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주교 서적에 20년치 보너스 몽땅 투자


[한겨레] 한국의 책쟁이들/⑨ 천주교 집안 4대손 송명근씨

책쟁이 치고 공간 고민 않는 이가 없다. 공간에 비해 책이 많아서다. 그 바탕에는 책의 늘어날 수 있음과 공간의 늘일 수 없음이란 물성이 대립한다. 하여, 책과 공간이 일치하는 행복한 순간 외에는 책의 놓임새는 곧 책과 공간의 투쟁사다. 책과 공간 사이에 시간이 끼이면서 벌어지는 이러한 현상은 인간의 주름살처럼 불가항력 앞에서의 부질없음이 적실하게 드러난다.

송명근(55)씨 집은 가장인 그의 몫으로 할당된 공간이 가장 크다. 송씨 부부와 자녀 1남2녀, 그리고 어머니 등 6명이 거주하는 80평 가운데 25평이 송씨 전용이라고 했다. 그런데 정작 그가 안내한 곳은 좁은 계단을 톺아올라 드르륵 문을 열고 들어가는 좁은 방이었다. 책쟁이의 웅장한 서재가 짠~ 하고 나타나려니 기대한 방문자라면 적잖이 실망한다. 견본으로 미리 준비해 둔 천주교 관련 고서 외에 <고서연구> 잡지 20여권이 책상 위에 놓여있을 뿐.

책들은 꼬깃꼬깃 숨어있었다. 쪽문으로 연결된 마루, 그 맞은 편 다락방, 층계참의 창고, 지하방 가구의 뒤쪽…. 지붕의 물매가 그대로 드러난 이층은 구석구석 여축없이 맞춤 책꽂이고 거기서 넘친 책은 이중 삼중으로 쌓였다. 원래 도르래를 달아 이중으로 운용했던 책꽂이는 그 앞에 책이 쌓이면서 도르래는 기능을 잃었고 그 뒤의 책들 역시 거풍한 지 오래다. 층계참 창고 안쪽은 빵빵한 책 마대가 겹으로 쌓여 천장에 닿았다. 문쪽 책꽂이의 책이 ‘마대 속 책은 이러려니’ 하는 표지다. 무정한 책은 아들방이라고 예외없어 가구로써 반을 갈라 그 뒤쪽을 차지했다. 책은 공용공간인 단련실과 주방 옆까지 몰려나왔다. 이처럼 분산된 책들이 흐트러져 보이지 않음은 무슨 까닭인가. 숱한 공간전쟁을 치른 ‘역전의 용사’의 손길이 덧입혀졌기 때문이다. 애초 할당한 공간에서 어떻게든 완결하려는 투지가 그것. 물론 넘치기 전 완벽할 정도로 공간을 요리한 솜씨 때문에 그 느낌을 두배다.

“만권 정도 됩니다. 천주교 2천권, 기독교 4천권, 시집 1천권, 기타 문학, 실용서 등등 해서 3천권?” 1980년대 대학 다닐 때부터 시작한 책사냥 치곤 적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그런 낌새를 챘는지 송씨는 사모은 책이 주로 50년대 이전에 나온 것들이라 결코 적은 숫자가 아니라고 말했다. 전체적으로 썩음썩음한 느낌을 주는 것은 그 탓이다. 들인 시간과 금액이 책 속의 세월만큼이나 녹록치 않을 것이다.

다락방·가구 뒤쪽…책 숨바꼭질

월급은 100% 고스란히 집에 가져다 바치고 보너스와 부수입은 자신의 몫으로 삼았다. 골프, 등산, 운동 외에 잡기가 없는 터, 남들이 술, 노름, 여색에 들일 돈을 책에다 쏟았다. 아내는 처음에는 탐탁찮아하다가 그가 허튼 짓을 하지 않는다는 믿음이 쌓이면서 책탐을 묵인하게 되었다. 2004년 현대그룹 금융사에서 임원으로 퇴사하기까지 한해 800% 이상의 보너스를 20여년 동안 책과 맞바꾸었으니 대충 알 만하다. 송씨는 그 돈을 부동산에 투자했더라면 돈좀 벌었을 거라며 웃었다.

그의 책탐이 절제된 느낌을 주는 것은 깔끔한 정리 외에 수집분야를 특화하였기 때문. 주변에는 책을 좋아해 무절제하게 책을 사들이다 패가한 사람, 좋은 물건을 만나려는 욕심에 아예 장사꾼으로 돌아선 사람들이 있다. 그는 시세가 떨어졌다거나 남들이 중요하게 여긴다거나 해서 책을 사는 일을 자제했다. 대신 관심분야의 책은 값의 고하를 크게 따지지 않고 샀다. 놓쳐서 아쉬운 책은 기억이 없다. 그는 이를 두고 ‘중심잡기’라고 일렀다.

“내가 수집한 책들은 대략 이런 것들이오.” <서유견문>(유길준, ), (John w. Hodge, 서울 프레스, 1902) <법한자전>(샤를르 알레베크, 서울프레스, 1901), (Camille Imbault-huart, 파리 Imprimerie Nationale, 1888), (Griffis, 1885), (Adrien Launay, 파리외방선교회, 1895), <한국천주교회사>(달레) 1~3권, (Norbert Weber, 1915), (Maurice Courant, 1896) 1~3권, <성경직해>(Diaz, 최창현 옮김, 1892~1895) 1~9권, <성교감략>(Delaplace, 1883) 등 개화기에 나온 한국 또는 천주교 관련 자료들. 주로 인터넷으로 구입했다.

그가 가장 공들인 분야는 천주교 서적. 그 이면에는 집안 내력이 자리한다. 비교적 개방적인 강경에서 터잡은 송씨 집안은 외래종교를 받아들여 고조부 때부터 독실한 천주교 신자였다. 증조부 안드레아, 조부 아우구스티노, 아버지 베드로. 증조모 허수산나, 조모 이베로니카, 어머니 김글라라 등. 증조부 안드레아는 익산의 나바위 성소 신도회장을 지냈다. 할머니는 1984년 성인으로 시성된 103인 가운데 한 분인 이명서(베드로, 1821~1866)를 낸 집안이다. 병인박해(1886) 때 전주 부근 성지동에서 다른 신도들과 함께 체포된 이베드로는 전주 감영에서 배교를 거부한 채 고문과 혹형을 당하고 교우 5명과 함께 참수돼 마흔 다섯 생을 마쳤다. 할머니의 오빠와 조카가 신부였고 송씨의 동생과 고종사촌 동생 역시 서품을 받았으며 외사촌 동생은 가톨릭대학 학생이다. 송씨의 세례명은 바오로.

