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10년이란 시간 속에 담긴 변화와 그 의미는 어떤 것일까. 꼭 10년 전(1998년)에 나는 한 시골고등학교의 3학년 담임을 맡았다. 인연이 닿아서였겠지만, 1학년 때에 이어 두 번째로 나는 그 아이들을 만났다. 이미 서로를 알 만큼은 아는 사이여서 우리는 아주 편안하게 한 해를 함께했다.

이듬해 2월 아이들이 졸업할 때, 10년 후쯤에 꼭 한번 만나자며 우리는 헤어졌다. 그리고 이태쯤은 아이들과 내왕을 했다. 5월 스승의 날이 되면 아이들은 추렴하여 나를 안동의 삼겹살집으로 초청해 주었던 것이다. 그러고 나서 사내아이들이 입영을 시작하면서 연락이 뜸해지더니 4, 5년 전부터는 아예 연락이 끊어졌다.

이 아이들의 안부가 궁금해진 건 지난 5월 스승의 날에 작년과 올해의 아이들로부터 겹으로 축하를 받고 나서였다. 기억이 정확하지는 않았지만, 아이들과 ‘10년 후 운운’하는 이야기를 나눈 걸 떠올린 것이다. 무엇보다 그해 말에 오토바이 사고로 머리를 다쳤던 아이의 안부가 몹시 궁금했다.

묵은 학생 요람을 꺼내놓고 몇 차롄가의 통화 끝에 이미 결혼한 여자아이와 연락이 닿았다. 모두들 안부가 궁금하다고 전했더니, 여러 군데서 걸려온 아이들의 전화를 받았다. 하나같이 그새 10년이 되었냐고 반문하면서 지난 시절을 추억했다. 흐르는 세월은 매정하고 삶은 고단한 법이다. 아이들은 제각기 꾸려온 시간 속에서 10년 전을 따뜻하게 떠올려 주었다.

여학생 중 여럿은 결혼해 어머니가 되었고, 모두들 여러 지역에 흩어져 살고 있었다. 염려했던 아이는 많이 회복된 것을 확인하면서 걱정을 덜었다. 문경 쪽에 혼자 살고 있는 그 녀석에게 다녀오려고 했는데, 연락이 닿지 않아서 만나지 못했다. 그리고 두어 달이 지났다.

지지난 주, 이미 정년 퇴임하신 옛 은사를 뵈러 가는 길에 나는 1, 3학년 계속 반장을 맡았던 아이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16일 안동 인근의 펜션에서 동기들 모임을 갖기로 했단다. 말하자면 그게 10년 전 우리가 어정쩡하게 나눈 약속의 만남인 셈이었다.

글쎄, 몇 명이나 모일는지, 각각 어떻게 변한 모습으로 나타날 것인지가 자못 궁금해서 나는 며칠 전부터 설레었던 것 같다. 당일 오후 6시께 아이들 2학년 때 담임이었던 후배 교사와 함께 약속 장소에 나갔다. 미리 와 있던 예닐곱 명의 아이들과 만났을 때의 반가움을 어떻게 다 표현하겠는가.






밤 열 시가 넘을 때까지 아이들은 계속해 왔고, 펜션의 야외에서 삼겹살과 갈비에 소주를 곁들인 성찬은 자정이 넘도록 계속되었다. 모인 아이들은 나중에 꼽아보니 남녀 각각 9명씩 모두 열여덟 명이었다. 서울서 내려오다가 차편이 없어서 대전에서 되돌아 간 아이, 오려고 했으나 여의치 않았다고 전화를 걸어온 아이들이 또 대여섯이었다.

사내아이들은 소주를 거의 물 들이켜듯 했는데 나는 아이들이 건네는 술잔을 사양하거나 한 방울씩 꺾어서 마시느라 무진 애를 썼다. 여럿이 모이다 보니 곳곳에서 얘기꽃이 만발했다. 아이들의 이야길 이리저리 듣다 보니 기실 내밀한 얘기를 깊이 나누지는 못했다.

스물아홉 살. 한창 일을 하거나 사회 진출을 모색하는 시기다. 공학 계열의 학교를 나와 기계관련 연구소에서 일하고 있는 친구들, 대학원을 다니는 친구, 간호사, 구미와 안동, 대구와 서울에서 각각 직장 생활을 하는 아이들, 아이 둘을 기르는 주부, 미용실을 열고 있는 아이, 내년도 결혼을 준비하고 있는 친구, 8개월 된 아이를 데리고 남편과 함께 온 쌍둥이 중 큰아이…….

결국 술자리는 새벽까지 이어졌고, 아침 6시까지 밤을 홀딱 새웠다. 모두들 그제야 쓰러져 잤는데 10시 반께 일어나니 아이들 반은 이미 돌아가고 없다. 저마다 사는 게 바쁜 것이다. 몇몇은 일을 나가고 몇몇은 볼일이 바쁜 모양이었다.

아침을 먹고 나서 인근 부용대와 병산서원을 돌아보기로 했다. 외지에서 온 손이 있으면 늘 밟는 여정이다. 아이들의 승용차 두 대에 9명이 나누어 탔다. 부용대 아래 겸암정사 마루에 앉아 쉬다가 사진을 몇 장 찍었다. 아래 사진이 그거다. 사적 공간인 블로그긴 하지만 내가 자신을 드러내는 걸 꺼리는 것은 어쩐지 난데에 벌거벗고 서는 기분이 들어서다. 아이들 속의 내 모습이 생뚱맞아 보이진 않은지 모르겠다.









병산서원 만대루에서 우리는 오래 머물며 쉬었다. 잠깐 비가 한 줄기 지나간 뒤였는데, 누각 위로 불어오는 바람이 시원하였다. 우리는 이런저런 삶 주변의 이야기를 가볍게 나누었다. 그리고 만대루 난간에 기댄 아이들의 모습과 그들의 풋풋한 미소를 여러 장 렌즈에 담았다.

복직하고 이태째, 몸과 마음의 부조화와 돌아온 교단에 대한 부적응으로 힘들었던 시기였다. 1996년, 변화가 필요하다고 믿었던 나는 내신을 냈고 새로 전입한 학교에서 1학년 담임으로 아이들을 만났다. 면 단위의 시골, 성적이 썩 좋거나 집안이 넉넉한 아이들은 인근 시군으로 진학하고 그도 저도 아닌 아이들 마흔다섯 명이 올망졸망 기다리는 교실이었다.

일찌감치 ‘매’를 놓았지만 나는 어떠한 경우에도 얘들을 체벌하지 않겠다고 거듭 다짐했다. 일주일도 지나지 않아 여학생 셋이 말썽을 부려 학생과에서 벌을 받고 내게 왔다. 나는 나직하게 ‘왜 그랬냐’고 물었고 아이들은 ‘죄송’을 거듭했다. 나는 아이들에게 ‘잘 하겠다’거나 ‘다시는 실수하지 않겠다’는 형식의 약속을 강요하지 않았고, ‘모두가 스스로의 선택’에 달렸다고 말해 주었다.

