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문예지를 구독하고 문학상 수상집을 여러 권 읽게 되면서, 작품 해설이나 문학평론을 읽을 기회가 평소보다 많았다. 이런 글들이 선입견을 준다든지, 그 해석에 갇히게 만든다는 위험성이 있지만, 가다머의 말을 도용하자면 텍스트의 진정한 의미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그런 선이해가 쌓이는 것이 필수적이기 때문에, 작품 뒤에 실리는 해설이나 비평을 피하지는 않고 항상 다 읽는 편이었다(하지만 그런 '해석학적 순환'이 정말 진정한 이해로 나아가게 해줄까? 글쎄..) 그런데 그런 선이해로 나아가려고 하면 어김없이 나를 가로막는 암벽들이 있었으니, 들뢰즈, 라캉, 아감벤, 한나 아렌트, 데리다... 그리고 지젝이었다. 평론이나 작품 해설을 읽다가 그런 암벽에 막히면, 나는 주위 맥락을 살펴보며 스리슬쩍 넘어가려고 했지만, 이 무지막지한 사상가들의 암벽은 그런 행위를 허락해주지 않아 나는 번번이 선이해로 가는 걸 포기해야 했다. '왜 이렇게까지 어렵게 해설을 써야 돼?' 하며 짜증내기도 하고.

 

 

 

 

 

 

 

 

 

 

 

 

 

 

 

<로쟈와 함께 읽는 지젝>은 나를 막는 수많은 암벽 중 '지젝'이라는 이름의 암벽을 타기 위해 내가 부른 전문가 같은 책이었다. 언제까지고 이 암벽들을 빙빙 돌기만 할 수는 없다는 생각에... 이 책은 지젝의 수많은 저서 중 <실재의 사막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이하 <실재의 사막>)를 주된 해설 대상으로 삼는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실재의 사막>을 이해하기 위한 좋은 안내서라고 말할 수 있겠다. 물론 필자가 '피상적인 읽기'를 지향하고 있는 만큼, <실재의 사막>을 읽지도 않고 섣불리 판단하는 것은 위험하지만, 오랫동안 지젝에 관심을 두고 주목해오던 필자의 설명은 굉장히 이해하기 쉽게 지젝의 사상을 풀어내고 있다. 덕분에 어느 정도는 막힘 없이 책을 읽어내려갈 수 있었다. 좋은 암벽 타기 선생님을 찾은 느낌이랄까..

 

그런데 문제는, 암벽은 결국 혼자 타야 되는데, 전문가의 조언만으로는 이것이 안된다는 것이다. 지젝을 좀더 매끄럽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라캉, 헤겔, 마르크스, 레닌이라는 근육을 써야 하는데, 이건 내가 써본 적도 없는, 쓰려다가 좌절을 맛보았던 근육이었다. 한때 <소피의 세계>나 <철학 콘서트>, <시간여행> 같은 책을 읽으면서도 헤겔만 나오면 그렇게 술술 넘어가던 책장이 안 넘어가던 기억이 선명한데. 그리고 구조주의 비평에 대해 공부할 때 외계어를 듣는 기분이 들게 만들었던 사람이 바로 라캉인데, 지금 이 암벽은 나에게 그들의 이름을 한 근육을 쓰기를 원한다. 이건 전문가 열 명이 와도 안 되는 것이다. 내가 단련시키는 것밖에는.

 

헤겔과 라캉에 대한 이해가 거의 전무하다 싶은 나에게 4장 '라캉주의 좌파'는 이해하기 굉장히 어려웠다. 하지만 다른 장에서는 필자의 친절한 설명과 예시(지젝이 드는 예시+a)가 있으므로 그렇게 겁먹고 읽을 필요는 없었다. 지젝이라는, 굉장히 과격하면서 파격적인 주장을 하는 철학자의 사상에 대한 입문서로 적절했다고 생각한다. 9.11 테러 이후의 세계,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의 모순과 허상을 짚어내는 지젝의 사유는, 생각하지 못했던 지평을 열어주었다는 점에서 의의를 찾을 수 있겠다. 특히 내가 인상적으로 읽었던 부분은 '냉소주의'에 대한 내용이었다.

 

'탈이데올로기 시대의 이데올로기'란 한마디로 말하면 '냉소주의'다. 이데올로기에 대한 일반적인 정의가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알지 못한다"라고 하면, 냉소주의는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알면서도 한다"이다. 대신에 투덜대면서, 아닌 척하면서 한다. "내가 이런 걸 꼭 해야 돼?"라면서도 마지못하는 척하는 것, 그것이 냉소주의다. 즉 "우리는 우리의 상징적 임무를 전적으로 떠맡지 않으면서, 그것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으면서 그것을 수행한다." (<실재의 사막>, 102쪽)

(109p)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자유민주주의의 요체인 현대 사회에서, 냉소주의는 탈이데올로기 시대를 지배하는, 그리고 불합리한 체제를 움직이는 이데올로기로 작용한다고 할 수 있을까? 혁명,이라고 말하는 것이 남사스러운 시대를 보면 이 주장은 유효해 보이고, 오늘날 한국 사회의 정치적 무관심과도 연결되기까지 한다. 어쩌면 나 자신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에 이 부분이 인상깊게 기억되는 것일지도...

 

9.11 테러 사태 이후의 사건들을 분석하는 지젝의 시선은 냉철하고, 그 이면에 담긴 계급적이고 사상적인 시도를 들추어낸다. 하지만 정작 그가 대안으로 내세우는 새로운 공산주의는 굉장히 막연해 보이는데, <실재의 사막>에는 이것이 제대로 설명되어 있는지 모르겠다. 어쨌든 급진적인 그의 사상이 사람들에게 많은 충격을 주었으며, 괜히 동유럽의 기적이라고 불린 건 아니겠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그의 사상에 100% 동의하는 바는 아니지만, 다른 저작들을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 암벽은 반도 오르지 않았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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