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거운 이미지즘의 세계

차한수, 뜨거운 달(서정시학, 2015)

 

한국 현대시에서 '이미지즘의 계보에 속하는 시는 도시적 풍경을 중심에 둔 김광균이나 김기림 식의 차가운 이미지즘과 자연적 풍경을 중심에 둔 정지용, 신석정, 장만영 등의 따뜻한 이미지즘의 계열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전자가 도시적 서정을 표현하는 것으로 사회현실에 대한 비판의식을 드러내는 주지주의적인 경향을 드러낸다면, 후자는 자연적 서정의 계열로 청신한 감각과 세밀한 언어표현을 통해 세계를 표현하려는 경향이 주로 나타난다. 물론 이들 시인이 단일한 시풍을 고수한 것은 아니다. “작은 어족(魚族)의 무리들은 일요일(日曜日) 아침의 처녀(處女)들처럼 꼬리를 내저으며 돌아댕깁니다”(바다의 아츰)라며 김기림은 자연의 생명력을 감각적인 언어로 표현하였다. 한편 촉촉이 젖은 리본 떨어진 낭만풍(浪漫風)의 모자(帽子) 밑에는 금()붕어의 분류(奔流)와 같은 밤경치가 흘러 나려갑니다라며 우수에 젖은 도회의 풍경을 예리하게 잡아낸 정지용의 황마차(幌馬車)에는 모더니티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의식이 나타나 있다.

갑작스레 1930년대 이미지즘의 계보를 꺼내본 것은 차한수의 이미지즘이 지니는 변별점을 짚어내기 위함이다. 차한수의 시들은 자연의 이미지들을 섬세하게 조탁된 언어로 그려낸다는 점에서 따뜻한 이미지즘의 계열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조창환은 이 시집의 해설에서 그의 시는, 그러니까 고독한 이미지스트 혹은 고립된 결벽주의자의 초상화라 할 수 있고, 그 고독감과 고립감을 꼼꼼하게 조립하고 재현하여 보여주는 섬세한 언어적 세공품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향토적이며 자연친화적인 이미지들이 주체와 대상 사이의 일정한 미학적 거리감 속에서 세밀하게 묘사되고 있다는 것이다. 시집의 제목으로도 사용된 뜨거운 달과 같은 작품을 대표적인 예로 들 수 있는데, 이 작품에서는 곁불처럼” “꽃망울처럼” “물결처럼과 같이 직유법을 주로 사용해서 대상과의 일정한 거리감을 유지하고 있다. 그런데 차한수의 시집에는 따뜻하다 못해 뜨겁기까지 한 이미지즘의 차원 역시 발견된다. 그것은 그가 단순하고 소박하게 자연에 대한 서정을 노래하는 차원을 넘어서 사물의 본질에 닿으려는 투사의 시선을 보여줄 때 나타난다. 다음 시를 읽어보자.

 

야만인의 허기가 강심에 고인 달을 훌훌 마십니다.

 

봄날 썰물로 이글이글 타오르는 노래를 바라보고, 밤이 깊어 가면 그리운 달빛이 뜨거워 그대 이름만 부릅니다.

 

아무리 눈을 떠도 캄캄한 사랑, 파도의 산맥처럼 멀어지고 있습니다.

― 「고백전문

 

이 시에 등장하는 야만인의 허기” “이글이글 타오르는 노래” “파도의 산맥과 같은 것은 이미지즘의 철학적 토대를 마련한 흄(T. E Hulme)이 강조했던 명료하고 견고한 이미지와는 한참 동떨어져 있다. 이들 이미지는 세계를 지성의 작용에 의해 고정된 이미지로 바라보는 근대인의 시선에서 벗어나 그야말로 야만적인시선에 의해 추동되고 있기 때문이다. 뜨거운 달에 수록된 시편들에게서 발견되는 이러한 뜨거움은 여기서 기인한다. 그칠 줄 모르고 달빛을 집어삼키는 봄날 썰물의 도도한 흐름을 야만인의 허기에 비유하고 있는 이 시에서 일종의 광적인(lunatic) 열광과 도취를 발견할 수 있다. 허나 정작 허기를 느끼는 것은 바다가 아니라 달빛의 뜨거움에 도취되어 그대의 이름을 불러보는 자신이 아니겠는가. 그리하여 빈속에 독주를 채워 넣듯이 허허로운 마음을 뜨거운 달빛으로 달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이와 같이 차한수의 뜨거운 이미지즘은 사물을 투시하는 시선으로 사물의 깊이를 끄집어내려고 한다. 이럴 때 이미지는 단순히 세계의 표상으로 나타나는 데 그치지 않고 주체의 내면을 달구는 뜨거운 열기를 내뿜는다.

