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동안 책을 전혀 읽지 않았다. 한때, 세상에 선 뵌 책은 모두 읽어야 하는 것 같은 강박감에 사로잡혔던 시절에 비하면 장족의 발전이다. 물론 책도 사지 않았다. 어쩌다 한 번씩 고정적으로 들리던 온라인 서점 두어 곳을 기웃대고, 거기 내가 사겠다고 찍어 둔 책 이름을 일별하면서도 까짓것, 아무렇지도 않게 돌아나와도 별다른 감흥이 일지 않았다. 세상이 바뀌지 않은 것은 물론이다.

 방학이 되면서 책 몇 권을 샀다. 물론 찍어 둔 책이 중심이다. 언제 찍었던가, 기억도 가물하다. 쇠귀 신영복 선생의 '나의 동양 고전 독법 강의'(책값도 만만찮다!), 살아 있는 우리 신화(신동흔), 호메로스의 세계(피에르 비달나케), G.마르께스의 최신작 '내 슬픈 창녀들의 추억'에다가 따로 최근 창비에서 낸 '20세기 한국 소설' 시리즈 중, '이태준, 박태준 편'과 '최서해, 이기영 편' 등이다.


 먼저 번갈아 가며 '20세기 한국소설' 시리즈와 '살아 있는 우리 신화'를 읽었는데, 우리 신화 쪽이 흡인력이 있어 쉽게 읽혔고, 소설은 곰삭여가며 천천히 읽었다. 쉬엄쉬엄 몇 날, 며칠이 걸렸다.


 '우리 신화'를 읽으며 솔직히 자신이 문학교사라는 사실이 몹시 부끄러웠다. 교과서에서

배우는 역사가 지배층 중심의 '공문서의 역사'라고 일갈한 선배 교사의 비유를 빌린다면 우리가 교과서에 배운 단군이나, 혁거세, 동명왕의 신화는 '관보'에 실린 신화에 불과하지 않은가, 서사 무가(巫歌)로만 가르쳐온 '바리 공주(바리데기)'가 민간 신화였다고?


 단군 신화를 가르치면서 "우리 신화에는 '천지창조 신화'가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천연덕스레 지껄여 댄, 숱한 문학 수업의 오류는 어찌할 것인가. 건국이나 시조 신화만을 다룬 문학 교과서의 편협성을 나무라기 전에 불핀치류의 '그리스, 로마' 신화의 문법에 익숙한 우리의 의식 세계를 되돌아볼 수밖에 없다.


 건국, 시조 신화로만 신화를 이해하고 있는 이들에게 민중들의 구전을 통해 그 신성(神性)을 면면히 이어 온 민간 신화(무속 신화), '78명의 신들이 펼쳐내는 25편의 우리 신화 이야기'는 벅찬 충격이다. 특히 '작은 가슴에 우주를 품어 안는 들판의 딸, 오늘이' 이야기는 한 편의 동화이며 판타지다.


 공교롭게도 고대 그리스 연구자 비달나케의 '호메로스의 세계'는 그리스 신화 속 영웅 이야기인 '오디세이'와 '일리어드'의 친절한 안내서다. 의도한 것은 아닌데도, 우리 신화와 함께 다시 희랍 신화를 읽을 수밖에 없게 되었다.


 대학 시절, 전공 수업 때문에 읽다 만 '이태준, 박태원'을 다시 읽으면서 '작품의 위대성은 시공을 뛰어넘는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무려 70년도 전의 작품들이 그리고 있는 당대의 현실이 손에 잡힐 듯 다가옴은, 그들의 문학이 지향한 모더니즘에도 불구하고 만만찮은 소설적 성취라 이를 수밖에 없다.


 이태준 단편의 미학적 완성도와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박태원)이 성취하고 있는 모더니즘과 해방 공간에서의 작가들의 사상적 선택은 어떤 상관 관계가 있는 걸까. 한 사람은 이른바 '사회주의 조국'에서 숙청되고(이태준) 다른 사람은 불멸의 작가로 남게 된 저간의 사정들은 흥미롭기도 하다.


  신영복 선생의 두터운 책은 천천히 읽을 작정이다. 88년인가 평화신문을 통해서 읽은 선생의 옥중서신 같은 감동은 가능하면 아껴두어야 한다. 마르께스의 소설도 서사의 즐거움과 기쁨을 위하여 역시 잠시 유보해 두어도 좋다.


 작가가 그리고 있는 작은 우주를 어찌, 어릴 적 입안에서 오래 굴려 그 단물을 취하곤 했던 알사탕에 비길 수 있으랴만, 몰입을 예비하며, 서가에 꽂힌 귀한 책을 그윽하게 바라볼 수 있는 것도 드물게 맛볼 수 있는 호사의 하나인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