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포네, 또는 여우 - 벤 존슨 희곡선 대산세계문학총서 42
벤 존슨 지음, 임이연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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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를 한 시간이 없다. 학기말이 다가오고 논문을 써야되기 때문이다. 졸업 해야된다는 논문써야된다는 압박이 점점 심해진다. 그럼에도 간간히 책을 읽으면 서평을 쓰고 싶다. 글 쓰기도 노력인데 게으른가보다. 


벤 존슨(Ben Jonson, 1575~1637)의 볼포네, 또는 여우안에 있는 내용이다. 나는 고전을 좋아한다. 1600년대에 쓴 작가 벤 존슨<연금술사>는 런던 전염병 시대 혼란한 사회에서 대두된 연금술로 인한 인물들의 욕망을 그렸다. 벤 존슨은 영국의 극작가이고 영국 연극의 황금기를 살았다. 셰익스피어와 동시에 살았던 존슨은 도시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한 도시 희극으로 유명하다. 연금술은 돌을 황금으로 바꾸어주고 전염병에 걸린 환자를 즉시 낫게 해주는 신비한 의술이다. 이 작품은 혼란이 만연한 도시에서 악당들이 철학자의 돌을 사용하여 불안한 런던 시민들에게 가짜 약을 팔며 거짓말로 사기를 치는 이야기이다. 하층민인 그들이 인간의 심리를 꿰뚫어 인간의 고매한 위선의 이면을 들춰 그들이 세상에 가진 끝없는 욕망과 인간을 바라보는 관점을 보여준다. 현대의 우리도 전염병과 같은 코로나 팬데믹에 의한 충격적인 영향을 경험했기 때문에, 이 작품을 이해하기에 시의적절하다. 작가는 욕망에 눈먼 희생자들의 다양한 어리석음을 이용하여 즐거움을 느끼는 인물들의 기민함과 악랄함, 그리고 사악함이 희극적으로 표현되어, 욕망에 눈먼 사람들의 이해관계와 그 한계를 보여주었다. 위트와 재미로 가득 찬 이 작품은 자본주의 욕망에 물든 사람들을 풍자하여 교훈적인 이야기이지만, 결론에서 가짜 연금술을 행해 돈을 벌어들인 악인 일당을 벌하는 권선징악의 형태가 아니다. 오히려 자신의 잘못을 변명하고 별일 아닌 것으로 축소하여 이야기하는 악인을 이해하며 끝나는 결말에 의아함이 있다. 악인에게 통쾌한 한 방을 기대했던 나에게는 약간 실망스럽다. 그럼에도 작품을 읽으면 기분이 좋아지고 현대 팬데믹의 사회에 투영해도 조금도 손색이 없는 훌륭한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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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옥의 기계
장 콕토 지음, 이선화 옮김 / 지만지드라마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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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미희곡을 제외하고 희곡을 읽을 기회가 거의 없다. 역시 편독하는 나에게 엄청나게 많은 희곡을 읽는일은 일종의 노력이다. 그럼에도 기회가 되어 시간을 내어 읽은 작품인데, 기대한것보다 재미있다.

<지옥의 기계>(La Machine infernale)는 오이디푸스 신화를 바탕으로 쓴 장 콕토의 희곡 작품이다. 4막으로 되어 있고, 각 막에는 유령, 오이디푸스와 스핑크스의 만남, 혼례의 밤, 오이디푸스왕이라는 소제목이 붙어 있다. 1막은 <유령>으로 선왕 라이오스의 유령이 테베의 성벽 아래에 나타나, 이오카스테와 테이레시아스가 사건의 진위를 확인하러 성벽을 방문하는 장면이고, 2<오이디푸스와 스핑크스의 만남>에서는 오이디푸스가 스핑크스와 대면하여 수수께끼를 풀게 되기까지의 과정이며, 3<신혼 초야>는 오이디푸스와 이오카스테가 혼례를 치른 날 밤을 재현하고, 4<오이디푸스왕>은 소포클레스의 작품 전체를 포괄압축하는 장면들로 진실이 밝혀지고 비극이 완성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17년이 지나고 오이디푸스왕의 거짓된 행복의 시절이 지나고, 왕은 진정한 불행이 진정한 축성임을 알게 된다. 거짓에서 벗어나 진실에 눈을 뜨면 그것이 축복이라고 여긴다. 여기서 드는 의문은 진실이 왜곡된 현재 행복하다 느끼는 것이 진실이 아니라 왜곡된 것일지라도 그 사실을 모르면 행복하다 느낄 것인가. 그러나 언젠가 먼 훗날, 자신에게 주어진 이 모든 것들이 거짓으로 왜곡된 행복, 즉 행복을 가장한 행복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 삶은 더 비참해질까 행복해질까. 비밀이 밝혀져 모든 것을 알게 되는 것보다, 때로는 모르고 지내는 것이 더 정신적으로 건강하게 지낼 수 있을 것 같다. 행복을 정의할 수는 없지만 모르는 게 약일 때도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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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킬 박사와 하이드씨 일러스트와 함께 읽는 세계명작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 지음, 강미경 옮김, 마우로 카시올리 그림 / 문학동네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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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화부터 시작해 다양한 출판사의 판본으로 된 이 작품은 뮤지컬에서 생생하게 실험하는 모습과 변신의 모습까지 여러번 본 애정하는 작품 중 하나이다. 이번에 그림책으로 나와서 새롭게 다시 읽게되었다. 