천주교 2천권·기독교 4천권 등 만권

어려서 초기 천주교 책이 많았다고 기억하는 송씨는 어느 때부턴가 책이 슬금슬금 없어졌다고 말했다. 귀한 책이 있음을 알고 천주교신자라면서 접근해 한권 두권 집어간 것. 그가 책의 가치를 알고 끝물에 챙긴 것은 <성경직해> 1~9권, <성교감략>(1883, 납활자), <요리강령>(1910, 한기근 옮김, 뮈텔 감준), <천주성교공과>(1862~1864, 목판본), <성찰기략>(1864, 필사본, 다블뤼 지음) <성상경>(1900, 납활자) 등 10여종. 그것은 씨앗이 되어 2천여종의 천주교 선교 초기서적과 자료로 불어났다. 그런 점에서 송씨의 책탐은 옛 기억의 회복 또는 소명의식과 동의어다. 1992년에는 100여권을 엄선해 한국교회사연구소에서 임대한 150여점의 사진·형구와 함께 청담성당에서 100주년 기념 전시회를 열었다. 그가 보유한 가장 오랜 천주교 관련 자료는 척사윤음. 사교에 미혹되지 말라는 임금님의 말씀이 담긴 이 책자는 1801, 1839, 1866, 1881년 네 차례 반포됐다. 그가 보여주는 기해년(1839) 및 신사년(1881) 윤음은 당시의 급박성과는 달리 정려한 금속활자체가 아름다웠다. 특히 뒷부분의 한글체는 슬플 정도로 미려해 탄성을 자아냈다.

1800년대 한글체 슬플 정도로 미려

“나도 까맣게 잊고 있었네” 하면서 두권짜리 <한국가톨릭대사전>(한국교회사연구소, 1985), 12권짜리 <한국가톨릭대사전>(한국교회사연구소, 2005), <한국성서백년사>(리진호, 대한기독교서회, 1996년) 등 공구서를 뒤져 각종 자료의 서지를 확인해 주었다. 무척 행복해 보였다. 공소를 순회하던 신부의 것으로 추정되는 한지메모, 1881년 신사윤음을 기초한 영의정 조인영의 필적을 펴보이는 손길은 무척 조심스러웠다.

천주교 관련 초기의 책은 거의 다 모았다는 그는 박물관이 꿈이다. 부지를 제공하겠다는 지자체의 제의도 있었고, 스스로 땅을 찾아도 보았지만 아직은 아니다라는 결론이다. 소중한 자료가 단지 눈요깃거리로 전락하는 것이 마뜩찮을 뿐더러 책이 홀대받는 요즘 세태로 보아 과연 보러오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싶다. “좋은 자료를 왜 독점하고 있냐”며 기증을 권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 역시 소중하게 관리해 줄 지 미덥잖다. 절두산 박물관에 첫 세례자인 이승훈이 과거 급제자 명단으로 오른 <사마방목>을 임대해주는 정도에 그치는 것도 그런 까닭이다. 한때 알바를 시켜 자료를 정리할까도 생각했지만 대학원에 진학해 스스로 연구를 하는 쪽을 고민하고 있다. 더 나이 들어 눈 어둡기 전에 어떻게든 자료화 해야겠는데…. 송씨는 초조해 보였다.

임종업 선임기자 blitz@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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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고수 찾아 십년 문필봉 ‘고수’ 되었네




[한겨레]
한국의 글쟁이들/③ 강호동양학 문필가 조용헌씨

“문필가를 알려면 그 서재를 봐야지요.”

하지만 문외한인 기자에게 그 차이가 쉽게 보일리야. 그저 ‘정신’과 ‘역사’에 관한 책들이 많다는 것만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그보다는 집안 곳곳 가구 대신 책장이 놓여있는 게 여늬 집들과 가장 달라보였다. 글쟁이 조용헌씨가 사는 전북 익산시 어양동의 복층식 아파트는 집안 곳곳이 서재였다. ‘진짜 서재’는 아랫층인 지하층 전체였는데, 마루 벽 전체가 책꽂이였다. 맞은 편에 놓인 커다란 화이트보드에는 유명 학자며 책이름 같은 명사들이 빽빽하게 적혀 있었다. 특히나 눈에 띄는 것은 마루 바닥 가운데 있는 둥그런 나무틀. “글쓰다가 이렇게 누워서 몸을 펴는 겁니다.” 인도의 요가 수행자들이 쓰는 것을 본떠 판다는 ‘기지개용 도구’였다. 그러고 보니 컴퓨터를 놓은 책상이며 가구들이 앉은뱅이다. 동양학 전문 저술가니 좌식생활을 하는 게 어찌보면 당연할텐데도 무척이나 새로워 보였다.

“난 저술가라고 안하고 문필가라고 해요. 풍수에 문필봉이란 게 있는데, 집터 앞에 삼각형으로 솟은 문필봉이 있는 걸 최고로 쳐요. 조지훈 종택이나 영랑 생가에 가보면 문필봉이 앞에 있지요. 옛말에 문필봉은 있어도 저술봉은 없으니 문필가라 하는게 맞지요.”(막상 조씨의 아파트 앞에는 문필봉이 없었다. 대신 양쪽에 어양중과 영등중 두 중학교를 거느리고 있어 어느 정도 문기(文氣)를 전해받는 듯했다.)

조씨는 문필가의 본질을 논어에 나오는 ‘학야녹재기중’(學也祿在其中), 곧 ‘공부를 하면 녹이 그 안에 있다’는 말을 약간 바꿔 ‘필야녹재기중’(筆也祿在其中)이라고 설명한다. 글 써서 먹고 산다는 이야기다. 이 문필가란 요즘 말로 ‘1인기업가’이며, ‘시대의 스토리텔러’란 게 그의 지론이다. 펜 하나 달랑 들고 홀로 이야기꾼으로 살아가는 것. 그런데 정작 그가 문필가로 살기로 결심한 것은 3년 전이었다고 한다. 1999년 첫 책을 낸 뒤로 한 참 지나서였다. “그 때는 직장에서 월급받았으니까. 책은 뭐 그냥 낸거지. (인생의) 승부는 안걸어요. 재미로 하는 거지.” 말투는 의뭉한듯 한데 거침이 없다. 출판가에는 조씨가 출판사 사장과 담당 편집자의 관상이며, 출판사 건물의 풍수를 보고 계약을 한다는 소문이 있어 물었는데 그건 아니란다. “서로의 아이덴티티를 따져요. ‘전통 플러스 동양적 팬터지’ 이게 내 아이덴티티인데 이게 출판사의 출판방향과 맞는지 보는 거죠.”

