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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명사회
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4년 3월
평점 :
한병철은 『피로사회』에선 우울증을, 『심리정치』에선 빅데이터를 단서로 현대 사회를 진단했고, 『투명사회』에서는 ‘투명성’이라는 개념으로 현대 사회를 진단한다. 그의 다른 저작에서도 쉽게 발견할 수 있듯, 그가 진단하는 현대 사회의 모습은 자기착취, 긍정성, 성과주체와 같은 단어로 대표될 수 있을 것이다. 『투명사회』에서 그가 주로 주목하는 것은 디지털 매체를 통해 드러나는 커뮤니케이션의 양상이다. 대체로 그의 관점에 동의하나, 나의 좁은 식견으로 몇 가지 주장들은 지나치게 나아간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부정성-타자의 추방으로 인한 긍정성의 과잉으로 대표되는 그의 주장이 이 책에서도 반복되고 있으므로 책의 전반적인 내용을 훑는 것보단 내가 읽으면서 느꼈던 몇 가지 의문점들에 대한 정리로 리뷰를 갈음하는 것이 나을 것 같다..
1. 전시사회: 사진에 관하여
“그때는 그랬지”라는 시간적 내용이 바르트에게는 사진의 본질이다. 사진은 과거에 존재한 것에 대한 증서이다. 따라서 슬픔이 사진의 근본 정조가 된다. 바르트에게 날짜는 사진의 일부이다. “왜냐하면 날짜는 삶, 죽음, 세대의 불가피한 소멸을 환기하고 다시 생각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날짜는 사진에 죽음과 무상성을 기입한다. (…) 전시가치로 가득 차 있는 오늘날의 사진은 이와는 다른 시간 구조를 지닌다. 서사적 긴장이나 “소설Roman”의 극적 구성을 허용하지 않는, 운명도 없고 부정성도 없는 현재가 사진의 시간 구조를 결정한다. 사진의 표현은 낭만적romantisch이지 않다. (31-32쪽)
저자가 바르트의 사진과 오늘의 사진을 구별짓는 기준은 방식의 차이, 즉 아날로그적 방식과 디지털 방식의 차이다. 아날로그적 방식으로 촬영된 사진은 사멸의 가능성을 가진 반면, 디지털 사진은 불멸하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제의가치를 지니고 있던 사진은 “페이스북과 포토샵의 시대”에 전시가치로 전락한다고 저자는 이야기한다. 하지만 촬영과 인화의 방식이 바뀌었다고 해서 사진의 시간성이 상실되었다고 볼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디지털 방식의 사진도 여전히 “과거에 존재한 것에 대한 증서”이자, 돌아갈 수 없는 시간에 대한 슬픔이 내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물론 디지털 사진에서 그런 애상의 정조, 즉 부정성의 정조는 전시되는 순간에 오는 것이 아니라 전시된 뒤 시간이 지난 이후에 온다. 한때 페이스북에서 제공한 기능 중 ‘1년 전의 나는 이런 흔적을 남겼습니다.’와 비슷한 것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플랫폼 자체가 전시가치를 우위에 점하도록 하는 형식을 가지고 있으나, 그렇다고 오늘날의 사진에서 바르트의 사진론이 있을 자리가 없다고 말할 수 있을까. 마찬가지의 입장에서 디지털 사진이 지시체와 사진의 연결을 분리시킨다는 다음 글에도 나는 마냥 동조할 수는 없는 것이다.
롤랑 바르트는 사진을 “지시체의 발산”으로 정의한다. 재현은 사진의 본질이다. 한때 존재했던 진짜 대상에서 빛줄기가 나와 필름에 자취를 남긴 것이 사진이다. 사진은 실재했던 지시체의 준-물질적 흔적을 보존하며, 언제나 자신의 지시체에 “순응한다.” (…) 디지털 사진은 실재의 종말을 알리는 표지가 된다. 그 속에는 실재에 대한 암시가 더 이상 담겨 있지 않다. (…) 디지털 사진은 하이퍼포토그래피로서 현실보다 더 현실적인 하이퍼리얼리티를 제시한다. 실재는 그 속에서 오직 인용 혹은 파편으로서만 현존한다. 실재에서 따온 다양한 조각들이 서로 연결되고, 상상적인 것과 뒤섞인다. 이로써 하이퍼포토그래피는 지시체에서 완전히 분리된 자기지시적인 하이퍼리얼 공간을 창출한다. 하이퍼리얼리티는 아무것도 재현하지 않는다. 그것은 오직 제시할 뿐이다. (200-202쪽)
2. 이름은 존경의 필요조건인가
