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에 방에 딸린 북박이장 한쪽 구석에 봉해놨던 박스 두 개를 뜯었다. 무엇을 찾으려고 그랬던 것 같기는 한데 그 왜에 대한 기억은 벌써 흐릿하다.
지난 것들을 뒤적이는 일에는 별다른 시간이 드는 것 같다. 먼지나 구김만큼 내려 앉은 기억이 시간을 엉겨 붙잡기 때문이겠지. 어쨌든 그날도 그래서, 나는 박스에서 꺼낸 몇 권의 책, 디스켓 통, 낙서 뭉치 같은 것들 사이에 낑겨져 있던 몇 개의 물건들 때문에 거진 하루를 맥놓고 보내야 했다. 책 위에 쪼그려 앉아 보는 누구도 없는데 보란 듯이, 낡은 엽서카드 한 장, 예전 연구실 프린터로 뽑았다가 죄 태웠다고 생각하곤 까맣게 잊고 있었던 사진 두 장, 그리고 책 한 권을 펼쳐 놨었다. 그리고 문득 어릴 때 살던 집 건너방에 있었던 다락 생각을 했다.
그때 난 다락이라도 절대 두 말 안했다. 나 따로 있고 싶었으니까 군말은 있을 이유가 없었다. 아버지 테니스 시합 때 타오신 트로피, 각종 함들과 긴 돗자리 같은 걸 한 쪽으로 떠밀어 놓고 쳐박힐 수 있다는 사실에 기왕이면 삼각 모양 창문이라던가, 기왕이면 저 멀리 별이 보인다던가 하곤 거리가 먼 후미진 구석이었지만 그래도 거기서 나는 좋았다. 쿰쿰한 냄새까지 고스란히 떠올랐던 기억 속에서 나는 이제 처음으로, 다락에서 방까지 나 있던 좁은 층층이 아래에서 본 엄마의 경첩달린 길다란 옷 함과 그 안에서 내가 본 어떤 사연들을 기억해 낸다. 커가는 동안 날 떠나지 않던 것들이 별 것도 아니요 유독한 것도 아니라는 걸 알아가는 밋밋한 어른된 삶에서 올록볼록한 ‘비밀’ 의 열쇳말이 필요한 동굴이나 정원, 아니면 물레같은 그 시절의 기억에 새로 살이 붙었던 걸 보면 그날 내가 늘어 놓았던 몇 개의 물건에 꽤 큰 추억의 힘이 담겨 있었던 모양이다.
저 하얀 책은 그렇게 다시 만났다. 두 해 하고 몇 달 전인데 2003년 5월 28일이라고 적어 둔 내 손글씨가 낯설게 느껴진다 싶게. 삼년 전에 인터넷으로 책 표지를 처음 봤을 때 ‘하얀 책’ 이란 별명이 바로 생각났었다. 화면에서 봤을 때 보다 조금 길다 싶던 책을 받아 보았던 날 뿌듯했던 마음은 기억이란 말이 어울리지 않는 것 같다.
그런데 책을 어디다 쓸지를 몰랐다. 딱히 알고픈 것이 있어서 찾아낸 책도 아니고, 누가 이 책 좋다고 크게 권해서 사 본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넓게 보면 우연으로 스쳤다 할 글에서 철학을 권하던 어떤 이의 가슴에 감동을 준 책이었다는 감상평을 읽고, 귀에 고둥을 대고 바다를 들었다고 치는 식으로 구했던 책, 그 밖에는 마땅한 동기도 목적도 없었고, 그래서 표지만큼이나 멀겋게 곁에 둔 책이었기 때문이다.
뒤늦게 학교 다닐 때 안 친했던 철학공부를 건드렸다. 철학을 하는 것은 아니고 철학 수업만, 진득하니 앉아 읽고 쓰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고 청강의 숫자만 늘려 가면서. 언제쯤 나한테도 번쩍하는 그 경이가 오나, 뭘 어떻게 하면 나도 그 탁월한 식견이 감지되려나, 뭘 만나면 나에게도 지혜를 연모하는 그 가심이 찾아 오려나, 나름대로 큰 꿍꿍이를 갖고서.
어떤 것에 뜻을 두고 나면 세상은 그쪽으로 갈래가 잡히는 것이 아닐까. 철학학습에 뜻을 두고 난 뒤, 나는 나랑 만나지 않았을지도 모르는 것들로 난 길목에서 어정거리는 느낌이곤 했다. 신기하기도 하고 좋기도 하고, 잘 하고 있다고 낙관하다가 털썩 무안해지기도 했다. 길인지도 모르는 주제에 샛길에서 뻘짓을 하고 있는 듯한 느낌은 반복해서 날 창피하게 하지만, 그래도 ‘가지 않은 길’ 로 두고 끝날 수 있었던 내 미래를 상상해 보면 꿀꺽하고 삼키게 되는 안도와 다행스러움이 큰 것 같다. 한 십 년을 채울 때까지는 형편 닿는 대로 철학공부, 최소한 읽기를 계속해보자는 마음이 그래서 가능했던 것 같다.
