 

이 시에서 말의 더듬거림은 흐느낌에서 비롯한다. 울음을 참으려고 할 때 흐느낌은 딸꾹질로 변하며 말을 머뭇거리게 한다. 이 시는 그렇게 울음을 참으려는 머뭇거림에서 비롯한다. 고통의 당사자가 아니라 그 당사자의 고통으로부터 가장 가까이 있는 자의 위치에서 이 시는 쓰여 졌다. 이 시의 발화 주체는 고통을 당한 당사자는 아니다. 그는 그 당사자에 대한 기억을 붙들고 있는 최후의 목격자일 따름이다. 그렇기에 그는 그 기억을 마치 자신의 목숨인 양 놓지 못하고 있다. 자신의 것이 아니기에 제대로 묘사할 수조차 없는 그 고통 때문에 그는 자기 존재가 해체되기 직전의 상황까지 몰려 있다. 시에서 쏟아진 얼굴을 수습하지 못하는 것으로 묘사된 상황은 이를 암시한다. 이때 헤아릴 수 없는 저녁의 모든 모음들은 그 마지막을 공유할 수 있게 해 주는 담보물이 된다. 그 무엇도 기억이 나지도 않고 다만 고통스러웠다는 사실만이 상흔처럼 남아 있는 가운데, 말은 그 형상은 온전히 갖추지 못하고 흩어진 채로 기록된다.

말이 처해 있는 극단의 절망이 그 말을 하는 존재의 상황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말의 극단과 존재의 절망은 어떻게 소통하는가. 이에 대해 말하기 위해 김근은 더듬거림을 들고 온다. 이때의 더듬거림은 말을 더듬는 것()이기도 하다. 고통이 섞이지 않은 말로는 천사의 말을 온전히 전달할 수 없다. 울퉁불퉁하고 어딘가 부족하고 모자라며, 순서가 어긋난 말들을 통해 말이 처한 위기가 비로소 드러난다. 김근은 말이 지향해야 하는 초월적 지평을 천사의 존재로 암시하는 한편, 거기에 도달하려는 몸짓이 온전한 표현으로는 가능하지 않음을 알려준다. 말을 더듬듯, 절뚝거리는 발걸음으로 천사를 향해 나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 시인의 운명이다. 천사의 울음을 자신의 심장에 새기지 않고는 천사를 살려낼 수 없다. 말을, 혹은 천사를 다시 소생시키기 위해 그와 함께 울어야 한다. 분열되고 해체된 존재들을 다시 조립하여 복원해내는 존재로서 천사는 이렇게 불려나온 것은 아니려나.

이와 달리 다음 시에서 이은규는 홀로 고백하고 선언하는 존재로서 미치광이 시인을 가져온다. 자못 비장한 데가 있는 이 시에는 김근의 시와는 다른 차원의 절박함이 배어있다.

 

모든 고백은 선언이다

 

나는 안장에 앉아 고삐를 쥔 자가 아니어라

가차 없이 채찍을 휘두르는 자도 아니어라

노래는 말이 아니어라

 

마부의 채찍질에도 꼼짝하지 않는

말의 목을 끌어안고 흐느꼈다는 한 사람

세상이 수근거린다 지혜를 사랑하다니, 미치광이

 

그가 오래 흐느낀 이유는

동물의 말을 알아들어서가 아니다

세상의 말에 귀가 부끄러웠기 때문이다

 

책상에 앉아 펜을 쥔 자가 아니어라, 나는

향기로운 문장을 휘두르는 자도 아니어라

말은 노래가 아니어라

 

나는 누군가 늦췄다 당겼다 하는 고삐에

가다 서다를 반복하는, 어리석은 발자국

누군가 함부로 휘두르는 채찍에

고개 숙여 히잉먼 소리를 내는 목울대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하는 자

그러나 나는 이 은유를 끝까지 밀고 나가야 한다

고삐를 움켜쥔 손아귀의 힘을 상상하며

채찍을 다루는 손목의 습관을 증오하며

 

말보다는 노래에 노래보다는 말에

그보다 행간 사이를 서성이는 동안

초록이 진다 한들, 온다 한들 한 점 꽃이

그러나 나는 이 은유를 끝까지 밀고 나갈 것이다

 

오래 미치광이라 불리는 사람과 같이

가까스로 초록을 지키는 식물과 같이

이은규, 말의 목을 끌어안고, 현대시학8월호

 

