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사울의 아들>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영화 <사울의 아들>(2015)은 아우슈비츠에서 '화장터의 까마귀'라고 불렸던 존더코만도의 이야기를 다룬다. 죽음이 일상화된 공간에서, 사울은 자신의 아들(이라고 고안되어진)에게 적합한 장례를 치러주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다른 동료를 이용하기도 하고, 거짓말을 하기도 하고, 봉기하려는 존더코만도들의 계획을 (결과적으로) 방해하면서까지 그가 추구하는 것은 랍비를 구해 아들의 장례를 치르겠다는 것, 그것뿐이다. 이 부분 때문에 영화를 보면서 왜 저렇게까지 하나..라고 생각하기도 했는데(심지어 그의 무모한 행동 때문에 사람이 죽는다), 다 보고 나서 생각해보니 그럴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말하자면 이 영화는 오로지 형식만으로 승부를 거는, 그래서 나에겐 독특한 경험이었던 영화다.



영화는 시작 부분부터 특이한 방식을 취하는데, 화면의 초점이 나간 상태에서 화면 앞으로 다가오는 사울의 실루엣이 점차 선명해지며 시작된다. 이후에도 사울만 선명하게 보이거나 종종 다른 인물 한두명이 보일 뿐, 대부분 초점이 나간 상태이기 때문에 가스실로 들어가는 사람들의 얼굴이나 시신들의 모습을 제대로 볼 수 있는 기회는 거의 없다. 게다가 평소보다 작은 화면(4:3)에 사울의 뒷모습이 항상 걸려있어 볼 수 있는 화면도 제한적이다. 이것은 '사울이 보고 있다'라는 사실을 끊임없이 상기시키기 위한 영화의 형식이자, 홀로코스트를 어떻게 재현할 것인가에 대한 감독의 윤리적인 답변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이렇게 제한된 시각으로 인해 소리에 주목할 수밖에 없게 되고, 실제로 소리의 묘사가 굉장히 현실적으로 다가온다. 오히려 이것 때문에 '청각적인 포르노'라며 비판한 사람도 있었다고 하는데, 나는 홀로코스트라는 사건을 상기시키기 위해 관객의 "감정을 건드리"는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 이전까지 만연했던 고통이나 잔혹함을 재현하는 방식을 거부하고 새로운 방식으로 그것을 전달하기 위한 감독의 고민이라고 보는 것이다.

















조르주 디디 위베르만의 『어둠에서 벗어나기』는 <사울의 아들>의 감독 라슬로 네메시에게 보내는 서한의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는 이 책을 내기 전에 이미 '쇼아는 (이미지로) 상상 가능하다'는 주장을 담은 글을 발표해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고 하는데, 역주를 빼면 100쪽이 채 안 되는 이 책은 영화비평서라기보다 영화를 통해 작가의 철학을 드러내는 철학서에 가깝다. 그가 주로 이야기하는 이미지의 '잔존'은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영화에 대한 좀더 깊은 정보를 얻을 수 있어서 좋았다. 이를테면 이 영화가 1944년 존더코만도의 봉기와 그들이 찍은 사진 네 장을 바탕으로 했다는 점, 유대인들은 신에게 바치는 제물이나 희생이라는 의미를 품고 있는 '홀로코스트'라는 단어보다 '쇼아'(Shoah, 재앙 또는 파국)라는 단어를 선호한다는 점, 사울의 이야기가 오르페우스 신화와 닮아있다는 점 등등. 특히 이 책에서 내가 주목했던 것은 미래지향적 저항(봉기)과 과거지향적 저항(장례)의 개념이다.


사울은 미래를 향한 전투-저항résistance-combat(봉기 및 소각장 폭파 계획)을 과거로 향하는 존중-저항résistance-respect(아이의 시신을 전통에 따라 장례하는 일)으로 치환합니다. 그는 현재와 미래의 산 자vivants들의 사회société보다 현재와 과거의 망자morts들의 계보학généalogie을 선호합니다. 그는 힘의 관계(모든 이들이 "조난당한 자"인 공동체임에도 존재하는 승자와 패자, 권력과 전략의 게임)보다 의례의 권위(랍비와 유대 기도문, 규칙을 준수하는 장례)를 선호합니다. (63쪽) (강조는 저자)


영화를 보면서 우리는 봉기를 꾸미는 전투-저항을 지지하고 계획에 수시로 훼방을 놓는 사울을 걸림돌처럼 여기게 되는데, 사실 영화에서 더욱 근본적인 저항을 하는 사람은 사울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우리는 이미 죽어 있어."라는 사울의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이미 그들은 존재 자체가 부정된 망자이며, 그 안에서 또다른 망자(아들)에 대한 경건한 매장에의 요구는 "망자의 비-존재함"에 저항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장례를 치러줌으로써 망자가 존재를 인정받게 되는 것이며, 이를 통해 쇼아라는 어둠에서 벗어나는 이미지가 솟아오르는 것이다.


