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동안 책을 전혀 읽지 않았다. 한때, 세상에 선 뵌 책은 모두 읽어야 하는 것 같은 강박감에 사로잡혔던 시절에 비하면 장족의 발전이다. 물론 책도 사지 않았다. 어쩌다 한 번씩 고정적으로 들리던 온라인 서점 두어 곳을 기웃대고, 거기 내가 사겠다고 찍어 둔 책 이름을 일별하면서도 까짓것, 아무렇지도 않게 돌아나와도 별다른 감흥이 일지 않았다. 세상이 바뀌지 않은 것은 물론이다.

 방학이 되면서 책 몇 권을 샀다. 물론 찍어 둔 책이 중심이다. 언제 찍었던가, 기억도 가물하다. 쇠귀 신영복 선생의 '나의 동양 고전 독법 강의'(책값도 만만찮다!), 살아 있는 우리 신화(신동흔), 호메로스의 세계(피에르 비달나케), G.마르께스의 최신작 '내 슬픈 창녀들의 추억'에다가 따로 최근 창비에서 낸 '20세기 한국 소설' 시리즈 중, '이태준, 박태준 편'과 '최서해, 이기영 편' 등이다.


 먼저 번갈아 가며 '20세기 한국소설' 시리즈와 '살아 있는 우리 신화'를 읽었는데, 우리 신화 쪽이 흡인력이 있어 쉽게 읽혔고, 소설은 곰삭여가며 천천히 읽었다. 쉬엄쉬엄 몇 날, 며칠이 걸렸다.


 '우리 신화'를 읽으며 솔직히 자신이 문학교사라는 사실이 몹시 부끄러웠다. 교과서에서

배우는 역사가 지배층 중심의 '공문서의 역사'라고 일갈한 선배 교사의 비유를 빌린다면 우리가 교과서에 배운 단군이나, 혁거세, 동명왕의 신화는 '관보'에 실린 신화에 불과하지 않은가, 서사 무가(巫歌)로만 가르쳐온 '바리 공주(바리데기)'가 민간 신화였다고?


 단군 신화를 가르치면서 "우리 신화에는 '천지창조 신화'가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천연덕스레 지껄여 댄, 숱한 문학 수업의 오류는 어찌할 것인가. 건국이나 시조 신화만을 다룬 문학 교과서의 편협성을 나무라기 전에 불핀치류의 '그리스, 로마' 신화의 문법에 익숙한 우리의 의식 세계를 되돌아볼 수밖에 없다.


 건국, 시조 신화로만 신화를 이해하고 있는 이들에게 민중들의 구전을 통해 그 신성(神性)을 면면히 이어 온 민간 신화(무속 신화), '78명의 신들이 펼쳐내는 25편의 우리 신화 이야기'는 벅찬 충격이다. 특히 '작은 가슴에 우주를 품어 안는 들판의 딸, 오늘이' 이야기는 한 편의 동화이며 판타지다.


 공교롭게도 고대 그리스 연구자 비달나케의 '호메로스의 세계'는 그리스 신화 속 영웅 이야기인 '오디세이'와 '일리어드'의 친절한 안내서다. 의도한 것은 아닌데도, 우리 신화와 함께 다시 희랍 신화를 읽을 수밖에 없게 되었다.


 대학 시절, 전공 수업 때문에 읽다 만 '이태준, 박태원'을 다시 읽으면서 '작품의 위대성은 시공을 뛰어넘는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무려 70년도 전의 작품들이 그리고 있는 당대의 현실이 손에 잡힐 듯 다가옴은, 그들의 문학이 지향한 모더니즘에도 불구하고 만만찮은 소설적 성취라 이를 수밖에 없다.


 이태준 단편의 미학적 완성도와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박태원)이 성취하고 있는 모더니즘과 해방 공간에서의 작가들의 사상적 선택은 어떤 상관 관계가 있는 걸까. 한 사람은 이른바 '사회주의 조국'에서 숙청되고(이태준) 다른 사람은 불멸의 작가로 남게 된 저간의 사정들은 흥미롭기도 하다.