그리고 1년, 때때로 나는 고함을 지르고 호되게 꾸중을 하긴 했지만 아무도 내게 매를 맞지 않았다. 아, 있다. 3학년 2학기 때였던가. 사내아이  대여섯 명이 염치도 없이 교실 앞에서 담배를 피우다 내게 걸렸다. 나는 녀석들을 엎어놓고 들고 다니던 교편으로 엉덩이를 서너 대씩 불이 나게 갈겨 주었다. 금도를 지키라 했지? 아이들은 죄가 되어 머릴 들지 못했다.

순박하고 정이 깊은 아이들이었다. 나는 마음으로 아이들을 믿었고 아이들도 말없이 그걸 증명해 주었다. 씩 멋쩍은 미소를 깨물면서 뒤통수를 긁적이는 아이들, 쳐다보기만 해도 서로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고 말하면 허풍일까.

여름방학에 사내아이 둘과 함께 인근 소백산으로 1박 2일의 산행을 했던 기억도 빼놓을 수 없다. 앞서 이야기한 오토바이 사고로 다친 아이가 그 산행을 같이 했다. 아주 밝고 유쾌한 아이였는데 녀석은 이번 모임에  오지 않았다. 한 녀석은 이번 모임에 와서 그 때 그 산행이 마지막 등산이었다면서 12년 전을 함께 이야기했다.

아이들은 돌아가며 모둠별로 일기를 썼고, 학년말에 우리는 문집을 한 권씩 나누어 가졌다. <열일곱 살의 비망록>은 1996년 마흔한 살짜리 교사와 열일곱의 소년소녀들이 함께 가꾸어 낸 사계의 기록이었다. 수업을 마치고도 시외버스 편으로 받게 될 문집을 초조하게 기다리던 더벅머리 소년들의 모습도 잊을 수 없다.

이듬해 나는 담임을 맡지 않았지만 아이들이 가는 설악산 수학여행에 동행했다. 마치 내가 저희들의 삼촌이나 맏형님 같은 느낌이었다. 우리는 그렇게 아주 무관한 사이가 된 것이었다. 그러나 이듬해에 내가 다시 아이들을 맡으리라고는 나도 아이들도 생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되었다. 부득이한 일이 있었다. 나는 기꺼이 아이들을 맡았고 담임 발표를 하던 날 아이들은 기분 좋게 팔뚝을 흔들어댔다. 그리고 1년, 여학생들은 그들 특유의 다정다감으로, 사내 녀석들은 또 그들만의 두터운 의리와 인정을 내게 유감없이 나누어 주었다.

반드시 순탄한 시간만은 아니었다. 아이들 몇몇이 이른바 삐딱선을 타기도 했고, 그 과정에서 내가 속이 잔뜩 상했던 만큼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마음에 상처를 입었을지도 모른다. 이번 모임에 그 아이들도 왔다. 글쎄, 그래서 그랬는지, 그 애들은 서먹해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들은 나름대로 자기 몫의 삶을 열심히 꾸려가고 있었다.

가장 안타까웠던 것은 불과 서너 달을 앞두고 사내아이 하나가 온갖 만류를 뿌리치고 학교를 그만둔 것과, 앞서 얘기한, 오토바이 사고로 한 녀석이 크게 다치게 된 일이었다. 나는 이번에 그들을 만날 수 있길 기대했지만, 녀석들은 이번 모임에 나타나지 않아 섭섭했다.

학교를 졸업하고 대부분의 아이들은 전문대학을 선택해 진학했다. 그리고 10년. 아이들이 졸업하고 난 이태 뒤에 나도 그 학교를 떠났다. 인근 시군의 두 개 학교를 거쳐 나는 현재의 학교로 전입했고, 아이들은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했고, 연애를 하거나 배우자를 만나고 몇몇은 또 부모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열심히 자신의 삶을 가꾸어 왔다는 점은 아무도 다르지 않았다. 나는 아이들이 보여주는 건강한 삶의 모습에 가슴이 뻐근해졌다.

안동 시내에 들어와 냉면으로 늦은 점심을 때우고 우리는 헤어졌다. 내가 그들로 하여금 10년을 돌아보게 만들었다고, 그래서 고맙다고 아이들은 말했다. 지난 10년의 세월, 때론 회한이 없지 않지만 그 시간이 소박하게 빛나고 있다면 그것은 오로지 아이들의 건강한 마음과 미소 탓일 터이다.

자주 연락드릴게요. 건강하셔야 해요. 그래, 좋은 날을 받으면 꼭 연락해 다오. 우리는 길거리에서 악수를 하고 헤어졌다. 꼬박 밤을 새운 지난밤의 피로가 한꺼번에 밀려왔다. 자주 만나자고 인사를 나누긴 했지만, 삶은 만만하지 않다. 마음과 달리 전화 한 통 하기도 쉽지 않고 그러다 보면 몇 해가 쏜살같이 지나가게 마련이다.

그러나 그게 뭐 문제겠는가. 우리네 삶을 스쳐간 숱한 봉별(逢別) 속에 아이들은 나이를 먹고 나 역시 늙어갈 것이다. 비록 만나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 아이들과 함께 내가 동시대인으로서의 연대의 시간 속에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은가 말이다.



<2008. 8. 19.>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 출판사에 보낸 원본 사진. 크기를 줄였다.




 
          ▲ 만휴정(晩休亭). 보백당 김계행이 세운 정자다. 안동시 길안면에 있다.


이런 게 '안빈낙도' 아니겠는가?  (2007. 7. 30)
-선비들이 지향한 청빈의 삶, 안동 만휴정을 찾아서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425337




 ▲ <조선사 클리닉>에 실린 내 사진. 'ⓒ 장호철' 표시도 선명(!)하다.


지난 6월 25일이다. 블로그 쪽지함으로 편지 한 통을 받았다. 도서출판 추수밭(청림출판의 인문·교양 도서 전문 브랜드라고 한다.)의 편집자로부터였다. <오마이뉴스>에 실린 기사를 보고 하는 연락이라면서 그 출판사에서 내는 책의 본문에 내 기사에 실린 사진을 쓰고 싶다는 전갈이었다.