글감에 ‘전통+동양적 판타지’ 가미

조씨가 첫 책을 낸 지 이제 7년, 쓴 책은 아직 10권에 못미친다. 그런데도 조용헌씨의 책 제목에는 ‘조용헌의~’라는 브랜드가 붙는다. 짧은 기간이지만 그가 저술가로서 또렷하게 자기 존재를 각인시킨 덕분이다. 조씨는 자기가 글쓰는 장르를 직접 만들어냈다. 이름하야 ‘강호동양학’. 누구나 관심을 가지는 주제이면서도 정식 학문이나 제도권 지식으로는 여겨지지 않는 ‘동양학’을 들고 나온 것이다. 사주명리학이며 풍수, 그리고 도사들의 이야기 등 우리 생활속에서는 하나의 문화와 전통으로 살아 있지만 정색을 하고 책으로 다루지는 않았던 것들을 책으로 펴냈다. 그가 말하는 강호동양학은 동양문화의 열쇳말들인 문·사·철과 유·불·선, 그리고 천문·지리·인사라는 아홉가지를 구궁(九宮)으로 한다. 이 아홉가지 열쇠로 풀어내는 동양학, 정통 제도권 동양학을 둘러싼 더 넓은 의미의 동양학, 그게 강호동양학이다. 이 강호동양학이 저술가로써 조씨의 강점이자 차별화 요소요, 매력이다.

조씨는 불교민속학으로 박사학위를 딴 뒤 잠깐 직장생활도 했지만 샐러리맨 생활에 염증을 느끼고 혼자 전국을 누볐다고 한다. 10년 이상 전국 이름난 절집이며 명문가, 산속에 사는 아웃사이더들들 찾아다니며 보고 들은 것들이 그만의 컨텐츠다. 조씨는 이 글감들을 동양학 지식에 버무려 ‘전통’과 ‘동양적 팬터지’란 두가지를 들려주는 책을 쓰는 데 주력한다.

조씨는 2000년 <500년 내력의 명문가 이야기>(푸른역사)란 책으로 그 이름을 알린다. 전국 명문가들의 가훈과 교육철학, 그리고 한국적 ‘노블리스 오블리주’(높은 사회적 지위에 걸맞는 도덕적 책무)의 전통을 들여다본 책이었는데, 많은 주목을 받으면서 5만부 이상 팔려나갔다. 이후 <조용헌의 사주명리학>(2002·생각의나무), <방외지사>와 <고수기행> 등의 책을 해마다 펴내면서 저술가로 자리를 굳혔고, 종합일간지와 시사잡지 칼럼니스트로도 활발하게 글을 쓰고 있다. 연수입은 1억원 이상인데, 원고료:인세:강연료의 비율이 각각 4:2:4다.

저술가로서 조씨 최대의 무기는 역시 차별화한 ‘동양학’이란 소재다. 그가 주로 취재하는 대상은 “컨텐츠를 지닌 사람들”이다. 찾기도 힘들고 말 트기도 힘들지만 오래하니 요령이 생겼다고 한다. “이런 양반들이 꼭 점조직 같아서 오대산 사람을 만나면 지리산 사람을 소개해주고 지리산에 가면 계룡산 사람을 알려줘요. 어려운 것은 명문가 후손들처럼 자존심 센 분들 인터뷰하는 거지요. 처음 만나면 쉽게 말씀을 안해요. 그럴 때는 풍수나 보학, 한시 같은 것들로 이야기 한 자락 슬쩍 운을 떼 관심을 끌어서 말문을 틔워야 해요.”

조씨는 “책을 펴내면서 우리나라 사람들, 특히 중장년층이나 샐러리맨들이 느끼게 되는 공허함을 달래주는 글을 썼을 때 독자들이 남다른 반응을 보인다는 점을 알게 됐다”고 한다. 그래서 펴낸 책들이 평범한 삶의 규칙을 벗어나 독특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인 <방외지사>나 독특한 자기 분야를 일군 사람들을 소개하는 <고수기행>이다. 무엇보다도 이야기꾼인 자신 역시 이런 사람들과 통하는 탓도 크다. “이야기꾼은 삐딱해야해. 평범한 사람들 만나면 상상력이 줄어요. 문필업은 반항적 기질이 있어야 해요.”

이야기꾼으로서의 ‘글발’도 조씨의 강점으로 꼽힌다. 조씨의 글은 단문이 특징이다. ‘한 문장에 하나의 생각’(one idea one sentence), ‘문어와 구어의 일치’가 그의 글쓰기 철학이다. 좋아하는 글쟁이는 언론인 박권상, 그리고 외국작가 오스카 와일드다. 오스카 와일드는 문장이 짧고 관계대명사가 없어 읽으면서 헷갈리지 않기 때문에 모델로 삼았다고 한다.

쓸것 많은데 몸 안 좋아 ‘운기조식’

조씨의 책에 대한 독자들의 평가는 비교적 크게 엇갈리는 편이다. 무엇보다도 ‘재미’가 있으며, 막연하게만 알던 동양학에 대해 명쾌하게 정리해준다는 것이 긍정적 평가의 축을 이룬다. 반면 지나치게 주관적이어서 어디까지가 객관이고 어디까지가 주관인지 모르겠다는 비판도 있다. 조씨 자신은 자신이 학자라기보다는 ‘이야기꾼’이란 점을 강조한다. 학문적으로는 공인받지 못했어도 구전된 부분 등을 다루는 것은 작가적 허용 범위 안에 있다는 것이다. ‘그 시대의 이야기’로 보아달란 주문이다.

조씨는 앞으로 불교의 명찰들에 대한 이야기를 책으로 쓸 계획이다. 명문가 이야기의 후속편도 준비중이다. 쓸 것은 많은 데 몸이 다소 안좋아 현재는 운기조식 중이라고 한다. “주화입마가 풀리면 글쓰는 속도가 되살아날 것”이라고 조씨는 웃었다.

익산/글 구본준 기자 bonbon@hani.co.kr, 사진 임종진 기자 stepano@hani.co.kr



조용헌이 말하는 내 책은…

500년 내력의 명문가 이야기

푸른역사 펴냄

‘유교+풍수’. 노블리스 오블리주란 화두를 던진 것이 그렇게 큰 관심을 모을 줄 몰랐다. 나온 지 4년이 지나가는데도 아직도 이 책과 관련해 문의와 강의 요청이 가장 많다.







조용헌의 사주명리학 이야기

생각의나무 펴냄

‘도교+사주’. 내가 도사를 만난 보고서다. 우리 신화와 역사, 예언 같은 것들을 녹여넣었다. 내 책 가운데 가장 재미있다는 평을 들었다. 도사들의 세계, 그리고 사주명리학이란 분야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가르쳐주는 책.