  신영복 선생의 두터운 책은 천천히 읽을 작정이다. 88년인가 평화신문을 통해서 읽은 선생의 옥중서신 같은 감동은 가능하면 아껴두어야 한다. 마르께스의 소설도 서사의 즐거움과 기쁨을 위하여 역시 잠시 유보해 두어도 좋다.


 작가가 그리고 있는 작은 우주를 어찌, 어릴 적 입안에서 오래 굴려 그 단물을 취하곤 했던 알사탕에 비길 수 있으랴만, 몰입을 예비하며, 서가에 꽂힌 귀한 책을 그윽하게 바라볼 수 있는 것도 드물게 맛볼 수 있는 호사의 하나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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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있는 우리 신화 - 우리 신들의 귀환을 위한 이야기 열두 마당
신동흔 지음 / 한겨레출판 / 2004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우리에게 낯익은 신, '옥황상제'나 '용왕'의 계보는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옥황상제'는 하늘을, '용왕'은 바다와 하천 등, 모든 물의 나라를 통치하는 신격임을 알고 있지만, 그런 계보의 근원이 우리의 민간 신화(무속 신화)에 있다는 걸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을 듯하다. 대체로 사람들은 그 낯익은 이름을 통해 도교나 불교의 이미지를 떠올리기 십상이다.


 국문학자 신동흔이 쓴 '살아 있는 우리 신화'(한겨레신문사)는 그 같은 신들의 계보를 밝하면서, 방 안에 모신 '삼신'이나, 부엌의 신 '조왕할아버지', '조왕할머니' 따위의 가정의 신도 그 계통의 한쪽을 차지하고 있다고 알려 준다. 물론 그들의 계보는 올림포스의 제신(諸神)들처럼 일목요연한 체계를 갖고 있지는 않다. 우리 신화들이 각 지역과 마을에서 '나름의 방식으로 구비전승된 데 따른 임의성 또는 자율성을 반영한 현상' 탓이라 한다.


 이 책을 읽고 있자면 자신이 문학교사라는 사실이 몹시 부끄러워진다. 교과서에서 배우는 역사가 지배층 중심의 '공문서의 역사'라고 일갈한 선배 교사의 비유를 따른다면 우리가 교과서에 배운 단군이나, 혁거세, 동명왕의 신화는 어쩌면 '관보'에 실린 신화에 불과하지 않은가.


 20년이 넘게 중등학교에서 '문학' 교과를 통해 '단군과 주몽, 수로 신화'를 가르쳐 왔지만, 정작 이 땅에 천지창조 신화가 없는 이유는 궁금해하지 않은 채, '우리에게는 창세 신화가 남아 있지 않다.'는 얘길 천연덕스럽게 해댄 이 기막힌 오류. 서사 무가로만 가르쳐 온 '바리 공주' 이야기가 민간 신화였다니! 제주도의 창세신화는 오늘도 제의의 현장에서 장엄하게 구송되고 있다고!


 아버지에게 버림 받은, 어린 소녀의 몸으로 이승과 저승의 경계를 넘나들며 병든 아버지를 살려낸, 죽은 사람을 저승으로 인도하는 오구신이 되어 세상을 떠난 영혼들의 죄를 씻어주고 있는 '길 위'의 여신, '바리 공주'(바리데기) 이야기의 서사적 구조는 신화로서의 화소(話素)를 너끈히 갖추고도 남는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를 서사 무가로만 이해하는 것은, 작게는 신화의 범주를 건국이나 시조 신화로 한정한 문학 교육의 편협성 탓이고, 크게는 토마스 불핀치 류의 '그리스, 로마 신화'의 문법에 익숙한 우리의 의식 때문이라고 보는 게 온당할 터이다.


 우리에게 '신화'란 일차적으로 '그리스, 로마 신화'로 이해되며, 가끔씩 양념으로, '쑥과 마늘'의 인고를 거쳐 사람이 되는 '곰할머니'[熊女]와 자라와 고기떼를 타고 엄수(淹水)를 건넌 주몽의 얘기를 떠올릴 뿐이다.그런 이들에게 민중들의 구전을 통해 그 신성(神性)을 면면히 이어 온 민간 신화(무속 신화), '78명의 신들이 펼쳐내는 25편의 우리 신화 이야기'는 일종의 문화 충격일 수도 있겠다.


