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긴밤 - 제21회 문학동네어린이문학상 대상 수상작 보름달문고 83
루리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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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김을 받아본 이만이 타자를 보듬어줄 수 있다는 것. 코끼리와 노든의 태도가 겹쳐지는 건 이것을 말하고 말하고 싶어서가 아닐까. 나와 타자와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타자를 보듬고 연대할 때 서로 완성된 존재가 될 수 있다는 걸 사랑과 우정의 연대기로 아름답게 풀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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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想 여섯. (2022년 4월 16일)


  크게 다르지 않은 하루였다. 여느 주말처럼 늦잠을 자고, 독서모임에 가기 전 책을 한 번 더 훑고, 이런저런 자료들을 검색해보고, 모임에 참석하고 돌아온 하루. 거리두기가 곧 풀린다는 이야기 때문인지 모임에 가는 길에는 사람들이 꽤 많았다. 집에 돌아와서는 저녁을 먹고 오랫동안 읽고 있던 《3월 1일의 밤》 읽기를 마쳤다.















  처음 책을 펼친 것이 3월 2일이었으니 한 달 반 가까이 걸려 읽은 셈이다. 지난 일想에서 언급할 때는 1부를 거의 다 읽은 시점이었고, 3.1운동을 대표하는 상징과 언어의 세계사적 맥락을 짚어보는 전개가 흥미로웠더랬다. 2부에서는 3.1운동 직전의 암흑기인 1910년대의 모습(일제의 강경책과 회유책, 사회진화론의 유행, 제1차세계대전, 신해혁명)을 다루었고, 3부에서는 3.1운동의 시위문화와 그 안에 있었지만 주목받지 못했던 사람들(노동자, 여성)의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 4부는 3.1운동 이후의 문화사(저자의 전공 때문인지 문학사에 미친 영향이 대부분이다)를 다루고 있다. 의도한 것은 아니었으나 이 책을 4월 16일에 완독한 것은 우연이었을까?
















  아마 이전에도 종종 인용하여 적기는 했겠으나, 검색해보면 내가 최초로 《눈먼 자들의 국가》를 읽고 글을 남긴 것은 2016년이었다.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 사회가 얼마나 달라졌는지를 생각하면 더 나쁜 쪽으로 가는 것 같기도 하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기분 탓일까. 속시원하게 밝혀지는 것은 없고, 여전히 바깥에는 고의로 현수막을 훼손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날 이후 있었던 일련의 사건들이 우리에게 다시금 "정치적 존재"로서의 의식을 자각하도록 해주었다는 것에서 변화의 씨앗을 찾을 수 있을까. 전진과 후퇴가 난장을 이루는 시기를 살고 있지만, 우리를 광장으로 모이게 해주었던 그 힘을 겪어보기 전과 후의 우리는 다를 것이라 생각하며 마무리하고자 한다. 1919년 3월 1일을 온몸으로 겪었던 청년들과 유년 시절 결집의 힘을 보았던 이들이 이후 역사에 뛰어들며 세상을 바꾸었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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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想 다섯. (2022년 3월 2일~8일)


  (이직은 아니고) 근무지가 바뀌었다. 이제 일주일하고 절반이 지난 지금, 새로운 일과 환경과 사람에 적응하느라 애쓰는 중이다. 아예 신입의 마음가짐이었다면 백지장과 같은 상태이니 일의 방식을 그대로 흡수하면 되련만, 이미 새겨진 리듬과 방식과 관습이 새로운 것과 만나 삐그덕거리고 맞춰나가는 하루가 계속되는, 적응하느라 애쓰고 있는 시기이다. 때로는 새로운 방식이 구태의연하고 비효율적이고 지나치게 형식적이어도 내 것을 고집하고 관철하기 어려운 시기이기도 하다. 아무튼 낯선 사람 만나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는 극강의 I인지라 하루하루 퇴근을 하면 뻗어버리고 말았으니... 주간이었던 목표는 월간이면 다행일 수준이 되었다. 환경 적응은 아직 진행형이고 에너지를 많이 소모한다.

