조용헌의 사찰기행

‘불교+무속’. 우리 사찰의 영험담과 역사, 사찰 풍수와 고승들의 이야기다. 데뷔 초기작인데 내가 생각하는 강호동양학의 구궁들이 모두 조금씩 들어있어 앞으로 내 저술방향의 단초들을 보여준다.







방외지사

정신세계원 펴냄

‘행복한 아웃사이더 열전’. 명문대를 나오고, 직장 들어가고, 승진하고, 그리고 차 한대 사고 아파트 사는 규격화한 삶을 좇는데, 이렇게 살지 않아도 행복하게 살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자기가 가면 길이지 꼭 한쪽으로만 가야 하나?







고수기행

랜덤하우스중앙 펴냄

어떻게 살아야 삶의 고수가 되느냐늘 말하고자 했다. 난 성공이란 게 고수가 되는 거라고 본다. 자기 분야에서 고수가 되는 것. 이들을 삶의 모델로 삼긴 힘들겠지만 대리만족할만한 참고자료로 보여주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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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 채집이 공부의 반입니다”




[한겨레]
한국의 글쟁이들/⑧ 민족문화 저술가 주강현씨

창조는 자료에서 나온다. 자료 자체는 과거의 흔적일 뿐이지만, 자료가 쌓이고 엮여 발효가 되면 새로운 생각과 새로운 글이 익는다. 수없이 자료를 모으고, 그 속에 담긴 공통의 씨앗을 골라내 새 싹을 틔우는 사람, 자료들을 잇는 생각의 고리를 찾는 사람. 저술가는 그런 사람이다.

민속학자 주강현(51)씨는 그런 점에서 가장 ‘아키비스트(기록관리전문가)’적인 저술가라고 할 수 있다. 주씨는 자신이 관심갖는 분야에 관한 한 모을 수 있는 모든 것을 모으고 또 모은다. 자료란 쌓이면서 생명력을 갖는 법. 당시에 한번 쓰고 버려지던 것들을 모아 새로운 의미를 부여할 때 자료는 진정 자료가 된다. 주씨는 그렇게 자료에서 책을 뽑아내는 저술가다. 그 자신도 스스로 아키비스트란 인식이 강하다.

지난 1995년 전통 미륵사상을 다룬 책 <마을로 간 미륵>으로 주목받기 시작한 주씨는 그 해 <한겨레>에 ‘우리문화의 수수께끼’란 시리즈를 1년 동안 연재하면서 이름을 알린다. 이듬해 이 시리즈를 묶어 나온 같은 이름 책은 단숨에 베스트셀러가 된다. 그리고 10년이 넘도록 꾸준히 팔리며 판매부수 30만부를 넘겼다. 이후 주씨는 <조기에 대한 명상>(1998) <왼손과 오른손>(2002) <개고기와 문화제국주의>(2002) 등 전통문화와 문화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담은 저작들을 이어 펴냈다. 2003, 4년 동안 잠시 책이 뜸하나 싶더니 지난해 해양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책 <제국의 바다 식민의 바다>를, 올해에는 <독살><두레><관해기1·2·3> 등 무려 5권의 책을 펴내며 예전보다 더 왕성하게 저술활동을 펼지고 있다.

주씨의 이런 왕성한 생산력이 바로 자료에서 나온다. “생각해보세요, 신문에 전면으로 1년을 연재하려면 그만큼 준비가 되어 있지 못하면 불가능한거죠. 사람들은 제가 <우리문화의 수수께끼>로 갑자기 등장했다고 생각하는데 그만큼 오래 자료를 모으고 글을 써왔기에 가능했던 겁니다. 최근 다시 활발하게 책을 내는 것 보고 일부에서는 ‘다작’이라고 말하는 것도 언제나 학술분야 책을 쓰고 자료를 모으는 기본작업을 물밑에서 계속 해온 것을 모르고 하는 말입니다.” 주씨의 출세작은 1996년 <우리문화의 수수께끼>지만, 첫 책은 1987년 <민족과 굿>(공저)로 거슬러 올라간다. <우리문화의 수수께끼> 이전에 쓴 책만 10여권으로 학술서와 대중서를 꾸준히 내왔다. 그리고 <우리문화~> 이후로는 거의 해마다 3~4권을 써 저서가 40여권을 넘는다.

실제 주씨의 연구실인 일산 ‘정발학연’은 자료실 수준을 넘어 개인이 만들어낸 도서관에 가깝다. 책 2만여권, 녹음테이프 2000여개, 사진 20만장이 한치의 틈을 용납하지 않고 빼곡하게 공간을 채우고 있다. 이 곳에는 집필용 컴퓨터말고 사진용 컴퓨터가 따로 있다. 혹시 바이러스 때문에 자료가 날아갈 수 있어 인터넷을 연결하지 않고 사진만 보관한다.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제본기. 주씨는 인터넷에서 자료를 보면 당장 필요가 없어도 그 자리에서 출력한다. “나중에 언제 다시 검색해서 찾아보겠습니까. 봐서 쓸만하다 싶으면 그 때 뽑는 게 더 시간을 절약해줍니다.” 이런 출력지들, 각종 다른 자료를 항목별로, 또는 시기별로 모아서 제본한다. 메모 또한 빼놓을 수 없다. 어떤 것이든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반드시 그 자리에서 종이에 적고, 집으로 돌아와 컴퓨터에 입력하고, 원본은 따로 메모함에 보관한다.

출장이나 여행길에는 반드시 빈 바인더나 클리어파일을 가지고 간다. 현지에서 거저 구할 수 있는 모든 서류-관광안내서, 교통시간표, 홍보용 전단, 어촌계 서류 따위-를 모조리 집어넣는다. 여기에 여행에서 적은 메모까지 넣어 여행에서 돌아오면 자료철 1권이 새로 생긴다.

올해만 5권…저서 무려 40여권

주씨의 이런 자료정리는 출판계에서도 정평이 나 있다. 주씨 책을 다뤄본 편집자들이 공통적으로 꼽는 주씨의 강점은 3가지. 어떤 것을 책으로 써야할지 아는 기획력, 답사와 취재 열정, 그리고 방대한 자료다. 특히 자료에서 사진은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 책에 들어가는 시각물을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저술가는 찾아보기 힘들다. “전 사진을 단순하게 책에 집어넣는 컷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사진 자체가 중요한 자료라는 점을 인식해서 오래전부터 중시해왔습니다. 민속학의 특성상 그 순간 찍어놓지 않으면 사라지거든요. 이미 제가 찍은 뒤 사라진 것들이 허다합니다.”