1886년 출간된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의 작품으로 인간의 마음속에 공존하는 선과 악의 대립을 미스터리 형식으로 풀어내, 인간 내면에 있는 악의 본능에 대해 이야기한다. 어느 겨울밤, 조용하던 런던 거리에 한바탕 소동이 벌어진다. 어린아이를 무자비하게 짓밟은 흉측한 몰골의 범인 하이드는 명망 높은 헨리 지킬 박사의 거처로 유유히 사라지고, 그 후로 런던에는 하이드를 둘러싼 끔찍하고도 불가사의한 사건들이 벌어지는데 이 사악한 에드워드 하이드라는 누구인가? 그리고 지킬 박사에게는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의문을 품게 한다.

순수악으로 칭한 하이드씨가 죽음의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 죽음의 두려움을 느낀다면 순수악으로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인간의 양면(선과악)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 생각해 보게 된다. “나는 무미건조한 연구 생활을 못내 지겨워하고 있었네! 지겨운 나머지 때로 신나게 놀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여전히 고개를 쳐들었지 내가 추구하는 철학은 점잖지 못했던 데 비해 나는 유명 인사에다 사회적으로도 꽤 존경받는 위치에 있었네.”(p.118)처럼 쾌락을 추구했던 지킬, 그리고 그가 지켜야 할 존경 받는 지킬 이 두 가지를 다 갖고 싶었던 인물이었다.

쾌락에 단호히 작별을 고하지만 그 쾌락을 잊지 못하는 무의식까지는 버리지 못한 것 같다. 이런 마음들이 결국에는 지킬이 아닌 하이드도 변하게 하지 않았을까. 그것은 인간의 모습이고 죄라고 여기면서도 단호하게 내칠 수 있다면 그것은 하이드씨의 정 반대에 있는 순수한 선의 영역이지 입체적인 인간의 모습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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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고기인간 연극과인간 중국현대희곡총서 3
궈스싱 지음, 김우석 옮김 / 연극과인간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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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회곡을 읽는다는것은 나에게는 드문일이다. 그럼에도 낚시하는 이야기에 흥미가 생겼다. 낚시를 좋아하는것은 아니지만, 한 번 바다낚시나 낚시에 매료되면 빠져나올수 없다는 이야기를 주위에서 여러번 들었다. 언젠가 한번은 시험삼아 해보고싶다.

<물고기 인간>은 중국 작가 궈스싱의 1993년 희곡으로 낚시하는 이야기에 인생이 담겨있다. 북방의 어느 호숫가에서 낚시 대회가 열린다. 호수의 신화 같은 존재인 대청어와 물고기를 지키는 위씨 영감은 낚시 대회를 탐탁지 않아 한다. 낚시 대회로 소란스러운 가운데 30년 전 대청어를 낚다가 아들을 잃은 낚시의 신이 등장하면서 호숫가에는 긴장감이 맴돈다