서신에서 그 편집자는 저작권료를 지불하고 사진 원본을 구입하고 싶다고 정중하게 제의해 왔다. 나는 잠깐 혼란스러웠다. 웬 저작권? 그건 워낙 내 삶과 무관한 개념이어서였을까. 나는 그이가 제시한 저작권료가 적정한지 않은지 따위에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냥 줄 수도 있는 사진인데, 저작권료까지? 그건 정말 유쾌한 일이 아닌가. 나는 쾌히 승낙하고 사진 원본을 보냈다. 얼마 후 내 계좌로 소액이었지만 예의 ‘저작권료’가 입금되었다. 나는 기분이 썩 좋았다. 드디어 사진 한 장을 팔았다! 


▲ 조선사 클리닉(김종성, 추수밭, 2008)
출판되면 책을 한 부 받을 수 있겠냐고 했더니 기꺼이 보내주겠다고 했다. 그리고 오늘 퇴근하니 예의 책이 도착해 있었다. 책 표지에 붙인 메모지에서 편집자는 깨알 같은 글씨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내 사진이 책의 31쪽에 실려 있다고 알려 주었다.

왼쪽이 바로 그 책이다.  '비뚤어진 조선사 상식 바로 세우기'라는 부제가 붙은 책의 제목은 <조선사 클리닉>이다. 저자가 눈에 익은 이름이다 싶었더니 MBC TV에서 방영한 드라마 <이산>이 한참 뜨고 있을 때 <오마이뉴스>에 '사극으로 역사 읽기'라는 연재 기사를 썼던 김종성이란 이다. 결국 내 사진은 <오마이뉴스>를 매파 삼아 <조선사 클리닉>을 만난 셈이다.

위 두 번째 사진이 바로 내 사진이 실린 부분이다. 예의 내 기사가 <오마이뉴스>에 실린 건 지난해 7월말이다. 그 기사에 나는 안동시 길안면의 정자 만휴정(晩休亭) 누마루에 걸린 청백리 보백당 김계행의 유훈을 찍은 사진을 썼고, <조선사 클리닉>은 그 사진을 책에 실은 것이다.

   
  오가무보물(吾家無寶物) 내 집에 보물은 없다.
보물유청백(寶物惟淸白) 보물이 있다면 오직 맑고 깨끗함뿐이다.
 
   


비록 작은 사진이지만 상업적 출판에 앞서 저작권자에게 저작권료를 지불하고 책을 만들겠다고 할 만큼 세상은 변한 것이다. 최근 나는 문학 교과서에 실린 벽초 홍명희의 <임꺽정>을 아이들에게 가르치고 있다. 나는 시중에 출판된 책이 사계절 출판사에서 북에 있는 벽초의 손자인 작가 홍석중과 ‘출판권 설정 계약’을 체결하여 간행한 책이라는 점을 소개했다. 이는 분단 역사상 최초로 북한과 정식 저작권 계약을 맺은 작품이라는 것도.

저작권이란 국어사전에 “문학, 예술, 학술에 속하는 창작물에 대하여 저작자나 그 권리 승계인이 행사하는 배타적·독점적 권리”로 정의된다. 이 저작권은 저작자의 생존 기간과 사후 50년간 유지된다고 한다. 나는 벽초 홍명희(1888 ~1968)의 저작권이 2018년까지 지속된다고 아이들에게 설명해 주었다. 사후 50년이 지나면 저작권이 소멸됨으로써 작품은 그 사회와 구성원들의 유산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우연히 편집자의 눈에 띄어 책에 실리게 된 평범한 사진이고 그게 무슨 저작권과 관련해 다른 의미를 가질 일은 없다. 그러나 뜻밖의 기회로 저작권을 새롭게 이해하게 된 것은 수확이라면 수확이다. 내 이름자를 곁들인 사진이 실린 묵직한 책 한 권을 받아드는 기분도 쏠쏠하다고 아니할 수 없다.



                                                                                <2008. 8. 2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경칩이다. 겨울잠 자던 개구리가 기지개를 켜고, 겨울 삼석 달 땅속에서 웅크리고 있던 버러지도 꿈틀거린다는 절기다. 아직 교복을 갖춰 입지 않은 신입생들로 북적이는 학교도 바야흐로 옹근 경칩 절기인 듯하다. 돌아온 지 한 주가 다 되어 가건만, 지난 2월말 미몽에 취한 듯 만난 개골산(皆骨山)의 황량한 골짜기와 금강산 호텔, 고성항 횟집에서 만난 볼 붉은 처녀들의 모습은 기억 한켠에서 여전히 새록새록 살아 있다.


정부가 비용을 부담하는 관광성 연수와는 통 인연이 없었던지라, 연수 연락을 받고도 나는 "그런가, 금강산엘 간다고?" 하고 심드렁하기만 했다. 금강산 관광이 시작된 지 7년, 이미 휴전선 월경(越境)은 관광 호사가들에게는 일상이 되어 버린 것이다. 따라서 이 땅의 분단 모순 그 질곡과 금단의 현장을 방문한다는 설렘이나 떨림은 전혀 없었다. 솔직히 그런 건조한 감정을 확인하면서 다소 쓸쓸한 기분이 들었을 뿐이다.


남북 양측의 출입국사무소를 넘을 때야 비로소 자신이 '북으로' 가고 있다는 것을 실감하기 시작했던 것 같다. 여권이 필요하지 않고, 형식적이긴 해도 거쳐야 했던 출국과 입국신고 같은 절차가 다른 체제,다른 땅으로 옮아가고 있다는 점을 명료하게 환기해 주었던 것이다. 북방 한계선을 넘으면서부터 관광전용도로를 따라 붉은 깃발을 들고 띄엄띄엄 서 있던 키 작은 인민군 병사들, 그들의 검게 탄 깡마른 얼굴과 의도적 무표정을 바라보면서 나는 이 민족 내부 교류가 단순한 '기쁨'이 아니라, 복합적인 '불편함'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깨닫고 있었던 것 같다.


그 땅과 거기 사는 사람들과는 무관하게 뻗어 있는 전용도로는 주변의 마을과 도로들과 완벽하게 격리되어 있었다. 그리고 도로를 둘러싼 펜스의 아련한 연둣빛은 연도의 잿빛 겨울 풍경과는 너무 이질적이어서 무슨 동화 속의 풍경 같아 보였다. 그래서인지 60년대의 낡은 흑백사진에서 튀어나온 듯한 연변의 낡고 오래된, 마치 창고처럼 보이는 기와집으로 이루어진 마을도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일행들은 관광조장의 익살스런 안내에 가끔씩 미소를 지었지만, 아무도 주변의 풍광에 대한 감흥을 쉽사리 드러내지 않았고 말을 아꼈던 듯하다. 이미 충분히 짐작하고, 이해하고 있었던 일이긴 했지만, 마치 무례한 틈입자처럼 찾아온 관광객의 모습으로 겨레의 남루한 삶을 목도하고 있다는 자각은 결코 개운한 느낌은 될 수 없었던 것이다.