그러고 보면 달과 광기의 관계에 대한 소박한 탐구는 정지용에게서도 제출된 바가 있다. 정지용은 달과 자유라는 글에서 이태백의 어머니가 태몽에 달을 집어 먹고 이태백을 낳았다는 일화를 소개하며, 이태백의 광적인 주정과 달은 선척적인 관련이 있다고 하였다. 환한 달빛 아래 미친 듯이 짖어대는 개를 보다가, 사람도 그와 다르지 않아서 달 밝은 밤에 골목으로 돌아다니는 청년의 발작에 가까운 잡가 소리를 떠올리거나 소박담장(素服淡粧)한 미망인들이 나돌아 다니는 장면을 언급하는 식이다. 이런 점에서 정지용 역시 그것을 광기라고 표현했을지언정 이는 인간이 도덕적인 억압에서 벗어나 자신의 본능에 따른 자연스러운 행위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른다. 물론 그것은 이성의 눈으로 보건대 그야말로 광기 어린 시선이 아닐 수 없다. 과학적 인식이 지배하는 세계에서 시가 외면을 받고 있는 이유 역시 이러한 세계관의 변화에 기인할 것이다. 이미지즘은 이러한 세계관의 변화에 대응하여 시가 간결하고 정확하며 뚜렷한 이미지를 통해 과학적 인식과 결코 모순되지 않음을 증명하는 과정에서 배태되었다고 할 수 있다.

다만 시가 과학적 진술에 머무르지 않기 위해서는 그 이미지의 연쇄를 통해 무엇을 의도하고자 하는 것 역시 분명해야 한다. 이때 차한수의 시는 이미지에도 깊이가 있으며, 이 깊이를 보여주지 않는 시란 과학적 인식과 마찬가지로 세계를 파편화하고 주체를 분열시키는 차원을 넘어서지 못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야만인의 시선이 필요한 것은 이 지점에서이다. 세계를 통합적으로 인식하여 사물들에 내재해 있는 열기를 감지해내기 위해서는 세계에 대한 본능적인 감각을 회복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이는 뛰어난 이미지스트에게서 발견되는 공통된 문제의식이기도 하다. 김기림이나 정지용이 모더니티에 대해 표명하는 날카로운 비판의식 역시 이러한 야만적인 시선의 재발견을 통해 모더니티를 낯설게 인식하고자 하는 리얼리즘의 차원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점에서 이들의 시선은 차가운 것이자 동시에 뜨거운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이미지에 깊이에 열기를 더하기 위해서는 본다는 것의 의미를 전환시킬 필요가 있다.

 

칠흑의 어둠이 깊다

 

소나기 묻어오는 먼 산을 바라보고

 

거꾸로 선 이름을 찾다가 눈을 감았다 떴다

 

어깨 너머로 스쳐간 수많은 어제가

 

돌담에 우두커니 기대서서

 

밭두렁을 날고 있는 노랑나비를 보다가

 

말라버린 듬벙을 하염없이 들여다보다가

 

거꾸로 선 나무를 불러보다가

 

안개비로 젖은 몽돌이 말이 없다가

 

이슬 머금은 수수 이파리 맞는 아침을 기억하고

 

땅을 뚫고 손 내미는 달래 냉이

 

눈짓에 취한 노래가 하나 둘 별이 되고 있는 것을 보았다

― 「물구나무서서 보기전문

 

이미지는 눈이 아니라 기억으로 보는 것임을 차한수의 시를 읽다보면 이해할 수 있다. 눈은 머릿속에 기억된 것을 바탕으로 이미지를 구성해낸다. 보는 것이 단순히 생리적인 작용이 아니라는 것은 눈을 감을 때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다는 점을 상기해 보면 된다. 이 시에서도 본다는 것은 그러한 의미에서 파악해야 한다. 세계를 볼 때 그것은 곧 자신의 심연을 보는 것이다. 그 심연을 통해 차한수는 이미지에 내재한 온도를 읽어낸다. 어두워져 가는 풍경을 바라보다가 문득 떠오르는 누군가의 이름을 기억하며 그는 어깨 너머로 스쳐간 수많은 어제의 눈으로 다시풍경을 본다. 감았다 뜬 눈에 이런 저런 기억들이 교차해 가면서 풍경을 엮어낸다. 이러한 이미지는 단순하고 소박한 것임에도 절절해서 금세 뜨거워진다. 그렇게 본다는 것과 기억하는 것이 눈짓으로 서로 소통하면서 노래가 만들어지고 또 그 노래가 별이 된다는 발상은 얼마나 시적인가.

