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강명 리뷰 대회와 관련하여, 내 리뷰는 분량 초과로 이벤트 대상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리뷰를 다시 쓸 생각은 없다. 이유는 첫째, 귀찮고, 둘째, 아무리 다시 써도 내 감상을 1000자로 압축할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글을 쓸 때마다 드는 생각이지만, 정말 말하고픈 핵심만을 쳐내어 내는 것도 아무나 못 할 짓이구나 싶다. 더욱이 쓰다보면 끝도 없이 길어지는 내 리뷰들을 보자면... <크리스마스 캐럴> 리뷰도 엄청 길게 썼는데, 다시 보니 내가 느꼈던 감상을 다 쏟아낸 느낌이라 중구난방인 것 같다. 이번에는 어떠려나..

 

"아뢰옵기 두렵사오나, 왕자께서 바라시는 것은, 가장 높은 것과 가장 낮은 것이 합하여 하나가 된, 바라문의 얼굴을 가지고자, 지금 쓰고 계신 탈을 벗으실 길은 없는가 하는 물음이시옵니까?"

"그렇다. 바로 그것이다."

(221쪽)

 

'가면고'는 가면에 대한 이야기다. 전쟁을 겪은 후 발레단의 대본작가로 있는 민의 서사가 주된 내용을 이룬다. 그는 끝없는 고뇌 속에서 자신이 쓴 모든 가면을 벗어던지고자 하는 마음을 품고 있다. 소설은 이런 그의 의식과 상상, 일상이 마구 얽혀서 흘러간다. 이런 복잡한 이야기를 이해할 수 있게 하는 실마리는, 그가 심령학회를 방문하여 최면 속에 만나는 인도의 브라만인 다문고 왕자의 이야기이다.

 

바라문의 얼굴을 가지고자 쓰고 있는 탈을 벗으려 끝없이 배움을 추구하고 갖은 실험을 했으나 실패를 거듭하던 다문고 왕자는 마술사 부다가에게 비책을 듣는다. 그것은 왕자가 가진 높은 것과 합치되는 낮은 것을 지닌 이의 얼굴 가죽을 벗겨 얼굴에 붙이는 것. 이를 위해 왕자는 많은 사람의 얼굴 가죽을 벗겼으나, 그들의 낮음은 왕자의 높음과 일치하지 못했다. 그러던 중 왕자는 마가녀에게서 그 얼굴을 찾게 되고 그녀에게 접근하여 관계를 맺은 끝에 그녀의 얼굴 가죽을 얻는 데 성공한다.

 

"왕자, 후회하십니까?"

나는 벌떡 일어나며 부르짖었다.

"후회한다......"

나는 숨을 모으기 위하여 잠깐 말을 끊었다.

"내 탈을 벗지 못해도 좋다. 영원히 깨닫지 못한 채 저주스런 탈을 쓰고 살아도 좋다. 만일 이 끔찍한 일을 하지만 않았다면, 이 죄만 없어진다면......"

(262쪽)

 

왕자가 자신의 업의 탈을 벗을 수 있는 방법은, 사랑이었다. '자신의 완벽한 초상'을 얻기 위한 방법은 결국, 사랑이었다. 여기서 다문고 왕자와 마가녀의 관계는 현실에서의 민과 무용수 정임과의 관계와 대응하고, 이는 다시 민이 쓴 신데렐라 이야기의 왕자와 신데렐라의 관계로 이어진다. 왕자와 민은 모두 그녀들을 보며 사랑을 느끼지만, 이들을 자신의 가면을 벗기 위한 수단으로 낮춰 본다. (여기서 나는 문득 영화 'Her'가 떠올랐다.) 하지만 자신의 탈을 벗기 위한 방법은 결국 그들을 향한 사랑이었던 것이다.

 

민의 미라에 대한 사랑이 엇나가는 것 역시 가면과 연결되어 있다. 민은 미라를 사랑함으로써 자신의 가면을 벗어 버리고자 하지만, 사랑은 진전되지 못한다. 이는 그림을 그리는 미라는 자신을 그림이라는 매개를 통해 표현하는, 말하자면 가면을 통해 자신을 표출하는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미라가 편지에서 '저를 마녀의 딸로 만들어버린 건 너무하시잖아요?'라고 말하는 것은 미라는 무용극 중 마녀의 딸처럼 왕자의 탈을 벗길 수 없다는 것을 암시한다. 민의 가면을 벗겨 줄 신데렐라는, 어떤 매개도 개입하지 않은 채 자신을 몸짓으로 표현하는 무용수 정임이었던 것이다.

 

"'본 케이스는 청년기의 보상 의식의 나타남으로서, 싸움에 다녀온 젊은이들이 그 동안의 공백 기간을 무엇인가 값있는 어떤 것을 빨리 얻음으로써 메워보려는 정신 현상의 하나임.' 이 대목 말입니다."

"그 대목에 약간 불만이 있으시다 그런 얘긴가요?"

(265쪽)

 

최인훈은 사랑만이 진정한 나를 찾을 수 있는 방법임을 강조하면서도, 이것이 한국적인 상황 안에서 이루어져야 함을 강조한다. 이는 민의 전생 이야기를 서양 학문을 대표하는 심령학회가 하나의 정신 현상으로 못박고 있는 것에서도 알 수 있다. '크리스마스 캐럴' 연작에서도 나타났지만, 최인훈은 우리의 구원이 우리 것을 품음으로서 이루어져야 함을 말하는 듯하다. 다문고 왕자 역시 모든 배움을 추구하였지만, 구원은 배움으로부터 멀어져 있지만 싱싱한 아름다움을 가진 마가녀를 사랑함으로써 가능했기 때문이다. 결국 전쟁으로 공허해진 한국 젊은이들의 내면을 채워줄 수 있는 것은 사랑이라고, 최인훈은 말하고 있다.

 

다 읽은 뒤 '사랑'이라는 주제가 <광장>에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이 소설 역시 세 이야기의 겹침, 그리고 환상과 현실 사이를 오가는 민의 서사로 인해 어려웠지만, 그래도 '크리스마스 캐럴'보다는 좀더 수월하게 읽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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