망자의 존재를 증거/증언하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갖는가? 위베르만이 인용하는 벤야민의 말에 따르면, "죽어 가는 자의 권위"가 이야기의 기원이기 때문에 그렇다. 여기에서 이야기라고 함은, 사울이 장례라는 "고독하고 절망적인 계보학적 탐색을 수단 삼아" 전달하려는 하나의 경험이라는 것이다. 죽음은 흔적을 남기게 되고, 그 흔적(잔존하는 이미지)을 전달하는 것이 바로 죽어가는 자의 권위라고 위베르만은 말한다.
















마치 삶이 다하면 인간의 내면에서 일련의 이미지(이때 이 이미지 속에는 평소에는 스스로 의식하지 못한 채 마주쳤던 자신의 생각이 펼쳐진다)가 활발히 움직이는 것처럼, 임종의 순간에는 갑자기 그의 표정과 시선에 잊혀질 수 없는 일들이 떠오르고 또 이 잊을 수 없는 일은 그와 관계했던 모든 사람에게 권위를 부여한다.

- 「얘기꾼과 소설가」 (178쪽)






영화로 돌아와서, 사울은 전투 중에 아들의 시체를 메고 랍비와 도망쳐 장례를 치르려 하지만, 랍비는 기도문도 외울 줄 모르는 가짜였다. 결국 그는 강을 건너다가 아들의 시체를 놓치고, 다른 동료들의 손에 붙들려 강 건너 오두막으로 피신한다. 이때 그는 문틈으로 자신을 발견한 폴란드 소년(영화에는 폴란드 소년이라고 나오지 않는데, 위베르만은 폴란드 소년이라고 썼다. 서양인은 얼굴만 보고 국적을 구별할 수 있는 걸까?)을 보고 처음으로 미소를 짓는다. 그는 왜 미소를 지은 것일까? 추측이지만, 이미 죽어 있는 망자로서의 자신의 흔적, 즉 잔존하는 이미지를 전달할 수 있는 존재로 보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죽은 아들의 비-존재에 저항하는 데는 실패했지만, 자신의 비-존재에 저항할 수 있는 다른 '아들'이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엔딩 크레딧에서 사울의 아들(Saul Fia)은 두 명이다). 영화는 의도치 않게 나치를 사울과 그 일행의 피난처로 인도하게 된 아이가 도망가는 모습으로 끝을 맺는다.















이 영화를 보고 나서 가장 먼저 들었던 생각은,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를 읽어야 될 때구나..'였다. 『이것이 인간인가』를 작년에 읽고, 올해 『주기율표』를 읽다가 잠시 접어둔 상태라 구입을 미루고 있었는데, 영화를 보고 나니 더이상 미룰 수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존더코만도나 카포에 대한 이야기는 2장 '회색지대'에 나오는데, 여기에 등장하는 나치 친위대와 존더코만도 사이의 축구 이야기는 섬뜩하다.


그런데 특수부대의 베테랑들을 대하는 SS의 태도는 달랐다. 그들은 이 베테랑들을 확장된 동료로 인식했다. 곧, 이제는 자신들만큼이나 비인간적인 존재, 어쩔 수 없이 부과된 공범성이라는 추악한 굴레에 묶인 한 배에 탄 동료로서 말이다. 니즐리는 '작업' 중 휴식 시간 동안에 SS 대 SK(존더코만도)의 축구 시합에 참관한 이야기를 한다. (...) 이러한 휴전의 이면에 있는 악마적인 웃음을 읽을 수 있다. 그것은 이런 의미이다. '일은 완료되었다. 우리는 해냈다. 너희는 더 이상 다른 인종도 아니고, 반(反)인종도 아니고 라이히 천년왕국의 주된 적도 아니다. 너희들은 더 이상 우상을 거부하는 민족도 아니다. 우리는 너희를 끌어안았고 타락시켰으며 우리와 함께 바닥으로 끌고 내려갔다. 자부심 가득한 너희들은 이제 우리와 같다. 우리처럼 너희는 너희 자신의 피로 물들었다. 너희도 우리와 같이, 카인과 같이 형제를 죽였다. 어서와, 우린 함께 경기할 수 있어.' (62-63쪽)