 이 책에서는 서사 무가로 전해져 온 '바리공주'를 '우리의 영혼을 온몸으로 감싸서 눈물로 씻어줄 구원의 여신'으로 복권시킨다. 지은이는 '온몸을 바쳐 신성한 직무를 감당하면서도 천대와 외면을 벗어날 수 없었던 천민 사제. 그들이 조상신으로 섬겨온 존재가 바리'라고 말한다.


 특히 '작은 가슴에 우주를 품어 안는 들판의 딸, 오늘이' 이야기는 한 편의 아름다운 동화이며 신화적 판타지다. 부모님을 찾아 먼 길, '원천강'을 향해 떠난 오늘이는 긴 여정을 거쳐 부모님을 만난다. 그리고 자신의 여정을 도와준 이들의 의문을, 하나하나 풀어주면서 세상에 돌아오고, 하늘나라 선녀가 되어 사계절 소식을 세상에 전하는 일을 맡게 된다. 한 손에 여의주, 또 한 손에 연꽃을 든 채. 지은이는 그를 '시간의 신'으로 이해한다. 우리에게 '오늘'이 있는 것은 순전히 그의 존재 때문이다.


 책 속에 소개되는 민간 신화들은 모두 전국 각지에서 전승되어 온 무가(巫歌)의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이들이 펼쳐 주는 신의 세계와 그 신격은 그러나, 매우 낯설다. 천민 사제인 무당에 의해 연희되어 온 서사 무가들은, '미혹된 믿음'으로 천대 받으며 간신히 명맥을 이어온 무속신앙을 통해 전승되어 오면서 대부분의 민중들의 기억에서 멀어져 왔던 까닭이다.


 신화는 한 민족의 집단 정체성의 표지일지도 모른다. 따라서 신화를 읽는 것은, 종교를 넘어서, 시대를 넘어서 집단 제의의 기억들을 회복하는 일일지도 모른다. 지은이는 다음과 같이 뇌며 책을 끝맺고 있다.


 "신이란 무엇인가. 파란만장한 삶의 역정을 거치면서 우리 안에서 찾은 우리의 신성이다. 신을 마음에 품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신성한 의미를 찾는다는 것이다. (중략) 눈을 감고 천천히, 아주 천천히 신의 이름을 불러보라.

 '바리-.' 

 그 목소리가 들려오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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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바람 2006-04-24 03: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보았습니다. 조왕할아버지 따라 들어왔답니다. 저도 이 책 보려구요. 첫 발자국에 땡스투를 누릅니다.

shindh 2008-02-02 12: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책을 쓴 신동흔입니다. (답글이 정말 많이 늦었네요.;;)
좋은 서평 감사드립니다. 새삼 어깨가 무거워지는 느낌이 드네요.
바리공주는 '서사무가'가 맞습니다. '무속신화'나 '민간신화'는 서사무가의 다른 이름이지요. 이 소중한 우리의 정신적 유산에 대한 세간의 관심이 살아나는 듯하니 다행입니다. 앞으로 우리의 민중신화가 열 배, 백 배의 힘을 내며 문화와 삶의 한 축으로 자리잡으면 좋겠습니다. 님 같은 분들이 계시니 그리 되리라 믿습니다. 건승하세요.
 
심청 - 전2권 세트
황석영 지음 / 문학동네 / 2003년 12월
평점 :
절판


황석영의 소설을 읽는 것은 기쁨이면서 고통이다. 마치 잘 벼루어진 끌이나 대패로 미끈하게 다듬어 놓은 얼개와 짜임을 만나는 것이 기쁨이라면, 그것들이 냉혹할 만큼 사실적으로 저며내는 이 땅의 사람살이의 모습들은 둔감해진 정수리를 날카롭게 베는 듯한 고통으로 다가온다. 70년대 이후 내내 진보적 문학 진영을 짓눌렀던 화두였던 ‘리얼리즘’을 황석영만큼 건조하게 천착해 온 작가가 또 있을까.

