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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볼루셔너리 로드 - Revolutionary Road
영화
평점 :
상영종료
(스포일러 주의!)
레볼루셔너리 로드. 주연이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케이트 윈슬렛이라는 것과 감독이 샘 멘데스라는 것, 그리고 저 제목만 들었을 때는 이런 영화일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었다...는 표현은 좀 과한 것 같지만, 어쨌든 미처 짐작하지 못했었다. 한국어가 모국어 아니랄까봐 머릿속에선 어설픈 직역으로 음... 혁명의 길? 따위의 뜻을 떠올리고 있었고, 그러다보니 나도 모르게 혁명 내지는 전쟁을 겪어내는 두 남녀의 이야기인가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나보다. 아무튼 기획 단계일 때 듣고 뭐 그냥저냥 싶어서 한동안 잊고 지내던 중 영화가 개봉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고, 들려오는 호평에 궁금해져 보게 되었다. 그게 벌써 몇 달 전인데, 아직도 내 기억 속에 이렇게나 촘촘하게 그 영화가 들어차있어 마침내 그에 관한 글을 쓰게 한다는 건... 그만큼이나 그 영화가 강렬했다는 뜻이겠지.
그랬다. 영화는 제법 오랜만에 만나는 강렬함으로 나를 사로잡았고, 나는 기꺼이 그 매력 안으로 빠져들었다. 혼란, 증오, 무기력, 권태, 도피에의 갈망, 환상, 희망과 절망... 그 모든 인간의 것들이 혼재되어있는 영화. 영화는 50년대 미국을 배경으로, 모두가 갈망하는 아메리칸 드림을 이룬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희망도 꿈도 없이 불화만이 존재하는 윌러 가족을 (영화에서 집중하는 것은 가족이라고 하기엔 너무 부부에 치중되어 있긴 하지만) 조명한다. 가장인 프랭크 윌러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는 그저 가정을 유지하기 위한 높은 수입의 수단일뿐인 회사에 다닌다. 거의 비슷비슷한 수트 차림의 남자들이 가득한 출, 퇴근 길에서 볼 수 있는 프랭크의 얼굴엔 기계적인 생활에 지치고 피로한 기색이 역력하다. 그가 지루한 일상을 탈출하기 위해 생각해내고 실행에 옮길 수 있는 것은 여사원과의 가벼운 외도 정도. 그에 반해 부인인 에이프릴 윌러 (케이트 윈슬렛) 는 보다 적극적이다. 누적된 권태에 짓눌려있던 그녀는 '이것은 내가 원하던 삶이 아니다'라는 반복된 깨달음 끝에 획기적인 해결책을 제안한다. 바로 "파리로 떠나자!"는 것. 처음에는 비현실적이라며 내켜하지 않던 프랭크도 에이프릴의 강렬한 설득에 결국 넘어가고, 그들은 파리로 떠날 꿈에 부풀지만...... 꿈을 꾼다고 그대로 이루어진다면 그게 어디 꿈이겠는가. 그들 부부는 현실적인 어려움에 각각 직면하게 되고 그들 사이의 갈등은 점차 격렬해진다.
영화는 50년대 미국 가정의 꿈과 좌절을 보여주지만, 영화 속 그들의 모습은 50년이 지난 지금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다. 꿈을 꾸고 그것을 이루는 극소수의 사람들을 제외한, 이상과 너무나 다른 현실에 안주하며 살아가는 대부분의 사람들의 모습. 멀쩡한 직장을 내팽개치고 파리로 떠난다는 그들을 주위 사람들은 뜨악하게 바라본다. 오직 제정신이 아니라는 존만이 그들의 꿈을 지지할 뿐이다. 정신 이상이 있다지만, 존은 핵심을 파악하고 정곡을 찌르며, 구구절절이 맞는 말만 늘어놓는다. 미친 세상에서는 미친 사람만이 제대로 된 판단을 내릴 수 있는 것일까. 어째 씁쓸해지는 대목이었다. 존이 "내가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게 뭔지 알아? 그건 내가 바로 그 아기 (에이프릴이 임신한) 가 아니라는 거야!"라는 대사를 할 때는 정말 소름이 다 끼쳤다. 어쩌면 저렇게 정곡을 찌를 수 있는건지. 솔직히 존이라는 캐릭터의 대사들로 인해 영화가 너무 직접적으로 설명된 듯한 감도 없지 않지만, 그래도 그는 불편함과 통쾌함을 동시에 주어 영화에 긴장감을 더해주는 흥미로운 캐릭터였다.
