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식주의자
한강 지음 / 창비 / 2007년 10월
평점 :
절판


 

실로 오랫동안 기다려왔다. 2005년 이상 문학상 대상 수상작이었던 '몽고반점'을 읽은 이후로 2007년 11월 현재까지, 근 3년이 되어가는 시간동안 나는 무던히도 기다렸다. 그리고 예상대로 요란한 광고 따윈 없이 (내가 보지 못한 걸 수도 있지만) 조용히 나와버린 이 책을 처음 봤을 때 어찌나 반가웠던지. 맹세코 단 일초의 주저함도 없이 집어들었다. 이렇게나 반갑게 책을 집어든 것이 도대체 얼마만인지.

이상 문학상과의 만남, 그것은 내 인생의 문학적 측면에 있어서 실로 터닝 포인트라 할 만한 부분이었다. 한국 현대 문학은 고루할 것이라는 선입견을 갖고 있던 내가, 그 선입견에서 탈피하여 한국 문학의 매력에 흠뻑 젖어버리게 한 계기가 되었으니. 내가 처음으로 접한 것은 권지예 작가의 '뱀장어 스튜'가 대상으로 수록되었던 2002년의 이상 문학상 작품집이었다. 마치 고등학교 문학 참고 서적과도 같이 투박한, 세련미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그 표지를 보고 내가 어떻게 그 책을 읽을 결심을 했는지는 아직도 미스테리다. 어쨌거나 별 기대도 없이 읽었던 그 소설은, 그러나 별 기대가 없어서였는지는 몰라도, 굉장히 매력적이었다. 내가 이유도 없이 갖고 있었던 선입견을 무참히 깨버린 신선함, 도발, 충격, 그리고 아름다움. 그때의 그 놀라움은 아직도 잊을 수 없다. 어쨌든 그 이후 나는 이상 문학상 작품집을 중심으로 한국 문학을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작품집을 읽고 그 중 마음에 드는 작가를 골라 그 작가의 소설을 찾아 읽는 방식으로. 그 후 해마다 출간되는 이상 문학상 작품집을 챙겨보았다. 작품집에 실린 소설 중 반쯤은 좋았고, 반쯤은 별로였다. 그리고 마침내 문제의(?) 2005년, 나는 한강의 '몽고반점'을 만나게 된다.

'몽고반점'을 읽고 느꼈던 전율, 그것은 굉장했다. 굉장했다, 라는 표현이 심심하게 느껴질 만큼, 거대했다. 마치 폭풍과도 같은 느낌이었다. 처음 뱀장어 스튜를 접했을 때보다도 더욱 강렬한. 나는 매료되었다. 그 생경하고 아름다운 카리스마에. 소설을 읽고 한동안 그 자리에서 멍하니 있었던 것이 기억난다. 그리고 자선 대표작으로 실린 '아기 부처'를 읽는 것을 미뤘던 것도 기억난다. 몽고반점을 읽으면서 이미 진이 빠진 것도 있었지만, 그보다도 '이 작가의 작품을 아껴서 보고싶다'는 마음이 들었던 것이다. 우스운 비유를 들자면, 맛있는 음식을 아껴 두었다 먹고 싶어하는 심리와 동일한 것이었다. 그런 내가, 이 소설이 하나의 단편이 아닌 3편으로 구성된 연작이라는 것을 들었을 때 얼마나 기뻤으며 목말랐겠는가 말이다. 1편 격인 '채식주의자'는 아직 책으로 발간되지 않았었고 (아마 잡지에 실렸었을 테지만 찾지 못했다) 3편 격인 '나무 불꽃'은 아직 씌어지지도 않았었으므로 당연히 읽을 수 없었기에, 그 때부터 나는 언젠가 이 연작이 하나의 작품집으로 묶여 나오길 기대했던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그 기대는 현실이 되어 돌아왔다.