금강산 호텔에 여장을 풀고 금강산 온천을 향해 출발하던 셔틀 버스 안에서였다. 호텔 주변을 아늑하게 둘러싼 곧고 키 큰 금강소나무 숲으로 난 도로를 가로질러 낯익은 북녘의 글씨체로 '우리 식대로 살아가자!'는 구호가 적힌 펼침막이 높다랗게 걸려 있었다. 차 뒤편에서 누군가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래, 한번 살아보라구."


상팔담

물론 나는 뒤를 돌아보지는 않았다. 비무장지대를 넘을 때부터 아슬아슬하게 목구멍을 간질이던 불유쾌함의 정체가 조금씩 그 의뭉스런 모습을 드러내는 듯해 나는 입을 다물어 버렸다. 그리고 이튿날 구룡폭포와 상팔담(上八潭) 산행을 다녀올 때까지 나는 등산로 곳곳에서 만난 남녀 '안내원 동무'들과 어떤 대화도 나누지 않았다. 나는 멀찌감치 그들을 바라보기만 했다. 우리 지역의 사람 좋은 교사들은 그들에게 '안동 간고등어'를 설명하기 위해 거의 거품을 물기까지 했다고 한다. 나는 대체로 그들을 향한 이남 사람들의 선의는 충분히 아름다울 수 있다고 생각한다. 진부한 비유겠지만, 수십 년 만에 만난 부자 형과 가난뱅이 아우의 상봉에서 형의 슬픔과 안타까움, 안쓰러움은 충분히 이유 있고, 그만큼 살뜰할 터이다.



그러나 동기간의 정보다는 현실은 훨씬 무거운 법이다. 의심 없이 '한 살림 뚝 떼어줄' 형편이 아닌 다음에야 그 해법은 만만치 않다. 한바탕 눈물바람 다음에 형제가 맞닥뜨리는 것은 서로가 가진 부와 가난 때문에 더욱 도드라져 보일 자신의 가난과 부다. 그리고 그것은 단순히 '물질적 결핍'의 문제가 아니라, 자신들이 살아온 '삶의 모습'인 것이다. 게다가 그 삶의 변수가 '이데올로기'라는 점까지 감안하면 문제는 점점 심각해질 수밖에 없다. 도움을 준다고 하지만, 주는 쪽이나 받는 쪽이나 껄끄럽긴 매일반이다.더구나 주는 쪽의 다른 가족들의 간섭과 눈초리가 예사롭지 않다면 오가는 보따리에 자존심이 걸리기 마련인 것이다.

곳곳에 '신성하게' 서 있는 '수령님 교시와 흔적'을 뜨악하게 바라보면서, 충분한 방한이 되지 못할 것 같은 초라한 입성의 안내원들의 안내를 건성으로 흘려들으며 산을 오르내린 남쪽 관광객들은 새삼 깨달았을지도 모르겠다. 그들의 구질구질한 가난이 자신의 여유와 부를 오히려 입증하고 있다는 만족감과 섣부른 우월감 따위를 말이다. 나는 산을 오르내리며 만난 남녀 안내원 동무들에게 나와 동료들이 두메산골에 기어든 '양복쟁이'의 모습으로 비추어지지 않기를 바랐다. 자본주의에 대한 그들의 적의와 경멸이 온당하지 않은 것처럼, 그들의 사회주의를 바라보는 우리의 동정과 연민도 그리 온당하지 않다고 나는 생각했던 것이다.

옥류관에서 평양냉면을 먹으면서 나는 조금씩 풀어졌다. 제복을 입고 재바르게 움직이는 '접대원 동무'들의 모습을 줄곧 좇아 다니면서 나는 내내 미소를 깨물고 있었을 것이다. 밝은 빨간색 유니폼과 살구색 스타킹을 입고 신은 날씬한 처녀들은 곱게 화장한 모습이었다. 대체로 볼연지를 강조하는 등 붉은 색조가 강해서 세련되었다기보다는 촌스러웠는데도 불구하고 처녀들은 매우 신선한 느낌으로 다가왔던 것 같다.

 

 



냉면 맛은 남쪽과 썩 다르지는 않았다. 그러나 수줍은 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공연히 이것저것 묻고 싶어하는 이방의 손님들을 주의 깊게 응대하는 그네들의 모습은 아름답고 우아했다. 이남의 습관대로 냉면을 잘라 달라는 요구에 "평양 냉면은 그냥 드셔야 합네다."라고 대답하는 처녀 앞에서 우리는 유쾌하게 소리내어 웃었다. 그녀들은 무엇보다 진지했고 당당했다. 옥류관 입구에서 발목을 드러내는 짧은 개량 한복에 하이힐을 신은 키 큰 접대원 동무는 점심 맛나게 드셨냐고 물었고, 나는 그렇다고, 그러나 음식 맛보다 사람들이 더 아름다웠다고 말했다. 그녀는 말없이 미소했다.

 

 


  ▲ 모란봉 교예단. 그들의 나긋한 손놀림과 초인적 기예는 내게는 투명한 슬픔으로 다가왔다.



오후에 문화회관에서 모란봉 교예단의 공연이 있었다. 1시간 30분이 언제 흘렀는지 꿈결 같은 시간이었다. 나는 공연을 보는 내내 울음을 삼켜야 했다. 너무 격하게 목이 메어 와서, 나는 마치 마법에 걸린 듯했다. 무엇 때문에 이리 눈물이 나는지, 기쁨과 감동으로 탄식하면서도 왜 그리 눈물이 나는지……. 우아하게 왼팔을 치켜들고 무대에 나와 관객들에게 답례하던 자그마한 몸집의 단원들, 그들이 짓던 미소, 그들이 보여준 인간의 육체가 표현할 수 있는 극한의 조형미들, 초인적 기예 앞에 환호하며, 손뼉을 쳐대는 관객들 속에서 나는 내내 소리죽여 울었다.


나는 지금도 내 눈물을, 내 오열을 설명할 수 없다. 누구는 그들의 초인적 기예 뒤에 숨은 인고의 시간과 그 고통을 떠올리고, 누구는 개인의 삶을 규정해 내는 체제의 억압을 떠올렸다고 하지만, 그것은 지극히 편벽한 자본주의적 관점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나는 오히려 그들의 놀라운 기예와 자랑, 말없는 긍지와 자부가 그들의 고단하고 남루한 삶을 뛰어 넘으려는 눈물겨운 자존으로 이해되고 존중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나는 배부른 이남의 관광객들에게 재주를 팔면서도 잃지 않는 그들의 당당함이, 그들의 재주 앞에 과장된 찬사를 바치면서도 시혜자의 연민과 동정을 벗지 못하는 남쪽 사람들의 근시가 가슴 아팠다.

