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suhyujin > 고전을 통해 보는 지금, 여기, 나-<강의>를 읽고
강의 - 나의 동양고전 독법
신영복 지음 / 돌베개 / 200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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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고전을 어렵다고 생각한다. 혹자는 고전의 정의를, "제목만 몇 수십번을 들어서 나중에는 읽지 않고도 읽었다고 착각하는 책들의 목록"이라고 농담처럼 말하기도 한다. 고전은 딱딱하고, 재미없고, 도통 무슨 말인지 모를 케케묵은 먼지투성이로 치부해버리는 경우도 적지 않다. 그러나 고전이 고전이 된 이유는 시대가 지나도 변치 않는 어떤 요긴한 것을 우리에게 넌지시 일러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고전을 한 번쯤 내 식으로 읽어 보는 것은 어떨까. 지금, 여기에서 의미를 갖게 말이다. 다시 그들에게 생기를 불어 넣는 일은 고고학자처럼 섬세한 손길을 요구하지만, 그 결과는 오래 묵은 장맛으로 담근 김치처럼 감칠맛난다.

<강의>에는 어렸을 때부터 출처도 모른채 마치 어머님이나 아버님이 들려주시는 옛 이야기처럼 어렴풋이 알아온 동양 사상의 여러 유파들-유가, 도가, 법가, 음양가, 묵가 등-이 쉽고 재미있게 설명되어 있다.  흔히 설교조의 말을 "공자왈 맹자왈" 이라며 무조건 어려운 것으로 치부해 버리는 사람들에게 꼭 추천해주고 싶은 책이다. 

특히 유교사상이라고 하면 고루하고 여성들의 자유를 묵살하던 일부 보수적인 유생들을 떠올리기 십상인데, 공자의 사상이 활달하고 평이하면서도 인간적이라는 새로운 발견을 하게 된다는 점이 이 글의 특징이기도 하다. 공자는 키가 크고 덩치가 좋았으며 호탕했다. 그는 음악에 조예가 깊었으며 백성들이 약간의 쌀만 수업료로 내도 귀천을 가리지 않고 제자로 받아주었다.  일언이폐지, 가정맹어호, 학이시습지면 불역열호아 같은 친숙한 성어들이 다 공자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니 더욱 정감이 갔다. 그는 사람의 일을 생각했으며 세상을 주유하며 자신의 정치관이 반영되기를 꿈꾸었다. 공자가 천명한 仁에서도 우리는 사람이 두 명 이상 모여 이루는, 정말 사람답게 살아가는 사회를 떠올리게 된다.

또 동양사상에서 내 마음을 이끈 것은 도가의 노자와 장자이다. 그들은 결코 인습에 얽매이지 않았으며 세상을 상대적인 개념에서 바라보았다.  노자는 부드럽고 여성적인 것, 온유하고 융통성 있는 갈대 같은 존재가 이 세계를 구원할 것이라고 보았다. 세력다툼이 치열했던 춘추전국시대에 그런 기발하고 창의적인 발상이 나올 수 있었다는 사실 자체가 감탄을 자아냈다. 노자의 도덕경은 단 1500여자로 되어 있지만 그 해석은 너무나도 다양하고 폭넓어 그 원본에 따른 텍스트가 무궁무진하게 피어 날 수 있다는 이야기도 수긍이 갔다. 그를 이해하는데 있어 중심이 되는 두 가지 열쇠는 도(道)와 덕(德)이다. 도(道)는 천지만물을 구성하는 가장 기본적인 원리이다. 우리가 나아가야 할 길, 이라는 표현에서도 알 수 있듯 동양인들에게 길과 도는 결코 다른 것이 아니며 이는 생활 속에서도 자연스레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그리고 덕(德)은 도에 따라 체현된 어떤 현실적인 발현체이다. 노자의 이상세계는 소국과민의 대안공동체였다. 나라는 작지만 백성은 적지만 너무나 넉넉하고 평화로운 그 곳은 백범 김구 선생님이 그리셨던, '우리나라가 세상에서 강한 나라가 아니라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길 원한다'고 하신 것과 맞닿은 듯 했다.  