  그렇다고 책읽기를 마냥 멈추고 있는 것은 아니어서 시도는 하고 있는데, 읽고 있던 책더미를 잠시 방치하고 3월에 처음 집은 책은 권보드래의 《3월 1일의 밤》이었다. 계절과 기념일이 오고 지날 때 관련 있는 책을 떠올리기는 해도 읽는 데까지 나아가지 않는 편이나, 이번에는 읽어보고 싶다는 마음이 생겨 올해 목표였던 책들도 잠시 멈춰두고 천천히 읽기 시작했다. 입시를 위해서 반, 흥미 반으로 일제강점기 독립운동 단체들의 역사를 연도별로 줄줄이 정리할 수 있었던 한국사 덕후는 시간과 망각의 풍파에 이젠 몇 개의 키워드들로만 역사의 흐름을 기억하는 평범한 사람이 되었다. 3.1운동 역시 마찬가지여서 2.8 독립선언과 민족대표 33인, 제암리 학살사건과 같은 단어들만으로 역사를 기억하고 있는 나에게 이 책의 초반부가 보여주는 3.1운동의 모습은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미주와 참고문헌을 제외하고도 560쪽에 달하는 이 노작에는 '3.1운동'이라는 한 단어로 정리될 수 없는 그날의 삼라만상들이 담겨있다. 3월 1일에 인파를 보며 조선이 이미 독립이 된 줄 알고 함께 만세를 불렀던 수많은 사람들, 대한제국과 군주제를 떠올리게 했던, 정작 3월 1일에는 그 모습을 볼 수 없었던 태극기가 대중의 목소리를 대표하는 상징이 되어가는 과정, 각양각색의 동기로 대표를 자임했던 3.1운동의 비체계성과 역동성, '만세'라는 구호에 담겼던 수많은 입장들과 목소리들까지. 다른 나라들과 달리 역동적인 봉기의 터전이 공화주의라는 사상의 공론장이 될 수밖에 없었다는, 사상과 언어가 무르익을 여유가 없었다는 것이 우리의 비극이면서도, 비극 속에서 행동과 선언의 장이 갖는 강렬한 힘이 3.1운동을 빛나게 하기도 한다. 1부를 읽으면서 1919년 세계의 정세, 그리고 쉽게 지나쳤던 '대표'나 '만세'가 가졌던 의미들에 대해 돌아볼 수 있어 좋았고, 이후의 이야기가 궁금해진다. 무게와 두께가, 그리고 휘몰아치는 3월이 나를 붙잡고 있지만...


  이 책을 집어들게 된 것이 작금의 정치 상황이 미친 영향인지는 모르겠으나, 내일이면(글을 쓰다보니 오늘이 되었다) 달라져 있을 한국의 모습은 쉽게 상상하기 어렵다. 그러나 3.1운동의 광장에서 보았던 역동성의 기억을 잃지 않는다면, 앞으로도 조금이나마 더 나은 길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작은 기대를 품는다. 이미 5년 전에 광장은 그 힘을 다시 보여주었고, 그것은 1919년의 힘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시간이 지나 연표의 한 줄로만 남더라도 그 한 줄에 새겨진 수많은 얼굴들과 목소리가 쉽게 잊히지 않고 기억되었으면 한다...




[곁가지들]














역사를 생각할 때 연표와 그 순서를 먼저 생각하는 것은 선후관계와 인과관계를 중심에 두는 우리의 시간관 때문일까? 모든 시간을 동시에 보는 트랄파마도어의 역사관은 푸네스처럼 수많은 목소리들을 기록하는 역사관일까? 인과성보다 합목적성을 우선에 두는 헵타포드의 역사관은 어떨까? 문득 연표로 집약되는 역사관이 역사 속에 잊혀진 수많은 사람들을 가리는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면서 문득 《제5도살장》과 〈네 인생의 이야기〉 속 외계인들을 잠시 떠올려보았다. 그러면 또 결국 추상과 구체라는 화두로 돌아오는 것인가 잠시 생각했지만 이쯤에서 꼬리를 접기로 한다...