물론 레비는 수용소에서 특수계층이었던 카포나 존더코만도에 대해 무조건적으로 비판하지 않는다. 그것이 개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라거라는 시스템의 문제까지 성찰해야 하는 것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체험자로서, 가라앉지 않고 구조된 자로서, 증언자로서의 의무를 가지고 레비는 라거라는 20세기 가장 잔혹한 시스템을 해부하고자 노력한다. 이 책에 『이것이 인간인가』에서 언뜻 나타나던 인간성에 대한 신뢰나 따뜻함은 없다. '홀로코스트는 다시 실현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레비는 '그럴 수 있다.'고 답하는 것이다. 여전히 현실에는 『나의 투쟁』에서 이름만 조금 바꾸어 교본으로 삼으려는 세력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영화와 관련해서 주목할 만한 이야기가 7장 '고정관념들'에 나오는데, 레비가 초등학교 5학년들에게 자신의 경험을 해주러 갔던 이야기다. 한 학생이 왜 도망치지 않았느냐고 묻고, 레비가 이유를 설명하자 그 학생은 수용소의 약도를 칠판에 그려달라고 하더니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밤중에 보초의 목을 친 다음, 그의 옷을 입고, 곧바로 발전소로 달려가서 전기를 차단"하면 된다고. 그리고 덧붙인다. "다음에 또 이런 일이 생기면 제가 말씀드린 대로 하세요. 꼭 성공하실 거예요."


한계는 있지만 이 일화는 내가 보기에, 분명히 존재하며 해가 갈수록 점점 더 벌어지고 있는 간극을, 그러니까 '그곳'에서의 실제 상황과 개략적으로 책이나 영화, 신화들이 키워낸 현재의 상상력에 의해 표현되는 상황 사이의 간극을 잘 보여주는 것 같다. 이러한 상상력은 치명적인 단순화와 고정관념으로 미끄러져 들어간다. (...) 이는 훨씬 더 일반적이고, 타인의 경험을 인지하는 데 있어 우리가 가진 어려움이나 무능력의 일부를 보여준다. 타인의 경험이 시간적·공간적으로, 또 질적으로 우리의 경험으로부터 멀어질수록 이러한 어려움이나 무능력은 더 심해진다. 우리는 타인의 경험을 '주변'의 경험과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다. (192쪽)


이것은 어쩌면 영화라는 매체가 갖는 한계일지도 모르겠다. 점점 타인의 고통을 일종의 스펙터클로 소비하고 있는 현대 사회에서 재현이라는 이름으로 전달되는 관음증적 쾌감을 문제삼지 않을 수 있을까. 그렇기 때문에 쇼아를 "사유 가능성 바깥에 존재하는 사건, 이미지로 드러낼 수 없는 상상 불가능한 사건"이자 "절대적이고 숭고한 부정성으로만 접근할 수 있는 무엇"으로 규정했던 지식인들의 태도 역시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고통의 이미지를 떠올리니 수전 손택의 『타인의 고통』이 생각나지만, 아직 읽고 있는 중이라 여기서 쓰기는 어려울 듯하다) 하지만 들여다보기에 너무 끔찍한 지옥이라는 이유로 어둠을 있는 그대로 두는 것보다는, 반딧불처럼 미미하더라도 그 어둠을 밝히기 위한 증언들이 끊임없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더욱이 8장 '독일인들의 편지'를 보면 여전히 증언의 반딧불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굳어진다. 증언/재현의 방식을 고민해야지, 아예 증언/재현하지 않는 것은 어둠을 어둠으로 두겠다는 선택을 넘어 더 이상 기억하고 싶지 않다는 의지의 발현이다. 그 일이 있은 지 70년이 지난 지금도 레비의 책들이 끊임없이 소환되고 읽혀져야 할 이유이기도 하다.


+) 마지막 문단의 '반딧불'의 비유는 조르주 디디 위베르만의 『반딧불의 잔존』이라는 책 제목에서 가져왔다. 『어둠에서 벗어나기』를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해서 내가 어느 정도 이해한 부분만 적었는데, 이미지-몽타주의 개념이나 잔존의 의미를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반딧불의 잔존』을 읽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책에 보면 위베르만은 이미 서른 권이 넘는 저서를 냈다고 하는데, 국내에 나와있는 책은 이 두 권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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