주씨는 “자료가 공부의 반”이라고 말한다. 기본자료를 찾고 정리하고 모으는 과정 자체가 연구와 저술의 상당부분을 차지하며, 이런 과정을 거쳐야만 일반자료가 진정 자신만의 자료로 변한다는 게 주씨의 지론이다. 또한 자료는 ‘아이디어의 소산’이라고 강조한다. 연구하고 쓸 거리가 많다보니 모을 것도 많아졌다는 이야기다. 주씨가 모으고 있는 자료에는 80년대 민중집회·연희 등의 자료도 있다. 당시 ‘대동제’ 행사 진행 및 준비자료들, 팸플릿, 심지어 기획회의록 등을 보관중이다. 앞으로 중요한 사료가 될 것이란 생각에 그때부터 모아놓았던 것들이다. 이런 자료의 힘은 주씨 저술의 핵심이자 강점이지만, 반대로 문체나 구성면에서는 약점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자료를 풍성하게 다루다보니 내용이 장황해지고 중언부언하는 느낌을 주며, 산만하다는 평도 듣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 출판시장에서 주씨의 자리는 확고해보인다. 민속문화란 분야에서 대중들과 직접 소통하고 있는 글쟁이는 주씨가 유일하다. 이는 주씨 개인에겐 아픔을 겪은 대가이기도 하다. 주씨는 80년대 초반부터 전국 각지를 돌아다니며 농촌 문화와 해양문화를 취재하고 주민을 인터뷰해 녹음하고 사진을 찍어왔다. 그렇게 10년을 보낸 뒤 저술가로 이름을 알렸고 책으로는 성공했지만, 교수가 되는 데에는 실패했다. 이후 주씨는 “교수들이 해내지 못하는 일을 한다”는 각오로 저술활동에 더욱 매달려왔고, 자신이 교수들보다 민속학을 알리는 데 더 기여한다는 자부심이 가득하다.

‘바다’ 화두로 세계 항구 답사중

최근 몇년새 주씨는 ‘바다’를 가장 중요한 화두로 삼고 있다. 조기라는 물고기 한 마리로 서해안을 조망한 책 <조기에 관한 명상>으로 시작한 바다 연구는 <제국의 바다 식민의 바다>를 거쳐 올해 나온 <관해기>로 기본틀을 갖췄다. ‘바다에 대한 온갖 다양한 이야기’를 다룬 <관해기>는 앞으로 주씨가 연구하고 글 쓸 것들의 단초들이 담겨 있는 책이다.

주씨가 바다를 자신의 분야로 미리 잡은 것은 오랜 관심에서 나온 것인 동시에 아직 아무도 다루지 않은 ‘블루오션’이기 때문이기도 했다. 요즘 주씨가 매달리는 일은 아시아 주요 나라의 항구 답사를 통해 제국주의사와 해양교류사를 들여다보는 것이다. “돈이 너무 많이 든다”고 푸념하면서도 주씨는 매달 어김없이 해외 현장을 찾아간다. 조만간 그 결과가 또 다른 책으로 선보일 것이다.

글 구본준 기자 bonbon@hani.co.kr, 사진 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주강현이 말하는 내 책은…

우리문화의 수수께끼1·2

한겨레출판(1996~1997)

벌써 10년! 지금도 찾아주고 있으니 고마울 뿐이다. ‘금줄 없이 태어난 세대· 도깨비없이 태어난 세대를 위한 우리문화길잡이’란 설명처럼, 중고등학생부터 기성세대까지 폭넓은 세대가 읽어주는 것같다. 이는 역으로 우리문화를 전문적이면서도 쉽게 쓴 책들이 부족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왼손과 오른손

시공사(2002)

‘좌우상징, 억압과 금기의 문화사’란 부제를 붙여보았다. 왼손잡이 이야기다. 신화학·건축학·도상학·미술사 등 학제연구를 진행하면서 책도 많이 사들이고 공부도 많이 했다. 프랑스 사회학자 브르디외의 표현대로 ‘왼손의 연대’를 위해 세상에 내보냈다.





제국의 바다 식민의 바다

웅진지식하우스(2005)

육지사와 해양사, 중심과 변방을 뒤집는 생각의 반란을 꿈꾸었다. 제국과 식민의 바다는 아직 현재진행중이기 때문에 대항해시대 우리 나름의 안전한 항해법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을까.







두레

들녘(2006)

자료들이 숙성되고 발효가 완성되기 까지 오랜 세월이 걸렸다. 공동체문화의 표징이기도 한 두레는 완벽히 사라졌다. 그러나 공동체를 지향하는 인류의 꿈은 유효기간이 없다. 사라지는 것들에 관한 최후의 기록자를 자처하면서 써내려갔다.





관해기1~3

웅진지식하우스(2006)

바다의 일상과 역사를 600여장의 사진을 곁들여 남·서·동쪽바다로 재구성하였다. 바다가 ‘바다이야기’식의 도박판 정도로 희화하되는 시점에서 다시 한번 우리 인문학이 발견해야할 새로운 영토를 거닐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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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사람 마음 요모조모 알리는 통역꾼




[한겨레] 한국의 글쟁이들/⑦ 전통미술 전문 저술가 허균씨

21세기 대한민국 독서가들이 책으로 만나게 되는 ‘허균’은 두 명이다. 한 명은 누구나 아는 그 허균, 바로 <홍길동전>을 쓴 조선시대 허균이다. 또 한 명의 허균을 이미 알고 있다면, 당신은 전통문화와 미술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다. 전통미술 전문 저술가 허균(59·한국민예미술연구소장)씨가 두번째 허균이다.

전통미술 저술가 허균이란 이름은 아직 일반 독자들에게까지 널리 알려진 편은 아니다. 하지만 적어도 민화나 고궁, 우리 옛그림, 다양한 전통문화의 상징 등 다양한 우리 전통미술에 관심을 갖고 이 분야 책을 읽어보려 한다면 허씨의 책을 피할 수는 없다. 현재 우리 출판계에서 대중들을 위한 알기 쉬운 전통미술책을 쓰는 가장 대표적인 저술가가 바로 허씨다. 서양미술에 대한 책을 쓰는 국내 저술가는 여럿이어도 우리 전통미술 책을 쓰는 저술가는 찾아보기 힘들다. 고 오주석씨가 세상을 떠난 뒤로 현재 전통미술 분야쪽에서 대중들과 같이 호흡하는 전문가는 허씨가 거의 유일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허씨의 책들은 전통미술이란 주제의 성격상 판매부수가 그리 많지는 않은 편이다. 하지만 허씨의 책들은 나온지 몇년 이상 지난 것들도 꾸준히 생명력을 이어가며 고르게 인기를 누리고 있다. “전통미술을 이해하는 계기를 마련”해주며, 또한 우리 것에 대한 무지를 깨우쳐주는 동시에 한단계 더 나아가 “옛 사람들의 마음을 읽게 해준다”는 것이 독자들이 꼽는 허씨 책의 매력이다.