 


▲ 금강산호텔의 승강기 안내원 함혜영 동무

마지막 밤, 장단항의 고성항 횟집에서 광어회와 함께 마신 진로소주와 '안동은 창원 지나 있냐?'고 묻던 볼 붉은 접대원 동무들, 그 처녀들의 엉뚱한 질문도 잊히지 않는다. 그리고 무엇보다 금강산 호텔의 승강기 안내원, 함혜영 동무를 잊을 수 없다. 호텔 로비에 있는 술집에서 생맥주를 마시다가 나는 스물한 살의 그녀와 몇 마디 대화를 나누고 그녀의 사진 몇 장을 찍었다.


나는 반쯤은 취해서 이렇게 말했다. "혜영씨, 남쪽에도 예쁜 여자들은 많아. 그러나 그들은 달라. 그들에게는 당신들에게 있는 건강함과 순수가 없어. 인간을 바라보는 따뜻한 마음이 느껴지지 않아." 그녀의 대답은 나를 간단히 재워 놓았다. "선생님, 좋은 말씀은 다 골라 하시누만요." 내가 그녀와 수작하고 있는 동안, 주변을 지나던 사람들마다 그녀와 격의 없이 어울리는 걸 본 내가 반쯤은 시샘하는 기분으로 "원, 사람들을 경계할 줄도 모르고……."라고 했더니, 그 여자는 기가 막힌다는 듯 이렇게 반문했다. "사람이 왜 사람을 경계합네까? 선생님."


이튿날, 만물상을 오르는 대신 나는 해금강과 삼일포를 둘러보는 것으로 금강산 구경을 마감했다. 첫 날, 나는 일찌감치 마음속에 꿈꾸어 온 금강산을 지워 버렸다. 겨울이라 그야말로 산은 개골(皆骨), 모두 뼈만 앙상해 황량했고, 중첩된 깊은 골짜기와 빛 때문에 풍경을 사진기에 담는 것도 마땅하지 않았던 것이다. 영상으로만 그렸던 금강의 풍광은 훗날 좋은 계절에 다시 만나자고 나는 스스로에게 다짐했다. 곧 다시 오게 될 거야. 나는 우정 스스로를 위로했다.


짐을 꾸려 호텔을 나서면서 나는 함혜영과 작별 인사를 나누었다. 선생님 또 오시라요. 혜영씨 잘 있어요. 내 곧 다시 오지. 이남과 다를 바 없는 복장의 도어맨들의 배웅을 받으며 우리는 호텔을 떠났고 오후 세 시께 다시 군사 분계선을 넘었다. 땅만 이북일 뿐, 금강산 단지를 구성하는 것은 '현대'거나 모습을 감춘 '자본주의'였다. 그러나 그것이 반 세기만의 왕래를 가능케 한 힘이었음도 부정할 수 없다.


금강산에서의 2박 3일. 나를 포함한 640여 명의 교사들이 만난 것은 한갓진 겨울 명산이 아니라, 거기 살고 있는 사람들의 온기와 체취였다. 함혜영 같은 접대원뿐만 아니라, 삼일포를 함께 걸었던 구조대 청년의 수줍던 미소를, 거칠고 공격적인 억양의 말씨 속에 숨어 있는 따뜻한 동포애를 아무도 놓치지 않았다.


그들을 바라보는 내 눈길이 공정하다기보다 치우치고 있다는 점을 나는 인정한다. 그리고 그들에 대한 의도된 '과잉 친절'과 한 겨레라는 핏줄에 기대는 '과장된 감동'이 오히려 다른 체제와 삶에 대한 총체적 이해를 방해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분단 60년의 세월이 이 땅에, 겨레들의 가슴에 남긴 증오와 저주의 흉터와 상채기들을 아물게 하고 지우기 위해서는 아직도 얼마든지 더 치우쳐도 좋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정치적 통일'에 앞서 저마다의 핏줄을 관류하는 피의 기억을 되살리는 조그마한 해원(解寃)의 씻김굿이라고 보아도 좋을 터이다.


< 2006. 3. 13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마음도 나이를 먹는다

 

 ▲ 케테 콜비츠 조각/ 피에타: 죽은 아들과 어머니 Pietä: Mutter mit totem Sohn 1937-1938

 "마음도 나이를 먹는다." 써 놓고 보니 꼼짝없는 신파다. '인간은 서서 걷는다.'는 진술과 다를 바 없는 맹꽁이 같은 수작이다. 물리적인 시간의 변화가 생물학적으로 인간의 몸뚱이와 그 기관의 노화를 가져온다는 점에서 '몸이 늙는 것'은 불가피한 일이다. 그것은 명확한 자각 증상의 형태로 다가오기 때문에 매우 구체적이고 객관적이다.

산 따위를 오르다가 적당한 높이의 내리막을 내려가 보라. 혹은 쉽지 않은 틈새의 개울 같은 허방을 뛰어넘어 보라. 대체로 젊은 축들은 서슴없이 뛰어내려 버린다. 대상을 보는 순간, 그 높이와 자신이 발을 디딜 위치와 착지할 때의 충격 따위가 한꺼번에, 별도의 셈이 필요없이 머릿속에서 정리되는 까닭이다. 허방도 마찬가지다. 건너편을 흘겨보면서 건너기를 결심하는 순간, 이미 의지와 몸의 관절과 근골격 등은 이미 공조의 준비를 마치는 것이다.


뛸까 말까가 망설여진다면 아직은 괜찮다. 바로 다른 경로가 없는가를 주변을 눈여겨 살피고 있다면 이미 그는 '젊지 않다.' 대상을 보는 순간, 이미 자신의 '거푸집'이 먼저 그것을 감당할 수 있을지 없을지를 일찌감치 깨우치고 있다는 명백한 증좌인 것이다. 훌쩍 뛰어 내리는 대신 이 신중한 '중늙은이'는 엉덩이를 땅바닥에 붙이고 아주 조신하게 자신의 거푸집을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하는 것이다.


한여름에도 뜨거운 물로 샤워하는 게 싫지 않게 느껴진다면, 어느 날부터 텔레비전의 볼륨을 저도 몰래 자꾸 키우고 있다는 걸 눈치챈다면, 아이들의 이야기를 제대로 알아듣지 못해 거푸 되묻다가 종내는 이제야 알아들었다는 듯(사실은 여전히 알아듣지 못한 채) 바보처럼 고개를 주억거려 본 경험이 있다면, 그에게서 노화는 이미 매끈하게 진행되고 있는 중이라고 믿는 게 옳다.


마음의 노화는 다분히 심리적이고, 주관적이다. 몸의 노화가 전해주는 직접적이고 객관적인 징표는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지만, 어느 날 그는 너무나도 구체적인 증거 앞에서, 옅은 비애와 상실감으로 그것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고 그 때부터 노화의 속도는 몸의 그것을 앞지르기 시작할 수도 있다.


