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있는 우리 신화 - 우리 신들의 귀환을 위한 이야기 열두 마당
신동흔 지음 / 한겨레출판 / 2004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우리에게 낯익은 신, '옥황상제'나 '용왕'의 계보는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옥황상제'는 하늘을, '용왕'은 바다와 하천 등, 모든 물의 나라를 통치하는 신격임을 알고 있지만, 그런 계보의 근원이 우리의 민간 신화(무속 신화)에 있다는 걸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을 듯하다. 대체로 사람들은 그 낯익은 이름을 통해 도교나 불교의 이미지를 떠올리기 십상이다.


 국문학자 신동흔이 쓴 '살아 있는 우리 신화'(한겨레신문사)는 그 같은 신들의 계보를 밝하면서, 방 안에 모신 '삼신'이나, 부엌의 신 '조왕할아버지', '조왕할머니' 따위의 가정의 신도 그 계통의 한쪽을 차지하고 있다고 알려 준다. 물론 그들의 계보는 올림포스의 제신(諸神)들처럼 일목요연한 체계를 갖고 있지는 않다. 우리 신화들이 각 지역과 마을에서 '나름의 방식으로 구비전승된 데 따른 임의성 또는 자율성을 반영한 현상' 탓이라 한다.


 이 책을 읽고 있자면 자신이 문학교사라는 사실이 몹시 부끄러워진다. 교과서에서 배우는 역사가 지배층 중심의 '공문서의 역사'라고 일갈한 선배 교사의 비유를 따른다면 우리가 교과서에 배운 단군이나, 혁거세, 동명왕의 신화는 어쩌면 '관보'에 실린 신화에 불과하지 않은가.


 20년이 넘게 중등학교에서 '문학' 교과를 통해 '단군과 주몽, 수로 신화'를 가르쳐 왔지만, 정작 이 땅에 천지창조 신화가 없는 이유는 궁금해하지 않은 채, '우리에게는 창세 신화가 남아 있지 않다.'는 얘길 천연덕스럽게 해댄 이 기막힌 오류. 서사 무가로만 가르쳐 온 '바리 공주' 이야기가 민간 신화였다니! 제주도의 창세신화는 오늘도 제의의 현장에서 장엄하게 구송되고 있다고!


 아버지에게 버림 받은, 어린 소녀의 몸으로 이승과 저승의 경계를 넘나들며 병든 아버지를 살려낸, 죽은 사람을 저승으로 인도하는 오구신이 되어 세상을 떠난 영혼들의 죄를 씻어주고 있는 '길 위'의 여신, '바리 공주'(바리데기) 이야기의 서사적 구조는 신화로서의 화소(話素)를 너끈히 갖추고도 남는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를 서사 무가로만 이해하는 것은, 작게는 신화의 범주를 건국이나 시조 신화로 한정한 문학 교육의 편협성 탓이고, 크게는 토마스 불핀치 류의 '그리스, 로마 신화'의 문법에 익숙한 우리의 의식 때문이라고 보는 게 온당할 터이다.


 우리에게 '신화'란 일차적으로 '그리스, 로마 신화'로 이해되며, 가끔씩 양념으로, '쑥과 마늘'의 인고를 거쳐 사람이 되는 '곰할머니'[熊女]와 자라와 고기떼를 타고 엄수(淹水)를 건넌 주몽의 얘기를 떠올릴 뿐이다.그런 이들에게 민중들의 구전을 통해 그 신성(神性)을 면면히 이어 온 민간 신화(무속 신화), '78명의 신들이 펼쳐내는 25편의 우리 신화 이야기'는 일종의 문화 충격일 수도 있겠다.


 이 책에서는 서사 무가로 전해져 온 '바리공주'를 '우리의 영혼을 온몸으로 감싸서 눈물로 씻어줄 구원의 여신'으로 복권시킨다. 지은이는 '온몸을 바쳐 신성한 직무를 감당하면서도 천대와 외면을 벗어날 수 없었던 천민 사제. 그들이 조상신으로 섬겨온 존재가 바리'라고 말한다.


 특히 '작은 가슴에 우주를 품어 안는 들판의 딸, 오늘이' 이야기는 한 편의 아름다운 동화이며 신화적 판타지다. 부모님을 찾아 먼 길, '원천강'을 향해 떠난 오늘이는 긴 여정을 거쳐 부모님을 만난다. 그리고 자신의 여정을 도와준 이들의 의문을, 하나하나 풀어주면서 세상에 돌아오고, 하늘나라 선녀가 되어 사계절 소식을 세상에 전하는 일을 맡게 된다. 한 손에 여의주, 또 한 손에 연꽃을 든 채. 지은이는 그를 '시간의 신'으로 이해한다. 우리에게 '오늘'이 있는 것은 순전히 그의 존재 때문이다.


 책 속에 소개되는 민간 신화들은 모두 전국 각지에서 전승되어 온 무가(巫歌)의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이들이 펼쳐 주는 신의 세계와 그 신격은 그러나, 매우 낯설다. 천민 사제인 무당에 의해 연희되어 온 서사 무가들은, '미혹된 믿음'으로 천대 받으며 간신히 명맥을 이어온 무속신앙을 통해 전승되어 오면서 대부분의 민중들의 기억에서 멀어져 왔던 까닭이다.


 신화는 한 민족의 집단 정체성의 표지일지도 모른다. 따라서 신화를 읽는 것은, 종교를 넘어서, 시대를 넘어서 집단 제의의 기억들을 회복하는 일일지도 모른다. 지은이는 다음과 같이 뇌며 책을 끝맺고 있다.


 "신이란 무엇인가. 파란만장한 삶의 역정을 거치면서 우리 안에서 찾은 우리의 신성이다. 신을 마음에 품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신성한 의미를 찾는다는 것이다. (중략) 눈을 감고 천천히, 아주 천천히 신의 이름을 불러보라.

 '바리-.' 

 그 목소리가 들려오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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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바람 2006-04-24 03: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보았습니다. 조왕할아버지 따라 들어왔답니다. 저도 이 책 보려구요. 첫 발자국에 땡스투를 누릅니다.

shindh 2008-02-02 12: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책을 쓴 신동흔입니다. (답글이 정말 많이 늦었네요.;;)
좋은 서평 감사드립니다. 새삼 어깨가 무거워지는 느낌이 드네요.
바리공주는 '서사무가'가 맞습니다. '무속신화'나 '민간신화'는 서사무가의 다른 이름이지요. 이 소중한 우리의 정신적 유산에 대한 세간의 관심이 살아나는 듯하니 다행입니다. 앞으로 우리의 민중신화가 열 배, 백 배의 힘을 내며 문화와 삶의 한 축으로 자리잡으면 좋겠습니다. 님 같은 분들이 계시니 그리 되리라 믿습니다. 건승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