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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 제1회 문학동네신인작가상 수상작 ㅣ 김영하 컬렉션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05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멀리 갈 일이 있었다. 아주 먼 곳이었다. 남한은 통째로 들어갈 수도 있고 북한까지 합하면 조금 모자랄지도 모른다는 큰 호수가 있는 곳으로, 나는 가고 있었다. 계절답지 않게 아주 뜨거운, 한국에 비한다면 더더욱 뜨거운 태양과 함께.
눈 앞에 펼쳐진 호수는, 호수라기보단 바다 같았다. 멀리 보이는 것은 건너편의 호숫가가 아닌 끝없는 수평선이 하늘과 맞닿아 있는 풍경이었고, 살찐 갈매기들이 날아다니거나 걸어다녔으며, 심지어 소금기를 동반한 짭짤한 바람까지 불었다. 다양한 이국의 언어들이 떠들어지고 있는 주변, 뜨거운 태양, 거대한 호수, 그리고 그 가운데의 나. 가만히 서있던 순간 그런데 왠지 모르게, '멀리 왔는데도 변한 게 없다'는 문장이 떠올랐다. 그러자 우습게도, 웃음이 났다. 멀리 왔는데도 변한 게 없다는 외침을 줄곧 드러내고 때론 숨기는, 한 때 날 매료했고 지금도 여전히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김영하의 소설,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가 생각났던 거다. 혼자서 아무 이유 없이 웃는 얼굴을 하고 있는 게 이상해 보일까봐 손으로 입가를 지워내듯 문질렀다. 멀리 왔는데도 변한 게 없구나, 라는 감상은 한동안 내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은 채 바삭거렸다.
돌아와서 가장 먼저 한 일은 물론, 소설책을 집어들어 읽은 것이 아니었다. 안타깝게도 인생은 영화도 드라마도 아니므로, 그렇게 극적인 진행이 이루어지기는 쉽지 않은 것이다. 짧았던 부재의 흔적들을 정리하고, 바쁜 일상으로의 복귀가 어느 정도 안정이 되자 비로소 뭔가 여유를 부릴 틈이 났다. 책을 찾아 들고-책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책상 옆 책꽂이에 얌전히 꽂혀 있었으니까-, 읽었다. 한동안 머릿속을 부유하던 소설의 편린들이 눈 앞에 문자화되어 놓이자 일단 마음이 편해졌달까. 기분 좋게 소설에 몰입.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라는 이 도발적인 제목의 소설은, 처음 세상에 나왔던 십여년 전에는 물론이고 지금까지도 꽤나 도발적이고 다소 충격적으로 다가온다. 그리고 물론, 매혹적이다. 지금 보면 다소 치기 어린 감이 없지 않지만, 그것 또한 흥미로운 일면이라 할 수 있겠다.
내용은 간단하다. 자살 안내인인 '나'를 주축으로, '나'의 고객이었던 두 여자, '유디트'와 '미미'의 이야기를 각각 기술한 것이다. 물론 그 앞부분엔 일종의 프롤로그가, 중간에는 '나'의 일종의 여행담이, 마지막에는 일종의 에필로그가 있는 전형적인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그 모든 장을 '죽음'이라는 주제가 관통하고 있다. 물론 이 소설에서 무게와 가치를 갖는 죽음의 방법은 자살 뿐이다. 자살 안내인인 '나'는 압축이라는 은유로 자살의 미학, 혹은 가치를 역설한다. 그런 부분에서 이 소설은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켰고, 작품성을 인정받은 것과는 별개로 일각에선 혹독한 비판을 받아오고 있다. 그러나 전부 우스운 것이다. 이 작품은 이론을 체계화시켜놓은 논문이 아니라 다만 한 소설가의 관점에 의한 픽션일진대, 왜 그에 굳이 시비를 가리려 드는가 싶다.
뭐 어쨌거나, 나는 이 리뷰에서 이 소설의 내용과 문장들을 낱낱이 파헤치지는 않겠다. 이것은 다만 리뷰일 뿐 서평이 아니며, 불특정 다수의 독자를 대상으로 하므로 그 중 이 책을 읽지 않은 사람도 많으리라 짐작하기 때문이다. 영화에나 책에나 스포일러가 가장 큰 적 아닌가. 게다가 작품을 두고 감히 왈가왈부하고 싶은 마음도 없고. 혹시나 이 소설을 읽고 이해가 안 가는 부분이 있다면, 아주 친절하게도 책에 꽤나 상세한 서평이 함께 실려 있으니 그것을 참고하면 될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이 리뷰를 쓰는 것은, 이 소설이 나로 하여금 무언가를 쓰고 싶게 만들기 때문이다. 무엇인지도 모를 그 무언가를.
이 소설은 죽음에 대한 다소 건방진 관점을 대놓고 표현함으로써 몇몇 사람들의 반감과 빈축을 샀지만, 사실 우리는 모두 죽음을 생각하고 있다. 대담하거나 은밀하게, 그러나 생각보다 빈번하게. 그리고 우습게도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우리가 살아있기 때문이다.
오로지 살아 있는 자만이 죽음을 생각한다. 우리는 살아 있기에 죽음을 생각할 수 있다. 그러므로 죽음이란, 살아있는 자만의 권리다. 누구보다도 생생히 살아있는 자들이 누릴 수 있는, 오만한 권리. 그러니 살아 있는 당신들은 그 살아있음을 감사하든 저주하든 간에, 권리를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든 간에, 마음껏 떠들고 적당히 침묵하길 바란다. 물론 관건은 적당량을 유지하는 침묵이겠지. 매사 적당한 것 만큼 어려운 일도 드무니까.
그래서 내가 이 책에 대해 할 수 있는 말 역시, 읽든지 말든지 상관 없다는 것이다. 나는 이 책을 찍어낸 출판사 사장도 아니고 작가는 더더욱 아니므로 중대한 상관이 있을리가 없다. 게다가 예술이란 수용자에 의해 언제나 다르게 받아들여지는 것 아닌가. 나는 이 책에 별을 네개나 줬지만, 어떤 사람은 다섯개를 줄 수도 있고 혹은 그냥 그런 세개를 줄 수도 있으며, 어쩌면 별을 하나도 주고 싶지 않아 할 수도 있는 일이다. 그러니 선택은 전적으로 당신에게 달렸다. 바로, 당신에게.
늘 현명한 침묵을 지키고 싶지만 왜 나는 이렇게나 말이 많은지. 언젠가 알 수 없는 누군가에 붙잡혀 숨막히게 좁은 방에 15년간 갇히게 되더라도 할 말이 없다. 다만 식단을 좀 다채롭게 해준다면 감사하겠다, 는 정도의 각오를 하고 있다. 어쨌거나, 왜 나를 이렇게까지 수다스럽게 만들어버리는 것일까. 문학이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