이제 쉰고개를 겨우 넘긴 형편에 이런 얘기를 하는 건 청승맞을뿐더러 다분히 외람되고 민망한 일이긴 하다. 그러나 몸의 정직한 반응만큼 이 흔들리는 마음의 풍경 앞에서도 우리는 솔직해져야 한다고 믿는다. '나이 먹은 마음'의 모습을 그려 내는 가장 소박한 표현을 나는 '너그러움'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관용'이라기보다는 '살아 있는 것들에 대한 어버이로서의 바라봄'이다.


어버이는 피와 살로 자식과 생명을 나눈다. '혈육(血肉)'이라는 낱말이 생긴 까닭이다. 짐승에게도 제 피붙이에 대한 애정은 본능적이다. 그러나 인간은 뭇 짐승과 달리 그 관계의 의미를 확충하여 이해한다. 말하자면 '세상의 모든 자식들'을 자기 혈육에 대한 시선으로 바라보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나이를 먹는 마음이란, '살아 있는 생명체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그에 대한 외경(畏敬)'이라고 말해도 좋겠다. 나이듦은 결국 '어버이 되기'의 과정이고, 그러한 과정을 통해서 생명에 대한 인식과 이해를 넓히게 되는 것이다. 새 봄을, 그리고 망울을 터뜨리며 피어나는 꽃을 경이로 바라보게 되는 것도 이때쯤이다.

 

▲ 케테 콜비츠의 조각 / 부모 Die Eltern 1932, 벨기에 블라슬로 군인묘지

 

단순히 생물학적으로 어버이가 된다고 해서 세상의 모든 딸과 아들들을 내 아이처럼 바라보게 되지는 않는 듯하다. 그것은 단지 앞서 말한 '너그러움'을 위한 필요조건일 따름이다. 아이들에 대한 어버이의 사랑이 단순히 '내 아들, 내 딸'이라는, 관계에 대한 이해로 이루어진 의례적 성격에서 '내가 지은 생명'이라는 새로운 의미로 심화되기 위해서는 '내 살을 베어서라도……' 식의 피 흘리는 맹목(盲目)의 사랑에 대한 깨우침이 필요하다. 내가 지은 생명의 가치, 그 절대성에 대한 자각이 사랑의 깊이와 넓이를 새롭게 하며 그 보편성을 획득하는 과정으로 발전해 가는 것이다.


어머니의 사랑이 아버지의 사랑보다 훨씬 더 큰 울림을 갖는 이유는 출산의 고통을 통해 어머니는 이미 자기 사랑의 의미를 새롭게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리라.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그들을 내 아이처럼 바라보게 된 것은 내 사랑의 성격을 새롭게 이해하기 시작하고서부터이다. 처녀 적에는 아이들에게 쉽게 매질을 했는데, 아이를 낳고서부터 그게 참 힘이 들기 시작했다는 후배 여교사의 고백도 같은 과정에 있겠다.


아비와 어미의 자리를 넘어 할미와 할아비의 자리에 오르면서 더 이상 그들은 아이들에게 모질어질 수 없는 까닭도 거기 있다. 가끔씩 부모는 분노로 아이들에게 매를 들지만, 조부모가 되면 그게 불가능해진다. 분노보다 생명에 대한 사랑과 연민이 더 큰 까닭이다. 아파트 주변에서 가끔씩 만나는 살빛 맑은 아이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나는 그들의 모습에서 내 아이들이 낳을 아이의 숨결 같은 걸 아주 진하게 느끼곤 한다.


 매주 일요일에 방영되는, 해외 입양아와 그 생모의 만남을 다룬 한 공중파 방송의 프로그램을 즐겨 보는 편이다. 순발력 뛰어나고 말솜씨가 좋은, 젊은 개그맨과 매주 초대되는 예쁘장한 여자 연예인이 진행하는 이 프로그램은 애당초의 목표대로 시종일관 시청자들이 눈물바람을 하게 만든다. 20년이나 30년 만의 만남이 주는 극적 성격도 흥미롭거니와 주인공들이 가감없이 드러내 보이는 슬픔과 고통의 결을 함께 따라가면서 아내와 나는 서로를 의식하지 않고, 눈물을 흘리고 혀를 차는 등 분노와 연민의 감정을 쉽게 감추지 못한다.


지난 연말에는 미국에 입양된 한 자매와 그 생모의 만남을 방송했는데, 늘 그랬듯이 딸들보다 어머니의 눈물과 통곡이 눈물겨웠다. 그건 전적으로 사랑의 무게와 부피를 이해하는 방식의 차이일 터이다. 어머니의 통곡 속에 똬리를 틀고 있는 수천 수만 겹의 한을 그 아이들이 얼마나 이해할까. 양부모를 만나기 위해 들른 집에서 카메라에 잡힌, 계단을 내려오던 양어머니의 표정을 나는 잊을 수 없다. 자신이 기른 딸과 그 딸의 생모를 일별하면서 그 여인이 지은 슬픔과 연민이 오롯이 담긴 그 표정은 마치 어버이의 사랑이 갖는 '동질성'과 '절대성'의 한 미니어처(miniature; 세밀화) 같았다. 그 여자는 천천히 계단을 내려와 딸의 생모를 껴안고 흐느껴 울었다. 인종도, 나라도, 문화도 달랐지만, 그 백인 여성이 보여 준 어머니의 눈물은 사랑의 보편성을 뜨겁게 증거해 주는 것이었다.


어버이로서의 사랑은 한편으로 다시 자식으로서의 어버이 사랑을 되살피게 함으로써 균형을 유지한다. 나이를 먹으며 아이들에 대한 사랑을 새롭게 일구어 가는 한편, 우리는 못다한 '치사랑'을 후회하고 그 회한으로 목이 멘다. 일상에서 만나는 노인들의 굽은 등, 힘겨운 걸음걸이, 굵게 팬 주름살, 가녀린 한숨소리 들은 모두 우리의 어버이의 모습으로 다가온다. 굽은 어깨에 실린 고독, 비낀 하늘에 잠시 머물다 가는 외로운 눈길들, 우리는 고통의 눈금 하나, 마음속 상채기로 그들을 기억하지만, 이미 그분들은 세상에 없다. 그것이 '어버이로 세상 살아가기'의 우울한 공식이다. 그렇다. 마음도 새록새록 나이를 먹는 것이다.


< 2006. 1. 8 >



댓글(5)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hanicare 2006-01-14 15: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큼직한 글씨가 반가운 걸 보니 영락없이 저도 노화되고 있군요. 어릴 때는 오히려 교과서의 큰 글씨가 눈에 안 들어와서 애먹었었는데. 그러나 마음은 어릴 때도 늙고도 어렸었고 지금도 그래요. 다만 그 마음을 담는 주머니가 점점 닳아서 아무래도 둔각이 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생명이 겪는 고통을 보면 점점 더 보아넘기기가 힘들어집니다.

