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deed, one interesting upshot of the emergence of virtue ethics is that some deontologists and utilitarians have reached to it by recognizing its importance and seeking to address it within the terms of their own theories. Hence, for example, the revived interest in Kant’s Doctrine of Virtue, the elaboration of character-based versions of Kantianism and utilitarianism, and the utilitarian Peter Singer’s latest book on ‘How are we to live?[1]. This is currently resulting in some very exciting work, particularly in the area of Aristotelian and Kantian scholarship. A recent collection has McDowell bringing Aristotle closer to Kant, and Herman and Korsgaard bringing Kant closer to Aristotole. I have not yet come across to interpret Mill in Aristotelian ways but I suspect it will happen any day


실제로, 덕 윤리학의 출현이 낳은 하나의 흥미로운 결과는, 일부 의무론자들과 공리주의자들이 그것의 등장이 갖는 의의를 인정하고, 그들의 고유한 이론 용어로 검토하려는 시도를 하면서 덕 윤리학의 출현이라는 결론에 도달해 갔다는 것이다. 다시 활기를 띤 칸트의 덕의 원리 Doctrine of Virtue 에 관한 관심, 성품을 기반으로 해석된 칸트주의와 공리주의 이론의 발전, 그리고 공리주의자 피터 싱어 Peter Singer의 최근의 책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등이 그 예다. 이러한 결과, 현재 특히 아리스토텔레스와 칸트 연구 분야에서 매우 흥미로운 연구들이 나오고 있다. 최근에 집적된 문헌들은 맥도웰 McDowell 이 아리스토텔레스를 칸트에게 보다 가까워지게 하도록, 그리고 헤르만 Herman 과 코르스고어Korsgaard 가 칸트를 아리스토텔레스에게 보다 가까워지게 하도록 이끌고 있다. 나는 아직 아리스토텔레스적으로 해석된 밀 Mill 을 발견하지는 못했으나, 언제든 그리 되리라 생각한다.

실제로, 윤리학의 출현이 낳은 가지 흥미로운 결과는 일부 의무론자들과 공리주의자들이 그것의 의의를 인지하고, 그에 대해 자신들의 이론적 언어로 설명해 보려는 시도를 하다가 윤리학의 등장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다시 활기를 칸트의 덕의 원리 Doctrine of Virtue 관한 관심, 인격을 바탕으로 차원 면밀히 해석된 칸트주의와 공리주의, 그리고 공리주의자 피터 싱어 Peter Singer 최근의 어떻게 살아야 것인가?’ 등이 예다. 이러한 결과, 현재 특히 아리스토텔레스와 칸트 연구 분야에서 매우 흥미로운 연구들이 진행되고 있다. 최근의 문헌 모음을 보면, 맥도웰 McDowell 아리스토텔레스를 칸트에게 가깝게 했고, 헤르만 Herman 코르스고어Korsgaard 칸트를 아리스토텔레스에게 가깝게 했다. 나는 아직 아리스토텔레스적으로 해석된 Mill 발견하지는 못했으나 머지않아 그리 되리라 생각한다.


This has meant that the lines of demarcation between the three approaches have become blurred. Describing virtue ethics loosely as an approach which ‘emphasizing the virtues’ will no longer serve to distinguish it. By the same token, of course, deontology and utilitarianism are no longer perspicuously identified by describing them as emphasizing rules or consequences in contrast to character. No one, as far as I know, is bothered by the fact that there are no longer satisfactory short answers to the questions ‘What is deontology?’ and ‘What is utilitarianism?’, but currently, at least some philosophers seem bothered by the fact that we virtue ethicists cannot come up with one to answer ‘What is virtue ethics?’. The demand that virtue ethics, unlike the other two approaches, should ba able to state its position succinctly, in terms both sufficiently broad (or disjunctive?) to get all virtue ethicists in and sufficiently tight to keep all deontologists and utilitarians out, seems a bit excessive. Why should anyone expect us, uniquely, to be able to do it?

이것은 세 접근법 사이의 경계가 불분명해졌음을 의미한다. 덕 윤리학을 ‘덕을 강조하는’ 하나의 방법으로서 느슨하게 설명하는 것은 더 이상 그것을 특징짓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물론 그와 같은 이유로, 의무론과 공리주의가 무엇인가는 성품과 대비되는 규칙이나 결과를 강조하는 이론이라는 설명으로는 더 이상 명쾌한 확인이 되지 못할 것이다. 내가 아는 한, 그 어느 누구도 ‘의무론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공리주의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 대해 만족스러운 짧은 답변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곤란을 느끼지 않는다. 그러나 현재 적어도 일부 철학자들은 우리들 덕 윤리학자들이 ‘덕 윤리학이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 대답할 하나를 제시할 수 없다는 사실 때문에 심히 걱정스러운 것처럼 보인다. 다른 두 방식과 달리, 덕 윤리학이 모든 덕 윤리학자들을 수용할만큼 충분히 포괄적이면서(혹은 이접 離接적이면서도?) 모든 의무론자들과 공리주의자들을 배제시킬만큼 협소한 차원에서 자기 견해를 간략히 서술할 수 있어야 한다는 요구는 다소 지나쳐 보인다. 왜 유독 우리에게만 그렇게 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가 있어야 하는가?

이는 개의 이론적 접근방식 사이의 경계가 불분명해졌음을 의미한다.  덕을 강조하는것이 윤리학이라는 식으로 막연히 설명하는 것은 이상 윤리학을 특징짓게 하는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당연히 그와 같은 이유로, 의무론과 공리주의는 인격과는 다르게 규칙이나 결과를 강조한다는 정도의 설명으로는 이제 더이상 이론에 대한 명쾌한 구별정립이 되지 못할 것이다. 내가 아는 어느 누구도 의무론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공리주의란 무엇인가?’ 질문에 이제 더이상 짧은 답변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사실 때문에 당혹감을 느끼지 않는다. 그러나 현재, 적어도 일부 철학자들은 우리들 윤리학자들이 윤리학이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 답할 어떤 하나의 답변을 제시할 없다는 사실이 심히 염려스러운 것처럼 보인다. 다른 견해와 달리, 윤리학이 모든 윤리학자들을 수용할만큼 충분히 포괄적이면서도 (혹은 비배타적이면서도?) 모든 의무론자들과 공리주의자들을 배제시킬만큼 협소한 차원에서 자기 견해를 간략히 서술할 있어야 한다는 요구는 다소 지나쳐 보인다. 유독 우리에게만 그렇게 있으리라는 기대가 있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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