장자의 우화들은 동화의 한 장면을 보는 듯, 판타지 소설을 보는 듯 이미지가 절로 떠오르는 환상적인 느낌을 주는데 이러한 알레고리 속에서 직접 이야기 하려는 것은 정작 말하지 않는 여백의 미덕을 갖추고 있다. 대붕과 참새의 비유, 오리 다리가 짧다고 늘리지 말고 학의 다리가 길다고 자르지 말라는 잠언,  장주가 나비인지 나비가 장주인지 모르는 호접몽의 고사 등을 통해 우리가 그동안 얼마나 사고가 경직되어 있는지를 스스로 깨닫게 해주는 <장자>는 스스로 그러한, 자연 그 자체가 내게 다가오는 느낌을 준다. 장자에게 있어 절대적인 것이란 없다. 이러한 사고의 유연성은 자칫 허무주의나 극단적 상대주의로 빠질 위험성도 있다고 하나 결국 어떻게 장자를 읽느냐에 따라 그 가치는 논해져야 할 것이다. 유교의 형식적일 수도 있는 도덕담론과 좋은 대조를 이루는, 매혹적인 글쓰기로 인해 <장자>는 많은 글에서 인용되며 풍부한 문학적 함의를 내포하고 지금까지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전공이 중어중문학과인 나에게 있어 이 책은 그 의미가 더욱 깊다. <강의>는 제자강독이나 동양정치사상 등의 수업에서 주요 교재로 활용이 되고 있으며 무엇보다 나만의 고전 독법이라는 방식이 마음에 들었다. 다른 이들의 사상을 내 것을 꼭꼭 씹어 소화시켜 써내려가는 글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새삼 느꼈다. 현실 속에서 빛을 발하는 고전의 참된 모습을 보는 것 같아, 행복한 책읽기 시간이 되었다. <마지막 수업>처럼, <강의>의 책장도 비록 끝이 나지만 되새겨볼만한 구절에 그어진 밑줄은 손때를 입고 다시 들춰보게 하는 힘을 얻게 될 것이다.

강의의 講 자는 본래 '익힌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이 강의를 통해 배운 것을 익혀, 내 것으로 다시 써내려가는 과정이 내가 고전을 사랑하는 또 다른 길임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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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 - 나의 동양고전 독법
신영복 지음 / 돌베개 / 200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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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의 시기를 겪은 이들은 고난의 끝에서 자신을 탈바꿈해 돌아온다. 고난을 잊으려는 이들은 '로맨티스트'로, 고난을 준 사회를 변화시키려는 이들은 '혁명가'로 돌아온다. 그런데 신영복 교수는 다르다. 누구 못지 않은 고난을 겪었음에도 로맨티스트나 혁명가라고 말하기가 어렵다. 그를 보고 있자면 '연금술사'라는 생각밖에는 떠오르지 않는다. 그렇다. 현대사의 희생양이 되어 혹독한 고난의 구덩이에 빠졌던 그는 고난을 희망과 믿음으로 승화시킨 연금술사로 탈바꿈했다.

승화 시켰다는 것, 그것은 말이 쉽지 직접 그렇기 하기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닐 터다. 허나 신영복 교수는 그렇게 했다.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에서도 볼 수 있듯이 신영복 교수는 돌로 금을 만든다는, 불가능에 도전하는 연금술사처럼 고통이라는 단어를 자기성찰을 거쳐 희망과 믿음으로 탈바꿈시켰다. 또한 그것을 그 순간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도 계속해서 이어져 오게 만들고 있다.

'나의 동양고전 독법'이라는 <강의>는 그러한 신영복 교수의 연금술의 정점을 이루는 결실이다.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에서 개인의 성찰을 이루어냈다면 <강의>는 개인을 넘어 사회의 성찰을 꾀하고 있는데 놀라운 사실은 그가 꾀하는 성찰의 대상인 사회가 아이러니하게도 그에게 혹독한 고행을 겪게 했던 대상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원망의 대상에게 구원을 손길을 내미는 것과 마찬가지인데 로맨티스트나 혁명가라면 결단코 행하지 못했을 것이다. 허나 신영복 교수는 연금술사이기에 그것을 가능케 한다. 개인을 고난의 구렁텅이로 빠뜨리는 혼란한 사회를 위해 기적을 행하려고 하는 것이다.