3·1운동은 낮, 장터, 태극기로 표상되지만, 다른 한편 밤의 사건이요 산 위에서 만세 부른 사건이며 독립만세기를 휘날린 사건이다. 어디서는 3월 초로 끝났지만 어느 지역에서는 12월에야 시작된 사건이자, 누구에게는 성대한 평화시위로, 다른 이에게는 면사무소를 습격한 경험으로 남은 사건이기도 하다. 그만큼 3·1운동의 얼굴은 여럿이다. 하긴 그토록 많은 이들이 3·1운동에 뛰어들었으니. 식민권력의 통계로도 약 60만에서 100만이 참여했다고 할 정도다. 역시 식민권력의 인구통계 약 1,600만을 적용하면 전 인구의 3.7퍼센트에서 6.2퍼센트 정도가 된다. 이후의 어떤 사건도, 1960년의 4·19혁명이나 1987년의 6·10 민주화운동도 그만한 참여도에 이르지 못했다. 3·1운동 때는 교통·통신이 미비했고 전국적 조직이나 지도체도 없었는데 말이다. - P11

3·1운동 당시 언어는 이렇듯 수행적이었다. ‘선언‘이라는 말 그대로 그것은 미래를 당겨쓰는 방법이었으며, 목표한 미래를 일궈내려는 자기 결의의 표현이기도 했다. ‘민족대표 33인‘은 청원과 선언 사이에서 고심했지만 3·1운동의 대중은 ‘선언‘의 급진성을 최대치로 고양시켰다. 「기미독립선언서」를 "조선이 독립이 되었습니다"라는 한 문장으로 요약한 18세 청년 채만식에 의해, 그리고 그 말을 고스란히 받아들여 "나두 만세! 만세!"를 외쳤던 촌로에 의해─그런 사람들에 의해 「기미독립선언서」의 선언은 (준)독립의 현실을 길러내는 생산적 모태가 되었다. 독립의 선언이 곧 독립의 현실을 구성한다는 믿음이야말로 3·1운동의 비밀이다. ‘와야 할 현실‘을 ‘도래한 현실‘로 변형시킴으로써, 그러한 정언명령을 표현하고 전달하고 감염시킴으로써, 3·1운동의 대중은 그 스스로 새로운 현실의 일부가 되었다. - P51

그러나 ‘독립‘은 민족적 불만의 해소 이상을 가리킨다. 3·1운동기의 구호, ‘독립만세‘ 혹은 그 축약형으로서의 ‘만세‘에 이르면 더욱 그렇다. ‘만세‘는 불만의 승화이자 희망의 표현인 동시, 새로운 세계의 새로운 질서를 축원하고 환영하는 기호다. ‘만세‘로써 축원하는 ‘독립‘의 새 나라는 따라서 단순히 대한제국의 귀환일 수 없었다. 그 새 나라는 대체 어떤 나라였는가? 100년 전 두 달여 동안 한반도를 휩쓴 군중 경험에서 참여자들 각자는 대체 어떤 뜻으로 ‘독립‘과 ‘만세‘를 불렀는가? 일반적으로 말하자면, 3·1운동 당시 ‘만세‘와 ‘독립‘은 민족해방으로 소진되지 않고 계급 이동으로 다 해소되지 않는 미정형의 유토피아적 충동을 표시한다. ‘만세‘가 저마다의 불만과 희망을 표현했듯 ‘독립‘은 그런 불만과 희망이 해결된 미래상을 지시했다. 인민은 고통스런 현실이 철폐되길 소망했고 현재의 부조리를 보상할 만한 새 나라를 꿈꾸었다. - P125

김원벽의 말마따나 고립된 단어로서 ‘만세‘의 의미는 모호하기 짝이 없다. 도시 공간 및 학교 제도 밖의 거주자들에게 있어서 ‘만세‘는 낯선 용어이기도 했다. "만세의 뜻도 모르면서 (…) 따라서 불렀을 뿐"이라는 발뺌이 적지 않았던 터다. 3.1운동 당시 ‘만세‘를 이해하지 못했거나 오해했다는, 혹은 그런 차이를 알리바이 삼는 진술은 종종 발견된다. 예컨대 동아등자회사 직공이었던 25세의 김흥수는 3월 1일 "3,000명쯤의 사람들이 ‘만세, 만세‘하면서" 지나가기에 까닭을 물었으나 돌아온 것은 웃음뿐이라 어리둥절했다고 기억한다. 전남 영암의 면서기로 국장 구경차 상경했던 유인봉의 경우도 비슷했다. 그는 만세시위를 목격하고는 "전혀 까닭을 몰랐으므로 자꾸 (…) 물었으나 (…) 만세를 모르면 몰라도 좋다고 하면서 만세를 부른 이유를 설명해주지 않았다." - P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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캉탕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17
이승우 지음 / 현대문학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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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이렌과 모비 딕의 모티프가 그의 오랜 화두(원죄,구원 등)에 대한 성찰로 이어지고, 안전장치를 확보한 일기/기도로서의 자기고백적 글쓰기의 (불)가능성에 대한 이야기는 작가의 글쓰기에 대한 고뇌로, 다시 말해 메타소설적 요소로 읽힌다. 웅숭깊은 사유가 꾹꾹 담긴 문장들은 여전히 매혹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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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想 넷. (2022년 2월 17일)