낮달 2006-01-14 20: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지요? 나이 들수록 <연민>의 감정을 가누기가 힘들어집니다. 연민이 <동정>과 다른 점은 대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밖이 아니라 <안>이라는 점이 아닐까 하고 생각합니다. 타인이 겪는 고통과 슬픔을 <자기화>하는 웅숭깊은 시선, 그것을 가능케 하는 게 세월이고 노화가 아닐는지...
주말인데도 이렇듯 발걸음 해 주시니 훨씬 더 반갑네요.

2006-01-24 14: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낮달 2006-01-25 10: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sandcat님. 공연히 신경을 끓이신 것 같군요. 무슨 문제가 있는지. 더바디샵에 관련된 정보는 대부분 한겨레의 기사에서 가져왔고, 인터넷의 검색을 통해서 다른 정보들을 가져왔을 뿐입니다. 소비와 관련된 정치, 윤리적 선택 문제는 누구나 쓸 수 있는 문제가 아닐까 싶습니다. 그러나 막상 이런 전언을 받는 기분은 괜찮군요. 아마 제가 그 기사를 볼 가능성은 없겠지만, 만약 무심코 그 기사를 읽게 된다면, 다소 헛헛한 기분이 될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언뜻 했을 뿐입니다.
아, 환경 운동에선 이렇게 문제를 바라볼 수도 있겠구나, 하고 감탄하기도 했지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2006-01-25 17: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더바디샵과 아니타 로딕, 그리고 삼성

 

 

▲더바디샵이 광고모델로 써 온 인형 '루비'

 몇 해 전 일이다. 롯데호텔에서 농성중이던 노동조합에 대한 경찰의 진압작전이 정도를 넘었다. 경찰은 10여명의 임신부를 구타하는 등 무차별 폭력진압을 자행했고, 당연히 여론이 들끓었다. 여직원에 대한 상습적 성희롱 사건까지 불거지면서 민주노조 진영에서 이끄는 롯데제품 불매운동이 벌어졌다. 어느 날, 한 후배 교사가 아이스크림을 사러 갔다가 빈손으로 돌아왔다. 그는 아주 진지하게 말했다. "롯데 물건밖에 없어서요……."


나는 빙그레 웃었고, 그렇게 말했던 것 같다. "부도덕한 기업을 응징하기 위해 불매운동을 벌이자면, 아마 우리가 아무 고민 없이 살 수 있는 상품이 얼마나 있을까?" 나는 그때 아마 좀 니글니글한 표정이었지 않나 싶다. 그러나 나는 그 친구의 소박한 실천이 무의미하다고 생각지 않으며, 그것이 그 대상 기업의 매출에 털끝만한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 실천의 진정성은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어느 날 서가에 꽂힌 전여옥이나 조갑제의 책을 찢어 폐지함에 넣거나 이문열의 책을 꾸려서 반납운동에 동참하는 행위는 저명 정치인이나 언론인, 작가의 명성에 타격을 가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정치적이든 문화적이든, '권력'을 갖지 못한 시민과 독자로서 '권력'을 가진 대상의 발언이나 표현에 대한 명시적이고 적극적인 반대와 비판의 의사 표시로 이해되는 게 마땅하다. 따라서 그것을 단순한 정치적 프로파간다로 폄하하는 것은 온당치 않다. 그것은 정치적·문화적 소수자일 수밖에 없는 시민과 독자의 주체적 판단과 비판의식을 능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기업 또는 대기업의 부도덕성은 이 땅만이 아니라 전지구적 현상이라 해도 무방할 듯하다. 이른바 국적을 초월하는 자본의 공세는 지구화와 자유무역의 이름으로 제3세계와 가난한 나라를 초토화하고 있다. 이 땅의 대기업들 역시 자본의 이해를 관철하기 위해 지극히 자본주의적 방식으로 노동과 노동자들을, 나아가서는 그들의 삶까지도 제어한다.


기업이 이윤 동기에 따라 움직이고 기능한다는 데 시비를 걸 생각은 없다. 그러나 그 방식은 최소한의 법적·도덕적 정당성을 가져야 한다. 노동조합이 자본주의를 지탱하는 주요한 기둥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노조를 금기시하고 있는 삼성의 경우는 현대와 전근대가 뒤섞여 있는 이 땅의 천민자본주의의 모습을 유감없이 드러내고 있다.


삼성의 '노무관리‘는 정평이 나 있다. 그 방식은 철저하게 전근대적이고, 철저하게 비인간적이고 철저하게 목적관철적이다. 그들은 그들 회사 안에 '노동'이나 '노동자'나 '노동조합' 따위의 형식이나 내용이 존재하지 않게 하는 데 필사적인 노력을 기울인다. 불온(?)한 노동자 감시를 위해 휴대폰 불법복제와 위치 추적 같은 탈법 행위를 기꺼이 감행(재벌과 그 돈의 힘은 너끈히 그것을 조장하고 보호한다)하는 그들 기업의 '글로벌 스탠더드'는 의심할 나위 없이 '무노조 경영'인 것이다.


휴대폰 위치 추적을 통해 노조설립 노동자를 감시했다며 삼성 관계자들을 검찰에 고소한 삼성 일반노조 위원장은 지금 감옥에 있다. 검찰이 삼성관계자를 증거 불충분으로 무혐의 처분한 6일 후, 법원이 김 위원장에게 명예훼손죄로 실형 10개월을 선고한 까닭이다. 이는 어쩌면 '휴먼테크'(!) 삼성전자의 노무관리 방식을 압축적으로 보여줄 뿐 아니라, 한편으로는 '유전무죄, 무전유죄'가 상식으로 통용되는 21세기 한국판 민주주의의 미니어처일지도 모른다. '승자독식'은 '신자유주의와 경쟁'이 유일한 시장의 원리로 추앙받는 한국 사회의 새로운 패러다임이 된지 오래인 듯하다.

 

  더바디샵의  창업자  아니타  로딕

 

노동자로서의 계급적 각성에 이른 한 무력한 노동자 개인의 삶과 생활을 송두리째 뿌리 뽑아 버리려는 집요한 그들의 노무관리 방식은 글로벌 스탠더드와는 무관하게 '야만적'일 뿐이다. 자신의 삶을 옥죄어 온 추적과 미행과 감시의 거미줄 앞에 맨몸으로 선 그 노동자들의 얼굴에 드러난 절망과 공포의 표정을 지켜보면서 나는 더 이상 삼성의 상품을 사지 않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부도덕한 기업의 제품을 사지 않는다는 것은 단순히 경제적 행위가 아니라, 훨씬 더 정치적인 행위다. 그것은 소비자로서의 자기 소비에 대한 윤리적 선택일 뿐 아니라, 나아가서는 실질적으로 엄청난 힘을 소유한 생산자에게 저항하는 정치적 발언인 것이다. 그런 행위가 그 거대 공룡에게 털끝만한 상처조차 입히지 못한다 하더라도 말이다.


