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적 기억 은행나무 시리즈 N°(노벨라) 9
윤이형 지음 / 은행나무 / 2015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기억하다'라는 동사는 '이해하다'라는 동사 다음으로 폭력적인 말, 이라고 전부터 생각해왔다. 다양한 색깔을 가지고 있던 시간과 공간을 내 틀에 맞추어 찍어내고, 덧칠하고, 때로는 지우기도 하는 폭력. 상처받는 기억이라는 것은 결국 그 일 때문이 아니라 그 일을 맘대로 바꾼 나 자신으로 인해 상처받는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하는 것이다.

 

의학드라마 '하우스' 시즌 7의 12화에는 지율처럼 과잉기억증후군을 앓고 있는 여자 '나디아'가 나온다. 그녀는 언니와 사이가 매우 좋지 않고, 자신이 싫어하는 것도 자꾸 잊어버리는 언니와 심하게 말다툼을 하기도 한다. 이후 자신에게 신장을 준 그녀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전하러 가지만, 언니에 관한 나쁜 기억이 그녀를 눌러버렸다. 모든 것을 기억한다고 말하는 그녀에게도, 기억은 결국 자신이 마음대로 뒤틀고 재단해버린 것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지율의 경우는 좀 다르다. 오히려 객관적인, 아니 모든 결을 기억한다는 사실 자체가 그에게 폭력을 가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지율과 나디아는 한없이 작은 세계에 머무르려고 하는 것은 같지만, 그 이유가 다르다고 할 수 있겠다. 기억 때문에 고통받는 이유마저도.

 

영원하지 않은 것들의 애틋함이 무엇인지 알고 싶었다. 늘 그 자리에 있을 것 같던 늙은 나무가 잘려나가거나, 추억의 장소들이 문을 닫았을 때 슬퍼하는 사람들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으면 했다. 내게 그런 슬픔은 '인간'의 표지처럼 느껴졌다. 나는 머릿속에 내가 가본 모든 장소를 언제까지나 담아둘 수 있었기에 그곳들을 그렇듯 소중하게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119p)

 

그런 그의 조그만 세계에 은유가 들어왔다. 둘은 사랑에 빠졌지만 여전히 지율은 괴롭다. 불현듯 홍수처럼 쏟아지는 기억들, 그가 만났던 다른 사람들이 은유를 보면 떠올라서다. 그의 가장 내밀한 비밀을 알고 있는 그녀에게조차도 자신을 온전히 열어놓을 수 없어서다. 말하자면, 너무나 사랑하는 그녀에게도 자신은 '인간'일 수 없기 때문에, 그는 괴로운 것이다. 그가 '오브'를 복용하기로 선택한 것도, 결국은 '비-인간'이 아니라 '인간'이 되고 싶어서, 인간의 사랑을 하고 싶어서였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이해하다'가 가장 폭력적인 동사라는 말을 했는데, 이것은 우리가 무언가를 이해한다고 오해하기 때문에 그렇다. 사랑하는 사이도 예외는 아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그 사람의 모든 것을 이해하는 것이라고 말하지만, 여기에는 '자기 나름대로'라는 말이 빠져있다. 어쩌면 오해가 사랑을 시작하게 한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이해는, '잘 알아서 받아들이다'라는 뜻의 이해는 불가능하다. '인간'이 '비-인간'을 이해하는 것은 더더욱.

 

나는 정말로 너무 평범해. 간신히 살아가고 있고, 그게 부끄럽다고. 내가 너라면...... 너는 왜 자기 능력을 좀 더 유용하게 사용하지 않는 거야? 나라면, 어떻게든 있는 힘을 다해서 그걸 쓸 텐데. 세상이 그렇게 만만한 곳이 아니잖아.

그 말을 듣고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처음으로 그녀에게 화가 났다. 나 자신과 부모님, 그리고 몇몇 사람들의 기억으로 이루어진 조그만 세계를 견디는 것만으로도 나는 힘겨웠는데, 그녀에게는 그런 싸움을 계속하는 내가 그저 여유를 부리고만 있는 걸로 보인 모양이었다. 서운했다. 은유의 입에서 나오는 '평범한 사람'이라는 말이, 거기 묻은 그녀의 수치심이 가시처럼 나를 찔렀다. 그녀는 내가 살아남은 사람이라고 했지만, 그녀에게 나는 실은 평범한 사람조차 되지 못했던 것이다. (99-100p)

 

어쩌면 이해한다는 착각은 우리가 기억하기 때문에 오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어떤 것을 자기 나름대로 단순화시켜버린 것이 기억이기에, 그것을 토대로 이해한다고 생각하는 것일지도. 그래서 어떤 변형도 없이 온전하게 머릿속에 담게 된 지율은, 아무것도 이해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인간이라는 것은 편파적이기도 하고, 나를 둘러싼 세계를 왜곡하기도 하고, 착각하기도 해야 한다는 것일까? 그렇게 오류투성이에 아집에 사로잡힌, 그것이 인간이다,라는 이야기로도 들린다. 단어만 보면 굉장히 부정적이지만, 그렇지 않으면 살 수가 없다. 지율처럼, 끝없이 자신을 가두고 살 수밖에 없을 것이다. 다만 진정으로 이 세계를 '기억'하고 '이해'하기 위해 노력할 뿐, 그렇게 나와 세계 사이의 균형을 유지할 뿐이다. 지율처럼 모든 걸 기억한다면 나와 세계를 구분할 수 없어 무너질 것이고, 끊임없이 망각하고 오해하면서 그에 대한 자각마저 없다면 나와 이 세계는 별개의 것이 되어버리므로.

 

개인적으로 실망했던 장면들도 있었지만(은유의 실종 같은), 지율의 처절함이나 좌절 같은 것들이 이루는 쓸쓸하면서도 애틋한 분위기가 나는 좋았다. 아마 내가 마음에 들었던 건 이 작품이 주는 따뜻함이었을 것이다. 나는 이제 이 소설이 훌륭하다/그렇지 않다라고 말할 수 있는 시선을 상실했다. 기억이라는 소재는 날 항상 사로잡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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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윗듀 2015-10-09 09: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기다리던 아무님의 리뷰. 늘 실망시키지 않는군요😀

아무 2015-10-09 12:16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사실 이번에 쓰면서 정리가 안 돼 많이 부족하다고 생각했는데.. 더 분발해야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