3개의 단편은 각기 다른 서술자의 시선으로 진행되지만, 그 한가운데 놓여있는 주인공은 단연 '영혜', 그녀이다. 세 단편의 제목 '채식주의자', '몽고반점', '나무 불꽃'은 전부 영혜라는 인물에서 파생된 것이다. 그녀는 (소소한 몇 가지 특징을 제외한다면) 지극히 평범한 여자였으나,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에서 기원한 악몽을 꾸기 시작하면서 고기를 먹는 것을 강력하게 거부하고 채식주의자가 된다. 그녀의 육식에 대한 거부는 거의 병적으로 악화되어 결국 정신적 이상을 수반하고, 심지어 자살 기도까지 하게 된다. 그 이후 남편에게 이혼당한 그녀는 여전히 채식을 한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평범하고 조용한 생활을 이어간다 (물론 다소 이상한 징후들이 눈에 띄지만). 그러나 비디오 아티스트인 형부가 그녀에게 아직도 몽고반점이 남아있다는 것을 알고 난 후 연작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든다. 형부는 그녀로부터 영감을 얻어 몽고반점과 관련된 비디오 아트를 작업해가며, 처제(그녀)에 대한 욕망이 커져나가는 것에 고뇌한다. 온 몸에 꽃을 그린 채로 어두운 욕망은 결국 현실이 되지만, 결국 그 절정을 목격한 아내(그녀의 언니)에 의해 파국으로 치닫는다. 이후, 그녀의 채식은 식물에의 열망으로 발전하고, 그녀는 나무가 되길 갈망하며 모든 음식을 거부한다. 그녀의 언니는 이혼 후, 가족에게서마저 외면당한 그녀를 돌보며 끔찍한 인내로 생을 견뎌나간다. 여기까지가 연작의 주요 내용이다.

작가 한강은 3편의 연작 단편을 통해 너무도 분명하게 '식물에 대한 갈망'을 보여준다. 그것은 작가도 밝혔듯 전작 '내 여자의 열매'에서 보여준 식물 지향을 변주한 것이다. 그러나 '내 여자의 열매'에서 보이는 모호함과 비현실적 느낌, 인과 관계의 결여, 그로 인한 다소의 그로테스크함과는 달리 '채식주의자' 연작은 지독히 현실적이다. 그리고 그것에서 느껴지는 충격은 어느 날 갑자기 몸이 푸르게 변하며 식물이 된다는 설정(내 여자의 열매)에서 느낄 수 있는 그 무엇보다 훨씬 묵직하고 구체적이며 강렬하다. 동물의 폭력성에 대한 환멸, 그로 인한 식물에의 지향. 그러한 전반적인 주제를 다양한 각도에서 효과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세 개의 시선. 그리고 이 시대의, 혹은 동물의 근원적 폭력성에 반대하고 싶어하는 작가의 낮은 목소리. 그것들은 나에게 끊임없는 물음표의 연속으로 다가왔다. 명확한 부분에서부터, 명확하지 않은 부분에까지.

채식주의자, 몽고반점, 나무 불꽃. 휘몰아치듯 읽고 나자 한동안은 가만히 앉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 처음 몽고반점을 읽었을 때 보다도 더욱 길고 깊은 정지상태였다. 너무 많은 생각들이 나를 공격해왔기 때문에. 그러나 기분 좋은 공격이었다. 요 근래 나를 이렇게나 깊이 생각하게 만드는 작품을 만난 적이 있던가? 글쎄.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래서 더 반가운 마음이 드는건지도 모르겠다.

작가 한강의 이 작품집은 그야말로 폭풍이다. 이 책을 읽는다면, 지루한 일상 속에 안일하게 머물러 있는 당신을 깊이 생각하게, 그로 인하여 살아 있다고 자각하게 만들어 줄 것이다. 모든 것이 가볍게만 흘러가는 추세에 타협하지 않고 일관된 진지함으로 작품을 써나가시는 작가님에게, 힘내시라며, 다음 작품도 기대하겠다는 허울 좋은 포장을 씌운, 그러나 본질은 명백히 부담인 응원을 아낌없이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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