그런 점에서 이 시에서 말하는 물구나무서서 보기는 사물의 기억을 더듬어 가는 행위를 의미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때의 기억은 성운(星雲)이라는 시에서 알 수 있듯이 일종의 전설(傳說)로 그려진다. “액자 속 별들의/솔씨 같은 기억//정적이 깊어갈수록/나무액자의 네 각이 비죽비죽 틀어지는/이 되어/물속을 걸어가는 전설과 같은 구절이 그렇다. 혹은 바다가 뛰면과 같은 시에서 바다가 뛰면/해질녘 서산마루에 걸린/물비늘이 뛴다/매티미가 뛴다/숭어가 뛴다라면서 이미지의 율()을 노래하는 것은 어떤가. 차한수는 어둠, , , 바다와 같은 자연물들을 기호 체계로 활용하여 자신만의 이미지 세계를 구축해내는데, 이것이 전설처럼 내려오는 상상적 이미지들을 엮은 것이라는 데 충분히 주목해야 한다. 초월적 세계를 그리는 신화와 달리 전설은 어떤 공동체의 내력이나 자연물의 유래와 같은 것을 담아내는 그릇과 같은 것이어서, 거기에는 사물과 관련된 기억에 얽혀 있는 지극히 인간적인 감정들이 올올이 배어 있다.

 

돌고래가 거울을 보고 웃었습니다

웃는 얼굴이 우스워 울었습니다

아무리 보아도 웃음이 보이지 않습니다

울음도 간 곳이 없습니다

다시 보아도 우는지 웃는지 알 수가 없어

눈을 감아버렸습니다

하늘에는 수많은 웃음과 울음이 엉겨

밤새도록 우박이 쏟아지고 있었습니다

― 「돌고래가 거울을 보고전문

 

이 시에서 거울뜨거운 달이나 고백에 등장하는 달의 이미지를 연상시킨다. 그리하여 사랑에 대한 허기로 달빛을 꿀꺽꿀꺽 삼키는 목마른 자의 애타는 시선이 우박과도 같은 별빛이 쏟아지는 바다를 유영하는 돌고래의 이미지와 연결된다. 돌고래는 거울-달을 보고 웃다가 울다가 한다. 그렇게 돌고래의 웃음과 울음이 파도의 일렁임 속에서 하나로 엉겨서 그것이 웃음인지 울음인지 알 수 없는 지경까지 되어 버린다. 이미지가 주체와 객체 사이의 경계를 전제로 한 것인데 반해, 차한수가 그리는 이미지는 사물의 표면을 뚫고 들어갔다가는 그 안에서 들끓고 있는 뜨거운 사랑의 에너지를 발견해내고는 그 이미지를 온통 방사(放射)시켜 버린다. 그의 시에서 이미지가 마치 광선으로 변환되는 듯한 인상을 주는 것은 이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그는 울음과 웃음으로 사물의 표면에 균열을 내고는 그 안에서 잠재되어 있던 블랙홀과 같은 어둠을 끄집어내어 사물에 농축되어 있는 에너지를 폭발시켜 버리는 것이다.

이러한 시적 전략은 그가 세계를 인식하는 기본적인 태도와 관련되는 것일 게다. 가령 맨발의 허무를 빨간 피의 열기로, 그리고 그 열기로 인해 재가 되는 장면으로 변용시켜낸 발바닥의 숨소리를 통해서도 알 수 있듯, 차한수는 기본적으로 세계를 유동적인 것으로 바라본다. 그러니 그에게는 당연하게도 이미지 역시 고정된 상태로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차한수의 시에서는 직유보다 은유가 빛을 발한다. 거칠게나마 정리하면, 직유가 원관념과 보조관념 모두를 각자의 자리에 고정시켜 놓고 양자를 연결시키는 다리를 놓는 전략을 취하는 데 반해, 은유는 원관념과 보조관념을 양쪽에서 밀어붙임으로써 이들이 중첩되면서 만들어내는 새로운 지평을 발견해내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특히 차한수의 경우에는 밀어붙임의 과정에서 발생하는 비애를 웃음과 울음으로 번갈아 전환시키면서 이미지의 화학반응을 통해 역동적 에너지를 발생시킨다. 이런 점에서 우박처럼 쏟아지거나 해처럼 솟구치는(솟아라 솟아라 해야 솟아라) 이미지들의 역동성을 차한수의 뜨거운 이미지즘을 정의하는 특성으로 추가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서정시학> 2015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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