연금술사가 기적을 행하려면 '현자의 돌'이란 것이 필요하다. 그것은 마음이나 열망을 구체화시켜줄 수 있는 '매개체'로 그것이 있어야만 돌을 금으로 바꿀 수 있다. 신영복 교수도 그런 매개체가 필요했을 테다. 개인의 성찰과 달리 사회의 성찰은 개인의 마음과 열망만으로 가능할 수가 없다. 혼탁하고 무절제하고 광기가 넘쳐흐르는 사회는 그리 만만한 것이 아니다.

그렇기에 신영복 교수도 현자의 돌을 들었는데 그것의 정체는 낯선 것이 아니다. 현자의 돌이라고 할 수 있는 그것은, 공자와 맹자 그리고 노자와 장자 또한 순자와 묵자 등 그 옛날 세상의 순리를 바로잡기 위해 중국 땅에서 나타났던 동양의 사상들이니 누가 그걸 낯설다고 할 수 있겠는가. 허나 낯익은 것이기에 다소 뜻밖으로 여겨질 수도 있다. 이 사상들이 태어난 중국에서조차 문화대혁명을 끝내고 희대의 혼란기를 맞이했을 때부터 하늘에서 내려온 동아줄로 생각한 것이 사르트르와 니체 등의 이름을 앞세운 서양의 근대사상이었다.

또한 오늘날에는 시장경제 바람이 불면서 피터 드러커 같은 시장경제의 대가들이 주목을 받고 있다. 공자나 노자 등의 이름은 설 곳이 없는 것이다. 그들이 태어난 곳이 이러할진대 먼 땅의 우리는 어떠한가? 마찬가지다. 동양의 사상가들은 존재했던 이름일 뿐이고 그들의 사상은 잊혀진지 오래다. FTA라는 단어가 시대를 상징하는 이때 누가 과연 주역과 서경을 운운하겠는가. 이런 때에 그런 단어를 들먹인다면, 비웃음이나 당하지 않으면 다행일 지경이 오늘의 시대다.

그런데 신영복 교수는 묵묵히 그 단어를 꺼내고 있다. 더군다나 시대의 구원으로까지 치켜세운다. 그래서 강의를 한다. 동양의 고전들, 저 멀리 중원의 대륙에서 뜨고 졌던 그것들을 유비쿼터스 시대를 앞둔 이때에 시대의 광기를 잠재우고 인간성을 회복시켜줄 수 있는 열쇠라고 말한다. 모든 연금술사가 꿈꿨던, 기적을 행하는 현자의 돌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럼 무슨 근거로 그런 말을 하는 것인가? 신영복 교수는 오늘날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필연적으로 과거를 재조명해야 한다며 운을 뗀다. 그리곤 그것을 통해 현재와 미래를 모색하는 기본 관점으로 삼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신영복 교수의 말은 일견이 아니라 백번 타당하다. 누가 이 말에 이의를 제기할 수 있을까? 하지만 필연적으로 한 가지 걱정이 떠오른다. 오늘날처럼 빠른 것을 추구하는 사회에서 이런 작업이 어떤 의미를 지닐 수 있겠는가.

신영복 교수도 그것을 알고 있을 테다. 그러나 그는 묵묵히 강의를 하려 한다. 마치 급할수록 돌아가라는 말을 몸소 보여주듯이 강의를 한다. 하기야 단추를 하나만 잘못 꼈을 경우 아무리 서둘러도 제 모양이 나오지 않는다는 건 누구나 알고 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과거를 제대로 우리의 내면화시키지 못했다면 아무리 빨리 서둘러도 오늘이나 미래의 모습을 보장할 수 없다. 과거와 단절된 채, 혹은 과거에서 고개를 돌린 채 무엇을 기약할 수 있겠는가.