재미있는 것은 허씨 자신은 자신이 ‘저술가’로서 ‘책’이란 것에 ‘모든 것을 거는’ 이가 아니란 점이다. 책이란 것은 그가 고른 수단으로 책 자체가 목적은 아니란 설명이다. “책 쓰는 것은 내 생각, 그리고 일반인들이 알아야할 것들을 전달하기 위한 방법이지 책 자체를 저술하는게 목적은 아니”라고 허씨는 말한다. ‘하다 보니’ 책을 쓰게 된 것이며, 수입 측면에서도 “책으로는 별 기대를 걸지 않”는다고 한다. “8, 9쇄를 찍고 1만권이 넘어가는 책이라고 해도 실제로는 수입이 있는지 모를 정도에요.”

허씨가 책을 쓰는 것은 대중들에게 전문가들만 알고 넘어가기 쉬운 전통미술 분야의 재미와 진면목을 알려려는 것이 더 큰 목적이다. 인문교양서 분야에서는 책이 1만권만 팔려도 베스트셀러로 불리지만 정작 1만원짜리 책이 1만부 팔렸을 때 지은이가 받은 인세는 1000만원에 불과하다. 오로지 돈을 벌겠다고 이 분야에서 책을 쓴다는 것은 경제적 관점에서는 거의 무의미할 정도다.

비록 실정은 이렇다해도, 저술가로서 허씨는 분명 ‘프로 저술가’라는 평을 듣는다. 허씨의 책들은 허씨 자신이 기획한 <한국의 정원…> 등도 있지만 출판사쪽의 요청을 받아들여 쓴 것들이 훨씬 더 많다. 출판사의 처지에서는 출판사의 품위와 이미지를 세우는데 전통미술 책만한 것이 없고, 이 분야 필자를 섭외한다면 당연 허씨가 최우선 섭외 대상이다. 전통미술을 대중들의 눈높이에 맞춰 편안하게 읽을 수 있게 글을 쓸 수 있는 필자가 허씨 말고는 찾아보기 힘들다는 점도 빼놓을 수 없다.

출판사쪽 필자 섭외 0순위

허씨가 책을 내기 시작한 것은 1997년부터지만 진정 홀로 글쟁이로 살기 시작한 것은 꼭 20년 동안 몸담았던 한국정신문화연구원(정문연)을 나온 2002년부터다. 허씨가 저술가가 된 모든 철학과 밑천이 평생 직장이었던 정문연 생활 20년, 그리고 그 세월을 쏟아부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편찬작업에서 나온다. 잠시 고등학교 미술교사로 교편을 잡다가 학교생활이 싫어 대학원에서 미술사를 전공한 뒤 허씨는 정문연에 들어갔고, 그 뒤 정문연 최대의 사업이었던 이 백과사전을 만드는데 책임편수연구원으로 참여해 청춘을 바쳤다. 그리고 이 작업을 통해 전통미술이란 한국인들에게 어떤 것인가, 그리고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가, 전문가로서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가 등에 대한 고민과 해답을 끊임없이 마음속에서 주고받았다. ‘전문가의 편협함’ 또는 ‘전문가들이 저지르기 쉬운 오류’도 평생의 고민거리였다.

“전공에만 너무 천착하는 것이 문제라는 걸 실감했어요. 백과사전에 들어갈 항목을 전문가들로부터 글을 받으면 자기 분야의 관점과 관심사로만 써오는 거에요. 미술사쪽은 특히 더 그래서 너무 양식사에만 치중하고, 바로 인근 분야조차도 아우르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문화현상이란 것은 성립요소가 굉장히 다양한데, 주변 문화요소들을 간과하거나 무시하는거죠. 백과사전 작업을 하면서 사물을 여러 시각으로 봐야 한다는 생각이 더 절실해졌어요.”

최대한 다각적으로 문화현상을 바라보려는 자세는 이후 그대로 그의 저술 원칙이 된다. 2002년 정문연을 떠난 뒤 허씨는 이 때 느꼈던 문제의식을 저술작업에 반영하기 시작했다. 전공은 회회사였지만 점점 관심범위를 넓혀갔고, 이후 다양한 소재를 다루며 우리 전통미술 전체를 아우르는 이야기를 들려주는 책들을 펴내기 시작했다. 대표작인 <한국의 정원…>은 이같은 허씨의 강점과 차별성을 가장 잘 보여주는 책이다. 허씨가 이 책을 낸 뒤 전국 여러대학 조경학과에서 잇따라 특강요청이 들어왔다고 한다. 그가 이 책을 쓰기 전에는 우리 전통 정원에 담긴 철학과 미의식을 정리한 책을 쓴 이가 조경학계에도 없었다는 이야기다.

전문가들이 자기 분야에만 빠지는 함정을 벗어나 대중들의 관점에서 전통문화를 접하게 하는 새로운 방식을 시도한 것도 허씨가 이뤄낸 성과라고 평할만하다. 특히 우리 전통미술을 주요 ‘상징’의 코드로 들려준 것은 그가 처음이다. 너무나 당연한 접근방식일 수 있지만 이를 독자에 맞춰 책으로 처음 써낸 것은 ‘콜럼버스의 달걀’같은 작업이었다. 1999년 펴낸 <전통미술의 소재와 상징>이 전통문화의 다양한 상징과 그 의미에 대한 필독서가 되고, 이후 대중서임에도 이분야 참고문헌으로 자주 인용되는 점은 그의 저널리즘적 감각을 잘 보여준다.

전통 이해의 단초 ‘문양’ 쓸 예정

앞으로 그가 다루고자 하는 주제는 ‘문양’이다. 우선 우리 문양부터 시작해 외국의 문양까지 아울러 포괄적으로 들여다볼 작정이다. “전 문양이란 게 꼭 난자 같아요. 그 단세포가 분할해 사람을 만들잖아요. 문양이란게 꼭 그래요. 전통을 이해하는데에는 외형보다 그 배후와 의미가 더 중요한데, 문화현상을 다방면으로, 포괄적으로 이해하는 데 꼭 필요한 것이 문양입니다.” 문양이 중요한 것은 우리가 생활속에서 흔히 보고 접하면서도 그 진면목은 잘 모르기 때문이다. “가령 태극문양 같은 거에요. 너무나 친숙한데도 그 뜻을 제대로 아는 사람은 많지 않잖아요?” 문득 허를 찔른 듯했다. 앞으로 나올 허씨의 책이 그런 무지를 어느 정도 메워 줄 것 같다.

