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리서부터 한 걸음씩 다가오는 초졸(楚卒)들을 이춘갑은 빤히 들여다보면서도 막을 수가 없었다. 졸들은 한 칸씩 기어붙었고 좁은 길을 뚫어서 복병을 불러들였다. 장기판에서는 갈 수 없는 길들이 빤히 보였다. 갈 길은 못 갈 길 뒤에 숨어 있다가 빼도 박도 못하게 되면 비로소 보였고 보이면 갈 수 없었다. 그렇게 하루하루가 한 칸씩 다가와서 흘러가고 또 흩어지는 것들이 쌓여서 아내와 헤어진 십육 년이 지나갔을 것이었다. 잔전(殘戰)은 썰렁했다. 수(手)들은 말로가 드러났고 중원은 비어 있었는데, 거기에는 아무런 힘도 작동시킬 수 없었다.
- 김훈, `저녁 내기 장기(將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