신영복 교수는 <강의>에서 동양고전의 의의를 '인간'과 '자연', 그리고 '조화'와 '균형'으로 설명한다. 시경이나 서경, 논어나 맹자 등 동양고전들 각각을 살피기에 앞서 일종의 핵심 키워드를 알려주는 것인데 그런 만큼 동양고전을 넘어 <강의>의 의의 또한 이 네 가지 단어로 이해할 수 있다. 인간과 자연, 그리고 조화와 균형으로 말이다. 이 키워드들은 어느 것 못지않게 중요한 의미를 띄고 있는, 서양이 아닌 동양 고유의 것인데 현대에는 그 의미가 빛바래고 있는 게 사실이다.

동양 또한 '서양화'되다보니 우리의 것을 놓치고 만 것인데 신영복 교수는 오늘의 사회에 꼭 필요한 것들로 이 단어들을 꼽고 있다. <강의>는 누차에 걸쳐 그것을 강조하며 그것이 동양고전에서 어떻게 드러나는지를 설명하는데 그 필요성을 역설하는 대목들에서는 가슴을 파고드는 간절함이 절실히 드러난다. 특히 자신이나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을 벼랑으로 밀었던 사회를 자식 잃은 어미의 심정처럼 비통하고 안쓰럽게 바라볼 때는 신영복 교수의 연금술을 의심하고 싶어도 의심할 수가 없다. 그 진심을 욕할 수가 없기 때문이리라.

동양고전에 대한 신영복 교수의 박식한 해설, 주옥같은 문체와 문체에 담긴 진실함, 그리고 <강의>를 통해 말하려는 것에 대한 간절함 때문에 <강의>는 '책'이라기 보다는 '마음'이라고 말하고 싶다. 이것은 결코 지나친 과장이 아니다. <강의>를 읽으며 단지 하나의 책을 읽는다고 생각할 수는 없으리라. 불가능해 보이던 것, 동양고전이라는 과거를 갖고 오늘과 내일을 모색한다는 그 허황된 것처럼 보이던 것을 꿈꾸는 신영복 교수와 마음이 통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목적 그대로 단절된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엮어주며 질주하는 테크놀로지를 인간과 자연의 가치로 막아서는 신영복의 <강의>. 고통을 희망과 믿음으로 승화시켰던 마음과 자신을 향해 칼을 겨눈 대상에게 따스한 손을 내미는 마음이 담긴 신영복 교수 삶의 결정체라도 불러도 과찬이 아니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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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solsolsol > 세월만큼 깊어진 서가에 발을 담그고......
강의 - 나의 동양고전 독법
신영복 지음 / 돌베개 / 200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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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세월 받아온 빛의 양이 느껴지는 듯, 어느 양반집 사랑채를 길게 드리우고 있는 듯한 발을 살며시 들고 들어간 곳이 한눈에 들어왔다. <강의>를 들고 책도 펼쳐보기 전에 그윽하고 고상한 빛에 이끌려 한동안 그 서가를 구경하고 있었다. 책걸이(書架) 그림이 내게 들려주는 이야기가 무엇인지를 생각하며, 다소 딱딱해 보이는 <강의>실에 들어가 본다. 

 신영복 선생님의 <강의>는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의 명성만큼이나 온화한 미소와 억양으로 설명이 시작되었다. 생각보다는 수월한 느낌으로.......  하지만 주역에 걸린 8괘부터 시작하여 어질어질한 발걸음이 잦아지다 이어지고, 끊어지려다 이어지며 양명학의 책장까지 어렵게 넘기게 되었다. 강의실을 나와서 내가 제일 먼저 한 일은 작은 책자를 찾는 일이었다. 몇 달전 도산서원과 병산서원등을 돌며 나름대로 필기해 놓은 소책자......  정확히는 기억나질 않으나, 유가, 법가, 묵가, 노자, 장자등의 이야기와 태극에 관한 설명도 좋았었던 기억이 어렴풋이 났던 것이다.  '언젠가는 차분히 읽어봐야지'라며 꼼꼼히 이야기들을 적었었는데, 그런데 아무리 찾아도 나오질 않았다. 그때 불현듯 "탁은 믿을 수 있지만, 내 발은 믿을 수 없지요."라고 말하는 차지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말 한마디가 책을 찾고 있는 내 손을 멈추게 하고 그제서야 내 발을 쳐다볼 수 있게 만들었다.