 “30년 전에 그놈을 낚으려고 왔던 낚시꾼이 아들의 목숨까지 얹어 보내고도 비늘 하나 못 건졌어”(p82) 에서 무언가를 얻으려고 억지로 하였지만 자기 것이 아니면 의미가 없고 무상하다. “당신이 잘못했네! 근데 왜 낚시하는 버릇 못 고치고?”(p97) 에서 보이듯이 무엇인가에 빠지면 그것을 바꾸고 고치기 힘들 것 같다. 좋은 것이든 아니듯 중독은 무섭다. 낚시의 신이 대청어를 잡으려는 행위가 30년을 기다린 인간과 물고기의 대결이 아니라, 결국은 대청어를 잡지 못하게 막은 위씨영감에 의해 인간과 인간의 대결이 되었다. 위 씨 영감의 말처럼 다들 대청어가 보고 싶고 그것을 잡는 것을 구경하고 싶지만, 세상에서 어떤 것은 안 보는 게 낫다. 자연은 자연 그대로 두는 것도 좋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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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형의 집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48
헨릭 입센 지음, 안미란 옮김 / 민음사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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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나도 유명한 작품이라 당연히 읽어야하는 필독서로 여겨 읽게 되었다.

헨릭 입센(Henrik Ibsen)<인향의 집>에 나오는 여 주인공 노라는 페미니즘의 대명사가 되는 인물이고, 인형의 집이라는 제목보다 노라로 더 유명하다. 이 극은 세 명의 아이들과 은행장인 남편의 보호를 받으며 종달새같이 현모양처의 모습을 가진 그녀가 대출 사건으로 인해 각성하고 문을 쾅 닫고 집을 뛰쳐나갔다는 내용이다

이후 노라의 뒷이야기가 궁금한 많은 작가들은 노라 그 후에 대한 여러 가지 이야기를 만들었는데, 여성의 성공을 질시하는 작가는 집 나간 노라가 온갖 고생을 다하고 결국 울면서 집으로 다시 돌아와 남편에게 사과한다는 버전부터, 처음에는 고생을 했지만 좋은 사람들을 만나, 작가로 데뷔하게 되었다는 성공 스토리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버전을 탄생시켰다

그런데, 작가가 된 노라의 성공스토리에서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작가 노라의 이름을 실명이 아닌 필명을 사용했다는 것이다. 마치 조지 엘리엇(George Eliot)처럼 남성의 이름을 사용했다. 이는 시대상을 반영하고 여성에 대한 제약성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노라의 성공이 페미니즘의 역사에 영향을 미친것은 사실이지만, 노라의 고생이냐 성공이냐, 가출 후 집으로 복귀냐 아니냐에 초점을 맞추기 보다, 원작에서 높이 살만한 부분은 노라가 안락하고 풍족한 곳이지만 자유가 없는 그런 곳을 떠났다는 점이다. 금수저 부모는 아니지만 나름 부족함 없이 편안한 집을 두고, 경제적 자립도 아니고 단지 자유만은 위해 그것을 찾아 집을 나간다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며, 특히 결혼 후 겉으로 보기에 완벽해 보이는 가정에서 자신만의 자유를 찾아 나가는 여성은 세상 사람들의 손가락질과 구설수의 소재거리가 되기에 십상이다.

그렇다면 그녀는 왜 자유를 찾으러 갔을까. 결혼한 가정에서는 자유가 없었을까. 남편이 심각한 문제가 있던것도 아니고 착한 아이들을 챙기는 삶은 대부분의 여성들이 현재도 하고 있고 때로는 원하는 삶이기도 한데, 그런 삶이 자유가 없는 삶일까. 누구나 자신의 잣대가 있으므로 잘잘못을 따질 수는 없지만, 안락한 집을 나간 후 경제적으로 피폐하고 사회적으로 인정받지 못하던 시대에 살았던 그녀는 밖에서 원하던 진정한 자유를 찾았을까. 그래서 많은 작가들이 노라 그 후에 관심을 갖는 것이 아닌지.

나 역시 궁금하다. 노라 그 후 그녀가 찾은 자유의 색은 무슨 색인지. 그녀가 맡은 자유의 공기는 어떤 냄새인지. 어쩌면 노라의 집이 마치 <쇼생크 탈출 The Shawshank Redemption>에 나오는 그런 감옥이었는도, 그 안에서 오랜 정체된 생활에 대한 익숙함에 환멸을 느꼈는지도 모르겠다. 마치 출소 후 현실 세계와의 괴리로 스스로 생을 마감한 쇼생크 탈출의 브룩스를 예견한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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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22598 2022-05-01 12: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유란...물리적인 조건이 수반되어야 하는 것이지만 어쩌면 감각, 인식적으로 이해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보아용 ^^

Angela 2022-05-01 14:40   좋아요 0 | URL
그런 자유 아주 중요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