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을 믿다 - 2008년 제32회 이상문학상 작품집
권여선 외 지음 / 문학사상사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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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이상문학상 작품집을 총체적으로 리뷰한 글을 원하신다면, 가볍게 패스해주시길*)

 

2008년 이상문학상 작품집엔 이상하게도 손이 가질 않았다. 아니, 사실 '이상하게도'라는 수식어는 가증스럽다. 이상문학상이라면 일단 나오자마자 읽고야 마는 내가, 연초에 나온 작품집을 올해의 중간이나 가도록 읽지 않고 방치해두고 있었던 것은 바로 대상 수상자가 권여선 작가였기 때문일 것이다. 권여선 작가는 정말이지 내 취향이 아니어서. 게다가 우수상 수상자들 중에서도 내가 좋아하는 작가가 천운영 작가 하나 뿐이었고, 그냥저냥 나쁘지 않았던 하성란 작가와 또한 영 내 취향이 아니었던 윤성희 작가, 기대를 지나치게 했다가 실망했던 전적이 있는 박형서 작가, 몇몇 단편을 제외하면 도무지 나와는 코드가 맞지 않았던 박민규 작가, 그리고 솔직히 말하자면 잘 몰랐던 정영문 작가와 김종광 작가. 이런 식의 구성이었기 때문에 선뜻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던 것이다. 이렇게 말해놓고 보니 정말이지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생각이 든다. 아니, 오히려 지금 읽은 것만도 기적이라는 생각까지도 든다.
 
아무튼 읽고 난 지금, 대상 수상작인 권여선 작가의 '사랑을 믿다'는 생각만큼 끔찍하진 않았지만 여전히 이게 왜 대상을 수상했는지 모르겠다는 의아함이고, 윤성희 작가의 '어쩌면'은 생각보단 재밌었지만 대상을 받지 못한 게 의문스러울 정도는 아닌 정도였고, 천운영 작가의 '내가 데려다줄게'는 작가의 비범함을 새삼 느끼게 해준 수작이었다, 는 정도의 소감이다. 나머지 작가들의 소설은 별로 끌리지가 않아서 아직 안 읽어봤다. 그리고 제목에서 밝혔듯 이 리뷰의 메인이 될 박민규 작가의 '낮잠', 이 소설은 박민규 작가에 대한 나의 견해를 통째로 뒤흔들어버릴 정도로 막강했다. 읽으면서 내내, 이걸 정말 박민규가 썼다고?! 정말?!?!?! 이런 놀람과 감탄과 충격에 휩싸여 있었다. 그리고 다 읽고 나자 오랜만에, 리뷰를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이지, 꽤 오랜만에.
 
이쯤에서 말해둬야 할 것은 단연, 박민규 작가에 대한 나의 생각 (물론 '낮잠'을 읽기 전에 한한) 일 것이다. 그의 소설을 처음 접한 것이 아마 '고마워, 과연 너구리야' 였던가. 당시 꽤 신선한 소설이었다. 재미도 있고, 독특하고, 내용도 있는.  그 다음으로 읽은 것은 '갑을고시원 체류기'였는데, 이 소설을 읽고서 한국 소설판에 제대로 된 구원투수가 하나 나타난건가, 했다. 그만큼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그의 다른 소설들을 찾아 읽었다. 단편집 카스테라를 읽고서는 그런데 좀, 이건 뭐지 하는 기분이었다. 앞선 두 단편에서 적당히 표출되었던 독특함은 단편집 전반에 걸쳐 주체할 수 없이 만연되어 있어, 읽는 내내 이거 분명 유머러스한 부분인데 왜 나 웃을수가 없지, 이런 심정이 되어버렸다. 아리송해진 기분으로 지구영웅전설, 삼미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같은 장편들을 읽고 나자 의아함이 거의 한계치에 도달하게 되었고, 그 이후 핑퐁을 읽으면서 나는 스스로 결론을 내렸다. 박민규는 외계인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이런 소설을 쓸 수 있는 걸까, 하는 생각에다, 실제 그 외모도 다소 외계인스러웠다는 점도 한몫 한 결론이었다. 
그  이후 읽은 '비치 보이스'또한 여전히 그 다웠지만 그래도 지구인인 내 사고방식으로 이해할 수 있을 정도의 유머감각이어서 재밌게 읽었다. 결말은 역시나 당황스러웠지만. 아무튼 그래서, 참 유니크한 작가로군 (비록 나와는 잘 안 맞지만), 하는 정도의 생각이었는데 이번 이상문학상 작품집의 리뷰들을 보니 박민규 작가에 대한 칭찬이 더러 눈에 띄는 거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낮잠'이 대상을 수상했어야 한다는 의견까지도. 기존의 박민규와 다르다는 소리에 도대체 어떻기에, 궁금해졌다. 일단 노년을 다뤘다는 것부터가 조금 의외였기도 하고.  

그리고 읽고 난 지금, 나는 박민규라는 작가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백만배쯤은 더 대단한 작가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난 솔직히 박민규 작가가 장난질밖에 칠 줄 모르는 작가라고 생각했었다. 물론 그 장난질이 꽤나 수준있는 것이긴 했지만, 기본적으로는 장난질이기 때문에 뭔가 깊이있는 울림을 만들 수가 없는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낮잠'에서의 그는, 정말이지 바뀌었다. 예전같은 황당무계함은 볼 수 없었다. 그렇다고 한없이 진지하고 무거워지기만 했는가, 그건 아니다. 여전히 박민규만의 통통 튀는 위트는 살아있고, 독특한 수사도 볼 수 있다. 다만 그가 이렇게나 능란한 작가였던가, 하는 생각. 문득문득 느껴지는 삶의 무게감과 깊이, 웃음지으며 읽다가도 문득 짠해지는 것. 그리고 인위적이지 않은 자연스러운 감동을 느낄 수 있는 마지막... 그가 인생을 이렇게나 제대로 다뤄내다니, 하는 감탄어린 감상이 절로 들었다. 실로 놀라운 소설이었다. 

그래서, '낮잠'에 별점을 매기자면 네 개에서 네 개 반 정도다. 이렇게 극찬을 해놓고 다섯 개를 주지 않는 것이 이상할지도 모르겠지만, 다섯 개 까지는 아니라는 생각이다. 사실 의외성에서 비롯된 호들갑도 한몫 하니까 말이다. 그리고 권여선 작가의 '사랑을 믿다'는 별점 두 개 반에서 세 개 정도라고 생각하니까, 이 정도면 충분히 높은거다. 나 또한 그가 대상을 수상하지 못한 것을 의아하게 생각하는 사람 중 하나가 된 것이다. 어쨌든 제대로 업그레이드된 박민규 작가, 그라면 곧 별 다섯 개로도 모자랄 정도의 수작을 써낼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머지않아 이상문학상 작품집 표지에서 대상 수상자로 커다랗게 박혀있을 그의 이름을 보게되길 기대하면서.

+) 이번 이상문학상 작품집은 그러니까, '낮잠'을 제외하면 그다지 인상적인 편은 못 되었다. 좀 실망스러운 수준이다. 해가 거듭될수록 이상문학상 작품집이 약해지고 있다는 전반적 의견에도 나는 아니라고 우기고 있었는데, 작년도 그랬지만 올해는 특히나 더 절감할 수 밖에 없는 부분이었다. 내년에는 더 나아지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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