내 발의 기억은 다시 주역의 8괘를 향하여 나아갔고, 이제는 늘 보고 있으나, 그 뜻을 깊이 생각하지 못했던 태극기 위를 거닐고 있다.  중앙에는 우주 만물의 가장 원초적인 상태인 태극(太極)이 서로 맞물려 성쇠(盛衰)를 반복하고 있다.  마주 보고 있는 하늘과 땅은 지천태(地天泰)와 천지비(天地否)의 대성괘를 오가며 서로 다가갔다가 막다른 골목에 이르면 태극처럼 함께 소통 통로를 찾아 나간다.  물과 불은 서로 상극이라는 통념을 깨고 64괘의 마지막 괘인 화수미제(火水未濟)를 기억하게 합니다.  불이 물위에 있는 형상으로 다 타지 못한다.  이 세상의 일을 다 끝마친다는 것도 또 다른 욕심임을 말하고 있다. 급한 마음을 누그러 뜨리게 하는 걸까?  '모든 것이 정리되길, 혹은 다 해결되어 있기를 바라지 마라'는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는 것이다. 그렇습니다.  도로의 속성을 반성하고 '길의 마음'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선생님의 목소리를 이제 들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앞으로는 가슴에 손을 얹고 바라보는 순간에도 마음을 누그러 뜨리고, 짧게나마 묵상할 수 있게 됨이 <강의>를 통해서 얻은 작은 기쁨이 됩니다.

내 발길이 600년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한양의 성곽길을 찾아보게 된 것은 삼년전쯤 부터였습니다.  사십년을 살아온 서울의 옛 지층이 왜 갑자기 보였을까요?  두 권의 책 때문이었습니다.  재미있게 읽고 있던 <로마인 이야기>와 <우리 궁궐 이야기>였습니다.  로마 시내를 두르고 있는 아우렐리아 성벽을 보면서 서울도 '고도(古都)'라는 것을 자각하게 되었을 무렵, 너무도 적절한 시기에 <우리 궁궐 이야기>를 읽게 되었습니다.   유교의 사단(四端) 인 인의예지(仁義禮智)를 의미하며 동서남북의 성문이 열려 있었음을 알았을 때, 서울 속의 한양이 포근하게 그려지게 되더군요.  뿌연 매연 속의 흥미없게 느껴지던 남대문이 '숭례문(崇禮門)'으로  문이면서도 그 구실을 하지 못하고 있음이 안타깝게 느껴졌습니다.  사람의 마음이 이렇게 변할 수도 있음이 신선했습니다.  이제  <강의>를 다 들었으니,  늘 부끄러운 마음을 잃지 않도록 노력하며 생활의 터전인 서대문(敦義門)을 지나다녀야 겠지요.  측은해하는 마음을 담고 동대문(興仁之門)에서 출발하여 장충동 성곽길을 따라 남산을 거쳐 남대문(崇禮門)으로 걸어봐야  겠습니다.  남대문 시장에서 장을 보면서도 사양하는 마음을 가져 볼 수 있는지  한번 생각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사대문 중 가장 한적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는 북대문(肅靖門)에서는 우리 모두, 옳고 그름을 가리는 마음이 떠나지 않도록 잠시 기원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선생님의 <강의>실 문을 열고 나오면서 우리는 세상으로 열려있는 소통의 문앞에 서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서울의  사대문도 그저 서 있는 문화재로 뿐만이 아니라, 그곳에 담겨있는 세상과의 관계망 속에서 그물처럼 얽혀있는 소통의 문으로 생각 되는군요.  이제 내년이면, 북쪽 찬바람을 맞으며 굳게 닫혀 있었던 숙정문도 활짝 열린다고 하니,  '상식'이 통하는 우리 사회의 소통의 문도 함께 활짝 열리길 기원해 봅니다.