파란과 격동의 20세기말의 문학적 연대기인 <오래된 정원>을 거쳐 이데올르기의 광기와 그 덫에 걸린 한 시대를 조감한 <손님>을 거쳐 그는 이제 고대사회의 인신공희(人身供犧)라는 제의적 공간과 불교적 환생의 세계에 침잠해 있던 심청을 냉혹한 근대화 시대의 저잣거리로 끌어낸 듯하다.

이 소설이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본격화와 서양의 동양 침탈 과정에서 한 여인의 몸에 새겨진 폭력의 역사'(경향신문)라는 평가는 정당하면서도 '시정 잡배들 삶의 자상한 기록'이라는 작가의 발언 쪽에 나는 조금 더 기울어진다. 그건 '아편전쟁이나 태평천국' 등의 역사를 '작은 우레 소리처럼 다루었다'고 고백하는 작가의 정서와 다르지 않다.

심청은 박제되어 버린 효녀가 아니라, 역사의 격랑 속에서 비로소 자기 삶의 주재자로, 질긴 여성성으로 부활한다. 렌화에서 로터스, 류큐의 시조쿠 부인과 렌카를 거쳐 마침내 고향 황주의 절에서 찾아온 자신의 위패로 돌아온 그녀의 미소는 '실컷 울고 난 사람의 웃음'처럼 희미하다. 그러나 파란 많은 그녀의 삶을 관통하고 있는 것은 고통과 절망, 슬픔과 분노가 아니라, 그것을 자기 삶으로 껴안는 너그러움과 넉넉함이며, 그것이 그녀를 수동적 희생자에서 능동적 삶의 주체로서 우리 앞에 마주 서게 한다. 소설 속에 노골적으로 묘사되는 사랑의 장면들이 음란하다고 느껴지지 않는 것은 그것이 지배와 종속의 관계가 아닌, 상호 동등의 관계로서 이해되기 때문일 것이다.

작가의 심청은 그의 다른 작품들, 이를테면 '삼포 가는 길'의 백화나, '몰개월의 새'의 미자와는 전혀 다른 여인이지만, 한편으로 같은 여인이다. 여덟 명의 군인죄수를 뒷바라지한 백화나 낯선 나라의 전쟁터에서 죽어간 애인들을 위해 몸부림치는 미자의 삶은 또다른 의미에서, 스스로 남자와의 사랑을 선택하고 '지옥 같은 나날이었는데도 남풍 집의 작은 방에서 덧문을 열고 내다보던 배의 등불빛을 잊을 수가 없었다'는 청의 삶과 동질적이다.

기억의 습관은 얼마나 무서운가. '여성과 폭력의 역사'라는 서평 하나만으로도 우리는 일제가 저지른 만행의 역사와 그 뒤켠에서 유린당한 저주스런 여인들의 근대사를 떠올린다. 그러나 이 소설이 가는 길은 그것과는 다른 여정이다. 섣불리 상상하지 말고 서점으로 가실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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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정원 - 상
황석영 지음 / 창비 / 200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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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을 가까이 하면서 얻는 소득은 쏠쏠하다. 그 중에서 온라인 서점을 발견하고 종종 그 서점을 이용하면서 얻는 성취감은 두 가진데, 하나는 지속적으로 서점에 가지 않고도 신간들을 검색해 볼 수 있는 파한(破閑)에 있고, 또 하나는 오프라인 서점에서는 엄두도 못 낼 가격으로 그걸 손에 넣을 수 있다는 점이다.

오래 전에 나는 황석영의 장편 소설 “오래된 정원”을 읽었다. 그는 내가 좋아하는 작가 중 하나일뿐더러 스무 살을 전후해 세상을 읽고 그것을 표현하는 방식 따위에서 내게 커다란 영향을 끼친 이다.

이 소설은 저 파란과 격동의 20세기의 마지막 20년을 다룬 문학적 연대기다. 작가는 저 80년대의 벽두를 피로 장식한 ‘광주에서의 학살’을 보고한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의 기록자였고, 80년대 후반에 북한을 극적으로 방문했고, 덕분에 90년대의 초중반을 감옥에서 보낸 이다. 따라서 그는 저 지난 20년에 대해서 충분히 말할 자격이 있는 사람인 셈이다.