깊게 뿌리내린 권태로 지탱되던 윌러 가정은 한때의 환상과도 같은 꿈과 충돌하여 활활 타오르다가 그 불꽃이 사그러짐과 동시에 무참히 산산조각나고 만다. 영화는 그 과정을 사실적이면서도 충분히 드라마틱하게 담아낸다. 몇 번이나 반복되는 격렬하게 싸우는 장면도 인상적이었지만, 개인적으로는 도피를 꿈꾸며 오랜만에 행복을 찾은 윌러 부부가 사랑을 나누는 장면이 압권이었다고 생각한다. 분명 그들은 행복한데, 그것을 보는 관객의 마음은 어쩐지 편하지만은 않은, 아니 오히려 너무나 불안한 것이다. 그들이 찾아낸 행복에의 길이 견고한 벽돌길 같은 것이 아니라 여차하면 한 순간에 사라져버릴수도 있는 위태로운 것이라는 걸, 영화의 탁월한 흐름이 말해주고 있기 때문에. 꿈, 그것은 얼마나 달콤하며, 그만큼 위험한가.
차분하지만 우울하지 않고, 담담해서 그만큼 절망적인 느낌까지 자아내는 스코어가 영화의 분위기를 한층 더 효과적으로 살렸다. 고전적인 느낌의 깔끔한 영상도 취향 탓인지 정말 마음에 들었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 무엇보다도 빛났던 것은 감정에 충실한 캐릭터들과 그를 연기한 배우들. 특히 두 주연 배우들의 풍부한 연기가 무척이나 인상적이었다.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의 다혈질 마초 연기는 절정에 이르렀다고 생각한다. 물론 저런 종류의 연기는 흔한 것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한껏 흥분한 뒤에 한풀 꺾여 불안정해진, 어딘가 유아적인 느낌까지도 주는 그 불안한 표정과 눈빛 연기가 디카프리오의 연기를 뭔가 특별한 것으로 만들어준다고 생각한다. 그 부분이 그가 연기하는 캐릭터에 대한 관객의 이해심과 동정심을 유발하고, 그로 영화에 대한 몰입도를 높이기 때문에. 케이트 윈슬렛의 연기 또한 절정이었다. 나는 그녀가 흥분했을 때보다도 싸늘하게 가라앉아 담배를 피울 때, 딱딱한 표정으로 평범한 동작들을 할 때 그녀의 연기에 매료되었다. 그녀가 완벽히 역할에 몰입되었음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부서지기 직전의 여인, 에이프릴을 연기한 케이트 윈슬렛은 정말이지 완벽했다. 하도 많은 사람들이 말해서 지겨울 법도 하지만, 나 역시도 케이트 윈슬렛이 '더 리더'가 아닌 '레볼루셔너리 로드'로 오스카를 받았어야 했다고 생각한다.
영화 속에서 그들을 파멸로 이끈 것은 과연 무엇일까. 지독히도 깊게 뿌리를 내리고 있던 권태인가, 아니면 안일하나마 잔잔했던 일상을 뒤흔들어놓은 꿈인가. 수많은 대답이 머릿속에 떠오르지만 어느 것 하나에도 쉽게 고개를 끄덕일 수가 없다. 이 영화를 보고 내가 느낀, 가닥가닥 엉켜 있는 세상과 삶에 대한 생각들 중에서 어떤 것을 결론삼아야 하는 것인지 나는 여전히 알 수가 없다. 다만 "아무도 진실을 잊어버리진 않아. 다만 거짓말에 능숙해질 뿐이지." 라던 에이프릴의 대사만이 이 모든 생각들 속에서 홀로 강렬하게 자리잡고 있다는 것만은 부정할 수 없을 것 같다. 그대, 아직도 꿈꾸고 있는가라는 박완서 작가의 소설 제목이 문득 떠오른다. 이 영화가 내게 던진 가장 큰 질문, 그대 아직도 꿈꾸고 있는가. 나는 맹렬히 생각을 더듬다가 결국 모르겠어요, 라고 대답해버리고 만다. 모르겠어요. 그리고 침묵한다. 영화의 마지막처럼, 나도 세상의 모든 소음으로부터 스스로 차단되고 싶다는 강렬한 욕망에 휩싸인다. 세상을 살아간다는 건 역시, 생각보다 많은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