<강의>를 읽으며 떠오르는 또 한권의 책은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였습니다. 오래전에 읽은 책이라 내용은 별반 생각 나질 않았지만, 마음 후련하게 술술 넘어가는 책이었다는 기억은 생생했습니다.  그리고 엄청나게 욕먹을 것을 작정하고 써내려 갔던 책인 만큼, 참으로 솔직하다는 느낌이었습니다.  정확한, 아니, 대략적인 이해도 별반 없는 상태에서 이미 뼈속 깊이 파고들어온 유교의 형식주의, 관혼상제, '전통'의 이름으로는 존재하나 별반 자랑스럽지 않은 비합리적인 허례허식이 주변에 널려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맹목적인 아들 선호사상부터 알맹이 없는 권위의식에 이르기까지......   아마 노자는 그런 폐해를 이미 알고 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자연을 최고의 질서로 보는 노자에게는 인의예지와 같은 도덕적 가치는 인위적 재앙으로 밖에는  보이지 않았겠지요.  옛 사람들의 생각의 갈피 갈피를 들여다 보면서 참으로 많은 것에 수긍이 갑니다. 묵자의 겸애와 반전 평화를 위한 실천을 보면서 자신에게 철저한 몇 사람들이 생각났지만, 언제나 그들은 소수였다는 사실에 안타깝습니다......  고전을 찬찬히 공부해보면 더 많은 깨달음을 얻을 수 있겠지요.  하지만 지금 느끼는 것은  '그들도 우리처럼' 세상에 대해 고민했던 같은 사람들임에 친근감이 더해집니다.

<강의>를 통해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언덕 위에 팔 벌리고 서 있는 어머니상인 키예프의 전승기념탑입니다.  절대로 소멸될 수 없는 전쟁의 소용돌이, 혼탁한 세상이라면 세상을 향해 팔 벌릴 수 있는 넉넉한 품이 우리의 희망이 되지 않을까요?  맹자는 "창랑의 물이 맑으면 갓끈을 씻고, 창랑의 물이 흐리면 발을 씻으라"라는  공자의 말씀을 '스스로 취하기에 달렸다(自取)'로 자신의 마음을 다시 한번 되돌아 불 것을 권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나라의 그림이나 건축에는  맹자의 가르침인 '탁족(濯足)'의 의미를 많은 곳에 새기고 있다고 합니다. 아마 그건 '내 탓이오, 내 탓이요, 내 큰 탓이로소이다'를 조용히 묵상하도록 하는 것이리라 생각됩니다.  내 몸을 통해 세상과 만나게 된 아이들에게 조차도 '그들 탓'으로 돌리며, 미움의 마음이 들 정도로 나약한 인간의 존재를 다시 한번 되새기고 창랑에 발을 담그라는 것이리라......   빛바랜 색으로도 세상을 더욱 풍요롭게 장식하며 사람들의 마음에 '행복'을 선물하고 있는 단풍의 계절인 요즘,  창덕궁에 가봐야겠다.  조용히 발을 담그고 '탁족'의 의미를 되새기고 있는 단아한 부용정을 만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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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풀꽃선생 > 이 책이 베스트셀러라면
강의 - 나의 동양고전 독법
신영복 지음 / 돌베개 / 200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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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이 베스트 셀러라면 우리 사회의 독서문화의 전망이 그렇게 어두운 것만은 아니지 않을까?

서점에서 '체 게바라 평전'과 '강의'가 베스트 셀러라는 것을 볼 때마다 '정말?' 그런 생각이 든다. 대중적으로 쉽게 읽을 수 있는 책이 아니지 않은가 말이다. 체 게바라의 일생이 정말 드라마틱하고 그이의 인성이 아무리 매력적일지라도 어쨌든 보수주의적이고 자유민주주의적 가치관이 사회 주류를 이루는 이 대한민국에서 사회주의자이자 무장혁명을 주장하고 실천했던 게바라를 읽는 것은 맘 편한 일이 아닐 것이다. 또한, 아무리 쉬운 말로 편한 어조로 강의하듯 풀어썼다고는 하나 중국고전에 대한 책을 그렇게 덥썩덥썩 집어들 분위기는 아니지 않나 싶다는 뜻이다.

이 현상을 누구 표현대로 '지적 허영심'으로 해석을 해야 하는지 (사 놓고 끝까지 읽은 사람이 드물 것이다, 들고 다니면 폼 나는 책이다 등등)  아니면 역으로 그 만큼 우리의 독서인구는 적고 그 얼마 안 되는 독서 인구들은 거의 매니아 급으로서 일반인보다 높은 독서 수준을 가지고 있기에 이런 책들에 집약이 되는 것일 수도 있다.