다시, 이 소설은 광주의 학살로 문을 연 이래 ‘군사독재권력과 민족민주운동과 피어린 대결이 숨막히게 진행된 80년대와 자본주의의 전지구적 승리라는 휘황한 조명 앞에 꿈도 열정도 덧없이 사위어 버린 듯한 90년대’(염무웅 서평)를 살아온 한 연인들의 이야기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세상을 사랑하고 그것을 위해 죽어갔던 모든 사람들의 이야기다.

남자는 0.75평의 독방 안에서, 그리고 여자는 이쪽 바깥에서 한 세상을 보낸다. 20여 년만에 출감한 남자(오현우)는 이미 병사한 그의 연인(한윤희)이 남긴 노트와 스케치북 속에 남긴 80년대의 삶과 투쟁을 회상하고 추적해 간다. 반 년이 채 안 되는 짧은 사랑의 시간 동안 그들이 낳은, 이제 열여덟 살이 된 은결이라는 딸과의 만남을 앞두고 소설은 끝을 맺는다.

후기에서 작가가 밝힌 대로 ‘아직도 희망은 있는 건가’고 우리는 되물어야 한다. 작가에게 ‘오래된 정원’은 무릉도원이거나 유토피아이며, 그것은 ‘더 나은 삶에 대한 꿈을 추구한 세대의 초상’이다. 그것은 남자에게 남긴 노트에서 ‘우리가 지켜내려고 안간힘을 쓰고 버티어 왔던 가치들은 산산이 부서졌지만 아직도 속세의 먼지 가운데서 빛나고 있’다고 말하며, ‘당신은 그 외롭고 캄캄한 벽 속에서 무엇을 찾았’냐고, ‘당신은 우리의 오래된 정원을 찾았’냐는 여자의 물음과 잇닿아 있는 것이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노동시인으로 더 유명한 한 운동가가 스스로를 스타의 반열에 올리며, ‘돈이 되는 운동’을 주장하는 이념의 왜곡과 혼돈 속에 비록 우리가 서 있다 하더라도, 그 시절의 이념이 다만 설익은 관념과 추상적 구호였다 하더라도, 우리는 아무도 저 고통과 절망의 시대에 연출된 모든 사람들의 삶과 죽음의 의미들을 결코 가벼이 바라볼 수 없다. 문제는 그들 세대의 ‘무거움’이 아니라, 변화는 있되, 변화에 대한 믿음을 상실한 이 날라리 시대의 ‘가벼움’일 터이다.

두 권의 책으로 다시 만난 정원, 합법화라는 달콤한 과실 앞에서 더러는 주저앉고 더러는 비켜선 우리들의 나태와 타협에 그들의 사랑과 삶은 날카로운 송곳처럼 되물어 온다. ‘당신들은 그 외롭고 캄캄한 벽 속에서 무엇을 찾았나’. 이제 우리가 대답할 차례다. 우리는 그 외롭고 캄캄한 벽 속에서 무엇을 찾았나.

아직도 희망은 있는가. 작가는 대답한다. ‘질문이 계속되는 한 우리는 다시 출발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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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수 아버지 ―아버지의 추억

요즘 나는 펜치나 드라이버, 망치와 톱 같은 공구들에 묘한 집착을 느낄 때가 많다. 얼마 전 사무실에 굴러다니던 녹슬어 뻑뻑해진 소형 펜치를 후배의 충고대로 식용유를 이용해 정성들여 녹을 닦아내 제대로 쓸 수 있게끔 만들어 놓았다. 보이지 않는 부위 깊숙이 녹이 슬어 거의 사용할 수 없으리라고 생각했던 물건이 몇 방울의 식용유를 먹고 붉은 녹물을 조금씩 토해내더니 곧 새것일 때의 기능을 되찾는 것을 보면서 나는 설명할 수 없는 즐거움을 느꼈다. 가끔씩 무료해지는 시간마다 연필꽂이에 꽂아둔 그 놈을 꺼내 만지작거리면서 연모를 처음 만들어 쓰던 때의 선사시대의 인간을 생각하곤 한다.

