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Common > 공감 2% 로망 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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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자의 로망 백서
박사.이명석 지음 / 북하우스 / 2005년 7월
평점 :
절판
유럽의 어느 한적한 시골의 햇살이 따스하게 내 눈가를 감싸자, 나는 부스스해진 머리를 가다듬고 세수를 한다. 그리고 숙소의 이부자리를 정리하고, 숙소 주인이 추천해준 어느 식당에서, 모닝커피와 가벼운 식사 그리고 꽤 굵직한 영어 원서 페이퍼북 책으로 아침 시간을 보낸다. 그리고 점심이 되어 근처의 인터넷 카페에서 고국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눈다. 또한 여행담과 여행 사진도 물론 보내준다. 야, 니가 말한 그 곳 가봤는데, 8인용 보트와 바닷가재 요리가 일품이더라. 그리고는 또다른 여행지를 찾아 나선다. 한적한 시골길에서 잔잔한 재즈 피아노 곡이 나오는 이어폰을 귀에 꽂고 흥얼거리며 길을 나선다. 그리고 어느 아리따운 여인과 함께 동행하게 된다. (유창한 억양으로) 이야기를 나눠보니 그녀는 내가 가는 여행지에 살고 있었고, 조금 친해진 덕택에 그녀의 집에서 하룻밤 묵어도 된다는 초대를 받게 되었다. 그녀와 나는 점차 친밀해져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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햐! 정말 멋진 '로망'이다. 하지만 이러한 상상은 결국 이루어질 수 없기에 '로망'인 것이다. 혼자만의 여행, 그것도 이국의 어느 머나먼 곳으로의 여행을 상상하는 것은 이루 말할 수 없는 대리만족과 여행에 대한 갈망을 북돋아준다. 하지만 동시에 내가 이러한 여행을 상상하고 꿈꿀 수 밖에 없는 현실에 짜증만 더해다주기도 한다. 여러 나라의 언어는 커녕 영어도 콩글리쉬 수준이고, 혼자만의 여행을 하기엔 용기와 자신감이 없고, 돈도 없고, 거기다가 공부에 전념해야하는 학생이고... 으으~ 여행에 대한 상상이 끝나고 나서 느껴지는 이런 공허함때문에 나는 일상으로의 탈출인 여행을 꿈꾸고, 공허감에 사로잡히는, 그런 반복에 찌들어 산다.
그렇기에 이 책에 더 호감이 간 것일까? <여행자의 로망백서>라는 제목과 소개를 본 순간, 이 책은 일상을 벗어나 여행을 하자고 부추기는 '위험한' 책이거나, 여행을 떠나지 못하는 나에게 대리만족을 더해줄 '유쾌한' 책일거라는 생각을 했다. 그렇다. 둘 중 다 맞았다. 이 책은 위험하면서도, 꽤 유쾌한 책이었다.
왜 우리는 여행을 하는 것일까? 여행은 우리에게 또다른 삶의 단면을 조금이나마 일깨워주는 진촉제, 작거나 큰 깨달음, 넓은 식견과 해낼 수 있다는 만족감등등 엄청난 요소를 가져다준다. 그렇기에 여행을 떠나기도 하지만, 또는 지겨운 일상의 반전을 꿈꾸는 사람들에게 가장 많이 이용되는 수단이기도 하다. 일주일 중 며칠만이라도 짬을 내서 어디론가 훌쩍 떠나고 싶다는 생각, 누구나 다 해보지 않았을까? 하지만 그것이 여의치 않기 때문에 여행기가 베스트셀러가 되고, 여행자의 블로그에 방문자가 붐비는 것이다. 나도 떠나구 싶다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여행의 로망'은 꿈꾸지만, 진정 '여행의 실재'는 느껴보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한 점에서 <여행자의 로망백서>가 나에게 주는 가르침과 대리만족은 균형이 있다고 봐야겠다. 두 명의 자유분방한 여행자가 매력적인 문체로 꺼내놓은 '여행의 로망'에 잠식되기도 전에, '여행이라는 몸의 독서가 아니라면 우리는 세상의 한조각도 제대로 읽어내지 못할 것이다'라는 뜨끔한 가르침을 내놓는다. 어느 장단에 박자를 맞춰야할런지. 투덜대는 나에게는 벌써 마음 속에는 여행을 가고 싶다는 욕망으로 가득해진다. 아, 미치겠네.
또한 이 책은 그래도 중국 패키지 여행 3박 4일도 여행이랍시고 갔다온 나에게, 조그만 공감 '2%'를 안겨줘 나도 여행을 떠날 수 있구나 하는 희망을 안겨준다. 이국의 땅에서 비벼져 흘러나오는 '이국 냄새'를 그들은 '풍경 위에 떠 있는 또다른 풍경'이라고 말한다. 중국에서, 뭐라 형용할 수 없는, 그렇다고 이상한 냄새도 아닌 어떤 것이 묘하게 내 코를 간지럽히던 순간이 생각난다. 햐, 내 말이 그 말이라고! 나는 조금이라도 공감되는 내용만 있으면 신기하다고 감탄사를 연발한다. 그들의 멋진 문체는 나의 공감대를 더 부풀려준다.
하지만 그보다 몇 십배는 큰 로망 '98%'는 내가 어떻게 감당할 수 있을까. 내가 평소에 생각하던 '로망'과도 어느정도 맞아떨어지는 게 있는 반면, 어떤 '로망'은 내가 직접 여행을 떠나봐야 할 수 있는 그런 한 것들이었다. 그들은 그러한 로망을 마음껏 떠벌리면서 나처럼 여행을 떠나지 못하고 대리만족으로 이 책을 편 이들에게 고한다. '여행은 로망이 있기에 빛나지만, 그것도 떠나봐야 아는 것이다' 라고.
공감 2%, 로망 98%. 이 제품의 함유량을 보는 순간, 나는 직감적으로 해야할 일을 알아냈다. 자 지금이라도 여행을 떠나자고, 그리고는 나중에 이 책을 펼치고 당당히 소리치는 거야. "흥, 이게 다 무슨 소용이야. 전부다 '공감 100%'의 이야기인걸! 로망?그런건 또 뭐야!"
자자, 집에 먼지쌓여있는 지구본을 돌리고 눈을 딱 감고 아무데나 찍자고. 핀란드의 헬싱키! 엥 거기는 어디야! 뭐 그래도 가긴 가야지! 북반구니까 나랑도 '가까운 편'인걸! 좀 추울테니까 코트 몇벌은 갖추고 갈까? 이렇게 소리 떵떵 치면서 정작 내일 부스스 일어나면 책가방을 먼저 챙기는 나에게, 이러한 호언장담은 또다른 '여행의 로망'을 재생산하는 현실에 대한 외침일지도. 흠, 너무 거창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