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정원 - 상
황석영 지음 / 창비 / 200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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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을 가까이 하면서 얻는 소득은 쏠쏠하다. 그 중에서 온라인 서점을 발견하고 종종 그 서점을 이용하면서 얻는 성취감은 두 가진데, 하나는 지속적으로 서점에 가지 않고도 신간들을 검색해 볼 수 있는 파한(破閑)에 있고, 또 하나는 오프라인 서점에서는 엄두도 못 낼 가격으로 그걸 손에 넣을 수 있다는 점이다.

오래 전에 나는 황석영의 장편 소설 “오래된 정원”을 읽었다. 그는 내가 좋아하는 작가 중 하나일뿐더러 스무 살을 전후해 세상을 읽고 그것을 표현하는 방식 따위에서 내게 커다란 영향을 끼친 이다.

이 소설은 저 파란과 격동의 20세기의 마지막 20년을 다룬 문학적 연대기다. 작가는 저 80년대의 벽두를 피로 장식한 ‘광주에서의 학살’을 보고한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의 기록자였고, 80년대 후반에 북한을 극적으로 방문했고, 덕분에 90년대의 초중반을 감옥에서 보낸 이다. 따라서 그는 저 지난 20년에 대해서 충분히 말할 자격이 있는 사람인 셈이다.

다시, 이 소설은 광주의 학살로 문을 연 이래 ‘군사독재권력과 민족민주운동과 피어린 대결이 숨막히게 진행된 80년대와 자본주의의 전지구적 승리라는 휘황한 조명 앞에 꿈도 열정도 덧없이 사위어 버린 듯한 90년대’(염무웅 서평)를 살아온 한 연인들의 이야기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세상을 사랑하고 그것을 위해 죽어갔던 모든 사람들의 이야기다.

남자는 0.75평의 독방 안에서, 그리고 여자는 이쪽 바깥에서 한 세상을 보낸다. 20여 년만에 출감한 남자(오현우)는 이미 병사한 그의 연인(한윤희)이 남긴 노트와 스케치북 속에 남긴 80년대의 삶과 투쟁을 회상하고 추적해 간다. 반 년이 채 안 되는 짧은 사랑의 시간 동안 그들이 낳은, 이제 열여덟 살이 된 은결이라는 딸과의 만남을 앞두고 소설은 끝을 맺는다.

후기에서 작가가 밝힌 대로 ‘아직도 희망은 있는 건가’고 우리는 되물어야 한다. 작가에게 ‘오래된 정원’은 무릉도원이거나 유토피아이며, 그것은 ‘더 나은 삶에 대한 꿈을 추구한 세대의 초상’이다. 그것은 남자에게 남긴 노트에서 ‘우리가 지켜내려고 안간힘을 쓰고 버티어 왔던 가치들은 산산이 부서졌지만 아직도 속세의 먼지 가운데서 빛나고 있’다고 말하며, ‘당신은 그 외롭고 캄캄한 벽 속에서 무엇을 찾았’냐고, ‘당신은 우리의 오래된 정원을 찾았’냐는 여자의 물음과 잇닿아 있는 것이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노동시인으로 더 유명한 한 운동가가 스스로를 스타의 반열에 올리며, ‘돈이 되는 운동’을 주장하는 이념의 왜곡과 혼돈 속에 비록 우리가 서 있다 하더라도, 그 시절의 이념이 다만 설익은 관념과 추상적 구호였다 하더라도, 우리는 아무도 저 고통과 절망의 시대에 연출된 모든 사람들의 삶과 죽음의 의미들을 결코 가벼이 바라볼 수 없다. 문제는 그들 세대의 ‘무거움’이 아니라, 변화는 있되, 변화에 대한 믿음을 상실한 이 날라리 시대의 ‘가벼움’일 터이다.

두 권의 책으로 다시 만난 정원, 합법화라는 달콤한 과실 앞에서 더러는 주저앉고 더러는 비켜선 우리들의 나태와 타협에 그들의 사랑과 삶은 날카로운 송곳처럼 되물어 온다. ‘당신들은 그 외롭고 캄캄한 벽 속에서 무엇을 찾았나’. 이제 우리가 대답할 차례다. 우리는 그 외롭고 캄캄한 벽 속에서 무엇을 찾았나.

아직도 희망은 있는가. 작가는 대답한다. ‘질문이 계속되는 한 우리는 다시 출발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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