존경은 이름과 결부되어 있다. 익명성과 존경은 양립할 수 없다. 디지털 매체를 통해 촉진되고 있는 익명적 커뮤니케이션은 존경심을 대대적으로 파괴하며, 조심성 없고 존중할 줄 모르는 문화의 확산에 함께 기여하고 있다. 악플 역시 익명적이다. 바로 이 점에 악플의 폭력성이 있다. 이름과 존경은 서로 엮여 있다. 이름은 인정의 기반이다. 인정은 언제나 기명적으로 이루어진다. 책임지기, 신뢰하기, 약속하기와 같은 행위 역시 기명성과 연관되어 있다. 신뢰란 이름에 대한 믿음으로 정의할 수 있다. 책임지기, 약속하기 또한 기명적 행위이다. 메시지를 전령과 분리하고 뉴스를 송신자와 분리하는 디지털 매체는 이름을 제거한다. (117-118쪽)
이름이 부여되지 않으면 존경은 부여될 수 없는 건가라는 의문은, 당장 알라딘서재를 이루는 커뮤니티만 보아도 의구심이 드는 대목이다. 막연하게 생각했을 때 존경이란 그 사람의 행동과 언어의 총체로 부여받는 것이 아닌지. 아니면 저자가 여기서 사용하는 ‘이름’의 함의가 훨씬 넓은 것인지. 물론 악플을 도래하게 한 원인 중 하나가 익명성이라는 것에는 동의하지만, 너무 쉽게 대립항을 설정한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3. 여기에도 메시지의 권력은 있다
블로그, 트위터, 페이스북 등의 매체는 커뮤티케이션을 탈매개화한다. 오늘의 의견사회, 정보사회는 이처럼 탈매개화된 커뮤니케이션의 바탕 위에 세워져 있다. 누구나 정보를 생산하고 송출한다. 커뮤니케이션의 탈매개화로 인해 한때 사회를 대표하는 엘리트, “여론 형성자”, 심지어 여론의 사제로까지 여겨져온 기자는 이제 불필요하고 시대착오적인 존재로 취급될 지경에 이르렀다. 디지털 매체는 모든 종류의 사제 계급을 몰락시킨다. 전반적인 탈매개화는 대표의 시대에 종지부를 찍는다. 오늘날에는 누구나 직접 나서려 하며, 자기 의견을 어떤 중개자도 통하지 않고 직접 발표하고 싶어 한다. 대표는 참가 혹은 발표에의 동참으로 바뀌어간다. (138쪽)
탈매개화로 인해 대의 민주주의는 무너지고, 정치는 즉흥성과 신속성을 요구하게 된다는 게 글의 요지이며, 투명성의 요구가 획일화를 자발적으로 강요하게 한다는 것이 책의 메시지다. 정치의 모든 것이 정말 투명해지는 추세인지에 대한 논의는 차치하고, 이러한 탈매개화가 정말로 디지털 커뮤니케이션에서 사제 계급을 몰락시키고 있는지는 주목해보아야 한다. 모두가 메시지를 직접 낼 수 있는 플랫폼 안에도 유효한, 즉 영향력 있는 메시지를 보내는 메신저는 여전히 존재하며, 그들이 디지털 시대의 새로운 여론 형성자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것을 우리는 쉽게 볼 수 있다. 새로운 여론 형성자와 기존의 여론 형성자가 대체로 일치하는 경향을 보인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4. 친밀사회-여기도 여전히 극장이다
친밀사회는 제의화된 동작과 격식을 갖춘 행동을 불신한다. 그런 것들은 겉치레이고 진정성이 없다는 것이다. 제의는 탈개인화, 탈인격화, 탈심리화를 촉진하는 외면화된 표현 형식들로 이루어진다. 제의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표현적”이지만, 그렇다고 자기를 전시하거나 노출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친밀사회는 심리화되고 탈제의화된 사회다. 그것은 고백의 사회, 노출의 사회, 거리를 모르는 포르노의 사회다. (75-76쪽)
소셜미디어가 심리적 거리를 제거한 공간을 만들어냄에 따라 우리는 모든 것을 전시하고 표현하며, 그럼에 따라 공적 영역은 상실되고 사적 영역만이 남는다는 것이 주장의 핵심이다. 그러나 저자가 말하는 소셜 네트워크에도 여전히 18세기의 “세계 극장”의 속성이 남아 있으며, 우리는 우리가 보여주고 싶은 것, 또는 보여줘도 괜찮을 법한 것만을 제시한다. 그리고 이 안에도 커뮤니케이션을 하는 동안 지켜야 할 예의, 상호작용 의례는 존재하며 여전히 형성 중이다.
이외에도 저자가 벤야민을 빌려 이야기하는 미(美)와 숭고의 차이는 내가 주워들었던 칸트의 정의와 사뭇 달라서 혼란스러웠으나, 이 책의 핵심적인 논의와는 거리가 있으므로 접어두기로 했다. 읽으면서 느꼈던 것 중 하나는, 현대 사회를 비판할 때에는 항상 근대로의 회귀를 주장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는 것이다. 긍정성의 과잉과 성과주체의 자기착취라는 저자의 통찰은 새겨들어야 할 것이지만, 사유와 권력의 중요성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은 근대적 질서의 회귀를 주장하는 것으로 비치기 쉽다. 근대로부터 배워야 할 것은 분명히 있지만, 지나간 시간은 되돌릴 수 없고, 모색해야 하는 것은 새로운 삶의 형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