글 구본준 기자 bonbon@hani.co.kr, 사진 이정용 기자 lee312@hani.co.kr



허균이 말하는 내 책은…

나는 오늘 옛 그림을 보았다(1997)

북폴리오 펴냄

<뜻으로 풀어본 우리 옛그림>의 개정판. 일반인들이 잘 아는 그림들인데 누가 그렸는지는 알지만 진면목을 모르는 것들로 골랐어요. 산수, 인물, 풍속, 사군자, 민화 다섯 분야로 나눠 우리 옛그림에 담긴 한국적 정서를 심도 있게 다뤄보고자 한 책입니다.




전통미술의 소재와 상징(1999·절판)

교보문고 펴냄

소위 상징과 의미에 대한 필독서처럼 되어 있어요. 우리 전통 미술을 지금까지는 주로 양식사로 보아왔는데 이렇게 상징을 통해서도 볼 수 있다는 점, 이렇게 보는 것이 더 중요할 수도 있다는 것을 알려주면서 전통미술에 대한 관심을 키워주자고 했어요.




사찰장식 그 빛나는 상징의 세계(2000)

돌베개 펴냄

사찰은 ‘불교미술의 박물관’이 아니라 수행의 도량입니다. 절에 있는 다양한 유물들은 수행의 봉사용이지 전시작품은 아니거든요. 그래서 그 하나하나 종교적 해석이 필요하고, 그래서 외형보다는 그 교리적 배경이나 예법과의 관련성을 아는게 필요해 이해를 돕고자 썼습니다.




한국의 정원-선비가 거닐던 세계(2002)

다른세상 펴냄

선조들의 생활철학이나 미의식을 알아보는데 정원처럼 좋은 대상이 없어요. 생활공간이었기 때문에 손때가 묻어있고, 우리가 직접 현장에서 미의식을 찾아볼 수도 있습니다. 전통 정원 곳곳에 들어있는 상징들의 의미를 찾아내소 이해하도록 도우면서 전통 정원 28곳을 감상할 수 있도록 했어요.




허균의 우리 민화 읽기(2006)

북폴리오 펴냄

일반적으로 민화란게 서민들이 즐겨 그렸던 서민전용이라고 생각하는 경향 강한데, 그게 아니라는 게 이 책의 주안점이에요. 문화란 것은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 없습니다. 배경이 있기 마련이죠. 민화의 배경은 고급 문화의 저변확대였어요. 왕부터 촌로까지 모든 사람이 다 즐겼던 것이 민화라는 것이란 알려 주고 싶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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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인도 학자도 무관심하니 ‘SF 왕국’은 제가 차지했죠


[한겨레] 한국의 책쟁이들/⑧ SF마니아 박상준씨

인터넷으로 ‘박상준’을 검색하면 여러 명의 인물이 떠오른다. 책쟁이로 칠 수 있는 박상준 역시 세 사람이나 된다. 출판사 사장, 출판 기획자, 에스에프 매니아. 이번 주인공은 에스에프 마니아 박상준이다. 정작 그는 한겨레신문사에서 넘어지면 코 닿을 데에 둥지를 틀고 있었다. 이마에 아무런 표식도 없이 세작처럼.

최근 그는 ‘에스에프아카이브’를 만들어 그 대표가 되었다. 물론 원래의 출판기획·번역가라는 타이틀 역시 가지고 있다. 사정이 있다. 과학문화재단 등 각종 과학관련 단체에서 무슨 일을 추진하고자 할 때 카운터파트가 없어 고민스러워했다는 것. 번듯함을 요구하는 그들의 관료성 외에 최소한의 수준과 체계를 갖춘 ‘무엇’이 없었다는 얘기다.

에스에프아카이브의 취합 대상은 한국어로 된 모든 에스에프 및 관련 자료다. 지금까지 책, 만화, 비디오테이프, 포스터, 팸플릿 등 1만여점, 간접자료를 합치면 2만점이 넘는다. 15년 이상 국내는 물론 해외의 헌책방을 뒤져 국내 최대의 독보적인 자료를 갖췄다. 지금도 수시로 인터넷을 통해 양과 질을 높이고 있다. 개인을 넘어 공공재산으로 활용하고자 목록작업을 눈앞에 두고 있다.

창문 차단 외계인 침입 막으려?

슈퍼건물 4층인 그의 사무실 겸 아카이브는 17평쯤. 정리 중인 자료가 쌓인 거실 양쪽으로 2개의 방에 자료가 꽉 차 있고 그 중 넓은 방 한쪽에 빈 자리를 비비고 박씨가 틀어앉았다. 공습에 대비한 것일까, 불빛이 새지 않도록 창문을 꼼꼼 여몄다. 화성인이 침공한다면 지구인 가운데 우주와 미래의 비밀을 가장 부지런히 염탐하는 그가 첫번째 제거대상이 되지 않겠는가.

나이가 지긋하리라는 예상과는 달리 박씨는 무척 젊었다. 67년생, 우리 나이로 마흔이다. 이 역시 알고보면 그럴 만한 사정이 있다.

“에스에프 하면 애들이나 보는 유치한 것, 또는 과학을 제대로 알아야 읽을 수 있는 어려운 것으로 잘못 알고 있어요. 기성 문인들은 거들떠보지 않았고 학자들 역시 연구나 비평작업을 하지 않았어요. 그러다 보니 저한테까지 행운의 차례가 온 거죠.”

그가 초점을 두는 것은 70년대 이전에 번역 또는 창작된 에스에프. 존재를 모르는, 또는 건사하지 않으면 잊혀져 없어질 자료들이다. <금성탐험대>(한낙원, 삼지사, 1957 초판, 1969 10쇄), <우주항로>(한낙원, 계몽사, 1981), <해저왕국>(한낙원, 삼성당, 1988 재판), <2064년, 우주소년 삼총사>(안동민, 동민문화사, 1972). 샘플로 들고나온 어린이용 책들은 옛 활판인쇄, 싸구려 장정에 먼지가 묻어났다. <2064, 우주소년 삼총사>의 삽화는 고우영이 그렸다.

아나운서를 하다 52년부터 어린이용 과학소설을 쓴 한낙원(1924~ )의 책들은 과거형. 더 이상 새로 쓰이지도, 서점에서 판매되지도 않는다. 안동민은 문단의 변방에 머물렀고 그의 아들은 <임페리얼코리아>라는 과학소설을 썼다. 박씨의 귀띔이다.