  화요일에 교보문고에서 주관한 황정은 작가의 랜선 팬사인회가 있었다. 《백의 그림자》가 복간되어 나왔을 때(4년 동안 절판된 상태였다는 것도 몰랐었다) 이미 알라딘으로 주문하고 굿즈로 머그컵까지 받았으나, 사인본에 눈이 먼 나는 사인회를 보면서 수강신청을 하듯 도전하여 또 구입을 하고 말았으니… 그리고 오늘 책이 도착했고, 교보문고의 책 포장 상태에 나는 잠시 놀랐다.


(포장이 절대 흔들리지 않을 것처럼 상자에 달라붙어 있음)


  거의 대부분의 책을 알라딘에서 구입하는 사람으로서 열에 한 번은 책이 약간의 손상을 입는 것을 보았기에 이와 같은 포장은 충격이었다. 어떤 상황이어도 파손시키지 않겠다는 의지가 보였다고 할까. 그만큼 포장재가 많이 쓰이는 것도 문제이겠지만, 이런 사소한 부분이 책을 오랫동안 주문해 온 사람에게는 배려처럼 보인다(일해라 알라딘!). 그나저나 이미 구입한 한 권은 어찌해야 하나...






  이로서 내가 가진 《백의 그림자》는 총 세 권이 되었다. 민음사에서 최초로 나온 판본, 교보문고에서 한때 리커버로 내놓았던 판본(링크), 그리고 창비의 복간본. 사람이 쉽게 변하지 않는다고 믿는 편이고 이는 나 자신에게도 유효하다고 생각하는 편이지만, 생각해보면 읽는 사람으로서의 나는 《백의 그림자》를 읽기 전과 후로 나눌 수 있을 만큼 변화를 겪었다. 치기 어린 10대와 20대 초반을 지나고 읽은 탓도 있겠으나(그래봤자 스물네다섯이다), 마음을 어떻게든 건드렸기 때문에 지금까지 항상 신간을 기다리고 꾸준히 읽고 있는 것이 아닐까. '다시 쓰는 후기'에서 이야기하듯 "세상의 폭력은 더 노골적인 쪽으로 / 그걸 감추는 힘은 더 교묘하게 감추는 쪽으로" 움직여왔지만, 긴 시간 동안 한결같은 필체처럼 한결같은 소설들이 있었기에 과거의 나보다 오늘의 내가 조금은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었다는 생각도 한다. "전야前夜"를 생각하는 것이 단념되는 일이 없기를 희구하며, 언제나 평안하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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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쟝쟝 2022-02-17 21: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우와. 그 정도예요? 저 백의 그림자 안읽었는 데.... 아무님이 이렇게까지 사랑하신다면 봐야겠어요. 역시 황정은 관련 페이퍼가 예사롭지 않았는 데, 이웃님... 황정은에 진심이셨구나.

아무 2022-02-17 22:04   좋아요 1 | URL
어쩌다 보니 백의 그림자가 유독 리커버가 자주 나와서 저렇게 되었네요^^;; 하지만 제가 생각하는 황정은의 최고작이 백의 그림자가 아닌 게 함정.. ㅋㅋ 당시에는 바뀌었다는 걸 자각하진 못했는데, 지금 돌아보니 그때를 기점으로 알라딘서재에도 자주 들락거리게 되고 활동도 차츰 하게 되었던 것 같아요. 참고로 제가 처음으로 읽은 황정은의 소설은 백의 그림자가 아니고 계속해보겠습니다입니다..😅

공쟝쟝 2022-02-17 22:58   좋아요 1 | URL
황정은 리뷰 맛집 아무님이 생각하는 황정은 최고작이 궁금합니다! 저는 참고로 처음부터 지금까지 쭈욱 <계속해보겠습니다> 입니다. ㅎㅎㅎ

아무 2022-02-18 09:06   좋아요 1 | URL
저는 <야만적인 앨리스씨>였는데, 요즘엔 <아무도 아닌>과 고민하고 있어요 ㅎㅎ 그래도 아직까진 앨리스씨인 걸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