그보다는 더 오래 전 일로, 집에서 쓰던 망치의 자루가 부러져 임시방편으로 아카시 나무로 볼성사납게 자루를 박아 쓴 지 근 3년만에야 나는 그놈의 자루를 간 적이 있다. 생나무가 마르면서 조금씩 헐렁해지기 시작한 망치자루를 갈아야겠다고 마음을 먹으면서도 차일피일만 하다가 결국은 인근의 야산에 들러 한참 물이 오른 감나무 가지 하나를 잘라 왔다. 물론 망치자루로 감나무가 적당하다고 믿었던 것은 아니다. 다만 짧은 시간에 낫도 없이 과도 하나로 꺽어올 적당한 나무를 찾지 못했을 뿐이다.

집으로 돌아와 대형 공작용 도루코 칼로 그놈을 자르고,식칼을 이용해 틈새를 메울 쇄기를 다듬으면서 나는 잘 벼루어진 낫과 끌을 얼마나 원했던가. 엉성하게나마 자루의 모양이 완성되자 나는 그것을 공구서랍 속에 곱게 모셔두면서 그놈의 물기가 완전히 말라 단단해지기를 기다렸다.

충분히 말라 꼬장꼬장해진 나무를 망치뭉치에다 박고 쇄기를 메우자 드디어 망치는 제 모양을 갖췄다. 나는 가끔씩 서랍을 열고 놈을 꺼내들고 흔들어보면서 놈의 기능을 확인해 보곤 한다.

그러한 내 일종의 유한 취미의 뿌리는 필요한 물건이 있으면 집안의 적당한 나무를 골라 단시간에 훌륭한 공작물을 만들어내곤 하던 아버지의 피에 있다. 아버지께선 목수셨다. 물론 당신은 일생동안 나무를 다듬은 전업 목수는 아니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지금 우리가 떠나온 집을 손수 지으셨고, 젊은 한때를 나무를 다듬으며 보내셨다. 훨씬 뒤에야 내가 깨달을 것이지만 아버지께선 생계의 수단으로 나무를 다듬었다기보다는 그런 일을 통해 가족과의 모듬살이의 기쁨과 즐거움으로 나누고자 하셨던 듯하다.

당신께선 다정다감하고 무엇보다 정직하고 너그러운 분이셨다. 아버지가 최초로 내게 공작물을 만들어 주신 것은 아마 국민학교 저학년 때로 기억된다.나는 그 즈음 잘 다듬어진 팽이가 몹시 갖고 싶었으나 학교 앞 초라한 전방(廛房)에선 그놈을 구할 수 없었다. 혼자서 낑낑대며 적당한 나무로 깎으려 해보았으나 그건 결코 용이한 일이 아니었다. 이를 본 당신께서는 아주 능숙한 솜씨로 팽이를 깎아 어린 아들에게 쥐어주셨다. 이때, 나는 기쁨에 겨워 ‘울 아부지가 최고’라는 탄성을 질렀는데 지금껏 어머니는 이 일을 두고두고 한 시절의 부자간의 정겨운 순간으로 추억하시곤 한다.

아버지의 작업을 바라보는 것은 어린 내게 참으로 경이롭고 흥미로운 일이었다. 아버지는 비교적 작은 키에 도타운 몸피였는데 별 서두르는 법도 없이 나무를 자르고 깎고 대패질을 하여 순식간에 단정한 공작물을 만들어내시어 나는 늘 그런 부조화를 불가사의한 것으로 느끼곤 했다. 목수들이 대개 그러하듯이 귓뒤에 작은 몽당연필을 끼우고 눈을 가느다랗게 뜨신 채 곡척(曲尺)에다 시선을 모으는 아버지의 모습은 마치 당신의 구렛나루에 머물다 가는 바람과 햇빛의 일부인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내가 막 젖을 뗄 무렵부터 시작한 방앗간을 운영하면서 아버지께선 방앗간은 물론 집안에 요긴한 모든 공작물들을 손수 만드셨다. 각각 다른 크기의 연장궤는 물론이고 함석을 이용한 각종의 소쿠리나 자투리의 송판을 짜 길죽한 나무의자(저 6,70년대의 만화방에 모여든 조무래기들을 일렬횡대로 앉히던 그런 의자 말이다.) 등속을 만드셨고, 만년에는 훌륭한 솜씨로 TV대(臺)를 짜시기도 했다. 아아, 그리고 내 어린 시절, 얼어붙은 낙동강 위를 달리던 썰매들……도 결코 빠뜨릴 수 없다.