아니면.....?

지금도 아주 오랜 시간에 걸쳐 곰실곰실 천천히 책을 읽고 있는 나의 독서수준이 일천한 것인지도 모른다. 맹자 원본도 소그룹으로 공부해 보았고 도덕경도 여러 번역본으로 서너 번 읽고 대학 시절 전공은 아니나 교양으로 한문학과와 동양철학과의 강의를 통해 중국고전을 조금이나마 맛보았던 나에게 그리 빨리, 쉽게 읽히는 책은 아닌 이 책이 베스트 셀러로 다른 이에게 쑥쑥 읽히고 있다면 (나야말로 나 자신에 대해 다시 돌아볼 시간이 온 것이 아닐까...)

하긴 남들의 반응과 수준에 연연할 필요는 없겠지. 시간이 없어서 주로 잠자리에 누워 조금씩 조금씩 (야학에 다니는 학생처럼) 아쉽게 이 책을 읽어온 나는 신영복이라는 존재에 대해 다시 감사했다. 그분이 여러 수필에서 보여주신 인격의 향기와 고전에 대한 오만하지 않은 해석의 자세에 사회문제와 모든 사물, 현상을 자연스레 엮어 생각하게 하는 역량이 얼마나 고마운지. 나는 특히 '묵가'를 읽으면서 무지 쾌감을 느꼈다. 이 해석이 신영복 선생의 매우 독특한 해석은 아닌 것인지 어떤지 모르겠다.  나로서는 처음 접하는 내용이라 더 신선하고 재미있었는지도 모른다. 검은 얼굴을 한 노동계급의 사상. 혁명적이고 '共'을 중시한 사상과 비폭력 평화주의의 결합은 오늘날의 사회민주주의적 사고방식 혹은 진보된 사회주의로 해석된다. 그러고 보면 사회와 사상, 체체도 직선으로 발전, 진화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어느 시대 어느 공간에서나 자본 중심의 사고와 노동 중심의 사고는 끊임없이 갈등하고 고민했는지도 모르겠다.

좋아하는 책은 빨리 읽어치우지 않는 내게  오래 걸려 읽은 이 책은 참 소중하다. 많은 밑줄과 많은 접힌 자욱과 메모들. 원전에 대한 풀이보다 신영복 선생의 해석과 사념에 밑줄이 더 많기도 하고 더러 내가 잘못 알고 있었거나 일반적인 해석과는 다른 풀이 들에 깜짝 놀란 표정으로 밑줄을 그었던 기억도 많다. 이제 나는 어느 주말 저녁 시간을 내서 일기장에 그것들을 차곡차곡 정리할 것이다. 누구는 이 정도로는 고전에 대한 학습이 되진 않는다 할 것이다. 내 인생에 기회가 오면 도덕경 원전도 읽고 해석해 보고 뭐 그런 날이 올 수도 있겠지만 지금 내게는 이 정도 '말씀'을 접한 것이 가장 적절하고 영양가 있었다. 어느 하나 맛없는 반찬 없는 정갈하고 푸짐하면서도 품위있는 밥상을 만난 기쁨.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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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 모더니즘이 팽배하던 대학시절, 오히려 동양 고전을 읽은 덕분에, 친구들에게 도사의 이미지를 얻게됐다. 지금이야 논어, 노자를 공중파 방송에서 강의할 정도로 어느 정도 대중화 되었지만, 10년 전만 해도- 내 기억이 정확한지는 모르겠으나- 묵자가 처음으로 번역되어 나올 정도였으니, 그런 선입관이나 편견을 가질만도 했을 것이다. 당시 번역된 붉은 표지의 묵자는 물론이고, 한비자 등 닥치는 대로 읽었던 기억이 있지만, 아직까지 뇌리에 깊숙히 자리를 잡고 있는 것은 별로 없다. 노자와 장자에 빠져 소요유하는 삶을 꿈꾸었다는 정도가 동양 고전을 읽으면서 나에게 남긴 흔적이라면 흔적일 터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과거 그 시절 내가 고전을 읽었던 방식은, 그 고전 속에서 지향하는 유토피아를 먼저 찾아내고, 그것으로의 접근 방법이 무엇이었는가에 대한 공부였던 것인듯 싶다. 그러면서 느낀 것은 대부분의 고전이 제왕학의 수단이었다는 것이고, 그 방법으로서 제도적 변혁 보다는 개인적 수양에 중심을 두었다는 것이었다. 즉 고전이 쓰여졌던 당시 시대적 상황에 대한 깊은 고찰 없이 막연한 추측만으로, 오직 텍스트 그 자체만에 치중했던것 같다. 그래서 신영복 교수가 쓴 강의는 당시 정치적 문화적 사회적 시대 상황을 설명하고, 그것을 중심으로 고전의 의미를 재 복원한다는 점에서 무척 흥미롭다. 그리고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무척 교훈적으로 다가온다.