이 시는 지나치게 꽉 차 있다. 가령, 이 시는 미치광이의 언어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미치광이의 언어를 밀고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당위를 스스로에게 설득하고 다짐하는 형태를 띤다. 다만 이렇게 설득하고 다짐하는 가 남아 있는 이상, 이 시는 다른 누군가가 들어올 자리를 만들어내지 못한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태는 부정의 제스처로 표현될 따름이다. ‘는 말의 고삐를 쥔 자, “가차 없이 채찍을 휘두르는 자도 아니며, “책상에 앉아 펜을 쥔 자향기로운 문장을 휘두르는 자도 아니다. 노래는 말이 아니고 말은 노래가 아니다. 이로써 이 시는 말(/)이 학대를 당하고 있는 상황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태에 놓인 자의 부끄러움을 증언한다. ‘는 말의 고통을 이해할 수 없다. 아무리 말의 목을 잡고 운다고 한들, 짐작할 수 없는 말의 고통을 안다고 할 수는 없다. 그가 흐느껴 우는 것은 말의 고통에 무감한 사람들에 대한 부끄러움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해하지도 못하는 말의 목을 끌어안고 우는 자를 미치광이라고 부르는 이들을 어찌하면 좋을까. 여기서 시인은 은유를 요청한다. 은유는 이러한 부끄러움을 뚫고 타자의 고통에 닿으려는 초월의 필요성에 의해 불러내어진다. 은유를 통해 가다 서다를 반복하는, 어리석은 발자국이자 고개 숙여 히잉먼 소리를 내는 목울대가 된다. 그러면 문제는 해결된 것일까. 은유를 통해 행간 사이를 서성이는존재의 언어를 발견해낸다면 말의 고통을 이해할 수 있게 될까. 어쩐지 이 시 스스로가 은유의 불가능성을 역설하고 있는 것으로 읽히는 것은 왜일까. “그러나로 이어지는 시인의 선언은 지나치게 단호하다. 어째서 시인은 이와 같이 단호하고 직설적인 어법으로 은유를 다짐할 수밖에 없는가. 이는 김근의 더듬거리는 말만큼이나 말이 혹사당하고 있는 이 시대의 증후인 것은 아닐까. 이러한 증후에 화답하는 것으로 다음의 시를 마지막으로 읽어보자.

 

모았던 손을 풀었다 이제는 기도하지 않는다

 

화병이 굳어 있다

예쁜 꽃은 꽂아 두지 않는다

 

멈춰 있는 상태가 오래 지속될 때의 마음을

조금 알고 있다

 

맞물리지 않는 유리병과 뚜껑을

두 손에 쥐고서

 

말할 수 없는 마음으로 너의 등을 두드리면서

 

부서진다

밤은 희미하게

 

새의 얼굴을 하고 앉아

창 안을 보고 있다

 

노래하듯 말하면 더듬지 않을 수 있다

안이 더 밝아 보인다

 

자주 꾸는 악몽은 어제 있었던 일 같고

귓가에 맴도는 멜로디를 듣고 있을 때

 

물에 번지는 이름

살아 있자고 했다

안미옥, 아이에게, 시와 반시가을호

 

안미옥의 시는 고통스런 외부를 부드럽게 끌어안으면서 어둠을 빛으로 바꾸어낸다. 그것은 기도와 같은 초월적인 방식을 통해서가 아니다. 그녀는 변화 없는 세계를 견뎌야 하는 막막함을 금세 시들어버릴 꽃의 유한한 아름다움에 기대어서는 버틸 수 없음을 담담히 받아들인다. 세계와 주체의 관계가 딱 들어맞아서 맞물려 돌아가는 것이라면 얼마나 좋겠는가. 말과 주체의 관계도 다르지 않아서 하고 싶은 말이 오롯이 전달되지 못한다는 사실은 말하는 존재에게 허무함을 던져준다. 김근이 머뭇거림을 통해, 이은규가 은유를 밀어붙임으로써 이러한 상황을 돌파하려 했다면 안미옥은 조금 다른 방식을 취한다. 그녀의 시에서 간결하게 배치된 단어와 문장들의 연결은 부드럽게 이어진다. 이 가운데 희미하게 부서지는 밤의 풍경이나 창 안을 바라보고 있는 꿈결 같은 이미지들이 나타나고, 이렇게 노래하듯 이어지는 이미지들의 부드러운 연쇄작용은 부서지는 밤의 악몽을 그저 어제 있었던 일처럼 심상히 지나가게 만든다.

이런 점에서 안미옥의 시는 김근과 이은규의 시에 화답하는 것처럼 읽힌다. “노래하듯 말하면 더듬지 않을 수 있다는 구절이 특히나 그렇다. 안미옥은 고통을 꼭 쥐고 붙잡고 있지 않는다. 슬쩍 놓아주며 말 스스로가 악몽에서 벗어날 수 있기까지를 기다려 주는 것 같다. 안미옥의 간절함은 고통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기를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고통과 귓가를 맴도는 멜로디쯤으로 전환시키는 방식으로 드러난다. 아이의 등을 토닥이며 불러주는 자장가처럼 그녀의 노래는 아련하기만 하다. 타인에 대한 위로를 하는 것이 그 자신을 위로하는 차원으로, 자신에 대한 위로가 또한 타인에 대한 위로로 소통하는 조심스러운 관계 속에서 주체의 견고함은 물에 번지는 이름처럼 흐려진다. 그리하여 마지막의 살아 있자는 청유는 다분히 중의적으로 읽힌다. ‘살아 있음이 무엇일까에 대해 물음을 던진다는 점에서 말이다. 이 물음은 무엇보다 죽음에 대한 질문일 것이다. 죽음이라는 심연이 망각되어 가는 시인들은 죽음을 상기시킴으로써 살아 있음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천사와 같은 존재가 되어야 하는 것인지 모른다.

 

<시로 여는 세상> 2015 겨울호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