대학생 때부터 출입한 헌책방은 그의 공부방이자 놀이터. 에스에프를 읽으면서 자란 그의 눈에 우연히 영어 원서가 눈에 띄었다. 어려서 본 것은 얇고 짧은데 원서는 상당히 길었다. 띄는 대로 집어다 짧은 것부터 읽기 시작했다. 그러다 잭 런던의 <강철군화>나 조지 오웰의 <1984>가 에스에프로도 분류됨을 알게 되었다. ‘에스에프가 과학공상 차원이 아니라 사회적 발언을 담을 수 있는 미디어구나.’ 그 무렵 깨친 생각이다. 91년부터는 기획번역을 했다. <멋진 신세계>, <라마와의 랑데부>, <세계 에스에프 걸작선> 등. 그걸로 밥벌어 먹겠냐는 부모의 염려로 몰래 내야 했다. 그 중 <세계 에스에프 걸작선>는 꽤 팔렸다. 당시 동유럽 붕괴 이후 방향전환을 모색하던 사회과학 출판사를 설득해 에스에프를 잇따라 냈다. 아시모프의 파운데이션 시리즈 외엔 별 재미를 못 본 것으로 안다. 자신한테는 진실을 전하는 미디어였지만 대부분 출판사한테는 돈벌이 대상이었을 뿐. 장정, 번역 모두 유치해 오래 가지 못했다. “얼떨결에 전문가 소리를 듣습니다. 절대평가 하자면 김상훈, 홍인기, 두 사람이 훨씬 윗단계죠.” 에스에프를 위한 사무실은 97년부터 냈고, 에스에프 도입사를 주제로 석사 논문을 준비하고 있다.

‘세계SF걸작선’ 출판사 설득 펴내

“우리나라의 에스에프는 당연히 번역으로 시작됐어요.”

1907년 재일유학생 잡지인 <태극학보>에 연재된 <해저여행기담>이 최초. 원작은 쥘 베른의 <해저 2만리>. ‘인도 왕녀의 5억 프랑’를 번안한 <철세계>(이해조, 1908), ‘기구를 타고 5주간’이 원작인 <비행선>(김교제, 1912), ‘달나라 탐험’ 원작의 <월세계 여행>(신일용, 1924) 등 쥘 베른이 잇따랐다.

카렐 차펙의 를 번역한 <인조노동자>(박영희, 1925), 스티븐슨의 <지킬박사와 하이드>가 원작인 <일신양인기>(게일·이원모, 1926)는 특기할 만하다.

최초의 창작 에스에프는 김동인의 ‘K박사의 연구’(1929년 <신소설> 12월호)를 친다. 똥을 원료로 개발한 대체식량을 둘러싼 이야기다. ‘천공의 용소년’(허일문, 1930), ‘라듸움’(김자혜, 1933), ‘여신’(방인근, 1939) 등이 뒤를 이었다. 해방 뒤는 먹고살기 힘들어 에스에프는 전무하다시피하다. <완전사회>(문윤성, 1965)가 섬처럼 도들하다. 복거일의 <비명을 찾아서>(1987), <역사 속의 나그네>(1991), <파란 달 아래>(1992), 듀나의 <태평양 횡단특급>(2002)이 근작들. 문윤성과 복거일 사이 22년 동안은 주목할 만한 작품이 없다. 다만 1968년 ‘한국SF작가클럽’이 결성돼 그 회원들의 작품을 1970년대 중반 10권으로 묶은 적이 있으나 모두 청소년용이고, 일부는 번안이다. 반면 북한은 과학소설 평론서인 <과학환상문학창작>(황정상, 1993)이 나올 정도로 남쪽보다 작품활동이 활발했다는 평가다. 특기할 것은 2004년부터 과학기술창작문예 공모전이 생겨 신인들의 등용문 구실을 하고 있다. 올해로 세번째. 역시 훌륭한 작품이 대거 등장하지 않을까 기대한다. 하지만 등단 이후 인터넷 외에 뾰족한 발표지면이 없어 안타깝다. 박씨는 “이제는 월간 또는 계간 잡지가 나올 시점”이라고 말했다.

그는 아직도 구하지 못한 자료들이 숱하다. 예컨대 아데네사에서 낸 ‘소년소녀세계과학모험전집’. 그 가운데 그가 보유한 것은 1959년에 나온 <공중열차 지구호>(압플톤 지음, 최지수 옮김) 낱권. 책 뒤에 전집 8권이 소개되어 있고 출간예정인 19편의 제목이 들었다. 이런 것들을 손에 넣을 수 있다면 자신이 갖고 있는 다른 희귀자료를 내놓을 생각이다. 그는 1953년에 나온 <타임> 잡지뭉치를 들고 나왔다. 거기에는 한국전 대차대조표가 실린 6월29일치도 포함돼 있다.

“에스에프 모른다고 자학하지 마세요.” 그는 한 도서평론가도 <당신 인생의 이야기>(행복한책읽기)를 읽고 비로소 눈을 떴다고 말하더라고 했다. 이제부터라도 반드시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는 무척 설득적이다. 20세기는 특별한 시대라는 거다.

20세기 100년동안 과학기술은 엄청나게 발전했다. 1900년 비행기 없던 때 태어난 이는 이른 살 무렵 달나라에 착륙한 인간을 보았다! 과학기술 변화가 일상적인 시대다. 토플러는 “고대 로마시대나 중세 장원경제를 가르치면서 미래사회학이나, 변화양상은 왜 가르치지 않는가” 역설했다. 21세기에는 에스에프 정체성이 흔들릴 것이다. 사회상을 반영하는 본격소설이 곧 에스에프가 될 터이기 때문이다. 일본만 해도 교과서에 에스에프가 들어있다는데….

‘두개골의 서’ ‘일본 침몰’ 강추

“과학발전에 관해서는 물론 그로 인한 환경오염, 자원고갈 등 시야를 넓혀야 합니다. 에스에프는 넓은 시야를 제공합니다.” 그는 <당신 인생의 이야기> 외에 <두개골의 서>(북스피어), <일본침몰>(범우사)을 읽어볼 것을 권했다. 에스에프에 대한 인상이 확 바뀔 것이라면서. “그런데 말예요. <일본침몰>이 1970년대에 이미 3종 이상 번역되었어요.” 영화덕에 다시 떴다면서 <일본열도 침몰하다>(안동민 옮김, 휘문출판사, 1973)를 보여주었다.

박씨는 에스에프 도입사가 완성되면 과학문화사 기술에 도전할 생각이다. <과학조선> <학생과학> 등 지나간 잡지는 물론 요즘 나오는 <과학동아>를 부지런히 모으고 있다. 할 일은 많은데 문제는 시간과 돈이다. 그런데 지구 방위대 유지비는 어디서 나올까?

임종업 선임기자 blitz@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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