내 신혼 시절에 내 방 한구석을 장식했던 붉은 페인트칠의 자그마한 책장도 아버지의 솜씨셨다. 그 책장을 채웠던 내 빈약한 장서들은 지금 훨씬 크고 의젓한 서가에 누렇게 변색된 채로 남아 있지만, 당신은 이 세상에 계시지 않다. 솔가해 낯선 땅에서 한 울을 이뤄살다 황급히 달려온 막내의 얼굴을 흘낏 일별해 보시곤 아버지는 만 24시간 동안의 혼수상태를 끝내고 숨을 거두셨던 것이다.

아마 81 년의 여름이었으리라. 태풍이 지나간 후에 수해가 여러 집을 덮쳤는데 우리 집도 예외는 아니어서 당신이 손수 지으신 흙담의 기와집의 뒷벽이 조금씩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면사무소에서 나온 얼마간의 지원금으로 아버지는 인부를 들여 그 뒷벽을 시멘트 블록으로 다시 쌓았는데, 공사가 끝나고 고정해 놓은 내 방의 문틀에 마지막으로 문을 달고 나서 지으시던 아버지의 표정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문틀의 고정이 설었던 탓일까. 아귀가 맞아야 할 문과 문틀의 마지막 틈이 길쭉하고 예리한 각도의 역삼각형으로 벌어졌던 것이다. 오랜 세월 동안 단련된 당신의 감각과 의지를 배반하고 삐죽이 틈을 드러낸 문틀 앞에서 아버지는 참으로 요량할 수 없을 만큼의 참담한 표정이셨다. 그러나 아버지는 결국 자신의 녹슨 솜씨를 스스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되었던 듯하다. 당신께선 쫄대를 적당히 잘라 붙이는 걸로 벌어진 문틈을, 청년 시절부터 단근질한 당신의 감각을 압도해 버린 세월의 간격을 여미셨던 것이다.

그런 아버지의 피를 이야기했지만 기실 나는 그런 공작엔 손방이나 진배없는 편이다. 공구에 대한 일종의 집착도 서른이 넘고, 가정을 온전히 이루면서 시작된 것이니, 일생을 관류했던 아버지의 이력 앞에 감히 그 ‘피’를 운운할 자격이 애당초 없는 것이다.

올 들어 낯선 땅으로 옮아 살면서 이룬 몇 가지의 공구들, 몽키 스패너와 단단한 새 펜치나 규격이 다른 드라이버 등속을 가끔씩 사용하면서 나는 다시 새삼스럽게 톱과 대패 따위의 목공구에 대한 향수에 사로잡히게 된다. 이미 버리고 오다시피 한 고향집에 남겨진 아버지의 공구들은 이미 너무 낡아서 제 기능을 잃어버린 것들이다.

아버지께서 세상을 떠나신 지 벌써 10 년이 가까워지고 있는 것이다. 간암이 막 일흔이 되셨던 당신을 빼앗아 갔다. 막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 당신께선 자신의 병명을 짐작조차 못하셨다. 모두가 간경화라고 둘러댔고, 치유될 수 있다고 당신은 믿으셨던 것 같다. 온몸으로 번진 황달과 무력감으로 거의 기동도 못하시면서도 아버지께선 ‘살 수 있을 것 같다’는 희망을 버리지 않으셨지만, 혼수에 빠진 24시간 후에 단순히 삶에의 미련으로서가 아니라, 가족과의 단란한 한때에 대한 소박하지만 강렬한 미련을 남겨두고 눈을 감으셨다. 1985년 을축 팔월 스무이레였다.

아버지의 육신이 산으로 향하던 날은 내가 낳은 당신 손자의 백일이었다. 그 날 네 살이던 내 딸애가 역시 아버지의 솜씨였던 녹색의 페인트칠을 한 대문을 붙잡고 눈이 빨개지도록 울어대던 모습을 지금도 나는 잊을 수 없다.

