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first is the concept of eudaimonia, usually translated as 'happiness' or 'flourishing' and occasionally as 'well-being'. Each translation has its disadvantages. The trouble with 'flourishing' is that animals and even plants can flourish, but eudaimonia is only possible for rational beings. The trouble with 'happiness', on any contemporary understanding of it uninfluenced by classically trained writers, is that it connotes something subjective. It is for me, not for you, to pronounce on whether or not I am happy, or on whether my life, as a whole, has been a happy one, and barring, perhaps, cases of advanced self-deception and the suppression of unconscious misery, if I think I am happy, then I am-it is not something I can be wrong about. Contrast my being healthy, or flourishing. Here we have no difficulty in recognizing that I might think that I was healthy, either physically or psychologically, or think that I was flourishing, and just be mistaken. In this respect, 'flourishing' is a better translation of eudaimonia than 'happiness'. It is all too easy for me to be mistaken about whether or not my life is eudaimonia, not simply because it is easy to deceive oneself, but because it is easy to have the wrong conception of eudaimonia, believing it to consist largely in pleasure, for example. 'Well-being' is also a better translation than 'happiness' in this respect, but its disadvantages are that it is not an everyday term and that it lacks a corresponding adjective, which makes for clumsiness.
그 첫째는 보통 ‘happiness-행복’ 나 ‘flourishing-행복’ 때때로 ‘well-being-행복’ 으로 옮겨지는 eudaimonia 라는 개념이다. 어느 것이든 제각기 번역상의 불리함이 있다. eudaimonia 를 ‘flourishing-행복’ 이라고 옮기게 되면 동물과 심지어 식물들조차 무성하게 잘 자랄 수 있지만, eudaimonia 는 오로지 이성적 존재에게만 가능한 개념이라는 점에서 문제가 있다. ‘happiness-행복’ 이라고 번역할 때의 문제는 고전을 통해 교육받는 저자들의 영향을 받지 않은, 행복에 관한 모든 현대적인 이해는 주관성을 띤다는 것이다. 내가 행복한가 아닌가, 혹은 내 삶이 전반적으로 행복한 삶이 되고 있는가 아닌가를 판단하는 것은 나지 네가 아니다. 그래서 고도의 자기기만과 무의식적인 고통의 억압이라는 경우를 배제한다면, 나는 내가 행복하다고 생각하면 행복한 것이다. -이것은 내가 뭔가 잘못일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다. 나의 건강함 또는 잘 있음과 대조해보자. 이 때 우리는 내가 육체적, 정신적으로 건강하다고 생각해도 좋은지, 또는 잘 지내고 있다고 생각해도 되는지 좋은지, 아니면 단순히 착각하고 있는지를 인지하는데 아무런 어려움이 없다. 이런 점에서 ‘flourishing-행복’ 은 ‘happiness-행복’ 보다 eudaimonia 을 받는 더 나은 번역이다. 나는 너무 쉽게 나의 삶이 행복한가 아닌가에 대해 잘못된 판단을 한다. 그 이유는 내가 단순히 나 자신을 속이기 쉬워서가 아니라 예컨대, 행복은 주로 쾌락에 있다고 믿는 등 eudaimonia 에 대한 잘못된 생각을 품기가 쉽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는 ‘well-being-행복’ 도 ‘happiness’ 보다 좋은 번역이겠으나 이 말은 그것이 일상적인 말이 아니라는 점과 상응하는 형용사가 없어서 쓰기 불편하다는 불리함이 있다.
However, despite the undoubted fact that ‘happiness’ can have this subjective connotation, it does seem that we also have a more objection notion much closer to that of eudaimonia, a notion of ‘true(or real) happiness’, or ‘the sort of happiness worth having’. We tend to say that someone may be happy, though not worth having’. We tend to say that someone may be happy, though not truly happy, if they are living in a fool’s paradaise, or engaged in what we know is pointless activity, or brain-damaged and leading the life of a happy child. When we hope that our children will grow up to be happy and have happy lives, we hope for more than that they will lie around all day in a drug-induced haze of contentment.
그러나, ‘행복’ 이라는 말에 이렇게 주관적인 의미가 담길 수 있다는 확실한 사실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 위에 eudaimonia 의 개념에 훨씬 더 가까운 보다 객관적인, ‘참(또는 진정한) 행복true happiness’ 또는 ‘얻을만한 가치가 있는 행복’ 이라는 개념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우리는 만일 사람들이 덧없는 행복의 환상 속에 살고 있거나, 우리가 알고 있는 무의미한 일에 빠져 있거나, 또는 뇌의 손상을 입거나 해서 그들의 삶이 행복한 어린 아이의 그것에 이르게 된 경우 비록 진정한 행복은 아닐지라도 아마도 그들은 행복해하는지 모른다고 말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가 우리의 아이들이 행복하게 자라서 행복한 삶을 살게 되기를 희망할 때, 우리들은 아이들이 약물에 취한 채 몽롱한 만족감에 젖어 하루를 빈둥거리게 되는 것 이상을 바란다.
The second is the concept of a virtue (or vice) itself. Suppose someone were described as having the virtue of honesty. What would we expect them to be like?
Most obviously we expect reliability in their actions; they do not lie or cheat or plagiarize or casually pocket other people’s possessions. You can rely on them to tell you the truth, to give sincere references, to own up to their mistakes, not to pretend to be more knowledgeable than they are; you can buy a used car from them or ask for their opinion with confidence. In thinking about virtues, many people stop here-or indeed, rather earlier, with just a couple of examples-and are thereby led to describe the virtues as no more than mere tendencies to act in certain ways, perhaps in accordance with a rule.
두 번째는 덕 (또는 악덕) 의 개념이다. 정직함의 덕이 있다는 평을 듣는 사람들을 가정해 보자. 우리는 그 사람들이 어떨 것이라고 예상하는가?
가장 분명하게 우리는 그들의 믿음직한 행위를 예상한다. 그 사람들은 거짓을 말하거나, 속임수를 쓰거나, 남의 것을 도용하거나, 다른 사람의 물건을 슬쩍하지 않는다. 당신은 그들이 당신에게 진실을 말하며, 솔직한 답변을 주고, 실수에 대해 숨김없이 인정하며, 알고 있는 것보다 더 많이 아는 것처럼 굴지 않을 것을 신뢰할 수 있다. 그래서 당신은 그 사람들에게서 중고차를 구입하거나 확신을 가지고 그들의 의견을 물을 수 있다. 덕을 고려함에 있어서, 많은 사람들이 여기서, 아니 실제로는 단지 몇 개의 예를 들면서 이보다 일찍 멈춘다. 그렇게되면 덕은 어느 특정한 방식으로, 아마도 규칙에 따라 행동하려는 경향에 불과하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