특정 기업의 제품을 사는 대신 경쟁적 기업의 제품을 삼으로써 우리의 윤리적 선택은 완성될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숱한 경쟁 기업, 경쟁 제품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단지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이유'만으로 어떤 상품만을 구매할 수 있다면, 그것은 즐겁고 유쾌한 일일 터이다. 그것은 숱한 이성들 가운데서 나의 사람을 선택하는 행위나 여러 명의 후보자 가운데서 특정한 한 사람을 선택하는 총선이나 대선에서의 선택과 동질적인 행위인 까닭이다.


"정치적 실천은 지구에 사는 사람들의 의무다."

"우리는 산성비, 재활용, 시골의 몰락, 녹색 소비자와 인종청소에 대해 발언해 왔다."

이건 정치인이나 시민운동가의 발언이 아니다. 이윤을 목표로 기업을 운영하는 영국의 한 화장품 기업 더바디샵(The Body Shop) 창업자 아니타 로딕((Anita Roddick)의 주장이다.(독일의 토마스 바이덴바흐 감독은 이 히피 출신의 여성 기업인의 헌신적 인생을 조명한 다큐멘터리 '아니타 로딕-바디샵 아줌마'를 서울환경영화제에 출품하기도 했다.) 그녀는 소비자들에게 '자사의 제품을 사는 것은 윤리적인 선택'이라는 이미지를 굳히는 데 성공한 기업인이다.


"여성들이 몸에 불만을 갖도록 하는 것은 비윤리적이다."

"여성은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 가장 아름답다."

다이어트나 여성미를 강조하는 광고에 대한 여성운동가의 발언이 아니다. 화장품을 만드는 기업인 더바디샵은 이러한 인식 아래, '당신의 몸을 긍정하고 사랑하라'는 이념을 실현해 왔다. 그녀의 이러한 인식은 굵직한 허리에 배가 볼록 나온 '평균 체형'의 여성 인형 '루비'를 자사의 홍보 모델로 삼고, 소비자를 오도하는 '뷰티'라는 단어는 아예 쓰지 않으며, 직원 중 여성의 비율을 80% 안팎으로 유지하고, 탁월한 보육시설이나 복지제도 등 여성적 경영 방식을 취하면서, '동물 실험 반대', '용기 재활용' 등 적극적 환경 보호에 참여하고, '자유무역과 세계화 반대'로 이어진다.

 

 

 

더바디샵코리아  홈페이지에  나와   있는   기업 이념

 

반전운동, 인권운동, 환경운동 등을 전개해 온 아니타 로딕은 "우리는 화장품 회사가 아니라 커뮤니케이션 기업으로 기억되고 싶다."며, 직원의 3분에 1에 달하는 거대한 홍보조직을 통해 각종 정치적·사회적 사안들에 대한 포스터를 만들고 집회 등 캠페인을 조직하곤 한다. 그녀는 "광고보다 정치·사회적 실천에 대한 우리의 홍보방식이 효과적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한다.


이탈리아계 이민 가정에서 태어난 로딕은 2차 세계대전 중 어머니를 통해 근검절약의 정신을 배웠고, 지역거래·재활용·재사용·리필링과 같은 '바디샵'의 환경보호 운동을 탄생시켰다. 오늘날 더바디샵의 사회 활동은 방대하다. 인도에서는 바디샵의 코끼리가 몸통에 에이즈 예방법을 광고하며 걸어다니고, 영국에서는 버스 12대가 반전 포스터 등을 붙이고 운행한다고 한다. 기업 활동을 정치적·사회적 발언과 실천의 일부로 만들어 가고 있는 더바디샵은, 아니타 로딕은 행복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디샵은 전세계 1,800개 매장에서 24개 국어로 운영되며, 8,400만의 고객을 가지고 있는 국제적인 기업으로 성장했다.


한겨레에 실린 더바디샵의 이야기를 읽은 딸애는 자신이 쓰던 바디샵 제품을 보여주면서 들뜨고 즐거워했다. 자신의 단순 소비행위가 윤리적 의미를 갖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은 즐거운 일임에 틀림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교통사고로 숨진 조각가의 배상을 두고 예술인 경력을 인정하지 않고 도시 일용직 노임과 60살 정년을 기준으로 보상하겠다는 삼성 계열 보험사의 결정과 이어진 소송 소식을 바라보는 기분은 씁쓸하기만 하다. ('호암아트홀'이나 '삼성 리움'은 삼성이 운영하는 공연장, 미술관이다. 아마 그들은 자신들의 문화 투자와 지원이 이 땅의 문화를 한 단계 높이고 있다고 주장할 것이다.)


윤리적 도덕적 기업 운영의 본보기를 따로 들지 못하는 것은 그 방면에 과문한 탓이라 여기고 싶다. '기업 이윤의 사회 환원'을 모범적으로 실천해 온 유한양행이나 노사상생을 위한 경영전략으로서 뉴패러다임 모델 운영의 귀감이 된 유한킴벌리는 해마다 존경 받는 기업과 기업인의 으뜸으로 꼽히는 삼성전자와 이건희의 그늘에 가려 잘 보이지 않는다. 삼성이나 그 총수가 쌓아올린 거대한 성이 드리운 그림자는 꼼짝없이 우리 경제의 취약점이며 전근대성의 표지라는 것을 사람들은 너무 자주 잊어 버리는 듯하다.


더바디샵이 행복하고, 아니타 로딕이 행복하겠다고 말했지만, 나는 정말 행복한 것은 여러 개의 동종의 상품 중에 꼬집어 한 제품을 고르면서, 자신의 선택이 갖는 윤리적 의미를 즐거워하고 자랑스러워하는 선량한 소비자일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 2005. 12. 18 >

 


댓글(3)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로드무비 2005-12-19 11: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얼마전 바디샵 핸드크림을 선물 받은 적 있는데 친환경제품인가보다
생각만 했죠. 수수한 연두색의 용기 보고......
이렇게 근사한 기업이 있었군요.
정말 멋집니다.

그런데 이 글 제 방에 퍼가도 될까요?
제 방을 즐겨 찾는 몇 분과 나눠 읽고 싶네요.^^

urblue 2005-12-19 11: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습니다. ^^

낮달 2005-12-19 14: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얼마든지 퍼 가십시오. 윤리적 기업에 관한 아주 단순 명쾌한 얘기를 쓸데없이 중언부언해 놓은 글인데, 취할 점이 있다면 다행한 일이겠지요...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