그리고 지금에사 어렴풋이 깨달은 일이지만 그 소박한 생애를 끝낸 아버지가 머문 떠돌이별―이는 가브리엘·마르께스의 “백년 동안의 고독”에 쓰인 말이다. 마르께스의 의도가 어쨌든 간에 나는 이승을 떠난 영혼은 본질적으로 외로운 존재이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래서 그들은 이승의 가녘을 나지막하게 떠돌아 다닌다고 믿는다.―은 지금도 우리 가족들 주위를 나즈막하게 떠돌고 있다고 나는 믿는다.

만 다섯 해에 가까운 해직 시절 동안 나를 무시로 충동질했던 것은 목공으로의 전업으로, 이미 그 방면의 전문가가 되어 있던 한 목수 친구의 도제(徒弟)가 되는 것이었다. 굳이 그것을 충동질이라고 표현한 것은 그것이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희망이라는 사실을 나는 너무도 분명하게 깨닫고 있었던 까닭이다.

나는 그때 이미 서른 고개를 훌쩍 넘어 있었고, 그만큼의 세월 동안 나를 지탱했던 것이 서툰 관념과 이론들이어서, 분명하고 단순한 사실조차도 난삽한 허구로 덧칠하는 데 이력이 난 얼치기 먹물이었던 것이다. 내가 5년만 젊었어도…, 자넬 따라다니며 나무를 만지며 살고 싶어. 이건 정말이야.

어느 날,술자리에서 만난 예의 목수 친구에게 내 희망을 이야기했을 때, 그 사람 좋은 친구는 맑고 정겹게 웃기만 했다. 소목일이면 모를까, 요새 집짓는 데 목수가 하는 일이 뭐 있기나 해야지……. 국민학교 졸업으로 자신의 학력을 마감하고 스무 해 이상을 톱밥을 먹고 살아온 그 자그마한 내 친구는 자신의 신산한 삶에 끊임없이 옹이를 박았던 숱한 눈물과 땀을 이해하지 못했던 어릴 적 친구를 그렇게 용서해 주었다.

그래도 나는 가끔씩 길거리의 전신주 위에, 혹은 정류장의 게시판에 붙은 직업훈련원의 원생 모집 공고를 설레임과 아련한 슬픔과도 같은 눈길로 쳐다보곤 한다. 그러면서 나는 스스로에게 다짐하곤 한다. 언젠가, 내 삶에 다소의 여유가 생긴다면 나는 일요목수(일요화가가 있다면 일요목수가 되지 말란 법은 없을 터이다.)가 되리라고.

그러나 과연 그 ‘언젠가’가 언제가 될지 나는 알 수가 없다. 올에 조부의 출상 덕택에 백일을 빈손으로 넘긴 손자는 열살이 되었다. 그애는 낳았을 때는 내 국화빵이라는 평가를 받았지만, 타고난 흰 살결과, 여름이 들면서부터 땀으로 속옷을 적셔내는 체질과 너그러운 성품, 애비의 서툰 공작에 동참하는 집요한 관심 등에서 나는 누대에 걸친 피의 순환을 확인하곤 한다. 아버지께서 머문 떠돌이별은 내 머리를 낮게 스쳐가 시방 아들놈의 이마에서 넉넉하게 쉬고 계신 것이다.

이달 말께 고향을 찾으면 나는 아버지의 묵은 연장궤를 뒤져볼 터이다. 그리고 여유가 생기는 대로 쓸만한 톱과 대패 따위의 목공구를 마련하고 싶다. 그것은 내 머리 위를 스쳐간 한 따스한 떠돌이별을 맞는 내 추억과 사랑의 제의(祭儀)이기도 하다.

1994. 10.

*이 글을 읽고 나서 아내는 목이 메었고, 딸애는 설움에 겨워 울먹였다. 모두 다 우리 가족들에게 사랑의 추억으로 남아 계신 아버지의 따뜻한 마음 탓일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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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2-01 09: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낮달 2005-12-01 13: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아픔은 아직도 생생하시겠지요. 내 아픔도 나이가 먹을수록 깊어집니다.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어머니의 것과는 또다른 울림을 갖는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