내 조건에 따라 철학수업 청강은 다음 학기를 끝으로 더는 없으리라 생각했는데, 그 바람에 묘한 마음이 들었다. 다음 학기엔 여태 들어 본 적 없던 과목 중에서 고르고 싶었고, 윤리학 수업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순간 이 하얀 책이 떠올랐다. 짠- 하고 떠올랐던 것도 맞고 조금 마음도 짠하게. 뭐에 쓰는지도 모르고, 심지어 어디 뒀는지도 잊고 지냈던 책인데, 두 해쯤 지나 이젠 내 필요로 내가 원해서 전과 다르게 대할 수 있게 되었다니까.
지금까지의 청강 경험을 보면, 나는 절대로 읽어가야 수업의 기본이 된다. 문외한이고, 객관적인 환경이 낯설고, 그렇다고 재빠른 소통을 어디서 할 수도 없고. 그래서 아예 수업을 듣지 말던가 아니면 절대로 미리 읽거나 준비해야 한다. 누가 쓴 무슨 책을 학습 중이냐, 누가 얼마나 잘 가르치느냐 따위는 내가 읽고 생각해갔느냐, 내가 사전에 좀 생각한 바가 있느냐의 조건을 넘어서지 못했다고 확신한다. 그래서, 안팎으로 짠한 하얀 책을 학기가 새로 돌아올 때까지 예습하기로 결심했다. 남을 것은 이제 한 가지, ‘그렇다면 어떻게’
반대 쪽에서 세상을 살지 않아놓고서 그것을 말할 능력도 자격도 내게 없지만, 그래도 난 이 서재와 그것이 상징하는 어떤 것 또한 내가 철학함의 길목에서 얼쩡거리지 않았다면 관련 없었어도 좋았을 것, 그러나 이젠 관련 없다고 말하기 어렵게 된 것 중 하나라고 느낀다. 그리고 나에겐 지난 7월에 글 두어 개 끄적이다 관 둔 이 서재에 그렇게 내버려 둔 마음 하나가 있었다. 때가 오면 회복하고 싶었던 마음, 그런데 나 혼자서 하고 싶었던 마음. 이제 그 마음을 여기까지 쓴 생각들과 하나로 묶어 본다.
얄팍하게 남은 두 장의 달력이 비어가는 동안 스물 네 쪽 짜리 책 서론을 우리말로 옮겨 볼 생각이다. 어림을 해 보니 내일부터 이틀이나 삼일에 두어 문단씩 번역을 하면 크리스마스 즈음에 마칠 것 같다. 전혀 아는 바가 없기도 하고 번역을 목적으로 하려는 공부도 아니니까 책의 본론은 미리 생각 없음을 주지하고서, 번역연습 삼고, 예습 삼고, 연말연시 준비 삼아 시작해 본다. 남 앞에서까지 이렇게 써 놓고 하다 못하게 되는 날이면 무척 창피하겠지만, 창피할 줄 알면서도 하고 싶어서 그냥 할란다.
마지막으로 사소하지만 밝혀야 한다고 생각한 몇 가지
-번역은 직역으로 한다. 그 이유는 첫째, 나는 비전공자이며 문외한이기 때문이고, 둘째 이 일이 내 일상에 크나큰 부분이 되길 원하지 않기 때문이며, 세째 내가 옮겨 보려는 텍스트는 문학적 번역의 대상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마지막 네 번째 이유는 나의 번역 실력이 너무나도 일천하기 때문에 첫 습관을 솜씨 부리기로 들이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번역은 가급적 단어 대 단어로 옮길 것이다.
-서툰 번역에 원문의 향취가 손상될 것 같다는 미리짐작은 원문을 함께 올리는 것으로 줄이려고 한다. 글을 올려도 많아야 두 세 분의 방문객 뿐인 후미진 서재라 그 점에선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번역한 내용을 옮기는 날 이외의 날엔 검색이라던가 밑줄긋기 같은 방식을 써서, 현재로서는 막연할 따름인 윤리학의 제 내용들에 대해 다만 눈이라도 익혀 볼 생각이다. 하지만 내 현재 할 일들에 따라서 안 하게 될 가능성도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