일단 과거 내가 읽었던 유토피아적 관점에서 이 책을 살펴보면, 유가 묵가 도가의 경우는 농본적 질서를 모델로 삼는다는 점에서 복고적 경향을 띤다. 즉 이상향이 요임금이나 순임금 시절과 같은 과거에 놓여져 있다는 것이다. 반면 진시황으로부터 비롯된 제국이라는 개념의 등장이나, 철로된 쟁기 등으로 인한 생산력의 증가 등의 정치 경제적 급변과 맞물려, 법가의 경우 변화를 인정하고, 과거보다는 미래를 지향하는 미래사관을 지니게 된다는 것이다. 고전의 사상이 어떤 뛰어난 한 천재적 개인에 의해서 탄생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밑바탕에서 함께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이런 깨달음은 지금 우리 사회를 움직이고 있는 사상적 기류가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를 생각하게 만들며, 그것이 과연 정당한지에 대한 끊임없는 질문을 하게 만든다는데서 이 책의 큰 장점이 있다하겠다.

위에 말한 것은 과거 내가 읽었던 방식 자체에서 무엇이 빠져 있었는가에 대한 반성이라고 볼 수 있다. <강의>를 꿰뚫는 시점은 물론 이것 이외에 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바로 관계론으로 바라본다는 것이다. 관계론은 단순히 인간이라고 말할때의 間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간이란 사이 존재며 사이 존재라는 것 또한 존재 중심의 개념일 뿐이기 때문이다.  즉, 존재 그 자체에 치중하는 것이 아니라, 관계를 중심으로 사회를 바라본다는 것이다. 사회란 것 또한 이런 관계, 인간관계의 지속적 질서를 말하는 것이다. 이런  관계에 대한 극한점이 바로 불교의 화엄 사상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하지만 화엄은 무정부주의로까지 나아간다는 점에서 양면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이런 관계론으로 바라본 고전을 여기서 하나하나 언급할 수는 없겠다. (그것이 궁금하다면 직접 책을 읽어보셔야) 다만 이렇게 재해석된 고전이 지금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을 것인가만 잠깐 이야기해보겠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삶과 정서가 분리되어 있다.- 개인적으로 관계론이란 단순히 사람과 사람만의 관계만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라고 느끼는 것이 바로 이 부분이다. 내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과 나와의 관계도, 또한 내 몸과 감성과 감정, 이상 등과의 관계도 모두 포함되어져야 할 부분일 것이다. -상품 미학의 발달로, 가상 세계의 등장으로, 교환 가치가 최우선의 가치가 됨으로써 내가 느끼는 감정들과 나의 삶은 통일을 이루지 못하고 따로 돈다. 그것이 바로 소외이며, 행복이라고 하기엔 어딘가 부족한 허전함을 가져온다. 따라서 허구적 관계로 말미암아 삶의 진정성을 잊고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소비하는 인간이 행복한 인간이 된 세상, 나혼자 즐거우면 행복한 獨樂의 세상. 과연 이곳이 유토피아를 향해 나아가고 있는 것인가? 진정 행복한 삶이란, 공감을 통해, 與民樂으로 흥겨운 세상이어야 하지 않을까? 고전에 대한 이 <강의>는 바로 이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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